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주일 설교 포함, 여기 올리는 글 대부분을 많은 분께 개인 카톡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몇 년 이상 되신 분들이시며, 겨우 살아남으신(?) 얼마 안 되는 분들이십니다. 저는 제 본업인 리딩과 번역 외에, 이 또한 제가 이 환경에서 힘쓸 수 있는 사역이라 생각하고 힘써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남으셨다’ 한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글들은 기존 기독교 교리와 많이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저는 오랫동안 많은 일, 별의별 일을 다 겪어야 했으며, 대부분 오랜 사귐에도 불구, 등을 돌리시거나 좀 불편한 관계가 되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 이분들은 그 가운데서도 아직 꾸준히 제 글을 거부하시지는 않고 계시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분들 대부분은 참 마음이 곧고 정직한, 한길만 파는 그런 올곧은 분들이시지 싶습니다. 한편으론, 평생을 그 교리로 살아오신 분들이시라 그 교리는 자신들의 생명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누가 그 생명을 건드리면 많이 힘들어하시지 않을까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적극적으로 거부하시지만 않고 있을 뿐, 그렇다고 그동안 적극적인, 또는 눈이 확 열렸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다섯 손가락도 많을 듯하네요. 이분들은 정말 희귀한 분들이시며, 참으로 귀한 분들이 아닐 수 없으십니다. 이분들은 나중에 주님과 함께 새 교회에 들어가실 분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누구를 또 새롭게 공유 명단에 올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괜히 또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해서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꾸준히 생각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처럼 제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며, 어떤 증거를 기다리지요. 그래도 계속 생각나며, 저를 꾹꾹 누르시면 할 수 없이 보내기 시작합니다. 사전 양해를 구해야 마땅하나 오랫동안 알던 사이라 그 또한 괜히 부담드릴 듯하여 그냥 슬그머니 보냅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일하실 차례입니다. 이런 거, 다시는 보내지 마시라든가 슬그머니 차단, 카톡 읽은 표시 노란 숫자가 한두 달 안 사라지고 있다든가 뭐, 등등... 아니면, 감사 인사라든가 무슨 질문이라든가 등 한결 좀 나은 반응을 보이시지요. 그러면 참 감사한 거고요...
여기 글들은 주님의 빛 비추심이 없으면 이해조차 쉽지 않으신 글들입니다. 오히려 속에서 막연한 반발심이 피어오르는 그런 글들이지요... ‘오직 믿음’의 교리, 그리고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는 신앙에 반해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일치, 하나 됨, 구원이란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담긴 것만 말씀이며,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말씀의 속뜻과 겉뜻이 있다는 등 기존 기독교, 개신교 교리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를 하니까요...
이 사역에 힘써 벌써 8년 차...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거나 후회하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늘 새롭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다정한 격려 있으셔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고는 합니다. 특별히 말씀들 안에 감추어 두신 아르카나는 저의 영과 육을 뒤흔들 만큼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의 연속입니다. 최근엔 내면이 조금씩 열림과 복음서 병 고침의 역사가 조금씩 내게도 일어나는 걸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 사모에게는 많이 미안합니다. 제가 이 일에 힘쓰는 대신 좀 더 기존 사역을 힘써 교세를 확장하거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았거나 했으면 한결 수입이 많아 생활이 훨씬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주님의 어떤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느껴집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그래서 못 지킬 때가 간혹 있지만 더욱 요만큼의 세상 두리번거림도 끊고, 스베덴보리의 글들 리딩과 번역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주일 설교, 그러니까 주일예배도 어떻게 약식으로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주일 설교 준비가 시간을 너무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결론, 주님 주시는 퍼셉션을 따라 보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본인 몫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 하셨으니 분명 언젠가는 일을 이루시며, 아 그래서 그때 나로 하여금 글들을 보내게 하셨구나 깨닫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이 세상 떠나기 전 그런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 대통령님도 창당 안 하고, 헌재 결과 받아들인다라고 윤상현 의원 통해 언급하셔서, 윤 대통령님 역할도 계엄까지로 막을 내린다고 하네요
이재명 관련 재판들은 법원에서 출석 통보 포기하고, 김만배는 오늘 무죄판결 나고... 대 놓고 법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치 모압-암몬-마온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심정이랑 비슷하네요
중국이 깊게 쳐들어와서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국민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있고... //
이상은 어젯밤 받은 어느 우국충정 지사의 카톡입니다. 아래는 제가 보낸 답신입니다.
