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1-4)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from the wilderness of Sin, after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 and they encamped in Rephidim;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people to drink. And the people quarreled with Moses, and they said, Give ye us water and we will drink. And Moses said to them, Why quarrel ye with me? why do ye tempt Jehovah? And the people thirsted there for the waters; and the people murmured against Moses, and said, Wherefore is this, that thou hast made us come up out of Egypt, 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And Moses cried unto Jehovah, saying, What shall I do to this people? a little more and they stone me (Exdo. 17:1-4).

 

 

※ 오늘은 제가 37년 전인 198868일, 당시 삼성그룹 공채 29기에 합격, 아침에 서울 소공동 삼성물산 앞 주차장에 모여 수십 대 버스에 나눠타고, 용인 자연농원 내 삼성종합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입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상 보듯 생생한데요, 요단을 건너기 전, 지난 40년 광야 세월을 회상하며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에게 거듭 여호와의 말씀을 신명(申命)하는 모세의 심경을 조금 알듯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37년간의 저의 지난날을 조금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신 광야(the wilderness of Sin)를 떠난다는 것은 두 번째 시험인 선과 관련된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가는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은 이렇게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른 시험이 시작됩니다. 보통은 한번은 선(good)에 관한 시험이, 한번은 진리(truth)에 관한 시험이 옵니다.

 

※ 진리 안에 있다 보면 그 진리와 관련된 선이 필요해져서이고요, 선을 행하다 보면 이번엔 관련된 진리가 필요해져서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보완, 공급,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라는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섭리는 진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진리가 삶의 아주 미세한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섭리는 인간의 구원 전체를 바라보시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내다보시는 주님의 통찰, 예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대강의 흐름과 원칙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은 항상 앞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요, 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지금 가나안까지 해안을 따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로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 주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3:17, 18)

 

주님은 그렇게 각 사람의 성품이나 영적인 특성들을 모두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심지어는 조상부터 후손까지를 모두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저도 주님의 섭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는 섭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면 이 정도의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슨 점이나 사주(四柱) 같은 거 없이 오직 부모의 인도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걸 찾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스베덴보리 저, ‘Angelic Wisdom about Divine Providence(1764, 라틴)를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라틴)의 속편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살피시는가, 어떻게 감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게도 하시는데요, 그것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섭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주님의 섭리 따라가는 걸 1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은 ‘르비딤(Rephidim)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 역시 광야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비딤도 또 하나의 시험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광야는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 광야에서의 시험이 선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시험은 진리에 관한 시험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물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거기서 장막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시험을 대비,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를 주님이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군대가 진을 치는데, 군사들이나 병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질서에 맞춰 서로 유기적으로 묶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만 시험 중에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선수 각각의 포지션이 있고, 얼핏 보면 서로 따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전략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상대방의 공격에 수시로 방어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처럼 주님도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 중에 힘들어 비록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더라도 주님 주신 어떤 선 안에서, 어떤 울타리 안에서 한다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우리는 내면에 준비된 뭐가 없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싸울 수 있는 무기, 곧 말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모세와 다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회의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었던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갈등하는 것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진리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행동이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 아마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계시를 이웃이나 친지, 지인에게 전할 때 경험하는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방금 말씀하신 저런 단계를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함 없이 전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진리에 대한 원칙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즉 인간관계라든지, 그 밖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 나는 진리에 대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이 물이 부족하다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앙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면에서 선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그만큼 다시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마치 남자가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선이 자기 짝이 될 진리를 그리워하는 것인데요, 그때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때의 시험이 바로 진리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런 영적 시험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르비딤에서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서 진리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면, 곧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불평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에 대해 불경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고요, ‘내가 이 진리를 왜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심하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시험의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중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 말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심,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한 욕심 같은 그런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그 실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건데도 불구, 그러나 시험이 깊어지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내가 진리를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그리고 또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가 내 안에 그나마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말이지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없어지면 속으로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me), 자녀(my sons), 가축(my cattle)’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자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자녀와 가축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자산인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진리가 계속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른 영적 자산들, 곧 선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들마저 위축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 시험이 너무 극심하면 주님의 진리마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 평소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비록 시험이 저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 중에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원하옵기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살짝살짝 주님의 진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제 숨구멍을 열어주시옵소서...

 

4절, 오늘 본문 끝 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는 진리이신 주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리가 주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 자체이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중재(intercess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교회를 사모하는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중재(intercession)는 다음과 같은데요,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중재합니다. 그것은 신적 사랑(Divine love)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데요,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신적 진리이셨습니다만,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화하신(was glorified) 후부터는 주님은 신적 선(the Divine good)이십니다.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속뜻으로 신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신적 진리이지요. 신적 진리는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 끊임없는 중재(continual intercession)가 있는데, 이걸 우리 식대로 표현, 아들이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한테 이해가 되나 저런 앞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천국의 비밀8573,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A secret that lies still more interiorly hidden in the word “intercession,” shall also be told.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continually intercedes in the manner described, because it proceeds from the Divine love.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the Divine truth; but since He was glorified, which was effected when He rose again, He is the Divine good (n. 7499). It is the Divine good which is meant in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Father,”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meant by “the Son” (n. 2803, 3704, 7499). And as in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Divine good, there is continual intercession, therefore it is said that the Son entreats the Father, and intercedes for man. This latter idea could be apprehended by man, but the former with difficulty. (AC.8573)

 

※ 저 하늘의 해처럼, 그러니까 해가 변함없이 지상에 열과 빛을 말없이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의 중재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자기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는, 즉 이 모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모든 체어리티의 사람들처럼 은은히 말없이 조용히 끝까지 사랑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이런 게 중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는 말은 시험이 좀 더 깊어지면 신앙인들이 진리를 모독하는 상황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모독하게 되는데요, 모독이란 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9:41)

 

주님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하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지옥은 진리가 충족되는 것을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주님은 그 시험을 오히려 이용하세요. 그래서 시험 가운데서 선이나 진리의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고요,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하십니다. 방해가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을 극복할 때, 우리 안에 선과 진리는 더 풍부해지며, 한 차원 더 높아집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련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극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을 것 같은 고비, 앞이 안 보이는 시기를 계속 걸어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 가운데 주님의 목적이 매번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이 사실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걸 통해 나로 하여금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81:7)

 

아멘

 

원본

2016-07-0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8(D1)-주일예배(2601, 출17,1-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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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는 자리는...

 

17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17, 18)

 

이번 대선 결과로 마음이 너무 힘들어 망연자실 중에도 오로지 말씀에 착념코자 습관을 좇아 오늘도 말씀을 따라가던 중 위 말씀에 시선을 붙들어 매시네요!

 

그러니까 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기어코 따라 들어간 걸로 이해가 되는데요... 오, 주님!

 

저 자리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인도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자기를 사랑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며, 천국을 향한 거듭남의 길을 꾸역꾸역 가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삶을 살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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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1, AE.389-397

 

AE.394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saying, How long, O Lord, who art holy and true, dost Thou not judge and avenge our blood on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6:10)

 

signifies sighings to the Lord, who is justice, respecting the judgment and removal of those who persecute and infe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the Lord and are in the life of charity.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rying out and saying, How long, O Lord,” as being to pour out to the Lord sighs from grief, for these are the words of those that groan and sigh and supplicate for justice.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holy and true,” as being the One who is Justice; for justice when predicated of the Lord, signifies that He does not tolerate such things, and this because He is holy and true.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judge and avenge our blood,” as being the judgment and removal of those who persecute and infe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the Lord and are in the life of charity.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because “blood” signifies all violence offered to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thus to the Lord; consequently violence offered to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and faith. To offer violence to these is to offer violence to the Lord Himself, according to the words of the Lord Himself in Matthew: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0, 45) Inasmuch as ye did it unto one of My least brethren, ye did it unto Me (25:40, 45).

