주일예배(2024/6/3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
‘모퉁잇돌’의 속뜻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20:9-18)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적 인성으로서 주님을 뜻한다. (계시록 해설 417:12, 이순철 역) and because “the stone of the corner” signifies all Divine truth upon which the church is founded, it also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His Divine Human; (AE.417: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세 차례, 그리고 마지막엔 아들을 보내었지만 다 소용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말씀에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하고, 포도원 주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교회는 꼭 외적으로만, 즉 겉으로 건물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면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는 누굴까요?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시고, 그것을 잘 가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각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멀리 계시거나 아예 안 계신 것처럼 여깁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멀리 타국에 나가 있는 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소출 얼마를 바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은 누굴까요?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살핍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는지, 잘못이 있으면 바로바로 회개하는지, 맡은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신앙이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영광을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 소출 얼마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때리는 것은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드는 걸 의미하고, 거저, 즉 빈손으로 보내는 건 교회 안에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걸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농부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임의로 푼답시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것들을 섞어, 결국 장로의 전통이라는 걸 만들었고, 그걸로 교인들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말씀보다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더 우선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두 번째,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유대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들, 그러니까 현 기독교회를 비롯, 과거 고대교회나 태고교회도 교회가 타락할 때는 먼저 말씀부터 왜곡했습니다. 말씀이 왜곡되면, 교인들의 삶이 피폐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여럿 욕보이고 죽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 말씀에 대한 폭행을 뜻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고 하셨는데요, 말씀의 진리를 더럽히고 죽이는 자가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말씀을 뜻하고,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종을 세 번까지 보냈다고 했습니다. ‘세 번’에 나오는 이 ‘셋’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세 번씩이나 종을 보내고, 농부들이 그때마다 때리고 쫓아내는 건 교회가 마지막까지, 끝까지 말씀을 더럽혔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말씀을 왜곡했다는, 즉 말씀에다가 인간적인 것들을 섞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십니다. 13절로 15절입니다.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서 주인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런데도 아들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에게 오실 때는 진리로 오십니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는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여호와는 인간이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에서 주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사랑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이라 부를 때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진리, 또는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을 때, 교회는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본문에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내쫓고 죽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쩌면 자기들 눈앞에 있는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농부들처럼 어리석게도 그들 역시 선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상속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농부들을 진멸한다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배척한 교회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 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진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살아나는데 진리를 왜곡하고 죽였으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일종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어 지옥의 기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결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면 보호받지만, 주님을 등지면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계시록 해설 417:12항에서는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성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타락한 교회들이 배척한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 진리가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주께서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 위에 떨어지는 자는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스스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교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서 쫓아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만 주님을 죽이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는 것은 모두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거역하는 것도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 있습니다. 일할 때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에 합당한 일인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진리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 배우기를 힘쓰고, 배우는 대로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이유 없이 박해나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견뎌야 합니다. 그때 합리에 속한 능력이 열리고,
※ 이 ‘합리’에 관한 능력이 우리 안에 열리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바로 점프를 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 둘을 중간에서 연결시켜 주는 거, 그게 바로 ‘합리’, 즉 납득하는 능력, 고개를 끄덕이는 능력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능력을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바로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진리의 말씀 앞에 확 열립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옵니다. 이 새로운 천국적 자아를 통해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121:4-6)
아멘
2022-06-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