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2025/4/20, 눅24:1-12, 부활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출22:26,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의 풀이 중)
※ 이 원고 중 ‘※’ 표시는 원고에 없는, 제가 더한 보충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한 단락일 경우는 뒤에 아무 마감 표시가 없지만, 두 단락이 넘어가면 ‘//’로 마감합니다. 비록 원고일지라도 상당 부분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좀 다듬었습니다. 원고 사용에 관한 원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 그리고 가을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절기이지요. 그래서 ‘부활’에 관한 지난 설교 한 편을 다시 기억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유월절’에 관한 속뜻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그걸 자세히 다룰 수는 없어 중요한 몇 문장에 대한 번역으로 대신합니다.
1.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에서만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의지적인 면(the will part)에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면에 주님은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이 의지는 그들의 교회와 관련되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따르는 의지다. (AC.6854)
※ 즉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의 신앙과 그에 따른 교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서 교리를 추출하고,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다양성을 인정, 거기에 맞춰 어떤 새로운 의지를 주신다는 겁니다.
2. 이들, 곧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천국을 통과하는 신성(the Divine passing through heaven), 이 신성은 주님이 오시기 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before the Lord’s coming)이었는데, 이 신성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 의지에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AC.6427)
3. 그들은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전엔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낮은 땅’(the lower earth)이라는 곳에 보내어져 돌봄 받고 있었다. 이곳은 말씀에서 ‘구덩이’(pits)라고 하는 곳이다. 이 땅은 거짓이 가득한 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거짓으로 인해 그들은 심하게 감염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셨다.
4.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인성(the human)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신 후, 이 ‘구덩이’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 천국으로 올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적 천국, 즉 이층천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셔서 갇힌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3:8)라는 말씀의 속뜻이다.
5.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은 그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 모호하다. (AC.2708, 2715,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833, 6289)
6. 그들의 흐릿함, 모호함(obscurity)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 의해 조명, 그러니까 밝혀진다. (AC.2716, 4402)
7. 그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지옥의 공격을 많이 받지만,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 (AC.6419)
8. 영적인 사람들은 의지적인 면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단지 지적인 면으로만이지만, 주님에 의해 거기에 새 의지가 형성된다. (AC.863, 875, 895, 927, 928,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9. 영적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AC.2833, 2834, 3969)
그러니까 영원하신 창조주 주님은 단지 이 세대뿐 아니라 홍수 이후 주님 오시기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주(主, 메인)였고, 주님 후 세대인 우리는 그저 그 혜택을 받고 있었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곧 주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내용이 좀 어리둥절하지요? 네, 저도 좀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진리는 사실은 겨우 요만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데, 지금은 이 그릇의 크기가 겨우 요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발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 전기 이야기인데요, 역시 처음 댐이나 발전소에서 생성된 몇십만 볼트의 전기가 가정집에 맞는 볼트가 되기까지 낮추고 또 낮춰 220볼트가 되듯 주님도 그렇게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우리 역량에 맞춰 허락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성경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태도는, 물론 중세 때 카톨릭의 극심한 타락으로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이 일어나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서 그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지나쳐 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형태의 계시는 모두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그러니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영계, 즉 천국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인데요, 주님을 사랑하되 순진하게 그냥 뭘 몰라서였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너무 이런 태도에 함몰되는 것은 그건 무슨 신념도 고백도 아닌, 그저 주님을 모독하는 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은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로 6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이 나이 되도록 평생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2017년 여름, 처음으로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던 초창기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어머니를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를 훨씬 웃도는 일이었지요.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인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혈육들을 비롯, 주위 많은 지인이 영적 체험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록된 겉 글자 신앙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안에 꿈틀대는 영계를 살짝살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좀 주님이 허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신령한 영적 체험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지난날 제 안에 있는 악령을 어렴풋이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영안으로 보았겠지요. 정원 목사의 ‘대적기도’라는 책을 읽던 시절이었는데, 이 경험은 제가 신앙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러나 저런 체험보다는 이왕이면 천사를 만나는 그런 체험이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 상태가 천사가 찾아올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가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비유하자면, 퍼셉션으로 아는 걸 햇빛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세상 학습을 통해 아는 건 달빛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은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 제 설교가 점점 길어지지요? 저는 10년 전인 지난 2014년 5월, 경기도 고양시 헤븐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정원 목사님 살아 계시던 시절이었지요. 목사님은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주일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되는 것에 질려, 그리고 다른 일정도 있어 할 수 없이 중간에 일어나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요. 큰애와 우리 부부, 이렇게 함께 갔는데... 그 당시 제 영적 역량이 그런 예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점점 그런 경향을 보이네요. 그나마 저는 원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계속 내용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절제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 퍼셉션, 곧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 싶습니다.
원본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두 번째 설교
2025-04-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