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41-47)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주의 모든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 안에 질서를 만드셨다. 주님은 질서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에 내려오셔서 실제로 사람이 되려고 하셨을 때 수태하고 출생하며 교육을 받고 점진적으로 지식을 획득하며 그렇게 해서 지성과 지혜 가운데로 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주님은 당신의 인성에 있어 사람이셨기 때문에 여느 아기들과 같은 아기이셨고, 여느 소년들과 같은 소년이셨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주님에게는 이러한 성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속하고 충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의 성장이 질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TCR.89, 이순철 역) ...at the time of their creation, and therefore his omnipotence in the universe and in each and all things of it, proceeds and operates in accordance with the laws of his order. (This has already been treated of consecutively, n. 49–74. ) Since, then, it was God who descended, and since (as is there shown) he is order itself, it was necessary, if he was to become man actually, that he should be conceived, carried in the womb, born, educated, acquire knowledges gradually, and thereby be introduced into intelligence and wisdom. In respect to his human he was, for this reason, an infant like other infants, a boy like other boys, and so on; with the sole difference that this development was accomplished in him more quickly, more fully, and more perfectly than in others. That this development was in accordance with order is evident from these words in Luke: And the child Jesus grew and waxed strong in spirit. And Jesus advanced in wisdom, and in the stages of life, and in favor with God and man (Luke 2:40, 52). (TCR.89, Ager)

 

 

오늘 말씀은 예수님 열두 살 되던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가 일어난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로는 주님이 오시는 것과 구원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류는 죄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지옥에 억눌려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사적, 그러니까 예수님 성육신 이후로 볼 때, 첫 번째 유월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이고, 신앙인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를 처음 받아들여 거듭남의 길로 들어섰을 때가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장 24절에 보면 애굽을 막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출12:24)

 

주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정하신 이유는, 모세 때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은 인류가 지옥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뿐 그것으로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수없이 많은 유월절을 거쳐야만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 41절과 4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말 그대로,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으로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구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영적으로 성장하신 모습이고, 또 하나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가 각자의 내면에서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입장에서 열두(12) 살이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십사만 사천과 같이 열둘과 관련된 수가 많습니다. 열둘이라는 수가 그렇게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 의미로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시기에 이미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셨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기독교’ 89번 글은,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장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시다는 것 등을 전혀 모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느 인간과 똑같이 부모님을 통해, 또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배움의 과정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과정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당신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열두 살이 되었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 시기에 이미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또한 능력을 이미 갖추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고 적어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한 모든 준비가 열두 살 때에 이미 거의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신 것은 언제일까요?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자 거룩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인성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인성입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의 인성에 대해, 창조되지 않은(uncreate) 인성이요, 주님 안에 영원 전부터 잠재해 있었던 인성이라고 말합니다. (DLW.233).

 

※ 이 DLW(Divine Love and Wisdom,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2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윗글은 아래 내용 중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in the Lord from eternity, who is Jehovah, before his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the two prior degrees existed actually, and the third degree potentially, as they do also with angels; but that after the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he put on over these the third degree, called the natural, thereby becoming man, like a man in the world; but with the difference, that in the Lord this degree, like the prior degrees, is infinite and uncreate, while in angel and in man they are all finite and created...

 

그 잠재해 있던 인성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면, 지옥으로부터 오는 극심한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한한 인성을 벗으시고,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무한하고, 창조되지 않은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간성을 완전히 벗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살이 되셨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구원의 능력을 가지셨다는 의미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주님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주님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과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의 진리의 성품과 선의 성품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시기에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선을 동반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가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를 나타낸다고 할 때,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경우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계속 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단계까지 진리가 성장했느냐 하면, 개인을 구원하는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진리, 즉 구원의 모든 능력을 가진 진리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교리의 지식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렇게 배웁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진리가 될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리의 지식을 행동으로 하나씩 옮길 때 진리가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교리의 지식 안으로 선을 넣어 주시구요, 그렇게 해서 지식은 진리가 됩니다. 진리 안에는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에서 올라오는 유혹을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또한 좋지 않은 습관들을 거절할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모두 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문서에서는 선이 없는 진리를 겨울의 햇빛과 같다고 말합니다. 겨울의 빛은 열기가 없고 냉냉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연계의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진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열두 살이 됐다는 의미는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지식의 차원을 넘어 선이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 부부가 열두 살 된 예수와 동행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의식(意識)을 나타낸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두 가지 의식이란,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love to the neighbor; charity)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속 사람 안에 있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는 다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실체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처음에는 속 사람 안에 생기지만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겉 사람은 보통 주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명예,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쾌락,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겉 사람입니다. 교회가 속 사람 안에만 있고, 겉 사람 안에는 없다는 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요셉, 마리아 부부는 어떤 교회를 나타낼까요? 겉 사람 안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셉, 마리아 부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의식이 속 사람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 신앙인들의 의식은 겉 사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 빠져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욕과 소망, 실질적인 행위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것은 겉 사람의 의식을 떠나 속 사람의 의식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인 것을 떠나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沈潛), 잠기는 상태, 그런 상태가 지금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속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주님에 의해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지옥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유월절입니다. 주님께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라 하신 것은 그런 뜻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계속 유월절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 마리아 부부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다 끝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들의 집이 나사렛이니까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는 말이겠지요. 여기서 돌아갔다는 말은 속 사람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자기의 내면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의 상태에 있다가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 머무는 것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상태라면,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속 사람의 상태에서 깨우친 것들을 활용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예수님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신앙인들은 겉 사람 속에 머물 때라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모든 행위 가운데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예루살렘에 두고 왔습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선을 동반한 진리는 없고 그냥 지식만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셉, 마리아 부부는 진리를 잃어버린 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직 진리인 줄 압니다. 그것을 본문 44절에서는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진리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까요? 오늘 말씀에서는 ‘하룻길을 간 후’라고 합니다. 사람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주 삐걱거립니다. 그때 ‘나는 옳게 한다고 하는데 왜 자꾸 실패를 하는 거지?’라고 자문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진실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이웃과 교회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구나 깨닫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교만이고 자기 사랑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의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는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합니다. 45절에서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가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룻길을 걸어오는 것이 나름에는 진리를 따라 산다 생각하면서 살았던 기간이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다시 갖는 것이지요. 46절에는 그렇게 해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여기서 사흘은 내 속에 진리가 없음을 느끼면서 진리를 찾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는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자책과 애통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노력하는 것이 사흘입니다. 왜냐하면 숫자 3은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 그때 진리이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씀에는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생이 무슨 뜻일까요? 선생은 유대 사회의 랍비들을 말하지만, 내적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교리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 중에 앉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여기서 지혜란 교리의 가르침을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또한 주님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실하고 순수한 것들입니다. 이전에는 분노와 질투와 증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연민과 화해 같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그것이 주님이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여기서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똑같은 상태에서는 아무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태로 올라갈 때, 그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에 놀라고, 또 이전의 상태에 비해 새로운 상태가 얼마나 다른지 놀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원래는 52절까지 있는 내용인데 내용이 길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모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해마다 왕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거주하시는 곳은 나사렛이지만,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찾아오면 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은 속뜻으로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면 나사렛은 무슨 뜻일까요? 성 문서에는 나사렛의 속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나사렛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땅에 있다는 것과 그곳에서 주님이 배척당하셨다는 것 등을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돌아간 곳, 즉 나사렛은 겉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겉 사람은 주님을 가장 배척하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그곳에 세워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부부가 주님과 함께 나사렛과 예루살렘을 오고 가는 것은 우리들의 영적 의식이 수시로 겉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고, 속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겉 사람 속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고, 그때는 보통 주님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때가 있지요. 마음속에 온기 대신 냉기가 흐르거나 진실성이 없다 느껴질 때입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부부처럼 진리를 되찾기 위해 속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해서 진실로 나를 살리는 것, 나를 영원히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때 교리 가운데서 빛나는 주님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7:31)

