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HI.007 | 힌두교(Hindu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바가바드 기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행하면서도 영적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와 참된 체어리티, 일상의 삶은 어떻게 영적인 삶이 되는가

 

해설

힌두교(Hinduism)의 대표적 경전 가운데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반드시 세상을 떠나거나 일상의 책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에서 벗어날 때 영적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생활을 특별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나 명상과 금욕에만 한정하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그 안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 확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인간은 가족을 돌보고 생업에 종사하며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영적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행위와 의무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거나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기로 행위하는가, 그 결과를 누구의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행위를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하여 바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을 단순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경전은 행위 자체보다 행위에 대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일부로, 전쟁을 앞둔 아르주나(Arjuna)와 그의 마부이자 신성한 스승인 크리슈나(Krishna)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르주나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 가운데 친족과 스승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갈등에 빠집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차라리 싸우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때 크리슈나는 단순히 용기를 내어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 행위와 그 결과, 의무와 해방, 그리고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삶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대화가 처음부터 평화로운 일상생활이나 개인의 직업윤리에 관한 일반적인 강의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무와 도덕적 갈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 경전의 가르침을 현대적 직업윤리나 자기계발의 원리로 적용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과 폭력,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의무라는 본래의 문맥을 지워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르주나에게 전쟁에 참여하라는 가르침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바가바드 기타’의 영적 통찰을 인정하면서도 그 윤리적 전제를 신중하게 분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경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가운데 하나가 2장 47절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인간은 행위할 책임이 있지만 그 행위의 결과를 자신의 소유로 삼아서는 안 되며, 결과를 얻으려는 욕망 때문에 행위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행위하지 않는 상태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카르마 요가’(karma yoga), 곧 행위를 통한 영적 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카르마(karma)는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를 가리키지만, 카르마 요가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행위하는 방식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 동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보상과 명예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실하게 일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성취를 통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거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행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기 존재의 가치나 영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후자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3장 19절에서는 집착 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궁극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영적 해방을 위해 반드시 모든 사회적 책임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넘어, 일상적 행위 자체가 영적 수행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타’가 말하는 집착 없는 행위는 단순한 무욕이나 심리적 평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3장 30절에서 크리슈나는 모든 행위를 자신에게 맡기고, 이기적인 욕망과 소유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요청합니다. 또한 18장 46절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자신의 일을 통하여 예배함으로써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경전의 여러 유신론적 해석에서 행위는 단순히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중립적 활동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독립적인 공로로 소유하지 않고 더 높은 신성한 목적에 연결하려는 종교적 태도가 나타납니다. 다만 힌두교의 모든 학파가 이러한 가르침을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이일원론 전통에서는 집착 없는 행위가 마음을 정화하여 궁극적 지식에 이르도록 준비하는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신애를 중시하는 전통에서는 신에게 행위를 바치는 헌신 자체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처럼 행위의 길은 지식의 길과 신애의 길, 그리고 해탈에 관한 여러 이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카르마 요가를 하나의 독립적인 도덕철학처럼 설명하거나 모든 힌두교 전통이 인간의 선행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행위의 중요성은 행위 자체의 공로보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신성한 목적을 향한 헌신에 깊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흥미로운 비교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422에서 참된 체어리티(charity)란 자신이 맡은 직분과 사업과 직업에서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왕과 재판관과 성직자와 상인과 기술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정의와 성실함을 실천하는 일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다고 밝힙니다. 특히 재판관이 뇌물이나 사적 관계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하게 판결하거나, 상인이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거래하고, 기술자가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모두 체어리티의 실제적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특별한 자선사업을 하는 일로만 제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매일 살아가는 직장과 가정과 사회적 관계가 모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가바드 기타’가 인간의 일상적 의무와 영적 성장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중요한 통찰을 보여 줍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종교적 수행만을 위해 일상의 책임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가 영적 상태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집착 없는 행위는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궁극적 해방에 이르는 길과 연결되지만, 스베덴보리가 밝힌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삶 속에서 결합되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지혜에 관한 신성한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about 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297에서 사랑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지혜를 통하여 그 목적을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쓰임(use)은 단순한 노동이나 외적 성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쓰임은 사랑과 지혜가 실제적 활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그 안에 어떤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따라 영적 성격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직업을 통해 많은 재물을 얻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다면 그 활동의 외적 유익만으로 그를 참된 체어리티의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통해 이웃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고 공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된 체어리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크거나 작은가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격입니다. 인간의 외적 활동은 비슷해 보여도 그 내면에서 작용하는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의 의무가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가바드 기타’ 3장 35절과 18장 47절은 다른 사람의 의무를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의무를 불완전하게 수행하는 편이 낫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맥에서 ‘자신의 의무’는 현대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직업이나 개인적 소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사회적 역할과 바르나(varna), 곧 전통적인 신분적 구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18장 41절로 44절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역할과 그에 따른 직무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가르침을 모든 사회적 지위와 관습을 무조건 유지하라는 명령으로 확대하거나, 태어난 신분 때문에 차별과 억압을 감수해야 한다는 근거로 삼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은 부당한 질서를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참된 체어리티는 단순히 자신이 속한 사회적 위치에서 요구받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성실함에 따라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TCR.422–424). 