주님 복음서 시절, 자기 지상 조국 유다의 운명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의롭고 올바름을 사랑할 때에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 밖으로는 로마의 식민 통치, 안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가로이(?) 천국 이야기만 하시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실 뿐이셨습니다. 그 덕에 나라 안팎 권력 잡은 자들, 정치인들의 시선을 피하실 수 있었지만... 아마 대제사장들을 비롯, 당대 종교 리더십들의 시기, 질투만 아니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일은 없으셨을 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 상황에 오셔서 저 복음서 시절처럼 동일한 사역에 힘쓰고 계시면... 지금은 뭐 좀 달라질까요? 아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종교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의 수많은 지적질 때문에 말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든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잘, 그러니까 주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로마에 아부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타도를 외치시지도, 그렇다고 로마에 부역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예 그런 현실 정치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겉을 보지만, 주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적 상황이 겉이라면, 유다를 비롯, 온 세상에 만연한 지옥의 기운, 곧 속을 주님은 상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공산, 전체주의, 사회주의든 사실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 때문에 주님의 일과 계획, 영원하신 섭리가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 어떤 정치 제도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재명 같은 사람 하나 때문에 주님이 곤란을 겪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겉과 속 상황이 전개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위해 굳이 사람들의 예배와 영광, 찬송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시고. 그런 걸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예배, 영광, 찬송 없이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해와 같은 분이셔서 우리의 무슨 찬송과 영광 돌림은 그저 성냥개비 하나 켜서 그 빛에 보태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섬기라 하시는 건 뭐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크신 분이십니다.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에 계신 분입니다. 천국을 비롯한 모든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온 우주 만물 등, 이 피조 세계 전체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그런 신이십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삼층천 한 가운데 천사들조차도 주님이 얇은 보호막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의 그 기운에 해를 입으며, 주님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시면, 그곳은 주님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신성(the Divine)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 속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겉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해처럼 방사되시는,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이신 주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분명 엄중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런 신, 이런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 능력의 천사들조차 주님 뒤에서 잠자코 수종 들었음을 생각합시다. 그 정말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을 사모하며 오직 주님의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 그 아름다우신 신성(the Divine)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상의 조국 유다의 엄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나를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역시 중심을 잡고, 주님처럼 우리도 속에 주목하고 집중, 우리 신앙의 기본으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고, 철저히 주님 사랑, 이웃 사랑 가운데 모든 걸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 사랑, 나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1-3)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 오늘은 본래 준비하던 다른 본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틀 전인 지난 4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의 너무나도 이상한 선고로 우리는 멀쩡한 대통령을 또 한 번 잃었습니다. 김문수 장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파면하는 게 말이 되느냐?’ 저는 목사이지만, 그러나 망망대해 태평양 무슨 외딴섬 목사가 아니며, 저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 좀 별난 사역에 힘쓰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저 우주 어떤 외딴 별나라 사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은 태어난 자기 조국을 사랑하며, 마땅히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이 나의 조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 역시 작금의 이런 상황에 가슴속 울분과 화가 넘쳐나지만, 그러나 저의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 모든 참 신앙인은 다 같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펴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십자가 달려 운명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다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밤의 한 장면입니다.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자, 주님께 집중하자, 가장 근원적인 질문,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나에 집중, 전에 나눴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말씀을 조금 더 다듬어 다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오실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개역개정에서는 ‘호적하라’이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인데요,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법도, 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고 이해했는데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 곧 선과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무슨 학교 교육하듯 일률적으로 가르치며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맞게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히 맞춤식으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지요. 비록 그것이 크고 중요한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 역량에 맞게 우리 페이스에 맞춰 아주 천천히, 아주 기초부터 오랜 세월 끝까지 말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은,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시 예를 들면, ‘퍼셉션’(perception)이나 ‘오운’(own)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난처한 표현입니다. 난처하다는 말씀은, 원래 그 의미와 뉘앙스가 이만큼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확 다 사라지고 하나만 남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부득이 이 역시 그냥 ‘래셔널’(rational)로 적겠습니다. 보통은 우선은 그냥 이성(理性)이나 추론하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래셔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이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 래셔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에서 인용했습니다.
