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AC.34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40:11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자’와 ‘양 떼’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참된 목자의 원형이 바로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3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에 안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목자직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사람인 목자는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 쓰임을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이 네 가지 동사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모으시며’, 품에 ‘안으시고’, 연약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역할이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 주는 ‘가르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에서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먼저 ‘양 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양은 목자가 제공하는 먹이를 먹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적 생명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참된 목자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지혜로 사람을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이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AC.343의 문맥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목자를 단순히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양을 먹이는 목적은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신앙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체어리티’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신앙에 속한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삶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입니다. AC.343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바로 그 주님께서 어린 양들을 ‘모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처럼 보여 줍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는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고,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결합합니다.
‘품에 안으신다’는 표현은 그 결합의 성질을 더욱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외적인 명령과 강제로 몰아붙이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여기에는 보호와 사랑, 그리고 각자의 연약함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인도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영적 인도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살피면서 선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양을 똑같은 속도로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양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합니다. 어린 양에게 필요한 돌봄과 새끼를 돌보는 어미에게 필요한 인도가 서로 다르듯,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목자직에는 진리뿐 아니라 지혜로운 배려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40:11은 목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목자는 양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모으는 사람이며, 자기 교리적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 주님의 선으로 살아가도록 먹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연약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품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권위도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가인과 아벨의 문맥에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며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사40:11에서는 주님 자신이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아벨의 ‘양 치는 자’라는 모습은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 그 체어리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40:11의 목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 마지막의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하지만, 체어리티의 부재는 흩고 분리한다’는 말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가인은 흩어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목자이신 주님은 모으는 방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343의 여러 인용 구절 가운데 사40:11을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가장 큰 구절로 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목자 = 인도하는 자, 양 떼 = 인도받는 자’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가’,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 인도는 어떤 성질을 가지는가’, 그리고 ‘체어리티가 왜 모음과 결합을 이루는가’까지 한 장면 안에서 보여 줍니다.
결국 사40:11을 AC.343에서 인용한 이유는 ‘양 치는 자’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선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양 치는 자’란 결국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아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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