따라서 어떤 의무가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영적으로 선한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원리와 부당한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전쟁이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본래 문맥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르주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단순히 생업을 유지하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여 상대를 죽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크샤트리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요청하며, 개인적 애착과 슬픔 때문에 그 의무를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장면을 현대의 모든 종교인이 그대로 모방해야 할 행동 지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신이 명령한 의무이므로 그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판단을 중단시키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내세워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부당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신성한 의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가 실제로 선한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선한 쓰임은 단순히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질서에 합당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그 자체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무가 실제로 어떤 선을 이루며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에서 결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통찰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의무의 내용까지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잘못된 행위가 선한 행위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한 일을 하면서 그 결과를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문제는 ‘바가바드 기타’의 집착 없는 행위와 스베덴보리가 밝힌 참된 체어리티를 비교할 때 특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439-442에서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사람이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한, 자신의 행위에 공로를 두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실제로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자신이 행한 선의 근원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전통 사이에 비교할 만한 중요한 접점을 발견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인간이 선한 행위를 자신의 공로로 소유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카르마 요가에서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카르마와 윤회의 속박에 묶어 두는 중요한 원인으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밝힌 공로의 문제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프로프리움’(proprium)과 관계됩니다. 인간이 선을 자신의 공로로 여기면 그 행위 안에 자기 사랑이 개입하고, 그 결과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인정하는 참된 겸손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이기적 집착과 자기 공로를 경계하지만, 인간의 영적 속박이 무엇이며 그 속박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에 관한 설명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분별은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매우 실제적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가족을 돌보거나 어려운 직장에서 책임을 감당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일을 계속하는 동기가 언제나 선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하는 것이 실제로 가족과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그 과정에서 정직함과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선한 쓰임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는 책임을 다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무한정 감수하거나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삶을 해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선택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책임감은 단순히 주어진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앞에서 무엇이 실제로 선하고 지혜로운 선택인지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과 직장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신의 공로로 여기거나 교회의 성장과 성도들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면, 그는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성과가 없더라도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진리를 성실하게 전하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그 사역에는 참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보다 누구를 위하여, 어떤 사랑으로 그 일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행위와 거듭남의 관계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10에서 회개가 인간 안에 교회가 형성되는 첫 단계이며,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일이 거듭남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435-438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이웃에게 유익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그대로 사랑하면서 외적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자동으로 영적 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이웃을 돕기 위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면서도 자신의 사업에서는 속임수와 불공정한 거래를 계속한다면, 그 기부 행위만으로 참된 체어리티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탐욕과 부정직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하면서 공정하게 사업을 운영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자기 수양이나 습관의 개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선한 행위는 거듭남과 분리된 외적 공로가 아니며, 거듭남 또한 현실적인 삶과 관계없는 내면의 신비로운 체험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적인 삶 안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가바드 기타’가 일상의 행위를 영적 해방과 연결한다는 통찰은 의미가 있지만, 그 해방을 윤회와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성경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거듭남의 진리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타’가 강조하는 집착 없는 행위를 단순히 일을 하면서 욕심을 내지 않는 태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스베덴보리가 밝힌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봉사 정신이나 직업적 성실함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든, 그 삶이 영적 의미를 지니려면 외적 행위와 내적 사랑이 서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적 행위가 선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참된 영적 생명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반대로 자신이 높은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이 선하다고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참된 영성은 인간이 일상의 삶을 떠나 특별한 상태에 들어가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가 인간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와 성실함과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서 그 실제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상의 책임은 영적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영적 삶이 실제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다만 모든 책임이 무조건 선한 것은 아니므로, 그 책임을 수행하는 동기와 목적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주님의 신성한 질서와 이웃의 참된 유익에 합당한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결국 ‘바가바드 기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행하면서도 영적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명제는 이 경전의 중요한 가르침을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떠나 모든 행위를 포기해야만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에는 깊이 살펴볼 만한 진리의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행위의 외적 결과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는 통찰은 스베덴보리가 밝힌 참된 체어리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성경과 주님의 계시에 비추어 그대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행위와 해탈은 카르마와 윤회, 자신의 다르마와 신에 대한 헌신이라는 고유한 종교적 체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 전쟁과 신분에 따른 의무 등은 반드시 별도로 분별해야 할 문제를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인간의 참된 영적 성장은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독립적인 해방을 성취하거나 그 공로를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할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거듭남은 특별한 종교적 수행의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이웃을 섬기는 실제적인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 의무가 실제로 선한 것이며, 누구를 위하여 어떤 사랑으로 수행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일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을 행하며, 그 모든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할 때, 평범한 일상은 참된 영적 생명이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 속의 의무와 영적 해방을 연결하려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에 대하여, 성경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계시의 빛이 제시하는 더욱 깊은 분별이 있습니다. (HI.007 해설)