 

아멘

 

 

원본

2017-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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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34-40)

 

 

시므온은 순종을 뜻하고 또한 신앙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이 계명에 순종하고 신앙에 따라 행할 때 그의 안에서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들은 말씀과 교회의 교리와 설교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그러한 지식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기억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의지에 속한 것은 없고, 그러므로 사람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앙을 행동으로 옮길 때, 즉 순종할 때 신앙은 의지 속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사람 안에서 신앙이 된다. (계시록 해설 443:3, 이순철 역)

 

※ 위 계시록해설 44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으며, 이는 계시록 7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Simeon” signifies obedience he also signifies faith, for faith becomes faith in man when he obeys and does the commandments; before this is done the knowledge of such things as man has drawn from the Wor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from preaching, appears as faith, but this is not faith until man does these things; until then it is merely a matter of thought from the memory, in which there is nothing of the will, consequently nothing of the man, for the will is the man himself; it is therefore when a man does this, that is, obeys, that it enters the will, thus the man himself and becomes faith. (AE.443:3)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7:7)

 

 

※ 본 설교부터는 서울 새 교회로 부임(2016년 12월) 후 하신 설교입니다.

 

그동안 출애굽기와 누가복음에 대한 말씀을 한주씩 걸러 전해드렸는데요,

 

※ 이상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입니다.

 

며칠 성탄절과 새해 예배가 있어서 시기에 맞는 말씀을 전하다 보니 누가복음 설교를 잠시 쉬었습니다. 오늘은 다시 누가복음 2장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유대교회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타락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를 그렇게 이해하는 까닭은 말씀에서 그들을 갈릴리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한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속뜻으로 이방인을 나타냅니다. 이방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또는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실한 신앙인들에게 참된 진리와 선을 보내주십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내면에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들 속으로 오십니다. 그것이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아기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부부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진리가 아니세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전처럼 진리만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신앙에 따르는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신앙과 삶의 진실한 행위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통해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이나 선지자는 그렇게 참된 진리를 만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바로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34절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는 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므온은 ‘듣는 자’, 즉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요, 신앙에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 진리를 만날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안의 선한 애정이 진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말이지요.

 

한글 성경에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이 아이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세워졌다’라고 말합니다. 많이 다르죠.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로 표상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마치 애굽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거듭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이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하구요,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말했습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는 말은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이 35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한다고 했는데, 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의지에서 나오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는 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 우리의 의지 속을 비추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지만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생명이고, 생명이 맑아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 의지나 애정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음 3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사람은 시므온 말고 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안나’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안나 역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안나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아셀’ 지파의 딸이라는 것과, 선지자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아셀 지파는 애정을 뜻하고, 선지자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가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안나는 교회의 교리를 배우기를 힘쓰고, 교리가 이끄는 데로 선하게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나가 남편과 결혼해 일곱 해를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누구를 말할까요?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과 진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었으니, 그것은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숫자 7은 거룩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함께 산 기간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복종, 선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진리에 복종하려면 진리에 반하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끊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하고, 자기의 이익과 이웃의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기 위해서 치열하게 갈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의 상태에서 선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시작됩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진리 행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 일단 선의 상태로 들어가면, 내면에서 선한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억지로 진리를 행하지 않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한 애정에 따라 행하고요, 그래서 그것이 기쁩니다. 37절은 안나의 두 번째 거듭남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방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처음 그 상태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혹시 지난주 출애굽기 19장 설교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은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 즉 선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광야는 진리가 아직 심어지지 않은 선을 뜻합니다. 본문에 안나가 과부로 사는 것이 그런 상태입니다. 선한 의지는 있는데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안나가 실천했던 진리는?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똑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고, 일반적인 진리만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앙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신앙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악을 먼저 끊고, 그다음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같은 진리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선을 행하기보다는 주로 자신의 행위 가운데 숨어있는 악과 거짓을 버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을 행하되 소극적으로 행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으로부터 받는 진리는 대부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진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선한 의지는 있는데 선을 행하는 방법에 대한 진리가 없음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안나가 과부로 지내는 상태입니다. 과부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아니면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안나의 경우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안나를 과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안나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이 표현은 안나가 과부가 된지 팔십사 년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안나의 현재 나이가 팔십사 세라는 말이겠지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숫자 4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84는 4의 배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숫자 4의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숫자 4는 하나의 상태가 완전히 끝나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선만 있고 진리는 없는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안나’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에는 ‘안나’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금식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금식은 애통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안나’는 무엇을 애통해했을까요? 자기 안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주님께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을 동반한 진리가 그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안나’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입니다. 38절에서는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통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소망하는 이웃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는 예수님, 즉 진리에 대해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안나와 같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들어간 사람이라야 진리를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님들 가운데도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분이 계실 수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 누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는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라고 말하는데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주님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웃들에게 주님에 대해, 즉 진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9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에 대한 정결 예식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 안의 신실한 신앙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낡고 병든 교회를 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때, 한동안은 이전 교회의 예배를 그대로 존속시키십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 동네 나사렛’은 새로운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시는 새로운 교회의 교리가 곧 ‘본 동네 나사렛’입니다. 왜냐하면 ‘동네’는 속뜻으로 교회의 교리를 나타내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며, 그래서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로 오신 주님은 처음에는 아주 연약한 주님이세요. 주님이 연약한 것이 아니고요, 주님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앙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깊어지면 그에 따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도 점점 자랍니다. 진리에 능력이 생기고, 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40절에서는,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인간의 때가 묻지 않는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정결 예식의 기간이 찬 다음 아기를 바친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된 선지자 ‘안나’는 그것을 위해 84세가 되도록 금식과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주님은 좀 더 빨리 나를 선하게 만들어주시지 않으시는가? 선에 대한 나의 열정을 모르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직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안나처럼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없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금식과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준비 중이신 모든 새 교회가 바로 설 것이고, 부흥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식구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40:6-8)