 

That this is signified by “blood” in this sense, may be seen above (n. 329f,g).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as being those who were in “the former heaven” that afterwards passed away, for those dwelt in the spiritual world upon the earth, upon mountains, hills, and rocks, while those who acknowledged the Lord and were in the life of charity abode under the earth, or under heaven, and were there concealed and preserved (see above, n. 391a, 392a).

 

[2] From this the meaning of these words in their genuine sense can be seen; but no one can know that such things are meant unless it has been revealed to him. For otherwise who could know who are meant by “the souls of those slain,” and what is meant by “to avenge their blood upon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One who does not know from revelation who these are must conclude that the martyrs only are meant; when yet these were not the martyrs, but all such as were persecuted and infested by those who were in the former heaven that passed away; for these were such that they thrust out from themselves all who openly acknowledged the Lord and were in the life of charity, because they were interiorly evil (as has been said above, n. 391a, 392a). To this I will add the following: all in the spiritual world who are interiorly evil, however moral a life in externals they may have lived in the world, are utterly unable to tolerate anyone who worships the Lord and lives the life of charity; as soon as they see such, they infest and either do them injury or treat them shamefully. I have often wondered at this, and all who do not know about it must wonder, since these same persons, when in the world, tolerated preachings respecting the Lord and also respecting charity, and themselves talked about these things doctrinally, yet when they become spirits they cannot tolerate them. The reason is that this aversion is inherent in their evil in which they are; for in their evil there is hostility, yea, hatred against the Lord, and also against those who are led by the Lord, who are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but this hostility and this hatred lie concealed in their spirit; consequently when they become spirits they are in them; then that antipathy or antagonism inherent in evil comes forth.

 

[3] Take, for example, those in whom the love of ruling has predominated; it is their delight to rule over others, and if possible over all; this delight is in them after death, nor can it be removed, since every delight is of the love, and the predominant love constitutes the life of everyone, and this life remains to eternity. When these have become spirits, they strive continually, from the delight of their love, to gain dominion over others as they did in the world; and when they are unable to obtain it, they are angry against the Lord; and as they are unable to harm the Lord Himself, they are angry again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Him; for the delight of their love is contrary to the delight of heavenly love; this delight is that the Lord may rule, while the other delight is that they themselves may rule; this is why there is inherent in this delight a hatred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all who are led by Him, who are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From this it can be seen why those who openly acknowledged the Lord and lived the life of charity were delivered by the Lord from the violence of such spirits, and were concealed in the lower earth, and there preserved until the judgment. But after the judgment those who had dwelt above the earth, upon the mountains, hills, and rocks there, who were, as said above, interiorly evil, were cast out; and those who had been hidden under the earth, or under heaven, were elevated and allotted an inheritance in the places from which the former were cast out. From this it can now be more fully comprehended what is meant by what is said to them in the next verse, that “they should rest yet a little time, until they should be fulf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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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 (AC.8556-8575)

 

AC.855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노정대로 행하여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출17:1)

 

journeying,” as being what is successive and continuous of life (see n. 4375, 4554, 4585, 5996, 8181, 8345, 8397), here what is successive or progressive of spiritual life, that is, its growth, which takes place continuously by means of temptations.

 

AC.4375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And he said, Let us journey, and go, 33:12)

 

That this signifies what is successive (namely, of the conjunction of good with tru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journey,” and “to go,” which plainly involve progression to further things; for progression and what is successive are contained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C.4554 (그들이 떠났으나 And they journeyed, 35:5)

 

That this signifies what is continuou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ing” as being what is successive (see n. 4375), thus what is continuous, namely, of progression toward interior things.

 

(2025/6/2)

 

AC.4585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And they journeyed from Bethel, and there was still a tract of land to come to Ephrath, 35:16)

 

That this signifies that now was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ing from Bethel” as being what is continuous of the advancement of the Divine from the Divine natural (that “journeying” denotes what is continuous may be seen above, n. 4554, here in the supreme sense what is continuous of the advancement of the Divine, and that “Bethel” is the Divine natural, n. 45594560); from the signification of a “tract of land in coming” as being what is intermediate (of which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Ephrath”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former state (of which below where Bethlehem is treated of, which is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hence it is said, “Ephrath, this is Bethlehem” (verse 19).

 

AC.4559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And called the place El-Bethel,35:7)

 

That this signifies a holy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the Divine natural (see n. 4089, 4539, 4556); but when it is called “El-Bethel” it is not the Divine, but a holy, natural; for when the Lord made his human Divine, he first made it holy. Between making it Divine and making it holy there is this difference—that what is Divine is Jehovah himself, but what is holy is from Jehovah. The former is the Divine being, but the latter is what comes forth therefrom. When the Lord glorified himself, he made his human also the Divine being, or Jehovah (n. 2156, 2329, 2921, 3023, 3035); but before he did this, he made his human holy. Such was the process of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s human. Hence also Bethel is now called “El-Bethel,” applying what is signified by the “El” which is added, namely,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to him.” For “El” in the original language means “God”; but here “gods” in the plural, because in the internal sense “gods” denote holy truths (n. 4402). But in what follows it is called “Bethel,” for it is said, “Jacob called the name of the place Bethel” (verse 15);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창35:14, 15)

 

and it is added, “where God spake with him,” where it is in the singular. For “Bethel” in the original language is the “house of God”; but “El-Bethel” is “God the house of God.” Hence it is that “El-Bethel” denotes the holy natural, and “Bethel” the Divine natural.

 

AC.4089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I am the God of Bethel,31:13)

 

That this signifies the Divine in the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good in the ultimate of order (see n. 3729), consequently in the natural; for this is the ultimate of order, becau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terminated therein.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 “God of Bethel” is the Divine in the natural. As “Bethel” signifies good in the natural, it also signifies the knowledges of celestial things there, for these are of good.

 

AC.372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the name of that place Bethel, 28:19)

 

That this signifies the quality of the stat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name” and of “calling a name” as being the quality (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421);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place” as being state (n. 2625, 2837, 3356, 3387). The quality of the state is that which is signified by “Bethel.” In the original tongue “Bethel” means the “house of God”; and that this is good in the ultimate of order may be seen above (n. 3720).

 

AC.3720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This is none other than the house of God, 28:17)

 

That this signifies the Lord’s kingdom in the ultimate of ord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house of God.” Mention is made of the “house of God” in many passages of the Word, and in the external sense, or according to the letter, it signifies a consecrated building where there is holy worship;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the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heaven; and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universal kingdom; in the supreme sense, however, it signifies the Lord himself as to the Divine human. In the Word we sometimes read of the “house of God,” sometimes of the “temple,” both having the same signification, but with this difference—that the “house of God” is mentioned where good is treated of; but the “temple” where truth is treated of. From this it is manifest that by the “house of God” is signified the Lord’s celestial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the heaven of the celestial angels, and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Divine good; and that by the “temple” is signified the Lord’s spiritual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the heaven of the spiritual angels,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spiritu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Divine truth (see n. 2048). The reason why the “house of God” signifies the celestial which is of good, and the “temple” the spiritual which is of truth, is that in the Word a “house” signifies good (n. 710, 2233, 2234, 2559, 3128, 3652), and also because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houses were constructed of wood, for the reason that “wood” signifies good (n. 643, 1110, 2784, 2812); whereas “temple” signifies truth, because the temples were constructed of stones; and that “stones” signify truths may be seen above (n. 643, 1296, 1298).