 

요약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는 인간이 세상을 떠나 모든 행위를 포기해야만 영적 해방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2:47과 3:19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강조하며, 3:30과 18:46은 자신의 행위를 신에게 바치는 헌신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일상의 책임과 영적 삶을 분리하지 않고, 행위의 외적 결과보다 내적 동기를 중시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가르침은 당시의 사회적 신분 질서와 전쟁이라는 문맥에서도 이해해야 하므로, 모든 의무가 무조건 선하다고 승인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에서 참된 체어리티란 각자가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이웃에게 유익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TCR.422-424). 또한 선한 행위를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않고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힙니다(TCR.439-442). 그러나 참된 영적 변화는 단순히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실제 삶 속에서 선을 행할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TCR.435-438, 510).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에는 존중할 만한 윤리적·영적 통찰이 있지만, 카르마와 윤회에서의 해방을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무조건 수행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의무가 실제로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HI.006. ‘우파니샤드는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넘어 궁극적 실재와 참된 자아를 탐구한다’

SL.HI.006 | 힌두교(Hindu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우파니샤드는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넘어 궁극적 실재와 참된 자아를 탐구한다’ - 제사의 내면화와 참된 자아의 발견, 영적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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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HI.006 | 힌두교(Hindu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우파니샤드는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넘어 궁극적 실재와 참된 자아를 탐구한다’ - 제사의 내면화와 참된 자아의 발견, 영적 진리는 어디에서 완성되는가

 