 

아멘

 

 

원본

2017-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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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찬송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28-33)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며, 주님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세속적 선과 또한 물질적인 선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것들은 각각 이러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선이 되며 그 안에 행복이 있다. (AC.1422:2)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총 10,837개의 글로 구성, 라틴어로 기록) 창세기 12장 3절 말씀에 대한 주석 내용입니다. Clowes 역입니다.

 

Here it is evident that “to bless the Lord” is to sing to him, to proclaim the good tidings of his salvation, to preach his wisdom and power, and thus to confess and acknowledge the Lord from the heart. They who do this cannot but be blessed by the Lord, that is, be gifted with those things which belong to blessing, namely, with celestial, spiritual, natural, worldly, and corporeal good; these, when they follow each other in this order, are the goods in which there is happiness.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 주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두 번째 본문입니다. 주님 탄생의 의미는 여러 번 설명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만, 워낙 중요한 사항이라 한 번 더 정리,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오신 것은 성경 기록을 통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탄생의 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5804번 글과 580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선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데, 그 진리는 말씀에서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진리로 인해 겉 사람이 거듭난다. (AC.5804, 5806 요약, 이순철 역) When a man has come to good by means of truth, he is “Israel”; and the truth which he then receives from good, that is, through good from the Lord, is new truth,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ile he was with his father. By means of this truth good becomes fruitful in the natural, and brings forth numberless truths wherein is good. In this way the natural is regenerated, and through fruitfulness first becomes like a tree with good fruits, and successively like a garden.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new truth from spiritual good. (AC.5804)

 

This truth is that truth which is from spiritual good (which is “Israel”), and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en with his father; but it is a still more interior truth when with Joseph. The truth which Benjamin represents when with his father, and which is called new truth, is that which alone makes man to be the church; for in this truth, or in these truths, there is life from good. That is to say,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from good, he is the church; but not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and not in the good of charity. For the truths with this man are dead, even though they are the same truths. From this it may be seen what is meant by this being the only truth of the church. (AC.580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과 베냐민은 모두 선에서 비롯한 진리 즉 새로운 진리를 표상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분은 모두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 역시 선에서 비롯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입니다.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 없는 진리, 그러니까 지식적 진리였다면 주님께서 노력하는 사람,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는 사랑이 있는 진리, 즉 선 있는 진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이전의 잘못된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됩니다. 선으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듭나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에서 베냐민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낸다는 것, 둘째는,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빛이라는 것, 셋째는, 그러므로 그 진리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넷째는, 이 진리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다섯째는,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탄생과 관련된 내적 의미입니다.

 

※ ‘선 없는 진리’, ‘선 있는 진리’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저는 ‘머리 신앙’, ‘가슴 신앙’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신앙인의 내면으로 오실 때, 즉 각 사람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이 변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저 말로만,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주님을 믿었다면, 이제는 마음으로, 의지로 주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의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속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마음으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신 다음에는 속 사람의 생각과 겉 사람의 행위가 일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드디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다음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변화를 오늘 말씀에서는 시므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속뜻으로 시므온은 ‘의지에 속한 신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신앙이 그냥 진리를 이해하는 데 그치는 신앙이었다면, 이 의지에 속한 신앙은 자기가 믿는 바를 의도하고,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므온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한글 성경은 ‘아기를 안고’로 번역하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아기를 팔로 들어 올렸다’고 합니다. 팔이 무슨 뜻인지는 새 교회 분들이라면 다 아시지요? 바로 능력입니다. 그리고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주님을 온 힘을 다해 높이구요, 자신은 한껏 낮추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아 들어 올리는 모습은 마가복음 12장 30절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30)

 

하신 주님 말씀과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시므온의 찬송인데요, 그러면 시므온은 어떻게 주님을 찬송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29절입니다.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는 종종 사람의 겉, 즉 겉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종이구요, 속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런데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합니다. 이 ‘놓아주다’라는 말은 한글 번역이고요. 영어 표현은 ‘depart’입니다. depart라는 말은 ‘떠나다’라는 뜻이지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 떠난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겉 사람의 상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즉 진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겉 사람이 선 안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못해 진리를 실천하던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진리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종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러한 변화들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해서 ‘천국의 비밀’ 8455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 속에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즉 주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또한 선한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그에게 평화가 있다. (AC.8455, 이순철 역, 출16:13,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This truth, which is called “the truth of peace,” is the very Divine truth in heaven from the Lord, which universally affects all who are there, and makes heaven to be heaven; for peace has in it confidence in the Lord, that He directs all things, and provides all things, and that He leads to a good end. When a man is in this faith, he is in peace, for he then fears nothing, and no solicitude about things to come disquiets him. A man comes into this state in proportion as he comes into love to the Lord. (AC.8455)

 

그러니까 우리가 시므온의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겉 사람의 거처가 진리에서 선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리를 강제하던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30절입니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눈이 보았사오니’는 이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알았을까요? 모든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이성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와 의지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주의 구원을 보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1절과 32절에서는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주님의 구원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만민’은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러므로 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과 관련해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21:42)