 

[2] That “wood” and “ston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not only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ey are mentioned, but also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other life; for they who place merit in good works appear to themselves to cut wood; and they who place merit in truths, in that they have believed themselves to have been better acquainted with truth than others, and yet have lived evilly, appear to themselves to cut stones; which things have often been seen by me. From this I was assured what is the signification of wood and stone, namely that “wood” signifies good, and “stone” truth; and also from the experience that when a wooden house was seen, there was instantly presented an idea of good; but when a house of stone was seen, there was presented an idea of truth; concerning which I was instructed by angels. For this reason, when mention is made in the Word of the “house of God,” there is presented to the angels the idea of good, and good of such a quality as is treated of in that connection; and when mention is made of a “temple,” there is presented to them the idea of truth, and truth of such a quality as is treated of in that connection. From this again we can infer how deep and utterly hidden are the heavenly arcana in the Word.

 

[3] The reason why by the “house of God” is here signified the Lord’s kingdom in the ultimate of order is that Jacob is treated of, by whom is represented the Lord’s Divine natural, as frequently shown above. The natural is in the ultimate of order, for in this all the interior things are terminated and are together; and because they are together, and thus things innumerable are viewed together as a one, there is relative obscurity there. This relative obscurity has been spoken of several times before.

 

AC.4539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Arise, go up to Bethel, 35:1)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perception is concerning the Divine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rising” as being elevation (see n. 2401, 2785, 2912, 2927, 3171, 4103), here the elevation of the natural to the Divine;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go up” as being more toward the interiors (of which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the Divine in the natural, or in the ultimate of order (n. 4089). For in the original language “Bethel” means the “house of God” and as the house of God is where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are, by “Bethel” in the proximate sense are signified these knowledges (as shown above, n. 1453). But as the interiors are terminated and closed in the ultimates of order, and are together there, and as it were dwell together in one house; and as the natural in man is the ultimate with him in which his interiors are terminated, therefore by “Bethel” or the “house of God” is properly signified the natural (n. 3729, 4089), and indeed the good there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house” is good (n. 2233–2234, 3720, 3729); moreover knowledges are in the natural, or in the ultimate of order.

 

[2] That “to go up” denotes toward the interiors is because interior things are what are called higher things (n. 2148), and therefore when progress toward interior things is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the expression “to go up” is employed, as “to go up” from Egypt to the land of Canaan, and in the land of Canaan itself “to go up” to the interior parts, and from all parts of it to Jerusalem, and in Jerusalem itself to the house of God there. For example “to go up” from the land of Egypt to the land of Canaan, in Moses: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50:6-7, 9) Pharaoh said to Joseph, Go up and bury thy father; and Joseph went up, and all the servants of Pharaoh went up with him; and there went up with him both chariots and horsemen (Gen. 50:6–7, 9).

 

And in the book of Judges: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1) And the angel of Jehovah went up from Gilgal to Bochim, and he said, I made you go up out of Egypt (Judg. 2:1);

 

for by “Egypt” in the internal sense is signified that memory-knowledge which is to serve for apprehending the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nd by the “land of Canaan” is signified the Lord’s kingdom. And as memory-knowledges are lower, or what is the same, are exterior, and the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re higher, or what is the same, interior, therefore one is said “to go up from Egypt to the land of Canaan,” and on the other hand “to go down from the land of Canaan to Egypt” (Gen. 42:2, 3; 43:4, 5, 15; and elsewhere).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창42:2, 3)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15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43:4, 5, 15)

 

[3] In the land of Canaan itself “to go up” to its interior parts, in Joshua: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7:2-4) Joshua said, Go up and spy out the land; and the men went up and spied out Ai; and they returned unto Joshua and said unto him, Let not all the people go up; let about two thousand men or about three thousand men go up; so there went up thither of the people about three thousand men (Josh. 7:2–4);

 

as the “land of Canaan” signifies the Lord’s kingdom, the parts which were more remote from its ultimate boundaries signified things interior, and therefore the expression “to go up” is here used. In like manner from all the surrounding parts to Jerusalem; and in Jerusalem to the house of God (1 Kings 12:27, 28; 2 Kings 20:5, 8; Matt. 20:18; Mark 10:33; Luke 18:31; and in many other places).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왕상12:27, 28)

 

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왕하20:5, 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10:3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1)

 

For Jerusalem was the inmost of the land, because by it was signified the Lord’s spiritual kingdom; and the house of God was the inmost of Jerusalem, because by it was signified the Lord’s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men spoke of “going up” to them.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arise, go up to Bethel,” namely, progress toward the interiors, which is 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n. 4536).

 

AC.4556 (야곱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And Jacob came to Luz, which is in the land of Canaan, this is Bethel, 35:6)

 

signifies the natural in its former state, and “this is Bethel” signifies the Divine natural, a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uz” as being the natural in its former state, or that very natural which was human. That this was made Divine is signified by, “this is Bethel.” (That “Bethel” is the Divine natural may be seen above, n. 4089, 4539.) So also in other places in the Word where “Bethel” is named it is likewise said, “Luz, this is Bethel,” and “Bethel, beforetime Luz,” as in Joshua:

 

11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13또 그 경계가 거기서부터 루스로 나아가서 루스 남쪽에 이르나니 루스는 곧 벧엘이며 또 그 경계가 아다롯 앗달로 내려가서 아래 벧호론 남쪽 산 곁으로 지나고 (18:11, 13) The boundary of the lot of the sons of Benjamin between the sons of Judah and the sons of Joseph went forth to Luz, to the side of Luz southward, this is Bethel (Josh. 18:11, 13).

 

And in the book of Judges:

 

22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1:22-23) The house of Joseph went up to Bethel, and spied out Bethel; and the name of the city beforetime was Luz (Judg. 1:22–23).

 

AC.4560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unto him, 35:7)

 

That this signifies holy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ods” as being holy truths (see n. 4402). That these were adjoined to the good represented by Jacob is signified by the “gods there revealed to him.” That the place was called “El-Bethel,” and yet previously (in chap.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8:19)

 

and again later (verse 15 of this chapter) “Bethel,”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35:15)

 

and likewise that here when it is called “El-Bethel” it is said,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unto him,” in the plural, and afterwards (verse 15) “where God spake with him,” in the singular, is a mystery, and it is evident that this mystery can be known only from the internal sense. Moreover, many other mysteries are hidden herein, but these cannot be disclosed.

 

AC.4402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and he called it El Elohe Israel, 33:20)

 

That this signifies from the Divine spiritual (namely, interior worship)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El Elohe” (explained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Israel” as being the spiritual (see n. 4286, 4292). As regards what has been said from verse 17 of this chapter thus far,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7절)

 

the case is this: In this chapter in the supreme sen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Lord, how he made his natural Divine. But as the things which exist in the supreme sense concerning the Lord surpass the ideas of man’s thought (for they are Divine), I may illustrate them by such things as fall more nearly into the ideas, namely, by the manner in which the Lord regenerates man’s natural; for in the internal sense the regeneration of man as to his natural is also here treated of, because the regeneration of man is an image of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 (n. 3138, 3212, 3296, 3490). For the Lord glorified himself, that is, made himself Divine, according to Divine order; and according to such order he also regenerates man, that is, makes him celestial and spiritual. Here it is explained how he makes man spiritual, for “Israel” signifies the spiritual man.