말씀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천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의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은 글자의 뜻 그대로 이집트인과 아시리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받아들여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융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서 내적 의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spiritual)은 ‘이스라엘’, 자연성(natural)은 ‘이집트인’, 그리고 그 중간 기능인 합리성(rational)은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룬다. 천사는 영적으로, 사람은 자연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천사와 사람은 거의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듯이 결합된다. 실제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영혼이고, 문자 의미는 말씀의 몸인 것이다. 이것은 말씀 전체에 해당된다. 이상으로 말씀이 천국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매체이고, 그 문자 의미는 기초와 바탕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H.307:3, 김은경 역)
즉, 우리가 말씀을 지상의 언어로 읽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천국의 언어, 곧 영적으로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중간에서 이 래셔널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가리켜 주님의 첫 번째 래셔널, 곧 human rational이라 하고, 이삭을 가리켜 주님의 두 번째 래셔널, 곧 Divine rational이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아직 아브람 시절, 곧 아직 주님 안에 마리아로 유전한 human이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차곡차곡 그것을 벗고, Divine Human, 곧 아브라함 시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
※ 하나 더, 다음은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라는, ‘천국과 지옥’ 4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합리적 기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하겠다. 진정한 합리성은 진리로만 형성되고, 그릇된 것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떤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진리에는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세 종류가 있다. 사회적 진리는 국가의 법과 다스림에 관한 사항이며, 일반적으로 나라 안의 정의와 평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도덕적 진리는 대인관계에 관련된 개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며, 일반적으로는 정직과 올바름, 구체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덕성에 관한 문제들이다. 영적 진리는 천국과 교회에 속한 일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HH.468, 김은경 역)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사회적, 도덕적 진리가 영적 진리가 되도록,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진리가 우리의 도덕적, 사회적 진리로 흘러 들어가도록 천국의 천사들처럼 행하며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이 래셔널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비록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기가 막히는 엄중한 상황에 부득이 갑자기 바뀐 설교이지만, 그러나 덕분에 다시 한번 주님의 탄생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래서 우리의 첫 출발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창13:7-11)
※ 개역 성경에는 롯이 ‘동으로 옮기니’로 되어 있고, KJV나 NIV 번역에도 ‘toward’, 또는 ‘eastward’로 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에 맞는 번역은 ‘from the east’, 즉 ‘동쪽으로부터’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을 이루는 세 가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합리성과 기억의 지식과 외면의 감각적인 것이다. 합리성은 안쪽에 있고, 기억의 지식은 바깥쪽에 있으며 감각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있다. 합리성을 통해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해 하나가 된다. (천국의 비밀 1589, 이순철 역) There are three faculties which constitute the external man, namely, the rational, that of memory-knowledge, and the external sensuous. The rational is interior,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is exterior, and this sensuous is outermost. It is the rational by means of which the internal man is conjoined with the external; and such as is the rational, such is the conjunction. (AC.1589, Clowes 역)
※ 이는 오늘 본문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중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에 관한 AC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은 아브람(Abram)과 롯(Lot)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예전 이름이고, 롯은 아브람의 형제 하란의 아들, 그러니까 그의 조카입니다.
오늘 본문 창13은 주님의 겉 사람을 다루는데요, 이는 나중에 주님의 속 사람과 결합하게 되지요. 겉 사람은 인간 본질(the human essence)이고, 속 사람은 신(神) 본질(the Divine essence)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롯으로, 후자는 아브람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됩니다. 아브람은 인성 가운데 계시는 주님(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을 표상합니다. 참고로 창12부터 이어지는 아브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영유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두 마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속 사람은 무엇이고 겉 사람은 무엇일까요? 속 사람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속 사람보다는 바깥쪽에 있는 마음이며, 그곳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나 귀 같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고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정말로 ‘산다’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이 ‘산다’는 상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말하는데 인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며, 특히 소위 신앙인이라 하는 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 이유는, 그 주된 관심사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이 다분히 ‘겉’에 기반한, 세상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속’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노후나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이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처럼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비로소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의 자아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즉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천국의 비밀’ 1594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삶 가운데 있기(he lives in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때문이며,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 있기(he lives in no charity, and when he is living in no charity it cannot be apparent to him that a life of the love of self and its yearnings is so contrary to heavenly lov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물질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질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오로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뿐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도 자신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진리를 떠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는 까닭은 대개 진리를 섬기기보다 진리가 자신을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둘은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하나가 됩니다. 사람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 안에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에게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갈등하고 그 갈등을 극복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글자의 뜻 그대로만 보면,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보면, 그러니까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보면, 아브람은 주님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고, 롯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속 사람은 선과 진리에 따라 살려 하고, 겉 사람은 세상 욕망과 쾌락을 좇아 살려는 것입니다.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은 주님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 악을 뜻하고, 브리스 사람은 유전 악에 바탕을 둔 거짓된 생각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고, 그 불러들인 시험을 이기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교통 정리하신 후라야, 곧 정하신 선을 벗어나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던 지옥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후라야 영계를 포함, 이 피조 세계 전체가 균형을 되찾고, 그래야 인간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때, 먼저 베를린을 점령당한 독일의 항복에 이어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일본마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항복, 전 세계 온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어 아시아에도 종전이 오고, 드디어 우리 대한민국에도 광복의 날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또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다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이 원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둘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때가 앞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아브람이 계속해서 롯에게 말합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속 사람을 대적하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바로 그 악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그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 여기 ‘나를 떠나가라’의 앞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와‘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에 대한 내용 역시 주석에는 있으나 제가 그걸 쉽게 풀어드리지를 못하겠어서 부득이 뺐습니다. 나중에 좀더 준비가 되면 그때 싣겠습니다.