 

여기서 건축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돌은 진리이신 주님이세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진리를 더럽히고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열매 맺는 백성들이란 바로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 ‘이방을 비추는 빛’과 그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영광’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당신의 교회를 비추는 내적 진리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33절에서는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모’는 우리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나타냅니다. 부(父), 즉 아버지로 나타내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이구요, 모(母), 즉 어머니는 개별적인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삶의 행위들과 연결된 개별적 선과 진리라 하는 이유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만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부모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이구요, 구체적으로는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과 진리들입니다. 그들이 시므온의 말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적 진리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신앙으로부터 나와, 부모로 표상되는 내면의 교회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부모가 ‘시므온의 말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놀라는 것은 그냥 놀라는 것이 아니고요, 예상치도 못한 변화를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씀은 우리 속으로 오신 내적 진리이신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기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중재자로서의 진리는 내적 특성과 외적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모두 필요한 까닭은 외적 특성이 없는 내적 진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면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에게 합리적인 면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주님의 지혜를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여기이고, 주님은 저 높은 데 계십니다. 사람은 육체이고, 주님은 영이십니다. 직접, 바로, 다이렉트로 이해할 수, 인식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중간 역할을 하는 무엇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어떤 특별한 준비를 시켜주시면, 사람은 다이렉트로 천사들의 지혜, 주님의 천국 그 찬란한 빛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이며, 보통은 육에서 합리, 이성, 지성을 거쳐 영으로 나아갑니다.

 

반대로 하늘의 것, 모든 영적인 것이 지상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무슨 외형을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과 천국 간 상응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상의 무엇을 보면서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천국의 그 무엇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두 이런 상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상 만물은 저마다 천국의 그 무엇을 담는 그릇이요, 용기(用器, recipient)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육체가 영혼을 담는 그릇이듯 말이지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상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 가운데 주님의 빛을 구하며, 부지런히 이 상응 훈련을 하면, 점진적으로 내면이 열려 천국과 연결되어 모든 놀라운 삶, 곧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시는 삶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

 

따라서 내적 진리는 외적인 옷을 입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겉 사람의 가장 마지막의 안에까지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겉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재자로서 세상에 오셨고요, 또 중재하는 진리로 우리 마음속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내적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이성적이던 신앙이 의지적인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구원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지키고 행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은혜가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5:9)

 

원본

2016-10-2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과 ‘아벨’의 속뜻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인애(charity)가 없는 신앙(faith)의 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며 자체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348, 이순철 역)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AC.348)

 

※ 윗글은 오늘 본문 중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에 나오는 ‘땅의 소산’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 오늘 설교는 원래 추수감사절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인과 아벨처럼 각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예물은 어떻게 보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급기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 즉 그 속뜻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보통 아담과 하와라고 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의 그런 겉뜻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의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 곧 속뜻으로 ‘아담’과 ‘하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즉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시던 그때부터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인간과 만나시고, 교회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시며, 그렇게 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신앙이 생긴 걸 말합니다.

 

※ 교회로 말미암는 자녀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신앙을 첫아들, 곧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를 그 아우, 곧 ‘아벨’(Abel)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옳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진리로 말미암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깁니다. 바로 그 신앙이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입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 이를테면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 같은 것, 즉 자아 사랑, 세상 사랑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극복,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그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내면에 있는 좋지 않은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아직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사랑 없는 신앙, 사랑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직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상태인 것이지요.

 

※ 모든 것이 완전, 온전했던 태고교회도 점차 변질, 기울어져 그 끝은 노아의 홍수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태고교회는 대략 여덟 번 정도의 상태변화를 겪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상태변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부분부터입니다. 이 부분부터 아담, 즉 태고교회는 자신의 자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perception, 주님으로부터 내 영으로 들려오는 일종의 내적 음성)으로 모든 것, 곧 주님에 관한 모든 것, 천국에 관한 모든 걸 100% 무슨 별도 학습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바로 답이,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100% 온전한 답이 자신의 열린 영으로 들려오니 굳이 따로 교리화하여 학습할 필요가 없었지요. 마치 천적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소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면서 이 퍼셉션의 해상도(?), 수신 감도가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일어난 것인데요,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리니 영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며, 주님이 일일이 다 알려주시니 부족한 거 없이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들이, 어린 영유아들이 무슨 신앙이 있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주님 아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퍼셉션 감도가 흐릿해졌으면서도 그걸 커버하느라 이런 쪽, 그러니까 전에는 저절로 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글로 정리, 교리화하여 그때그때 주님 찾을 필요 없이 꺼내볼 수 있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 겁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만 바라봄으로써 선조들처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2절입니다.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 부부에게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이 바로 체어리티인데요, 이 체어리티를 아벨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부부에게 아벨이 태어난 것은, 할 수 없이 생긴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제는 이 신앙으로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걸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신앙만 있을 때는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리에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 즉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 신앙과 사랑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신앙과 사랑의 분량이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보다 사랑이 더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신앙이 더 많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21번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성향, 곧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지, 아니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지를 잘 살피면 나중에 나는 어떤 천국으로 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양치는 자 ‘아벨’은 사랑, 즉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이었고, 농사짓는 자 ‘가인’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고교회 안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사랑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고,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신앙보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뚜렷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보다는 신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뚜렷하다,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즉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3절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인과 아벨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인’, 즉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나빠졌고,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만약 그러지 않고 ‘신앙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게 되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사랑의 상태’로 나아간 사람은 신앙이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의 수준에 맞는 진리, 즉 신앙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체어리티로 사는 아벨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신앙으로 사는 가인은 영적으로 쇠퇴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나타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물’은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이 드린 제물입니다. 반면 ‘양의 새끼로 드린 제물’은 이웃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셨다기보다 받으실 수가 없었다가 맞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진리를 믿는다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진리에 따라 그렇게 살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선자의 삶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애, 체어리티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헌금과 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러니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살다가 예배를 드릴 때만 경건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1-12)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제물을 안 받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조금 있는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안색을 붉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양심을 통해 그의 사랑이 식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 양심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걸 바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은 주님으로부터 양심을 통해 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걸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원망의 마음이 커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8절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랑 없이 신앙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 즉 체어리티를 모두 잃어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신앙’, ‘신앙’, ‘교리’, ‘교리’하며 마음이 돌덩어리같이 딱딱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그동안 여러 시대의 교회, 곧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도 그랬고,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오늘날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앙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앞에 세 교회 시대처럼 이 기독교회도 교인들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높이고,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신앙과 삶을 분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 곧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 물론 이는 마틴 루터 당시 극도로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반발, 저들의 엉터리 같은 ‘행위’를 극단적으로 고발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이번엔 완전 반대쪽 극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랑을 죽이는 일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데요, 이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순수한 지각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였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 또는 진리와 선이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고, 진리와 선을 분리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신앙, 그러니까 진리를 주시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그다음에 사랑, 그러니까 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인애의 선을 만들어주신다. (계시록의 속뜻 935, 이순철 역) the Lord produces the goods of charity with a man according to the state of truth with him. (AR.935)