 

[2] The spiritual man is not the interior rational man, but the interior natural. The interior rational man is what is called the celestial man. What the difference is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celestial man has already been frequently stated. A man is made spiritual by having the truths in him conjoined with good, that is, the things of faith conjoined with those of charity, and this in his natural. Exterior truths are there first conjoined with good, and afterwards interior truths. The conjunction of exterior truths in the natural was treated of in this chapter from verses 1 to 17; and the conjunction of interior truths with good, from verse 17 to the end. Interior truths are not conjoined with good in any other way than by enlightenment flowing in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man. From this enlightenment Divine truths are manifest only in a general manner, comparatively as innumerable objects are seen by the eye as one obscure thing without distinction. This enlightenment from which truths are manifest only in a general manner was signified by Esau’s words to Jacob, “Let me set I pray with thee of the people that are with me”; and by Jacob’s answer, “Wherefore is this? Let me find grace in thine eyes” (as explained above, n. 4385–4386).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33:15)

 

[3] That the spiritual man is relatively in obscurity see n. 2708, 2715, 2716,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246, 3833. It is this spiritual man who is represented by Israel (n. 4286). The spiritual man is so called from the fact that the light of heaven, in which is intelligence and wisdom, flows into those things in man which are of the light of the world, and causes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ight of heaven to be represented in those which are of the light of the world, and thereby to correspond. For regarded in itself the spiritual is the Divine light itself which is from the Lord, consequently it is the intelligence of truth and the wisdom thence derived. But with the spiritual man this light falls into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in him, and which he believes to be true; whereas with the celestial man it falls into the good of love. But although these things are clear to those who are in the light of heaven, they are nevertheless obscure to those who are in the light of the world, thus to most people at this day, and possibly so obscure as to be scarcely intelligible; and yet as they a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and are of such a nature, the opening of them is not to be dispensed with; the time is coming when there will be enlightenment.

 

[4] The reason why the altar was called El Elohe Israel, and by it was signified interior worship from the Divine spiritual, is that in the supreme sense “El Elohe” is the same as the Divine spiritual, and so also is “Israel.” (That “Israel” denotes the Lord as to the Divine spiritual, and in the representative sense the Lord’s spiritual church, or what is the same, the man who is spiritual, may be seen above, n. 4286, 4292.) In the original tongue “El Elohe” means “God God,” and strictly according to the words, “God of gods.” In the Word, Jehovah or the Lord is in many places called “El,” in the singular, also “Eloah”; and he is likewise called “Elohim,” in the plural; sometimes both in one verse, or in one series. He who is not acquainted with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annot know why this is so. That “El” involves one thing, and “Eloah” another, and “Elohim” another, everyone may judge from the fact that the Word is Divine, that is, derives its origin from the Divine, and that it is thereby inspired as to all the words, nay, as to the least point of all.

 

[5] What “El” involves when mentioned, and what “Elohim,” may be seen from what has been occasionally shown above, namely, that “El Elohim” or “God” is mentioned when truth is treated of (see n. 709, 2586, 2769, 2807, 2822, 3921e, 4287). Hence it is that by “El” and “Elohim” in the supreme sense is signified the Divine spiritual, for this is the same as the Divine truth, but with the difference that by “El” is signified truth in the will and act, which is the same as the good of truth (n. 4337, 4353, 4390). The expression “Elohim” is used in the plural, because by truth Divine are meant all truths which are from the Lord. Hence also angels are sometimes called in the Word “Elohim” or “gods” (n. 4295), as will also appear from the passages adduced from the Word below. Now as in the supreme sense “El” and “Elohim” signify the Lord as to truth, they also signify him as to power; for truth is that of which power is predicated, because good acts by truth when it exerts power (n. 3091, 4015). Therefore wherever power from truth is treated of in the Word, the Lord is called “El” and “Elohim,” that is, “God.” Hence also it is that in the original language “El” also signifies one who is powerful.

 

[6] That “El” and “Elohim,” or “God,” are mentioned in the Word where the Divine spiritual is treated of, or what is the same, the Divine truth, and hence the Divine power, may be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Moses: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2-3) God said unto Israel in the visions of the night, I am the God of gods [El Elohe] of thy father; fear not to go down into Egypt, for I will there make of thee a great nation (Gen. 46:2–3);

 

as these words were spoken to Israel, whom he would make a great nation, and thus the subject treated of is truth and its power, it is here said “El Elohe,” which in the proximate sense signifies “God of gods.” That in the proximate sense “Elohim” denotes “gods,” because predicated of truths and the derived power, is also evident in the same: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35:7) Jacob built there an altar, and called the place El-Beth-El, because there the Elohim were revealed unto him, when he fled before his brother (Gen. 35:7).

 

And also elsewhere: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0:17) Jehovah your God, he is God of gods and Lord of lords, the great God [El], powerful and formidable (Deut. 10:17);

 

where “God of gods” is expressed by “Elohe Elohim,” and afterwards “God” by “El,” to whom greatness and power are ascribed.

(2025/6/3)

 

[7] In David: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95:3-4) Jehovah is a great God [El], an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Elohim]. In his hand are the searchings out of the earth; and the strengths of the mountains are his (Ps. 95:3–4);

 

here “God” or “El” is used becau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Divine truth and the derivative power; and also “gods,” because the subject treated of is also the truths thence derived; for in the internal sense a “king” signifies truth (n. 1672, 2015, 2069, 3009, 3670). Hence it is evident what a “great king above all gods” involves. The “searchings out of the earth” also denote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are called the “strengths of the mountains” from the power from this good. In the same:

 

6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8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89:6-8) Who in heaven shall compare himself 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Elim] shall be likened to Jehovah? God mighty in the secret of the holy ones. O Jehovah God Zebaoth, who is as thou the strong Jah? (Ps.89:6–8).

 

Here the “sons of the gods” or “of Elim,” denote truths Divine, of which it is evident that power is predicated; for it is said a “God mighty, Jehovah God of Armies, who is strong as thou?

 

[8] So in another place in David: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9:1) Give unto Jehovah, O ye sons of the gods, give unto Jehovah glory and strength (Ps. 29:1);

 

In Moses: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6:22) They fell upon their faces, and said, God of gods [El Elohe] of the spirits of all flesh (Num. 16:22).

 

pdf 원본에는 Num. 14:22로 되어 있음

 

In David: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I said, ye are gods [Elohim] and ye are all sons of the most high (Ps. 82:6; John 10:34);

 

where they are called “gods” from truths, for “sons” are truths (see n. 489, 491, 533, 1147, 2628, 3373, 3704).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Elohe Elohim];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In Daniel: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을 반드시 이룰 것임이라 (단11:36) The king will act according to his own pleasure, and will puff himself up, and will exalt himself above every god [El], and above the God of gods [El Elohim] will speak wondrous things (Dan. 11:36);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in the proximate sense “El Elohe” is “God of gods,” and that in the internal sense “gods” are predicated of the truths which are from the Lord.

