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 교회’, ‘ 성도’, ‘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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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종교란 인간에게 어떤 별도의 초월적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라고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 묘합니다.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죽어서 천국 가는 ’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스베덴보리에게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들어가는 보상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형성하고, 그 사랑에 따라 사후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따라 산다면, 그 고백 자체가 천국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특히 도올이 말하는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표현은 외형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를 단순한 신조의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 안에서 나타나야 하며,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도올이 한국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굳이 방어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이 실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가 계속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도올이 ‘기독교라고 말한들, 불교라고 말한들, 유교라고 말한들 똑같다’고 넘어가는 순간 스베덴보리와는 갈라집니다.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필요 없다거나, 어떤 진리를 믿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모두 같다는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단순히 훌륭한 윤리적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인간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단순히 깨달음을 제공하는 가르침을 넘어 ‘생명을 주는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잠시 뒤 도올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나라는 존재가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교의 ‘대각’이나 ‘해탈’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변화’라는 현상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변화의 근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깨달아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가져오시는 과정, 곧 ‘거듭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서문과 첫 번째 말씀 사이에 있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여기서 ‘’가 예수일 수도 있고 기록자인 도마일 수도 있다고 본 뒤, 결국 자신은 도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 곧 ‘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도마가 독자에게 제시한 일종의 해석 원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이 강조하는 ‘해석을 발견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도올은 단순히 교수에게 배우거나 책에서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ChatGPT에게 물어서 얻는 해석 같은 것도 아니라며, ‘너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 발견이 자기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진리와 사랑하여 행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다’는 것이 단순히 독자의 실존적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 안에 이미 신적 질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 천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참된 해석은 ‘ 삶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발견은 말씀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에도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문장을 읽고 스베덴보리를 가져다가 자유롭게 의미를 붙이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고,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과 속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어느 순간 본문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식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도마복음에는 애초에 ‘영혼’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맛본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합니다. 맛보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이므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사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은 오염된 음식을 먹는 비유를 듭니다. 먹는 행위 자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인데,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먹으면서 오히려 죽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한국 기독교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잘못된 성경 해석과 죄책감, 협박과 겁박의 종교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올은 ‘죽음을 맛본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도올 특유의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다’라는 고대 표현 자체를 이렇게까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 경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나오는 결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에 특정 정치적 집단까지 연결하여 ‘성경을 공부할수록 뇌가 경색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에는 신학적 해석과 도올 자신의 정치·사회적 평가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은 구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의 영적 죽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편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맞더라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올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가까이 왔다가 다시 갈라집니다. 도올은 ‘아무도 죽음을 체험할 없다. 인간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경계 너머를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으로서 삶이 계속되는 전환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영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도올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제거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를 오직 현세적 삶의 질로 가져온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현세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훨씬 급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라는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도올이 ‘영생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훨씬 더 깊게 되찾습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 끝없이 오래 사는 ’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이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올이 처음 비판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신앙’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미래의 보상 상품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먼저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로 나타날 때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땅에서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중요한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 형성된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삶이 된다.’ 현세와 내세는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래서 도올이 너무 좋은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결국 인간의 ‘깨달음’으로 수렴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해석을 발견하라 삶에서 깨달아라 인격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어라 죽음을 맛보지 말라.’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한 분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거듭남은 자기계발의 최고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서 스스로 고양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선도 진리도 생명도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유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도올의 ‘해석을 발견하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거기서 끝나지 말라. 진리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를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마복음과 정경 복음서 사이의 차이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서술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만 남겼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그 모든 과정 역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의 어록에서 귀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사가 없기 때문에 순결하다’는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사가 불순물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서사’ 안에 주님의 구속과 영화라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도올에게서 상당히 좋은 질문 하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명을 먹고 있는가, 죽음을 먹고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간직할 만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심지어 스베덴보리를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우리를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지성을 자랑하게 된다면, 진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도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내가 발견한 탁월한 해석’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말씀의 속뜻도 결국 우리를 지적으로 놀라게 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말씀의 해석을 삶에서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인간을 말합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죽은 교리를 경계하고, 삶 없는 신앙을 경계하며,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중심은 다릅니다. 한쪽에는 ‘깨닫고 변화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도올을 보는 일은 바로 그 차이를 발견하면서도, 도올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조각을 버리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의 몇몇 과장 때문에 모든 말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삶에서 발견하라’, ‘신앙이 사랑과 이웃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는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아마 그 한마디가 이번 도올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깊은 접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일 것입니다.

 

 

 

SY.88, 도올 김용옥, ‘예수가 역사적으로 진짜 있었던 사람인가? - 바울의 레토릭은 근본적으로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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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는 ’,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인물을 우상화하여 그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 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 우상화하지 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통해 확장된 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누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 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악을 자기 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 가운데 누가 악한가?’가 아니라 ‘ 말씀을 듣고 있는 안에는 이것이 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 정치인들이 사람이다’, ‘ 극우 기독교인들이 사람이다’, ‘ 지도자들이 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 나도 사람일 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의 손을 만져 주고 안아 있는 따뜻한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분노를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 참된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 판단한 상대를 미워하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치인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극우 양성소가 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 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 사람도 그러지 않았는가’, ‘저쪽은 심하지 않은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우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앞에서 안의 proprium 내가 만든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물리치며, 자리에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나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좋은 정치인이고 누가 나쁜 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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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5, 박요한 목사, ‘내 어머니 같은 나의 하나님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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