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자주 밝히신 바입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이를 ‘황폐’(vastation) 또는 ‘황폐하게 함’(laying waste)이라 부르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황량’(desolation)이라 부릅니다. 또한 ‘완결’(consummation)과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고도 말합니다. 사6:9, 11-12, 사23:8-끝, 사24, 사42:15-18, 렘25, 단8, 단9:24-끝, 습1, 신32, 계15-16 및 그 이후의 장들을 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와 ‘황폐하게 함’(laying 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과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단9:24 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와 ‘황폐하게 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과 ‘끊어 버림’ 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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