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93,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무덤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훗날 다시 살아나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 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정확히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 몸의 물질이 마지막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SY.93, 신성종 목사, ‘성경은 화장에 대해 정말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오늘날 교회의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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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진리가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교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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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체어리티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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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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