 

그것을 본문에서는 ‘하와가 먼저 가인을 낳고 그다음에 아벨을 낳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교회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런 신앙을 ‘앉은뱅이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사랑의 단계로 나아갔다가 후퇴해서 다시 신앙의 단계로 내려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잘못하면 내면에 있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어떤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인의 예물을 가지고 온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올 한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 심장이 뛰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러한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아멘

 

2019-11-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02(D1)-주일예배(2587, 창4,1-8), ‘가인’과 ‘아벨’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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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서 故 권성조(權聖祚, 1923 生 - 2015 卒, 享 91세), 김정자(金貞子, 1926 生 - 2005 卒, 享 79세), 두 분의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1절

 

 

본문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6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멀리 대전에선 6시에 출발했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10주기 기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 삼일절입니다. 특히 올 삼일절은 현 시국과 관련, 그 정신과 의미가 마치 106년 전 그날과 같아 저 자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곳을 와야 하나 저곳을 가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만큼, 오늘 이 예배가 짧지만, 큰 의미가 있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곳은 묘원,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곳이며, 그러므로 이곳에 오면 자연스럽게 생과 사, 삶과 죽음, 사람의 사후 상태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했습니다. 두 분은 지금 어떤 상태이실까? 사람의 사후, 영혼으로 가는 그 나라에서 두 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궁금했습니다.

 

다음은 주님의 허락으로 생전에 천국과 지옥 등 영계를 두루, 그러니까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시작, 27년간 수시로 왕래한 모든 기록을 주님의 허락을 받아 라틴어 원고 수만 장으로 남긴,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분의 여러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간 영계(The world of spirits)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의 지역, 즉 상태(state)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만큼 머물고 난 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is raised up)지옥에 던져진다(is cast down). (HH.421)

 

중간 영계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모든 사람이 사후에 일단 그곳에서 만나고, 거기서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고, 준비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몇 주 또는 몇 년 동안 머문다. 그러나 삼십 년을 넘지는 않는다. 머무는 기간의 이런 차이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이 상응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 중간 영계에서 사람이 어떻게 여러 상태를 거치며 준비되는가를 설명하겠다. (HH.426)

 

사람들이 사후에 중간 영계에 들어가자마자 주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분류하신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 살 때, 그들의 중심적 사랑(ruling love)으로 이어져 있던 바로 그 지옥 공동체에 즉시 연결되고, 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love)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그리고 신앙(faith)으로 이어져 있던 천국 공동체에 즉시 연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어져 있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친하게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 특히 부부와 형제자매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만나고, 함께 얘기한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여섯 아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는 많은 이들도 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dispositions)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 그러나 중간 영계를 지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간 영들은, 그들의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성격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한다.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HH.427)

 

내용이 이해되시나요? 살짝 보충 설명을 좀 드리자면,

 

① 영계는 이곳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다.

 

②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갈 수 있다.

 

③ 사람은 누구나 ‘’(善, good) 몇 %, ‘’(惡, evil) 몇 % 상태로 죽는다. 그래서 대부분 죽자마자 천국, 혹은 지옥으로 바로 갈 수는 없고, 어딘가 준비하는 곳이 필요한데, 거기가 바로 이 ‘중간 영계’, 곧 ‘영들의 세계’다.

 

④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육, 즉 몸은 그 안에 영을 담기 위한 그릇이며, 다른 말로는 영이 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입고 다니는 옷이다.

 

⑤ 사람은 또한 ‘겉 사람’(external man, 外的)과 ‘속 사람’(internal man, 內的)으로 되어 있으며,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은 속 사람이다.

 

⑥ 겉 사람은 몸을 포함, 영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속 사람은 주님께 속하며, 주님은 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속 사람은 사람이 주님 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살 때, 그러니까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실천할 때 형성된다.

 

⑦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은 상태로 지내는 곳이다. 이 세상은 겉과 속이 달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그렇지 않다. 영계에서는 속이 선하면, 겉도 선하며, 속이 악하면, 겉도 악하다.

 

⑧ 이 세상에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은 그 모습과 외관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겉은 무척 멋있거나 아름다워도 속은 괴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늙고 추해도 속은 천사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의 허락으로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놀란다.

 

등... 이 외에도 계속 이어지지만 아직은 이 정도만 하지요. 이런 진리들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일종의 수학이라는 학문을 떠받치는 공리(公理) 같은 것입니다. 공리란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없는 진리를 말하지요. 우리의 신앙은 이런 신학적 공리에 기초, 주님도, 천국도, 그리고 인간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진리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두 분은 여전히 함께 지내시거나 두 분 중 준비가 끝나 100% 상태가 되신 분은 먼저 해당 천국에 올라가 기다리고 계시지 싶습니다. 제 기억에 두 분은 참 선하고 진실하셨으며, 비슷하셨기 때문이지요.

 

천국이나 지옥을 가기 전, 이런 사전 준비가 필요한 이유는, 천국은 선 100%의 나라여서 천국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악은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지옥은 악 100%의 나라여서 마찬가지로 지옥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을 역시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모든 것이며, ''이란 모든 것의 근원되신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는 호칭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우리의 영에 해당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육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활동에 해당하는 '성령'을 한 분으로 모으는 호칭입니다.

 

위 427번 글에,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는 건, 영계의 특성, 즉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비록 같은 식구요, 호적상 같은 가족이었어도 영계에서는 선악의 문제, 진리와 거짓의 문제, 즉 주님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 자기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엔 반가움으로 만났어도 곧 헤어지게 되지요. 그러므로 부부의 경우나 가족의 경우, 사후에도 계속 함께하고프면 서로 비슷해져야 합니다.