해설

힌두교(Hinduism)의 오랜 역사에서 우파니샤드(Upanishad)의 등장은 인간이 신성과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초기 베다 전통에서는 신들에게 찬가를 바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일이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제사를 통해 신들의 은총을 구하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며,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외적인 제사와 의식의 의미를 더욱 깊이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제사에서 사용하는 불과 제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인간의 생명은 무엇이며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인도의 종교적·철학적 문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우파니샤드를 베다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뜻에서 ‘베단타’(Vedanta)와 연결하여 설명하며, 그 가운데 초기의 주요 문헌들은 대체로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 중반을 전후한 오랜 구전과 사색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중요성은 단순히 제사를 반대하거나 종교적 의식을 폐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행위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하는가를 탐구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신성한 질서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관심이 외적인 행위에서 그 행위의 근거와 인간 자신의 존재를 향한 탐구로 확대된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명칭은 전통적으로 스승 가까이에 앉아 가르침을 받는 모습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역사적 의미를 단순히 ‘스승 곁에 앉는 것’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문헌에서 이 표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연관성이나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우파니샤드의 문학적 형식에서도 나타납니다. 우파니샤드는 하나의 저자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철학서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대화, 왕과 현자의 문답, 비유와 우화, 명상과 제사에 관한 설명, 우주의 근원에 대한 사색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rihadaranyaka Upanishad)와 찬도기야 우파니샤드(Chandogya Upanishad)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대표적인 문헌으로,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사색으로 확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1에서는 제사에 사용되는 말의 신체 각 부분을 우주의 여러 요소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제사를 단순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 보지 않고, 우주 전체의 질서와 관계되는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correspondence)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사물과 우주적 실재 사이에 상징적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비교할 수 있지만, 그 관계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천적 질서에 근거한 신성한 상응인지 여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파니샤드의 중심적인 탐구 대상은 브라만(Brahman)과 아트만(Atman)입니다. 브라만은 일반적으로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 또는 실재를 가리키며, 아트만은 인간의 참된 자아 또는 존재의 근본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의 의미가 처음부터 모든 우파니샤드에서 동일하게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브라만은 베다의 제사와 찬가에 관계되는 신성한 언어와 힘이라는 의미에서 발전하여 점차 존재 전체의 근거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대되었으며, 아트만 역시 호흡이나 생명,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용법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와 의식에 관한 개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탐구의 배경에는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육체는 늙고 병들며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마음의 생각과 감정도 계속 바뀝니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육체와 마음의 배후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자신을 육체나 사회적 신분이나 일시적인 욕망과 동일시한다면, 그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인간이 일상적으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더욱 깊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참된 자아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외적인 모습이나 세상적인 역할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자아가 무엇이며 그것이 궁극적인 신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우파니샤드와 후대의 철학 학파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탐구를 대표하는 가르침이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6.8.7에 나오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곧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웃달라카 아루니(Uddalaka Aruni)는 아들 슈베타케투(Shvetaketu)에게 모든 존재의 배후에 있는 미세한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참된 실재이며 자아이고 바로 너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씨앗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소금이 물에 녹아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물 전체에 퍼져 있다는 사실 등을 통해 감각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근본적인 실재를 설명합니다. 또한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4.10에는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곧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후대의 베단타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샹카라(Shankara)의 불이일원론(Advaita Vedanta)은 인간의 참된 자아와 궁극적인 브라만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해탈의 핵심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라마누자(Ramanuja)의 한정불이론(Visishtadvaita Vedanta)과 마드바(Madhva)의 이원론(Dvaita Vedanta)은 이러한 관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 전체가 인간의 개별적인 영혼과 궁극적인 실재의 완전한 동일성을 단 하나의 방식으로 가르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파니샤드가 궁극적인 실재와 참된 자아의 관계를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다는 사실과 그 관계에 관한 특정 철학 학파의 해석은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인간의 참된 본성에 관한 중요한 분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지혜에 관한 신성한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about 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4에서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인간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존재이시며, 인간과 천사는 창조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과 인간 자신이 생명 자체라는 주장은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DLW.55–60에서는 피조 세계의 모든 것이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단순한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아무리 깊은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생명의 근원인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영적 완성은 자신이 본래부터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더욱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우파니샤드의 자아 탐구와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진리를 비교할 때 반드시 분별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한편 우파니샤드가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탐구하였다는 사실은 성경의 제사와 예배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비교점을 제공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 등 다양한 제사 제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도 외적인 제사 행위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선언하였으며(삼상15:22), 호세아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호6:6). 