그러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영적인 빛으로 인해 주님의 겉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요단 지역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단 지역의 이런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했을 때 주님의 겉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교회에 선과 진리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요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 또는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곧 교회를 이루는 진리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가 태고교회처럼 순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 교회의 지식들 속에 선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소알이라는 지역은 선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애굽은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세상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요단 지역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 대항하는 것들이 물러났을 때의 겉 사람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서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게 대적하는 악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롯이 떠나는 것은 주님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결별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 안의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모르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모든 악은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의 사주(使嗾, 남을 부추겨 좋지 않은 일을 시킴)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신앙인들은 교만해지지 않고, 또한 지나친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291-302) 292번 글입니다. 위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주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그리고 아래는 위 ‘주204’ 내용입니다.
주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그러므로 부언하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五感, 다섯 감각, 시, 청, 후, 미, 촉)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자칫 악한 영들을 통해 지옥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브람과 롯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각각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신 이유는,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가르치시며,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사모하거나, 또는 그와는 반대로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그것이 모두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신 안에 여호와가 주장하시는 마음이 있고, 지옥이 주장하는 마음이 있어 서로 다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이 겉 사람의 악과 결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이것은 앞으로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절에서 롯은 요단 지역을 택해 떠났다고 합니다. 요단 지역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지역을 택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의 내면에 세워지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 교회가 되기를 결심할 때,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동안 속 사람을 대적하던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롯이 ‘동으로’(from the east) 옮겨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동쪽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 즉 주님의 교회가 설 자리인 겉 사람의 중심을 속 사람에게 양보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단이란 각자의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 결단이 설 때 속 사람을 대적하던 모든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다음은 어느 경건하신 원로(39생) 여목사님이 보내오신 고백과 그에 대한 저의 답글입니다.
먼저 여종의 글입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목사님, 너무 두렵고 떨리는 말씀, 저는 얼마나 추악한지 모릅니다. 겉치레만 그럴 듯, 속은 형용할 수 없는 내면입니다. 어찌 표현할 수 없이... 자존심에, 이기심에... 감히 글로 표현 못 하겠습니다. ~~~, 끝이 없습니다. 어서 부르시기 전에 변화되어야지요... 죄송하지만 기도해주세요.
저는 목사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어 그 귀한 보화를 무지한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귀한 날이 이르도록...
귀한 긴 시간 소비시켜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가내 평강하소서... 🙏🙏🙏🙏🙏🙏
다음은 다음날 제가 보내드린 답글입니다.
목사님, 다음 글은 ‘천국과 지옥’ 513번 글인데요,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에 나오는 겁니다.
교육은 많은 공동체의 천사들이, 특히 북쪽과 남쪽 공동체의 천사들이 맡는다. 그쪽 천사 공동체들은 선과 진리를 아는 데서 오는 지성과 지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 장소들은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양하며, 모든 영이 각자의 성격과 수용 능력에 따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천국적 선의 종류와 다양함에 따라 구분되고 배치되어 있다. 교육 장소들은 아주 멀리까지 둥글게 퍼져 있다. 교육을 받을 선한 영들은 중간 영계에서의 그들의 둘째 상태가 완료되면 주님의 인도로 이 장소들로 오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들은 세상에서 이미 가르침을 알고 있었고, 주님에 의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다른 길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중 일부는 죽은 뒤 바로 올라가고, 일부는 선한 영들과 잠시 머물면서 세상에서 명예와 재물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애정의 탁한 요소들이 제거되어 정화된 후에 올라간다. 일부는 먼저 버려짐을 겪는데, 이는 낮은 땅이라고 하는 발바닥 밑에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지만, 그릇된 생각을 확신한 사람들이다. 그릇된 생각들은 확신하면 굳게 달라붙고, 그것이 떨어져 나가기 전까지는 진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버려짐의 과정은 ‘천국의 비밀’에서 다룬 바 있다.주278 (HH.513)
이중 ‘주278’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오는데요,
① 내세에는 황폐함(vastations, 버려짐)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고 내세에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것이다. (AC.698, 7122, 7474, 9763)
② 선한 사람들은 거짓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나고, 반면 악인들은 진리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난다. (AC.7474, 7541, 7542)
③ 선한 사람들이 겪는 황폐함은 지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황폐함인데, 이것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함께했던 것들이다. (AC.7186, 9763)
④ 또한 악과 거짓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서 나오는 천국 선과 진리의 유입을 위한 여지, 그리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AC.7122, 9330)
⑤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까지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방해하고, 그들과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AC.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⑥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미리 준비된다. (AC.4728, 7090)