(2025/6/4)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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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1(D1)-주일예배(2600, 출16,30-36), '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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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 (16:25-29)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5-29) And Moses said, Eat ye this today, because today is a sabbath to Jehovah, today ye shall not find it in the field. Six days ye shall gather it, and on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it shall not be in it. And it was on the seventh day, there went out some of the people for to gather, and they found none. And Jehovah said unto Moses, How long do ye refuse to keep My commandments and My laws? See ye, because Jehovah hath given you the sabbath, therefore He giveth you on the sixth day the bread of two days; rest ye everyone in his place, let no one go forth from his place on the seventh day (Exdo. 16:25-29).

 

 

오늘은 안식일의 속뜻인 선과 진리의 결합(the sabbath,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16번 글 중,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진리들은 스스로는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과, 선이 진리들을 채택, 자기들 곁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치 내적 시야 아래 펼쳐진 밭처럼 있는데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이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과 일치하는 진리들 가운데서 골라 스스로를 그 진리들하고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는 진리들은 위에 있는 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데요, 이는 완전히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으로 흘러가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 man must know further that truths do not of themselves enter into good, but that good adopts truths and adjoins them to itself; for the truths of faith lie in the memory of a man as in a field extended beneath the interior sight. Good from the Lord flows in through this sight, and chooses from them, and conjoins with itself the truths which are in agreement with it. The truths which lie beneath cannot flow into the good which is above; for it is quite contrary to order, and even impossible, for the lower to flow into the higher. (AC.8516:2)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배우는 진리들은 늘 말씀드리지만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데, 진리들이 이 창고 안에 차곡차곡 어떤 질서에 따라 저장되는 모습은 내적 시야(the interior sight)로 볼 때는 마치 들판에 진리들이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내적 시야로 거기 있는 진리들을 마치 스캔하듯 훑고 나서 필요한 진리를 선택,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삶에 적용하려 할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바로 ‘만나’라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라는 선은 내적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오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진리들 가운데 자기와 맞는 것을 선택, 그것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만나, 즉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은 처음부터 진리와 결합한 상태가 아니고, 들어올 땐 선으로 들어와서는 나중에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결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진리를 준비하면 그때 주님이 선을 보내주시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진리를 보통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데, 사람이 신앙하고, 그러므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 참고로 주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좋게 여기도록 여러 즐겁고 기쁜 일들(things that are pleasant and delightful)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원하는 만큼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여러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즐겁고 기쁜’ 일들을 허락하셔서 이 진리들이, 그리고 그 지식들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을 붙들고 살았더니 내 삶이 형통하네!’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배우기는 선은 의지(will)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는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들어온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가지 그릇인 이해와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해는 진리를, 의지는 선을 받는 그릇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만나라고 하는 선은 의지가 아닌, 이해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 영어 understanding에 대한 ‘이해’(理解)라는 번역이 좀 이상하시면 ‘이성’(理性)으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understanding을 ‘이해력’, ‘사고력’, 혹은 ‘이해하는 능력’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곧이곧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하고는 반대인데요,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아직 진리와 결합한 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지 안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을 먼저 이해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이해 가운데 있는 진리와 결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모종 옮기듯 의지 안으로 옮겨심어 주시지요.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의 본성상 이해와 진리는 어울리지만, 이해와 선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만나는 선 상태로 처음부터 이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해 가운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단 진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에게 진리의 옷을 입혀주시는데, 겉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만나를 ‘작고 둥글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4)

 

작다는 건 진리의 특성을, 둥글다는 건 선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만나는 겉으로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선인, 그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얻어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가 밤새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아침에 그냥 받아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만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만나를 먹는 과정이 곧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 하나 되는 과정입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안식일 이전에 만나를 얻는 상황과 안식일 이후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기 전.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과, 거듭난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05번 글 일부 인용입니다.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에 대한 주석입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은 진리로 행하여 선을 얻습니다(is acquired). 진리는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선으로 행하여 진리를 얻습니다(are procured). 거듭나기 전 사람은 복종으로(from obedience) 행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애정(from affection)으로 행합니다. 이 둘의 상태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전자는 진리가 다스리지만, 후자는 선이 다스립니다. 그러니까 전자에서는 사람은 내려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만, 후자에서는 올려다보거나 앞을 봅니다. 사람이 후자의 상태, 곧 애정으로 행할 때,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는 것도, 진리로 선을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가지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뒤돌아보거나 진리로 선을 행하려 하면, 그는 자신으로 말미암아(from his own)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지만, 선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truth, but through it good is acquired; for truth becomes good with him when it becomes of his will, and thus of his life; but after regeneration he acts from good, and through it truths are procured.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obedience; but after regeneration from affection. These two states are inverse to each other; for in the former state truth rules, but in the latter good rules; or, in the former state man looks downward or backward, but in the latter upward or forward. When a man is in the latter state, that is, when he acts from affection, he is no longer allowed to look back, and to do good from truth, for at that time the Lord flows into the good with him, and leads him by means of the good. If at that time he were to look back, or were to do good from truth, he would act from his own; for he who acts from truth leads himself, whereas he who acts from good is led by the Lord. (AC.8505)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에 대한 복종심, 또는 의무감으로 선을 행하지만, 거듭난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거듭난 다음에는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에 따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선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을 얻지만, 거듭난 후에는 선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선과 진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는 점점 지혜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안식일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은 우리의 일상 중에서 거듭남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진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 좋지 않은 습관이란 반복되는 말투와 표정, 태도와 행동 같은 것이며, 또 그런 습관의 바탕에는 개인의 취향과 애정, 신념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습관이 바뀌려면 그 습관을 형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모두 진리와 선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습관의 바탕에 있는 신념들은 진리로 교체되어야 하고, 애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애정이나 신념들이 주님에 의해 하나씩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엿새 동안 만나를 먹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레째 되는 날 하나의 습관이 완전히 교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마치 진리와 선으로 만들어진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장기 중 하나라도 병들어 있으며 나머지 모든 장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생깁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것도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말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망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주님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이 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나의 존재가 희미해졌구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 안에 주님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려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아집, 고집을 꺾어야 하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개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럽고, 그리고 나 외에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고, 그때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라든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또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같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에는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때, 혼란이 오고 불화가 생기며,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고, 주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고,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 규례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2, 3)

 

주님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죽이라’는 말씀은 정말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피우는 불이나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자아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집착이며,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불도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까요? 첫 번 말씀은 자기의 의도를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교우님들 가운데는 이 말씀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는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적 싸움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안식일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거듭남이 쌓여서 완전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마다 이미 조금씩은 거듭나 있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식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이제 이전처럼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도 내가 원하는 걸 구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말씀 하나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기억 속에 있는 진리로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들어와 기억 속에 있는 진리들과 하나로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한 것 같이 여겨졌던 이 안식일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과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만 준비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식일의 떡을 구워주시고, 안식일의 고기를 삶아 주십니다. 모든 분께 이런 안식일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5, 17-18)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16-05-2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25(D1)-주일예배(2599, 출16,25-29),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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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의 속뜻 (2025/5/22)

 