 

하나 더,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같은데요, 앞서 ⑧번 설명을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이 어떤 모습인지, 즉 자신의 속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모릅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후 이 두 번째 상태인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는 속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게 되는데, 생전에 나도 본 적 없는 내 속 사람 모습을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으므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우리의 결론은, 인생의 목표는 천국 가는 것이요, 목적은 창조주의 뜻,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인 쓰임새(use)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쓰임새가 있어 창조하셨고, 우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가 그 쓰임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평생 곁에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 즉 나라의 일상이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악과 거짓, 불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그나마 살짝 숨어서 했다면,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합니다. 정체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옥이 ‘그래, 나는 지옥이다. 어쩔래?’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 역시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1]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2]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3] 재판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장 한장 펼쳐져 읽힌다.

 

[4]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연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5]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연되었다.

 

[6]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히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7]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8]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다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9]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주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그러나 안심하세요. 이런 폭로는 오직 악한 영들, 즉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한테만 일어납니다. 주님은 선하고 진실한 삶,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산, 겸손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영들의 과거까지 무분별하게 들춰내시는 고약한 신이 아니십니다.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현 시국, 특히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정말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대통령을 탄핵, 끌어내리려는 모든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일컬어 국가 전복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을 경우, 이들의 사후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게 의롭고 올바르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종교가 다르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예수 믿지 않아도 이런 ‘의로움과 올바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이며, 이 ‘의로움과 올바름’은 주님의 신성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다니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을 가장 잘 환히 비추는 성경 말씀이 기독교에,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밝고 환한 빛 아래서 주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지름길의 삶을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길, 다른 종교, 다른 가르침들은 비록 거기에도 여러 형태로 주님의 신성이 부분적으로 스며들어 있어도 마치 초롱불, 등잔불 불빛 같아 흐릿하여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유로 비록 이 세상 살 때는 예수를 믿을 수 없었을지라도 사후 중간영계에서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 인정,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건, 이 세상에서 교회 다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즉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 예수를 믿지 못하였어도 어찌어찌 어렵게라도 속 사람이 그렇게 형성된 사람들은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즐겁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비록 이 세상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도 정작 삶이 엉망이어서 자기 속 사람 준비에 소홀했던 사람들은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등을 돌립니다. 거기서는 각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며, 그걸 거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든, 이제는 은퇴하여 남은 삶을 손주 돌보며, 조용히 지내든, 무엇을 하든 그 자리, 그 역할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은 모두 나의 이웃입니다. 나의 핏줄과 혈육, 직장과 교회 등 모든 인간관계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건 이웃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앞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의인이든 불의한 자이든 그는 주님이 지으신 자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주님의 신성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꼭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사랑과 지혜, 부유함과 능력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이런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삶이 형통하며, 이 모든 것이 겉 사람으로도 흘러들어가 나이 들어 자연스런 노화, 노쇠의 상태로 평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육체라는 둔탁한 옷을 벗으시고, 이제는 그 영적 오감이 몇 배나 더 활짝 열려 상상할 수도 없는 영광의 삶을 살고 계실 두 분을 기억하며, 내년 이맘때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2절, 3절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추모예배를 통해 들려주신 이 세상 삶의 목적과 목표,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그래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등에 관해, 그동안 안개처럼 흐리고 뿌옇던 시야가 맑아져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5-03-01(D7)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2025-03-01(D7)-추모예배(2586, 눅12,2-3), '2025 故 권성조(10주기), 김정자(20주기) 추모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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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속뜻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천사 또는 사람 안에서 결합한 선과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때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선이고, 진리는 선을 바탕으로 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선과 진리의 결합은 마치 사람이 의도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과 같고, 그때 생각과 의지가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다. (천국과 지옥 372, 이순철 역) Good and truth conjoined in an angel or a man are not two but one, since good is then good of truth and truth is truth of good. This conjunction may be likened to a man’s thinking what he wills and willing what he thinks, when the thought and will make one, that is, one mind; (HH.372)

 

 

새 교회에서는 결혼은 남녀의 순결한 사랑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은 남녀의 정서적, 육체적 필요에 따른 결합이며, 자손을 번식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영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했다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고, 또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도 순결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마태복음 19장 3절 이하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주님께서는 결혼한 부부 중 어느 하나가 순결의 의무를 깨지만 않는다면 결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신서에 보면, 바울도 결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결혼보다는 독신을 지지했던 것 같은데요, 그의 서신 몇몇 구절들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전서 7장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7:25-26, 28)

 

그는 또 결혼이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하는데,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7:32-35)

 

서신서의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드는 생각은, 바울은 결혼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 바울은 ‘결혼’의 내적 의미,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속뜻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런 상담의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시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결혼을 생각할 때 변함없이 ‘속 사람’이라는 목표, 관점으로만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의 완성이 결혼이며, 그래야 천국에 올라가 그곳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라 하면, 그때는 박해의 시대였고, 그리고 사도들은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으로 가르쳤으며, 그래서 당시 성도들은 ‘이제 잠시 후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친 건 그들 역시 주님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말씀에는 결혼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요, 그중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남녀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만 창조하시지 않고, 오히려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상’은 사람의 영적 생명 중에서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을, 그러니까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은 폐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그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는 진리, 이해(understanding)를, ‘여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 의지(will)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에 대한 신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그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순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주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점점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가 그의 마음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신앙과 사랑은 처음에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생깁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생기지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 마지막에 겉 사람 안에까지 생기는 모습을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여기서 ‘부모’는 속 사람을 뜻합니다. 속 사람을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뿌리내리는 모든 진리와 선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표현은 속 사람 안에 있던 진리, 또는 신앙이 겉 사람 안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표현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의 자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은 자아,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을 반대하던 자아가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2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기,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단하고 차갑기만 하던 자아가,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의 생명이 들어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단단한 ‘갈빗대’는 타고난 자아를 뜻하고, 그것을 들어낸 자리에 채워지는 ‘’은 주님의 생명이 담긴 따뜻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아가 변할 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의 구애에 화답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사람들의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소통할 정도로 영이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녀의 결혼이 육체의 결합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영적 결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고,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이성과 의지의 결혼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남녀의 순결한 결혼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거룩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수했던 태고교회가 무너지면서 결혼의 순수한 의미도 퇴색되어 버렸고, 그 결과 노아의 고대교회를 지나 모세의 유대교회에 이르러서는 결혼의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은 시작하면서 살핀 본문인데요,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위와 같은 대화가 저렇게 오갔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결혼의 영적 의미에 대해 무지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연계의 결혼이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그러므로 결혼의 파기는 선과 진리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계시록 해설’ 710번 글의 20항을 보면, 주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은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만난 주님의 천사와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그런 집요함(tenacity)을 나타내는데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집요한 요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직접 밝히신 내용입니다.