⑦ 준비도 되기 전, 천국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AC.537, 538)
⑧ 황폐함이라는 과정을 마치고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의 내적 밝아짐과 기쁨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리셉션에 관하여 (AC.2699, 2701, 2704)
⑨ 이들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지역을 가리켜 낮은 땅이라고 한다. (AC.4728, 7090)
⑩ 그 지역은 지옥들로 빙 둘러싸인 발바닥 아래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AC.4940–4951, 7090)과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AC.699)
⑪ 그 무엇보다 훨씬 더 감염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지옥들이란 무엇인가 (AC.7317, 7502, 7545)
⑫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황폐하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피하며, 그들로부터 돌아선다. (AC.7768)
⑬ 이들 감염과 황폐의 과정은 악과 거짓의 들러붙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며, 그들의 질과 양에 따라 계속된다. (AC.1106–1113)
⑭ 일부는 황폐화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이 원한다. (AC.1107)
⑮ 일부는 두려워하면서 황폐화 과정을 밟는다. (AC.4942)
⑯ 일부는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세상에서 한 거짓된 생각들로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이 악과 거짓 때문에 근심하고 양심의 큰 고통을 겪는다. (AC.1106)
⑰ 일부는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영적 감금 상태에 있는, 그런 식으로 이 과정을 지나는데, 이 상태는 진리에 관한 무지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다. (AC.1109, 2694)
⑱ 일부는 잠드는 식으로, 일부는 깨어있음과 잠이 든, 그 중간 상태에 있는 식으로 (AC.1108)
⑲ 자기가 한 일을 공으로 여긴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AC.1110)
⑳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엄청한 다양함으로 (AC.699)
//
여기서 예를 들어, ‘AC.699’라는 표현은, ‘Arcana Coelestia 699번 글’이라는 뜻입니다.
‘Arcana Coelestia’는 라틴어로, ‘天界秘義, 천국의 비밀’ 등으로 옮길 수 있고, 이는 주님이 풀어 주시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을 스베덴보리가 총 7년에 걸쳐 딕테이션한 것입니다. 글 번호가 10,837번으로 끝나지요.
목사님, 어제 목사님 마지막 글을 읽고 계속 생각하게 하시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답을 하게 하시네요...
목사님,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사후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을 보긴 보았지만 아주 아주 희귀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지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도 보았답니다.
위 ⑦번 글처럼 저 역시 이 상태로 만일 임종, 그리고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위 ④번 글처럼 사후, 저렇게 천국에 올라갈 준비를 시켜주시는 주님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 역시 ⑬번 글처럼 제게 들러붙은 것들을 떼어내는 과정이 진행되겠지만, 욥의 고백처럼 정금, 순금처럼 정제되어 천국에 올라갈 줄 믿습니다.
목사님이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순금(pure gold)이시며, 극락조(a bird of paradise)이십니다. 목사님은 스스로 자신을 배설물이요, 거기 앉아 있는 파리로 여기시기 때문인데요, 참으로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그런 존재임을 시인, 인정, 그리고 믿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더 이상 자꾸 저거하지 마시고,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호의, 선의 안에 머무르시며, 감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에게 와있는 천사들이 목사님 홀로 계시는 방과 거실을 삼층천 천국 향기로 가득 채우실 줄 믿사오며...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5:27-39)
오늘날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계에 만연하고, 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인 사람 고유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악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개혁되고, 개혁이 되어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신앙으로 개혁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악과 싸우기 전에는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AE.1189:3,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1189번 글 3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the love of rule and the love of riches prevail universally in the Christian world, and these loves at this day are so deeply rooted that it is not known that they in any wise lead astray, it is important that their quality should be set forth. They lead every man astray who does not shun evils because they are sins; for he who does not thus shun evils does not fear God, and therefore remains natural. And as the love of ruling and the love of riches are the natural man’s own loves, he does not see with any interior acknowledgment what the quality of those loves is in him. This he does not see unless he is reformed, and he can be reformed only by combat against evils. It is believed that he can be reformed by faith; but there can be no faith of God in man until he fights against evils. (AE.1189:3, Ager 역)
이는 계시록 18장 23절,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에 관한 주석 중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And the voice of bridegroom and of bride shall not be heard in thee any more)에 대한 내용입니다. //
오늘 본문 27, 8절입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가버나움 세관 앞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주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게 다가가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러자 놀랍게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여기 레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태입니다. 레위는 그렇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 레위는 그들의 원수인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세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힘없는 동족,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도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순경이며 관공서 및 은행이며... 등, 물론 그들이 다 악인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거의 대부분 정말 지독한 악인들이었습니다. 어떨 땐 본토 일본 사람들보다도 더 말이지요. 참고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레위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라는 직업의 내적 의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속뜻으로, ‘레위’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보면,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모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해 제자로 삼으신 걸 의미합니다. 여기 교회 밖의 사람들이란,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새 교회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위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말입니다.