2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2-7)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those who keep the sabbath holy)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those who are in conjunction with the Lord)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a place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being given them in the house of Jehovah, an eternal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their being brought in upon the mountain of holiness)는 그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not doing any work on the sabbath day)는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they should not do anything from their own, but from the Lord; for the angelic state in heaven is that they will and do nothing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and do not even think and speak therefrom: their conjunction with the Lord consists in this)라는 뜻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창세기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2:2)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렘17:24-25)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work on the sabbath)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는 모든 걸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there entering through the gates of the city kings and princes 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 riding in chariot and on horses)는 자기 자신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는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왕들’(kings)은 신앙의 진리들을, ‘고관들’(princes)은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은 이들 진리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병거와 말’(the chariot and horses)은 신앙의 교리들과 지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AC.8495, 출16:23, 내일은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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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  (16:21-24)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16:21-24) And they gathered it morning by morning,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d the sun grew hot and it melted. And it was that on the sixth day they gathered bread double, two omers for each one; and all the princes of the assemblage came and told Moses. And he said unto them, This is what Jehovah spake, A rest, a sabbath holy to Jehovah, is the morrow; what ye will bake, bake ye; and what ye will boil, boil ye; and all that is left over, this lay ye by for you to keep until the morning. And they laid it by till the morning, as Moses commanded, and it did not stink, and the worm was not in it. (Exod. 16:21-24)

 

※ 지난주부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1장이 아닌 16장부터 갑자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 앞부분 원본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훗날 제 역량이 준비가 되고, 주님의 허락 있으시면 그때 마저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을 1절부터 지난주 본문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20)

 

※ 이스라엘의 어느 한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시는 성지순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광야 체험 코스를 반드시 권하신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가이드를 부탁하시는 분들에겐 절대 사양하신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광야의 백성이기 때문에 광야를 자동차 타고 대충 둘러보는 걸로는 참된 순례의 정신을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두 발로 하루를 걸어보아야, 예를 들면, 오늘 이 출애굽기 16장 같은 본문, 그러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하는 그 정황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선교사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다음 말씀들을 보면 실제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한낮 광야 그 타는 열기에서는 구름 기둥으로, 한밤 광야 그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서는 불 기둥으로 돌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1-22)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민14:14)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9:19)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처럼 자기 자녀를 훈련을 빙자, 혹독하게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인생들이 겪는 혹독함은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본인들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 불의의 사고라는 것조차도 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우주에서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 주님을 의뢰하는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돌봄과 보살핌의 약속을 하시는 분입니다. //

 

만나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고 새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 ‘선한 진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통해서나 또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배운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 알았던 진리가 단순히 지식에 그쳤다면 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선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선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선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삶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주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긴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만나라고 하는 진리의 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전에는 잘 변하지가 않아요. 진리 속에 들어있는 선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를 받아먹으면 이전에 즐기던 악한 것, 거짓된 습관들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주님보다 나를 더 믿었다면 이제는 나보다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기서 ‘아침마다’의 속뜻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일단 진리의 선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선을 받는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각 사람의 역량, 곧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 즉시 생활로 옮기는 사람의 역량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선을 많이 주세요. 흘러들어오는 선을 방해할 무슨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선을 받아서 그것을 생활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안 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못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자꾸 더럽히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본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분량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삶으로 살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에 따라 만나를 받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의 속뜻입니다. 말씀에서 햇볕은 보통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반대니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concupiscence)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은 우리 마음에 세상적 욕망이 뜨겁게 일어날 때, 즉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울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 일단 선의 물꼬가 터지면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선의 유입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많이, 어떨 때는 잠시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에는 선이 많이 흘러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많을 때에는 선의 흐름이 중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할 때, 즉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을 내게 주신 주님의 목적 자체에만 충실할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활발하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그 일의 결과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할 때는 선이 흘러들어오다가 딱 멈춥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선의 흐름을 그때그때 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우리의 인생은 천국을 향한 준비 과정이며, 그래서 현재 거듭남의 풀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만나를 소홀히 여기는데요,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11:4-6, 10)

 

그들은 만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며, 그리고 만나 속에는 온갖 순진함과 평화, 안전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갓난아이와 어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며 돌보듯 주님에게 만나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우리도 주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는 세상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걸 몰랐습니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하찮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이나 진리는 청정한 공기와 물,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햇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잠시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바라볼 때, 아니면 가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생명같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자의 내면 상태를 보시고, 그것에 따라 선의 흐름을 조절하십니다.

 

22절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여섯째 날’은 영적인 어떤 상태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그다음 날이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날, 즉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동안 수많은 영적 상태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태 안에서도 여러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일주일에 일곱 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째 날이 지나면 둘째 날이, 둘째 날이 지나면 셋째 날이, 그렇게 해서 여섯째 날이 지나야 하나의 상태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진리와 선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큰 목걸이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째 날인 마지막 단계에 주님은 평소보다 만나를 두 배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뜻으로는 다음 날은 쉬는 날이니까 두 배로 거두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다릅니다. 둘이라는 숫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이란 숫자의 속뜻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두 배를 거두라는 말씀은 그동안 주님이 주셨던 선과 진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반대되는 악이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매일 먹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구요, 또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전, 그러니까 만나를 받기 전에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깁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확실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싸움에서 이긴다고는 하는데, 때로는 완전히 이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때, 그때에는 완전히 이기는 게 아닙니다. 또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대로 선을 행할 때인데요,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백성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직 선과 진리가 결합되었다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까지의 내적 싸움과 수고를 묶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둔지라’의 속뜻, 곧 선과 진리의 결합을 준비하라, 안식일을 준비하라시는 뜻입니다.

 

각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인데요, 여기서 ‘오멜’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능력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두 오멜씩 거두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내가 너희에게 줄 터이니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도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죠.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지금까지 잘했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자’, 그리고 ‘내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 유종의 미를 거두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앞에 두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안식일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 안에 신적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은 원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에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도, 거듭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모든 능력이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지옥과의 싸움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인성 안에 여전히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즉 유전악에 속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과연 완전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옥과 싸워 온전히 이기심으로 불완전한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거룩한 인간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의미는 주님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 되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걸 위해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구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씨앗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씨앗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곧 영적 싸움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 ‘휴일’이라 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를 말하구요, 우리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가 거룩한 것입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울 것을 굽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은 진리이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선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으로는, 즉 ‘오직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바탕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선 없는 진리는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와 선을 하나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의 속뜻입니다. ‘나머지’라는 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선과 진리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선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부터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다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하는 거야. 주님의 명령이니까...’ 하면서 한다면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아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늘 나쁘게 말하지만,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아가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아의 기쁨을 존중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여기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아, 잘난체하고 나만 잘되려는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구요, 거듭남에 따라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천국적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자아를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거듭남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떠날 때까지 타고난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살겠지요.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싸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듭남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습니다. 그 천국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하는 것 같은 기분과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다. 왜 거역했을까요?