 

신명기 9장 6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9:6)

 

유대교회 사람들처럼 완악한 사람들은 순결한 결혼을 반대하고, 오히려 간음의 기쁨을 원합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허락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 위 ‘계시록 해설’ 710번 글(계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의 속뜻 주석)의 20항에 의하면, 야곱과 그의 후손, 즉 열두 지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그저 자연적이기만 했으며, 그 결과 천국의 선과 교회, 양쪽에 모두 반대되는, 즉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Jacob and his posterity even from their fathers down were merely natural, and therefore were opposed to the good of heaven and the church)고 하며, 그럼에도 그들이 성경에서 저런 위치에 있는 것은 그들의 성정이 집요하고 고집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상은 그들은 선택된 게 아니라 하도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허락하신 거(That the Israelitish and Jewish nation was not chosen, but was accepted to represent a church, because of the tenacity with which their fathers and Moses persisted)라는 말이지요.

 

이런 비슷한 일이 현 기독교, 개신교에서도 여전히 비일비재합니다. 가령, 자신의 그 무엇을 관철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그것도 여러 번을 말이죠, 무슨 솔로몬의 일천번제, 즉 천일예배나 천일기도를 드려 주님의 보좌를 흔든다든지 등,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신앙생활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걸 또 무슨 영적 계급장처럼 자랑하고 다닌다든지... 물론 이런 것도 그 속뜻을 따라 하는 것이면 그 순기능이 크지만, 저들 유대인들처럼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의 그 어떤 걸 이루기 위해서 저렇게 집요하게, 저렇게 고집부리며 무리를 하는 것이라면, 나중에 혹시 그게 이루어지더라도... 글쎄요, 그게 과연 ‘이루어진 것’이며, ‘기도 응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런 일련의 모든 황소고집 같은 태도는 그 결과, 자신의 속 사람의 성장, 내면의 열림 등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 후, 그의 꿈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시는데요, 그것은 그의 내면이 한 단계 열려 비로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그전까진 자연적이기만 했던 솔로몬이 비로소 영적 인간이 된 것이죠. 우리 역시 어떤 큰 기도, 정말 진지한 나아감이 필요할 때는 저들 야곱의 후손들처럼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생떼를 쓰는 태도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를, 참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 내면이 한 단계 더욱 높이, 그리고 깊이 열리기를 구하는 그런 태도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모든 복은 우리 내면, 우리의 속 사람의 크기만큼만 담기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동안 내 삶이 정말 많이 불행했다면 그것은 그저 내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조금도 담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구나 하시면 틀림없으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런 내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저 우주공간 햇볕처럼 영원히 공급되는 주님의 복을 넘치도록 담는 그런 속 사람의 태도로 변화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왜 유대인들은 결혼을 자연적으로만 생각했는지,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집요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이 신성한 이유는 순결한 결혼은 천국을 만드는 온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천국의 천사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부부의 순결한 사랑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어떤 방법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로 흘러들어올까요?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먼저 남편에게 진리를 보내주시고, 그것이 남편의 지혜를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흘러 들어가 거기서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결합한 사랑이 다시 남편에게로 흘러 들어가 남편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아내를 순결하게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사랑이 있는 진리가 생기고, 남편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진리가 있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남녀의 결혼을 거룩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불순한 결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간음이나 불륜 같은 것입니다. 간음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탐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만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순결한 부부의 사랑이 모든 천국의 기쁨의 원천이라면, 간음의 사랑은 지옥의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절대로 가까워질 수도, 섞여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 하시고,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14간음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4, 17)

 

천국과 지옥’ 384번 글은, 간음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닫히며, 일단 천국이 닫히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나 교회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And this is why heaven is closed up to man when he commits adultery from delight; and when heaven is closed man no longer acknowledges the Divine nor anything of the faith of church. (HH.384)

 

그러므로 간음은 인류를 지옥으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악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순결한 결혼의 사랑은 천국의 모든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순진함의 원천이며, 그러므로 신성한 것입니다.

 

남녀의 결혼이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맞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스베덴보리 같은 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웁살라 대학교 재학 시절, 친구인 크리스토퍼 풀하임의 여동생을 연모했으나, 풀하임의 아버지가 교제를 허락했음에도 불구, 여자 쪽의 지나친 수줍음으로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일생에 두 번 다시 무슨 여자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는데요, 이렇게 이런 분들이 혼자 사는 이유는 주님만이 아시는 개인의 사정과 그에 따른 주님의 어떤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개인의 영적 특성이 거듭나는 데 있어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유리하다든가, 아니면 주님이 맡기시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독신으로 사는 게 더 나은 경우 같은 섭리 말입니다. ‘결혼애’ 229항에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참된 결혼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배우자를 보내주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면 천국에서 맺어 주신다. (CL.229, 이순철 역) That for those who desire love truly conjugial the Lord provides similitudes; and if they are not given on earth, he provides them in the heavens. (CL.229, Warren 역)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결혼한 부부들은 배우자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통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주님이 맡겨주시는 일을 통해 주님과 결합하고, 그 결합을 통해 천국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아멘

 

 

2020-10-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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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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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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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21절은 누가복음 전체 강해 원본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도 사실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이런 불순한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여기 ‘주의 율법’이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 하셨을까요? ‘장자’(長子), 즉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처음 난 아들’은 사랑이 있는 신앙, 또는 체어리티(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는 사랑 또는 체어리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체어리티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태어난 진리와 신앙,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신앙,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앙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신앙, 즉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는 진리나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끔찍이도 준수하는 율법에 사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의미 없는 외적 행위만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 가령 이런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세리의 기도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구원은 체어리티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믿게 된 것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루터를 만나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796번 글입니다.