※ 자신의 직업과 관련, 물론 선한 직업이겠지요, 그리고 직업을 쓰임새(use)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 이 쓰임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어떤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생각, 또 이 쓰임, 이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으며, 관련된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레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에게 다가가셔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 과거 삼십 대 중반에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주님께 보답하고자 교회 직원의 삶을 선택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중요한 결정에 비해 허점투성이였던 그 과정에도 불구, 저의 그런 면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날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알게 하시고, 그의 일을 이어받게 하신 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겨 봅니다.
29절입니다.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주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는 이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문을 여는 사람은 바로 레위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그 속뜻으로는 레위가 베푼 잔치가 아니고요, 주님을 향해 문을 여는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구약 규례에서는 부정한 사람이나 죄인들이 제사의 예물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0-21)
이 규례의 의미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은 진리와 선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가지게 되면 진리와 선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모독이며, 그래서 이런 것은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에 관해 전에 제가 정리한 글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 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 곧 네피림을 포함한 이들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
이 규례 속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는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는 인간의 전통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그 전통 지킬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께서 세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들으신 주님께서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의사’는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질병으로 상징되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건강한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주님께 말합니다. 33절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식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금식의 전통은,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16:29-30)
하신 규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렇게 금식은 회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 전통을 전혀 지키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내적 의미로 ‘금식’(禁食)은 자기에게 진리와 선이 없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받을 때입니다. 시험 가운데 ‘나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구나, 진리와 선이 나한테는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중에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심하게 다투거나, 또 악한 유혹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오, 주님! 저에게는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바로 그것이 금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진정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금식이었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스스로 진실하고 선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신랑’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 집 손님들’은 회개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는 사람, 즉 주님과 결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에게 진리와 선은 없고, 대신 악과 거짓만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백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곳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과 결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비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날’은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그때 교회가 주님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있어도 주인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껍데기뿐인 교회만 있는 날이 그날이며, 신랑을 빼앗기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동안 교회들이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더라도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스스로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과의 통로를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마지막 때 신랑을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 역시 타락한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옷’은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고요, ‘낡은 옷’은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포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며, ‘낡은 가죽 부대’는 이전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의 장로의 전통이라던가,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앙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그러한 낡은 가죽 부대로는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 진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이전의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새로운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은 대개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셨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교리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전의 것을 여전히 가진 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결국 둘 다 못쓰게 됩니다. 그런 진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이 타락한 교회의 진리를 고수하고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은 포도주’는 이전 교회의 낡은 진리들이고요, ‘새 포도주’는 새로운 진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진리 체계 허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거듭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교회가 신랑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집니다.
※ 저 역시, 아니 저는 정말 묵은 포도주 버리는 걸 지독하게도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읽는 걸 무슨 종교적 금서(禁書) 읽는 걸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아시고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접근, 곧 먼저 영계에 대한 입문으로 정원 목사의 글들을 읽게 하신 후, 이어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서사라 목사 등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게 하신 후, 강문호 목사님을 통해 수도원, 수도사의 세계로 이끄셨고, 공용복 선생의 시흥영성수련원 등을 알게 하신 후, 그곳을 통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특히 침례교에서 바로 스베덴보리로 점프하는 건 저 같은 사람한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주님은 이렇게 준비의 준비의 준비를 통해 차근차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네비게이토식 제자훈련이 참 신앙인 줄 알았고,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저는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식구들 한분 한분의 모습에서 교회의 성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이 성장은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의 내면에 다양한 보석들이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음을 매일 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빛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회개와 겸손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라고도 부르는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었습니다. 조국이 아니라 로마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고요, 대부분 직위를 이용, 동족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늘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레위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런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하고 음식을 함께 드신다 비난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개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쳤습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끝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사후에 영계에 가서야 자기에게 선과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세상에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가 있고요, 회개하는 자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우리 속에도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의 말을 듣지 말고, 늘 겸손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늘 회개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같이 낡은 진리들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흠 없는 진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새 교회 모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는 영광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in the midst of his tent.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the shoulder, both of them,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 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창9:21-23)
※ 오늘부터는 본문에 영문도 함께 싣겠습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이순철 역)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reby fell into error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drunkard” in the Word. They are called “drunkards” who believe nothing but what they apprehend, and for this reason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And because this is done by means of sensuous things, either of memory or of philosophy, man being what he is cannot but fall thereby into errors. (AC.1072, Clowes 역)