이러한 말씀은 제사 자체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가 인간의 마음과 삶에서 분리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잃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175에서 내적인 것이 외적인 예배에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참된 예배는 외적인 형식이 얼마나 정교하고 장엄한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예배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이 자연적인 세계에서 표현되는 수단이며, 그 안에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가 없다면 영적인 생명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가 제사의 의미를 외적인 행위에서 더욱 깊은 실재의 탐구로 확대하였다는 사실에는 비교할 만한 종교적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사의 속뜻은 단순히 인간이 외적인 의식의 상징을 이해하거나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제사들은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구원 사역, 그리고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볼 문제는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적인 종교 행위보다 내적인 영성이 더 높고 참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외적인 형식에만 집착하면서 마음과 삶의 변화를 소홀히 하는 신앙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것이라고 해서 모두 선하고 참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탐욕과 교만,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제사에서 내적인 명상으로 옮겨 갔다고 해서 그 자체로 참된 영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감정의 움직임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모든 판단의 중심에 둘 수 있으며, 심지어 특별한 영적 경험을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평범한 사람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한다면, 그의 외적인 예배 안에는 참된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가운데 어느 하나를 무조건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인 것의 근원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단순히 감정이나 심리적 깊이를 뜻하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차원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참된 내면화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 내면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새롭게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문제에서도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 SS.5–6에서 말씀에는 자연적 의미와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으며, 이 세 의미가 상응을 통하여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씀의 속뜻은 단순히 문자적인 표현보다 더 깊은 철학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인간과 천국에 전달되는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에서 외적인 제사의 요소와 우주 또는 인간의 내면 사이에 깊은 관계를 발견하려는 해석을 성경의 상응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파니샤드의 상징 해석은 고대 인도인들이 제사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발전시킨 종교적·철학적 탐구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밝힌 말씀의 속뜻은 주님께서 말씀 안에 담아 두신 신성한 진리의 내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전이 외적인 의식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경전이 성경과 동일한 신성한 말씀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성경의 속뜻을 이해하는 일 역시 지적인 해석이나 상징의 지식을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인간의 이해에 들어온 다음 의지와 삶 속에서 선과 결합해야 비로소 그 사람에게 실제적인 영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자아 탐구는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주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와 유익, 종교적 지위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외적인 종교생활의 양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그 안에 있는 악을 발견하며 주님께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성찰은 우파니샤드의 일부 전통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깨닫는 과정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10–511에서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는 일이 영적 변화의 시작임을 밝힙니다. 특히 TCR.511에서는 회개가 단순히 생각이나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인간의 의지와 실제 행동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깨달음이 단순한 자기 인식이나 관념적 통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발견하였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발견을 통해 어떤 악을 멀리하고 어떤 선을 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계시는지를 실제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우파니샤드의 자아 탐구를 바라볼 때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영적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거나 자신의 내면에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 생명과 능력이 본래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자신이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행동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유와 합리성 자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일부 가르침이 인간의 참된 자아를 궁극적인 신성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밝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반면 인간이 단순한 육체적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초월하는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통찰은 주목할 만합니다. 다만 그 영적 차원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신성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의 본성인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집니다. 참된 겸손은 인간의 영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르게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파니샤드는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넘어 궁극적 실재와 참된 자아를 탐구한다’는 명제는 고대 인도 종교와 철학의 역사적 발전을 설명하는 말로서 대체로 타당합니다. 우파니샤드는 기존의 제사 전통을 완전히 폐기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의 배후에 있는 의미를 탐구하고, 인간의 참된 자아와 우주의 궁극적인 근원을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종교적 사색을 확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더 깊이 물어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탐구가 언제나 참된 영적 진리에 도달한 것은 아니며, 특히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를 인간과 신성의 본질적인 동일성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성경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계시의 빛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인간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가는 영적 존재이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또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의식만으로 완성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외적인 예배를 버리고 내적인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것이 곧 영적 완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이 선과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자아 탐구를 대할 때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영적 통찰을 존중하되,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무조건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여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알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여기에 외적인 제사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참된 본성과 궁극적인 실재를 탐구하려는 우파니샤드의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제시하는 더욱 깊은 영적 분별이 있습니다. (HI.006 해설)