 

※ 아마도 ‘내일 염려’(care for the morrow)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일 또 주신다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덜 먹고 아침까지 남깁니다. 오늘 다 먹었다가 혹시 내일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 말입니다. 다음은 천국 천사들의, 이 ‘내일 염려’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HH.278:2)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 18절에,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랬더니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구요, 악취가 풍겼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만나를 남겨두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선이 아닙니다. 그러니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겠죠. ‘악취’라는 것은 그 행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악한 의도입니다. 여기서 악한 의도란 자기만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치 선을 행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 즉 자기를 높이려 한다거나 자기를 선하게 포장하려 하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악취입니다. 그런데 악취가 나는 곳에는 보통은 또 벌레도 생기는데요, 그래서 ‘벌레’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주님은 5절에,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위해 갑절의 만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선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벌레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적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나는 진리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넘어서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을 만나를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밋밋하게 느끼고요, 여전히 세상에서 오는 자극적인 즐거움들을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래서 자아로부터 수시로 욕망이 올라온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 가운데는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욕망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이 사실은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흐름이 중단될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욕망을 따라 사니까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기가 부족하거나 물이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하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이 있구요, 그리고 실질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일같이 영적으로 끌어올리며,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 아침을 열어주시고, 만나를 우리 마음의 지면 위로 하얗게 내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만나가 주는 평화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무언가 모르는 안정감과 은근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선과 진리를 우리 속에서 하나로 만들라는 뜻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선과 진리가 우리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진리에 입각해서, 즉 주님 주신 진리에 기초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선과 연관된 진리가 결합하는 일이 거듭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 되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23절에,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구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가 즐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6-7)

 

아멘

 

 

※ 설교가 길다고 다들 시험 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점일획도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꼭 원고를 함께 제공하는데요, 그 이유는 첫째, 설교 중 제가 무슨 사사로운 말을 할까 봐서이고, 둘째, 설교 중 다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 곧 설교자를 주목할까 봐서입니다. 

 

 

 

원본

2016-05-1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8(D1)-주일예배(2598, 출16,21-24),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pdf
0.55MB

 

 


※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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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 (16:15-20)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5-20) And the sons of Israel saw, and they said a man to his brother, What is this [Man hoc]? for they knew not what it was. And Moses said unto them, This is the bread which Jehovah hath given you to eat. This is the word that Jehovah hath commanded, Gather ye of it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 omer a head, according to the number of your souls, take ye everyone for him who is in his tent. And the sons of Israel did so, and they gathered, collecting for the numerous and the few. And they measured it with the omer, and it made nothing over for the numerous; and for the few there was no lack; they gathered everyone according to his eating. And Moses said unto them, Let no one make a residue of it till the morning. And they heard not unto Moses; and men made a residue of it until the morning, and it bred worms and stank, and Moses was angry with them (Exod. 16:15-20).

 

 

오늘 본문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출16 1절로 14절까지를 먼저 좀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14)

 

만나’(히브리어: מָן, 그리스어: μάννα)는 15절의 ‘이것이 무엇이냐’를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아침에 처음 보는 그걸 보고 이게 뭐지? 서로 묻던 그 의문문이 그대로 ‘만나’라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만나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을 뜻합니다. 그것을 진리의 선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진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라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영적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영적 교회에는 처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 이 교회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4장 아벨과 가인에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가인은 신앙(faith)을 말합니다. 원래 주님은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기를 원하셨지만, 가인이라는 사람들, 즉 신앙, 신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했는데, 이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절)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이런 가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인류 역사가 결국 가인 쪽으로 흐를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십니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4, 15절)

 

그러니까 주님은 이런 가인들일지라도 그 쥐고 있는 신앙, 즉 진리를 통해 결국은 다시 체어리티를 회복, 체어리티와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시려는 장구한 계획,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 그런 계획을 섭리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먼저 진리를 주시고, 그다음 그 진리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실까요? 진리를 모르면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그때 주님은 선이나 선한 애정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만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선입니다. 진리면 진리고 선이면 선이지, 왜 진리의 선이라고 하냐면 이 선은 진리를 통해 얻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겉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그 속을 보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선이 담긴 진리인 것이지요.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고도 해도 됩니다. 선은 능력입니다. 선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이 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진리, 앉은뱅이 신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거듭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진리의 선을 받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일어나는 삶의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악과 거짓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대부분 나는 항상 경우가 밝다,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참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이제 진리의 선, 선한 진리라는 빛이 비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어두워서 안 보이던 것들, 내 안의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깜깜한 데서 밤을 보내며, 아, 참 좋다, 여기는 무슨 호텔 같아 했는데 정작 아침 동이 틀 때 보니 자기가 쓰레기 더미들 가운데 있었던 걸 알게 되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걸 끊는 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걸 끊어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선은 설교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선, 선한 진리 안에는 주님이 계세요.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집니다. 세 번째 일어나는 변화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는 어땠습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하든 반드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뭘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아무 대가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입니다.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이러한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라는, 즉 진리의 선, 선한 진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그것에 수반되는 은근한, 은은한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익숙해 있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빠르고 자극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시골의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삶의 기쁨, 소확행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두 가지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 거두라’입니다.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말씀은 각자의 분량에 맞게 선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오멜(omer) 씩 거두라는 말씀은, 오멜은 곡식 같은 걸 측정하는 단위인데, 성경에는 오멜이란 것도 있고, 에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오멜은 속뜻으로는 충분한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 ‘’(10)이란 수는 충분하다는 속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배수나 분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에바의 십 분의 일인 한 오멜 역시 충분하다(enough for)라는 속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선을 주시되 충분한 양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 그러니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량은 어떤 식으로 정해질까요?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선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선을 행하더라도 얼마만큼 진리를 따라 행하는가에 따라서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또 선과 결합한 진리가 얼마나 내적인 진리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리에도 외적인 진리가 있고, 내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내적인 진리는 주님과 보다 가까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가운데 있는 진리가 보다 내적인 진리일수록 선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을 선의 분량을 정해주십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천국의 어떤 사실들입니다.

 

한 천국 안의 천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지 않고,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선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공동체로 나뉘어 있다. 같은 선을 지닌 천사들이 한 공동체를 이룬다. 천국의 선은 무한히 다양하며, 각 천사마다 선이 다르다.주44 (HH.41)

 

주44.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며, 그 어떤 것도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다 (AC. 7236, 9002). 천국에는 그래서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AC. 684, 690, 3744, 5598, 7236). 천국의 무한한 다양성은 선의 다양성이다 (AC. 3744, 4005, 7236, 7833, 7836, 9002). 이들 다양성은 다양한 진리를 통해 존재하며, 각 천사의 선은 이들로부터 나온다 (AC. 3470, 3804, 4149, 6917, 7236). 천국의 모든 공동체와 어느 한 공동체 내 모든 천사가 서로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AC. 690, 3241, 3519, 3804, 3986, 4067, 4149, 4263, 7236, 7833, 7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다 (AC. 457, 3986).

 

천국의 천사 공동체들은 그 선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만큼 서로 떨어져 있다. 영계에서 거리는 오직 사람의 내면 상태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사랑의 상태가 다르면 거리가 생긴다. 많이 다른 사람들은 멀리, 약간 다르면 조금 떨어져 있다. 유사성이 그들을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주45 (HH.42)

 

주45. 천국 모든 공동체는 그들 생명의 상태 차이,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차이에 따라 어떤 일정한 위치가 정해진다 (AC. 1274, 3638, 3639). 저세상, 곧 영들의 세계에 있는, 거리, 상황, 장소 및 시공간에 관한 놀라운 것들 (AC. 1273–1277)

 

한 공동체 내 천사들은 모두 서로 간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는데, 보다 완전한 천사들, 즉 선에 있어 뛰어난, 그래서 사랑, 지혜, 지성에 있어 뛰어난 천사들은 가운데 중앙으로, 덜한 천사들은 그 완전함이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으로 빙 둘러 퍼지게 된다. 이 배열은 마치 중앙의 빛이 주변으로 퍼져 감소하는 것과 같으며, 중앙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주변으로 퍼져 있는 천사들은 점점 더 희미한 빛에 있는 것과 같다. (HH.43) //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두 번째 명령은,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입니다. 여기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는 자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 공동체(society)를 뜻합니다. ‘선의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선의 공동체는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사회가 선의 공동체이구요, 지상에서는 교회가 선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연대가 바로 선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만나를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쓰라는 말씀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모든 사람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이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고, 또 모든 사람의 선이 끊임없이 내게로 흘러오는 그런 관계 속에서 주님의 교회는 점점 천국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걸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입니다.