※ 위 인용은 AC(Arcana Coelestia, 라틴,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 1072번 글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창세기 9장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중 ‘취하여’에 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먼저, 오늘 배경입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었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는데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함은 그냥 자기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아니 그러는 게 더 나았을 일을 형제들에게로 가 알려요. 점잖게 말해 ‘알렸다’이지 아마 키득키득 천박, 경박하게 알렸을 겁니다. 함의 말을 듣고 그의 형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가서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이 일은 작은 사고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 말씀에는 영적 교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노아와 그 자손들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의 몰락 후, 주님에 의해 새로 세워진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聖) 문서(스베덴보리가 주님의 계시로 기술한 그의 모든 저작, Writings)에 의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들, 즉 아직 지상에도 퍼셉션(perception)이 있었던 시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말씀을 그때그때 직접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天的, Celestial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 위 퍼셉션에 관해 전에 정리했던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 직관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
천적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즉 사랑이나 선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신앙, 또는 진리가 따라오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노아로 상징되는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靈的, Spiritual Church)입니다. 영적 교회는 지성의 교회입니다. 즉 신앙이나 진리가 먼저이고, 다음에 사랑과 선이 따르는 교회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랑의 교회라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종의 천국에 관한 공리(公理,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 거의 심비(心碑,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일반적, 종류별, 그리고 세부적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나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세 천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사회공동체(societies)로 나누어진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고 하기 때문이다. (HH.20)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HH.21)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HH.22)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서로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HH.23)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聖職)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성경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王權)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성경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the celestial Divine the Lord)에서 ‘예수’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HH.24)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즉시(at once)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perceive),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 34)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는 것’(the taught of Jehovah)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45, 46절에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5, 46) (HH.25)
앞서 말한 대로, 이 천적 천사들이 지혜와 영광에 있어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신적 진리를 생활 속에 직접, 즉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적 진리를 듣자마자 그것을 의도하고 행하며(will and do), 결코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천사들은 어떤 진리를 들으면, 주의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즉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directly) 들어가시고,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님은 선 안으로는 직접 유입하시지만, 진리 안으로는 선을 거쳐 간접적으로 유입하신다. 왜 두 가지가 같은 말이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동에 속한 것은 선이라 부르며, 기억과 거기서 나오는 생각에 속한 것은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진리는 사람의 의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선으로 바뀌어 사랑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그냥 기억과 생각 안에만 머무는 진리는 선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으며,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의지와 의지에서 비롯된 사고 능력(understanding, 이해, 이성)으로 인해 사람인 것이며, 의지를 떠난 사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HH.26) //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했던 천적 교회의 사람들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는데요,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 그리고 네피림과 같은 괴물이 출현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이어 고대교회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는 세 종류, 곧 감람(橄欖,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들 나무는 각각 천적(celestial), 영적(spiritual), 그리고 자연적(natural)인 것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본래 진정한 신앙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릇된 신앙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고, 그릇된 신앙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주님 신앙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입으로만 주님을 신앙할 뿐, 삶은 정반대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또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비밀’ 1072번 글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진정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반대로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합니다.
※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 안에는 순진함, 천진난만함(innocenc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행이 이상하게 순진하지가 않다면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닌 겁니다.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에서 인용 //
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나 말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릇된 교리가 양산되었습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이를테면 오늘 노아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들인 것입니다. 말씀에는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 ‘벌거벗은지라’는 교회 안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추론하거나 왜곡하는 교회에는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잠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것은 고대교회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함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22절입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은 노아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되는 아들로, 영적으로는 부패한 교회를 뜻합니다. 부패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천국의 비밀’ 1076번 글은 부패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지만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해서 신앙을 그 본질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며, 그로 인해 신앙을 죽은 것으로 만든다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 (AC.1076, 이순철 역) A church is said to be corrupted when it acknowledges the Word and has a certain worship like that of a true church, but yet separates faith from charity, thus from its essential and from its life, whereby faith becomes a kind of dead affair; the result of which necessarily is that the church is corrupted. (AC.1076, Clowes 역)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뿐, 삶에 있어서는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는 교회가 부패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부패한 교회의,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들이 생각할 때 잘못된 교리나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는 그들, 곧 잘못된 교리나 신앙을 가졌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날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만약 비난을 할 목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우리는 여기 함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잘못이 아니겠지요. 함의 말을 듣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갑니다. 23절입니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함과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지요. 속뜻으로 셈과 야벳은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셈’은 고대교회 예배의 내적인 것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리고 ‘야벳’은 예배의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즉 제사의 제물들과 의례들을 뜻합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오직 외적이기만 한 예배는 생명 없는 죽은 예배입니다. 반대로 예배의 내적인 것만 있고, 외적인 것이 없다면 내적인 것은 허공중에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만 있고 지상의 교회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의 내면에 속 사람만 있고 겉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없이 어떻게 천국의 시민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 안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안에 동시에 있는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옷을 가져다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뜻하고, ‘하체를 덮었으며’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깨는 힘과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벗은 몸을 똑바로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함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마치 공모를 하듯 진심으로 잘못된 행동에 동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 다음은 셈, 함, 야벳 요약입니다.