 

루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 교리(dogmas)의 극렬한 창조자였고, 변론자였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오는 수에 따라 그 열정이 더해갔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아이슬레벤(Eisleben)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집 한 채가 주어졌고, 거기서 추종자들이 와서 그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리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했으나, 간혹 그는 자기의 설교자로서의 인기에 의해서 청중들에게 마법을 거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술법은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아주 강력해서 영계에서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애(the love of self)로부터 발생하고, 발언자로 하여금 그의 반대자의 의견뿐 아니라, 그 인격까지 공격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므로 이 술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청중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그의 예전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행해진 최후 심판의 때까지, 루터가 살아온 생활 상태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처음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동시에 그의 심정 상태도 변해졌다. 그리고 내가 자연계에 있으면서 영계 안에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추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몇몇의 질문들을 하고 내 대답들을 듣고는, 그가 지금 옛 교회의 종말과 다니엘서와 복음서들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또한 이 새 교회가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표상되었음과, 또 천국 한 가운데를 나는 천사가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전파한 영원한 복음으로 표상되었음도 지각했다(계14:6). 처음에는 그는 격분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곧 새 하늘이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마28:18)에 의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자들로써 형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그는 욕설을 중지하고 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나와 전보다 친숙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독단교리(his chief dogma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을 때, 주님, 인애, 참 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말씀에 의하여 교육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새 교회가 기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성하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때에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며, 그가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말씀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독단교리들, 즉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등을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관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들이 이 독단교리들 안에 내포된 명확한 성경 말씀과의 모순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서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검문하는 천사들(the examining angels)에게 루터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로 자신들의 믿음을 굳힌 많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로나 설교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내적, 영적 속 사람(영혼) 속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믿음만에 의한 이신득의에 찬동하는 교리로 체어리티의 영적 특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그 교리에 굳어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Saxony)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가 특히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난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켰고,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합해서 구원의 방편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은 체어리티를 믿음 위에 놓고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고 부언했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

 

※ 그러니까 위 성전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던, 이런 율법 준수의 동기가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 자기 자랑이었던,

 

그런 영혼 없는 율법 행위를 부정했을 뿐, 체어리티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 즉 이 할례를 명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오직 믿음’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되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신앙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신앙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므온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창세기 29장 33절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은 신앙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새로운 신앙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신앙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신앙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머리 신앙이 가슴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신앙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신앙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신앙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신앙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내가 여호와다!’ 하시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당신 안의 신적 진리와, 여호와이신 신적 선이 하나가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본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지,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시하시는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반드시 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신앙이 이성에 속한 신앙에서 의지에 속한 신앙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신앙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신앙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신앙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어리티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원본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0(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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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이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베들레헴은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고, 그러므로 선에서 비롯한 진리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6247, 이순철 역)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lehem,”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see n. 4594), thus a state of new affec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the truth of good, thus the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AC.6247, Clowes 역)

 

※ 윗글은 아래 창세기 48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48:7)

 

 

※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앞부분이 좀 겹칩니다. 원래대로라면 15절부터 새로운 본문이어야 하는데, 아마 21절까지 말이지요,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한 설교 원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러 성탄절 본문 중 여기에 근접한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님과 함께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주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했고, 또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주님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탄생하시던 날, 주님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멀리 시리아에서 온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목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8절,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밤은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교회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를 지키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본문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태고교회부터 시작,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현 기독교회 역시 각 교회 시대의 종말마다 소위 ‘남은 자’(remnant),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 주님이 그때그때 새 교회를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소수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그중 일부가 바로 이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잇는 ‘노아’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 특정 신앙이나 교리,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목자’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 앞에 주님의 천사들이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데요, 그러자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에서는 주님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의 모습을, 떨거나 죽은 사람처럼 되거나, 또는 온몸의 기운이 빠진 걸로 기술하는데요, 가령, 다니엘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서 10장 4절로 12절입니다.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4-12)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죽은 자처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의 자아가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처럼 된다는 것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으로 보면 지극히 경건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을 만날 때의 떨림을 거룩한 떨림, 또는 거룩한 전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는 사람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새롭게 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여러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안에 영이 있고 몸이 있으며,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기운이 있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영과 몸과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발산되는 에너지와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인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마음속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진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하나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진리를 배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내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폄하하고 비난합니다. 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을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여관’(inn)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관에 방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리 안에서 진리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이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가피하게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말씀에서 ‘’(horse)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manger)는 말이 먹이를 먹는 곳이므로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구유에 누워계시는 주님은 신앙인들의 지성을 먹이는, 교리라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첫 번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태양의 뜨거운 불에서 나오는 첫 번째 빛과 같이 순수하고 밝은 진리입니다. 태양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우주공간과 대기권을 차례로 지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 빛과 열기가 얼마나 희석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처음 진리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각자의 영적 상태에 맞도록 주님에 의해 그 빛과 열기가 조절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원형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바로 나온 진리, 즉 순진무구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곧 주님이십니다.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에서는 천국이요, 사람 안에서는 속 사람입니다. 또 ‘’은 지상에서는 교회이며, 사람 안에서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하늘과 땅에서 주님을 여호와로 인정하는 사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영광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아기로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지옥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합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우리도 천사를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것이 천사를 통해 얻은 생각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의 속뜻 진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베들레헴’은 자연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인 합리적 진리와, 말씀의 문자적 뜻인 자연적 진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자적 진리, 즉 선에 속한 진리(truth of good)나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선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선의 진리, 선에 속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진리는 주님이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심어놓으신, 체어리티라고 하는 선 안에서 자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 문서에서는 그것을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자연적 진리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을 뿐, 선의 진리, 즉 선에 속한, 선을 동반한, 참 신앙의 진리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드디어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은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다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들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면서 전할 때, 그들의 진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봤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진리에 순종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천할 때,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제일 먼저 당신의 탄생을 알린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오십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믿음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의 속뜻이라는 순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말씀의 속뜻 진리 안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들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매일 같이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한 선한 삶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에 맡기신 사명은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빛이 없던 각자의 등불들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덮은 재앙의 어둠이 걷힐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그런 충직한 목자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님들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0-1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8(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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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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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보통은 성탄절에 드리는 말씀을 8월에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 지역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 지역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합리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적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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