 

요약

우파니샤드(Upanishad)는 고대 베다의 제사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외적인 의식의 의미를 더욱 깊이 탐구하면서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인간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의 관계를 중요한 주제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6.8.7의 ‘타트 트밤 아시’와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4.10의 ‘아함 브라흐마스미’는 후대 베단타 철학의 핵심적인 논의가 되었지만, 그 의미에 관한 해석은 학파마다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인간과 천사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DLW.4, 55–60). 또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의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AC.1175), 거듭남은 단순한 자기 인식이나 영적 체험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TCR.510-511).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내면적 탐구에는 존중할 만한 종교적 통찰이 있지만, 인간의 참된 자아를 신성 자체와 동일시하는 해석은 분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적 완성은 자신이 본래 신성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선한 삶으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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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HI.005 | 힌두교(Hindu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베다는 인간이 만들어 낸 지식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전하는 권위 있는 경전이다’ - 경전의 신성한 권위와 참된 계시의 기준

 

해설

힌두교(Hinduism)의 신앙과 철학을 이해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베다(Veda)의 권위입니다. ‘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알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지식’ 또는 ‘앎’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힌두교 전통에서 베다는 인간이 경험과 사색을 통해 축적한 일반적인 지식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많은 정통 힌두교 학파에서 베다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를 전하는 경전이며,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저작이 아니라는 특별한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베다를 ‘아파우루셰야’(apauruṣeya), 곧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전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궁극적 실재와 영원한 질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참된 종교적 지식은 인간의 제한된 판단을 넘어서는 근거를 필요로 한다는 중요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전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그 경전이 신성한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경전의 권위에 관한 신앙적 고백은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지만, 그 고백만으로 경전의 모든 내용이 신성한 진리임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다는 하나의 책이 아니라 오랜 세월 형성되고 전승된 방대한 경전들의 집합입니다. 일반적으로 리그베다(Rigveda), 사마베다(Samaveda), 야주르베다(Yajurveda),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리그베다는 여러 신에게 바치는 찬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마베다는 제사의 노래와 선율에 관계되며, 야주르베다는 제사 의식에서 사용되는 주문과 절차를 담고 있습니다. 아타르바베다에는 치유와 보호, 일상생활의 소망과 관련된 주문과 찬가, 그리고 보다 철학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베다 전통에는 찬가와 주문을 모은 상히타(Samhita), 제사와 의례를 해설하는 브라흐마나(Brahmana), 의식의 상징적·사색적 의미를 다루는 아란야카(Aranyaka),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참된 본성을 탐구하는 우파니샤드(Upanishad) 등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한 시대에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쳐 형성되고 전승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베다 문헌이 동일한 성격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부분은 신들에게 바치는 찬양과 제사에 집중하고, 다른 부분은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근원을 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그러므로 베다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서처럼 이해하거나, 모든 부분이 동일한 철학적 결론을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베다의 권위가 힌두교 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과 그 내용이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힌두교 전통에서 베다의 권위를 설명할 때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슈루티’(śruti), 곧 ‘들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의 성현들인 리시(ṛṣi)가 특별한 영적 통찰을 통해 받아들인 진리라는 이해를 나타냅니다. 이에 비하여 ‘스므리티’(smṛti), 곧 ‘기억된 것’은 전승된 가르침을 후대에 정리하거나 해석한 문헌들을 가리키는 범주입니다. 물론 실제 힌두교의 종교생활에서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처럼 스므리티에 속하는 문헌도 매우 높은 권위를 인정받으며, 어떤 경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전통에 따라 다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베다의 비인간적 기원을 이해하는 방식도 힌두교 안에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미망사(Mīmāṃsā) 철학의 일부 전통에서는 베다가 인간뿐 아니라 신에 의해서도 창작되지 않은 영원한 언어적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베다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을 경전의 저자로 설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유신론적 힌두교 전통에서는 베다를 신성한 지혜의 표현이나 신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베다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곧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감이나 계시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비인간적 기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지만, 그 기원이 인격적 하나님인지, 영원한 언어 자체인지, 또는 성현에게 드러난 궁극적인 실재인지에 따라 그 신학적 의미는 크게 달라집니다.