 

앞의 두 가름에서,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각 공동체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각 천사도 이와 똑같다는 것은 거기 설명한 원리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천국이 가장 큰 형태의 사람이고,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사람이듯이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람인 것이다. 천국 형태처럼 지극히 완벽한 형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천국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이라는 데 있다. 천국의 모든 것은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며, 각 구성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 나누어짐에 의해 받기 때문이다. 앞의 해당 가름에서 말했듯이, 천사는 그처럼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가장 작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가 천국을 받아들이는 한, 그릇이며 천국이고 천사이다. (HH.73) //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각자의 분량대로, 각자의 그릇대로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계시는 분들은 선을 많이 받을 것이고, 반면에 변두리에 계신 분들은 선을 조금밖에 받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분들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과 연결된 분들이시라면, 아래 천사들처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HH.278)

 

여기 ‘필요한 만큼’이란 주님이 맡기신 어떤 쓰임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달라도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시기 때문에, 저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데가 천국입니다. //

 

그러면 누가 교회 중심에 계시고, 누가 변두리에 계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만큼 우리는 교회의 중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세고 영향력이 있다고 해서 꼭 교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구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선을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 매일 매일을 만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아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HH.278) //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이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이 뜻대로 되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반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절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도 오만하지 않구요, 비천한 자리에 내려와 앉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매일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말씀하신 데에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더러는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내일 먹을 게 걱정되어 다 안 먹고 남겨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것이구요, 주님의 것을 자기 창고에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진리를 실천하고 선을 행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선 안에, 즉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났다고 말합니다. 벌레는 주님의 선이 아닌 인간의 선 안에 들어있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악취가 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행하는 선은 결국 불결한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천국 선이 아니라 지옥 선으로 바뀐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악취가 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분명히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아침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잘못하더라도 성을 내시거나 보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며,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진리에 등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진리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로 표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주님이 선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에게 만나를 줄 터이니 이 두 가지는 꼭 지키라 하십니다. 그 하나는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으로 거두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악하고 거짓된 것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옷을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노력과 지혜가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엇을 섞지 말고 주님 주시는 선 그대로를 가지고 행하라 하시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다른 하나는,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라고 하시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 두지 말고 이웃과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곳간에 쌓아 두는 일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 땅을, 이 교회를 주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분량에 맞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마태복음 6장 28절로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28-34)

 

아멘

 

원본

2016-04-1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1(D1)-주일예배(2597, 출16,15-20), ‘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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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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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천국 공부에 힘써야 하는 세 가지 이유 (2025/5/8)

 

첫째,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면 대략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듯 천국 또한 그렇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주님을 알기 위한 건데요, 천국 또한 알면 알수록 천국을 포함, 영계 전체를 그렇게 설계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 하늘의 해를 공부하겠다고 맨눈으로 해를 볼 수는 없듯 주님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이렉트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불덩어리 그 자체인 해에서 나오는 열과 빛으로 우리가 사는 것처럼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열과 빛, 곧 선과 진리로 만물이 존재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불덩어리에서 나오는, 주님의 이 신적 진리(Divine Truth)는 여섯 단계, 등급(degree)이 있는데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처음 두 단계의 진리는 심지어 삼층천 천사들조차 이해 불가한 진리입니다. 세 번째 단계부터 차례로 삼층천, 이층천, 그리고 일층천 천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각 단계마다 수천수만 배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에 사는 우리는 마지막 여섯 번째에 해당,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The Word)입니다. 그러니까 각 천국, 각 대상마다 자기 역량에 따라 맞추고 조절된, 허용된 진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일생은 그 목적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이를 위한 일종의 가이드로 주신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일생은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일생인데요, 어디서 태어나 무슨 삶을 살든 말입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지만 세상 편하기만 한 꿀 보직 같은 건 없습니다. 겉보기엔 그래도 결국은 어디나 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쓴맛 단맛이 있습니다. 군 뿐이겠습니까? 세상일이 다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로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커 보이는 남의 떡 때문에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 낭비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 시간에 천국 공부에 집중, 지름길 인생을 사시길 권합니다. 결국 우리가 갈 곳을 미리 공부, 거기에 맞춘 맞춤식 인생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험문제도 그 출제자의 의도를 얼른 읽는 게 중요하듯 우리네 인생 역시 창조주의 의도를 얼른 파악, 거기에 맞춘 삶을 사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아무렴 창조주께서 우리를 세상에 내신 이유가 우리 맘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우리 거실 요만한 소품 하나도 무슨 이유가 있는 건데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으로 세월 낭비하라고, 그리고 최종 목적지도 아닌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지음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랬다간 결국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아궁이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이 그런 곳이며, 그래서 그것이 천국 입국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면 삶이 또렷해집니다.

 

셋째, 천국을 알아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결국은 저마다 자기 사는 동안은 좀 평안한 삶, 형통한 삶 살기를 원하는데요, 이는 주님도 원하시는 바이며, 이 역시도 그러려면 천국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우리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싶으면 그 사람의 상태, 그러니까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이 자기 안에 흘러들어오며, 그것은 곧 천국의 모든 것, 즉 모든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능력과 부요가 자기 삶 가운데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 역량만큼만이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복의 정체입니다. 누가 내게 안수하여 복을 빌어도 정작 내 속 사람의 역량이 그 복을 수용할 수 없으면, 내 속 사람이 하늘의 어떤 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10:5, 6)

 

그러니까 기도응답의 정체, 비밀도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속 사람의 역량이 넉넉하다면? 그렇다면, 천국의 지혜와 평안, 능력과 부요가 내 삶 가운데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속 사람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요? 즉 어떻게 해야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네, 그래서 천국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매인 바 된 우리의 이 시야, 이 가치관에서 철저히 물러나 천국에 오리엔티드된,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철저히 사로잡힌 그런 새로운 시야, 새로운 가치관을 옷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끝으로, 천국을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특별히 주님의 은혜로 어느 날 기도 중에 불쑥 들림받아 천국을 다녀오지 않는 한, 천국을 다녀온, 그리고 주님의 허락을 받아 그 사실을 잘 기록한 어떤 사람의 기록을 접하는 것이 무난하지 싶습니다. 물론 유튜브도 있지만, 그게 좀... 워낙 중구난방 다양해서 말이지요. 뭐, 어쨌든 자기에게 끌리는 것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시다 보면, 아, 이건 좀... 싶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아지니까요. 저 역시 지금 이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걸 두루 경험해야 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현재 8년째 늘 곁에 두고 읽는 책입니다. 제가 무슨 책 광고? 뭐 그런 거 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저는 이 책으로 천국 공부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걸로 하셔도 됩니다. 참고로, 아래 첫 번째는 릴리즈된 영문이고요, 그 아래 두 번째는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여러 번역 중 저한테는 이게 제일 낫더군요. 저는 이 출판사나 번역자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아래 링크들은 혹시 도움 되실까 달았습니다. 그럼...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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