 

베다의 권위는 오랜 구전 전통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다의 찬가와 주문은 문자로 기록되기 전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소리와 억양과 배열을 정밀하게 익히는 방식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승은 단순히 문헌의 내용을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그 소리 자체가 종교적 의미와 권위를 가진다는 믿음과 관계됩니다. 오늘날에도 베다의 낭송은 여러 전통에서 중요한 종교적 행위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경전을 오랫동안 정밀하게 보존했다는 사실과 그 경전이 신성한 계시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신성하다고 믿는 문헌을 매우 충실하게 보존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보존의 노력은 역사적·문화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전승이 오래되었다거나 낭송 방식이 정교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 전체가 영원한 진리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경전에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나 시대적·문화적 특징이 나타난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신성한 진리가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전의 외적 오래됨이나 보존 방식만이 아니라, 그 경전이 어떤 근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에게 어떤 진리를 전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힌두교의 베다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경전의 권위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에서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된 책이 아니라 신성한 진리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SS.1에서는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신성한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만, 그 말씀이 무엇 때문에 본질적으로 신성한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성경의 문체가 세상의 뛰어난 문학작품처럼 화려하거나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이러한 외적 모습 때문에 인간이 오히려 말씀의 신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신성은 인간의 문학적 평가나 종교적 감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SS.3에서는 말씀 안에 신성한 지혜와 생명이 있으며, 그 말씀이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천국을 열어 준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신성한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어떤 경전을 거룩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에 그 경전이 신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가 그 안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말씀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성을 설명하는 기준은 단순히 오래된 경전이라는 사실이나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는 전통적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 자체에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어떤 방식으로 담겨 있는가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기준이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말씀의 속뜻(internal sense)과 상응(correspondence)의 원리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SS.5–8에 따르면 말씀에는 자연적 의미와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으며, 이 세 층위는 상응을 통하여 하나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연적 언어로 읽는 말씀의 글자는 단순한 역사나 도덕적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천사들이 이해하는 영적·천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SS.8에서는 말씀이 상응을 통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SS.18–19에서는 말씀의 신성한 영감과 거룩함이 그 속뜻과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경전의 권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차이를 발견합니다. 베다의 일부 전통은 경전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영원한 소리와 지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밝힌 말씀의 신성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언어와 영적·천적 의미의 상응을 통하여 인간과 천국을 연결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베다의 상징과 의례에도 영적 의미를 찾으려는 해석 전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헌에 상징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성한 말씀과 동일한 구조와 권위를 지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상징이 신성한 상응은 아니며, 인간이 어떤 문헌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한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그 문헌의 모든 부분에 영적·천적 의미를 담아 주셨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279에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이전에도 고대의 말씀이 존재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민21:14와 27에 언급되는 ‘여호와의 전쟁기’와 고대의 예언적 말씀을 관련지으면서, 그 고대의 말씀이 가나안과 주변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상응의 지식을 통하여 영적 지혜를 받아들였다고 밝힙니다. 또한 이 고대의 말씀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계시의 역할을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계시와 말씀의 역사가 오늘날의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말씀이 존재하였다고 설명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씀이 곧 인도의 베다였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TCR.279는 베다의 네 경전이 그 고대의 말씀과 동일하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베다의 오래된 역사와 고대의 말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 사이에서 비교할 만한 문제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양자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원전의 근거를 넘어서는 추론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 고대의 여러 민족에게 영적 진리를 전하셨다는 사실과 오늘날 전해지는 모든 고대 경전이 동일한 신성한 계시라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다에는 참된 진리가 전혀 없다고 판단해야 합니까?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근거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19에서는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신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종교에 따라 양심을 형성하며 선한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325에서는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가 신성을 인정하는 것과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베다와 그에 연결된 여러 힌두교 전통 안에도 인간이 신성을 경외하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절제하며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진리의 요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르침이 선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그 경전 전체의 신성한 권위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주의 근원에 관한 깊은 사색이나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가르침은 의미 있는 통찰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 윤회, 신들의 본성과 제사의 효력에 관한 모든 주장이 참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 진리가 포함된 종교적 체계 전체를 무조건 승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신성한 본성과 인간의 거듭남,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문제에서는 성경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계시의 빛에 비추어 각각 분별해야 합니다.

 

한편 경전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태도는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신학적 해석이나 교단의 전통까지 모두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의 신성한 권위와 인간이 그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SS.56에서 상응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참된 교리 안에 있지 않으면 말씀의 속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이 이미 받아들인 잘못된 원리를 정당화하도록 말씀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경전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신성한 진리처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인이 베다의 권위를 내세워 전통적 교리와 관습을 무조건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면, 기독교인 역시 성경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이 속한 교단의 해석이나 개인적 신념을 절대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주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순간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 확신이라는 모습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전을 참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 경전의 권위를 자신의 주장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와 삶을 끊임없이 살피며 잘못된 사랑과 생각을 내려놓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경전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베다의 찬가와 철학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종교적 스승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지식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 자체가 그를 참된 선으로 인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종교적 양심에 따라 악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비록 그의 교리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인정해야 할 선한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기독교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거듭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실제로 인간의 의지와 삶 속에서 선과 결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인간에게 특별한 종교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할 지식을 쌓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의 참된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내용을 무조건 반복하거나 외우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인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도록 받아들이는 데서 드러납니다.

 

결국 ‘베다는 인간이 만들어 낸 지식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전하는 권위 있는 경전이다’라는 명제는 힌두교의 여러 전통이 베다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신앙적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역사적·신학적 사실로 그대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베다가 오랜 세월 전승된 고대의 경전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특정 힌두교 전통의 신앙적·철학적 입장입니다. 또한 베다 안에 인간의 삶과 신성한 질서에 관한 깊은 통찰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내용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신성한 진리라는 결론은 자동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경전의 참된 신성은 그 오래됨이나 종교적 권위에 관한 인간의 선언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상응을 통하여 자연적 언어 안에 담긴 것이며, 그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고 천국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다를 연구하면서 그 안에 나타나는 진리의 요소와 인간의 영적 탐구를 존중하되, 그 경전의 모든 내용을 성경과 동등한 신성한 말씀으로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신앙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떤 경전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그치지 않고, 그 경전을 통해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떤 사랑과 삶을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참된 계시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고,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받은 생명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도록 인도합니다. 바로 여기에 경전의 권위를 분별할 때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HI.005 해설)

 

요약

‘베다’(Veda)는 고대 인도에서 형성된 방대한 경전 전통으로, 많은 정통 힌두교 학파는 이를 인간이 창작한 것이 아닌 영원한 지식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베다를 ‘아파우루셰야’(apauruṣeya), 곧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의미는 학파에 따라 다르며 반드시 인격적인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에서 말씀의 신성이 인간의 종교적 평가나 경전의 오래됨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가 그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설명합니다(SS.1–3). 또한 말씀의 자연적·영적·천적 의미는 상응을 통하여 하나를 이루며, 말씀은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천국과 연결합니다(SS.5–8, 18–19). 스베덴보리는 성경 이전의 고대의 말씀이 존재하였다고 밝히지만, 그것이 베다와 동일하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TCR.279). 따라서 베다에 담긴 종교적 통찰과 선한 가르침은 존중할 수 있으나, 그 모든 내용이 성경과 동일한 신성한 계시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경전의 참된 권위는 인간이 부여하는 절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에 있으며, 그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삶 속에서 선과 결합하여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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