셈, 참된 내적(internal) 교회
야벳, 참된 외적(external) 교회
함, 부패한(corrupted) 내적 교회
가나안, 부패한 외적 교회 (AC.1227)
어떤 예배가 참되다 하는 것은 그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사랑의 애정(affection)을 가지고 드려지고 있다는 뜻이고, 어떤 예배가 부패했다 하는 것은 그런 애정 없이 형식적으로, 즉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사랑의 애정을 말하는데, 이걸 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배웠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아들 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달려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로 보고 장점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무섭게 추궁하고 마음속으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의 말을 듣고 급히 옷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깨에 옷을 메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이유 없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 제가 알기로 근처 개신교 교회들이 와서 시위를 하고, 민원을 넣는 등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개축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건축이 늦어지면서 시공비는 엄청나게 인상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잊으라고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듯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생각하고, 분풀이를 하려 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 항상 체어리티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이 잘못을 할 때,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되 결코 동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1, 3)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5:17-26)
주님에 의해 치유 받은 병자들의 신앙은 역사적이라 불리는 신앙이었는데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은 주님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신앙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신앙(this historical faith)은 구원의 신앙(a saving faith)이 생기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역사적 신앙은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AE.815:4,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815번 글 4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called historical, which at that time was a miraculous faith, was meant by this faith whereby the sick were healed; consequently by this faith many wrought miracles at that time. This faith was, that the Lord was Almighty, because He was able to do miracles of Himself; for this reason He also allowed Himself to be worshiped, which was not the case with the prophets of the Old Testament, who were not worshiped. But there must always be this historical faith before it becomes a saving faith; for a historical faith becomes a saving faith with man by his learning truths from the Word, and living according to them. (AE.815:4, Ager 역)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셨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로 하셨던 일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특히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유출 병 걸린 여인을 고치셨으며,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병자들과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 하기도 했고, 그러면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가장 병이 깊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의 병을 치유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신앙인들이 그토록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중풍 병자 역시 그런 신앙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다합니다. 자기 힘으로 고치려고 하는 대신 주님께 의지해서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는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요?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침 그곳에는 갈릴리에서 온 자들도 있었고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교회 밖의 이방인들을 뜻하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타락한 교회 안의 위선자를 뜻합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를 뜻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느 날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볼 때, 갈릴리와 유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왔다는 말씀은, 참 진리가 나타났을 때, 교회 안과 밖에서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나사렛의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를 그렇게 주목했을까요? 다시 말하면, 기독교회 안에서, 또는 밖에서 왜 많은 사람이 새 진리로 나타나신 주님을 주목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로 설명합니다.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진리는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그 속에 주님의 선이 들어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는 주님의 온전한 생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씀의 글자의 뜻을 ‘구름’으로, 그리고 말씀의 속뜻은 구름 속에 빛나는 ‘영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그만큼 글자의 뜻은 어둡고 둔탁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진리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말씀 가운데 능력이 있음을 놀라워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새 교회의 진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이 밝혀주신 참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이 진리에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시하고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주님께로 메고 왔습니다. 18,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중풍 병자가 주님께 가까이 가려 했으나 무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풍 병자는 수족이 마비되어 걷지도 못하고,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 뇌가 손상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 뇌졸중이라고도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암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지요. 영적 의미로 ‘걷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려 해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은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풍 병자’는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나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멀리하려 해도 잘되지 않고요, 선을 행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중풍 병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왜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고, 또 좌절할까요? 그 이유는,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에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행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고, 시험에서 자주 넘어집니다. 지금 중풍 병자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풍 병자와 주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선이 없는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 형태의 진리만 있고, 정작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선은 없는 진리, 바로 그것이 주님과 중풍 병자를 가로막고 있는 벽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병자와 주님 사이를 많은 무리가 가로막고 있는 걸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리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중풍 병자는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 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고민 끝에 깨닫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지붕을 뚫고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붕’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있는 작은 선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상태는 영적인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신앙생활이 멈춰 선 상태, 정체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지금 지붕을 뚫으라고 하세요. 작은 선이라도 행하라 하십니다. 그 작은 선은 어쩌면 그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질병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장병이 있는 사람이 손을 깨끗이 씻는 것 같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식으로라도 조그마한 선한 습관들을 하나씩 몸에 붙이라 하십니다.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붕을 뚫는 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 씻는 일은 병자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주님은 그 일을 권고하십니다. 마침내 병자가 지붕을 뚫고 주님께로 내려왔습니다.
※ 위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달아 내리니’라는 표현은 성서시대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좀 아셔야 이해하실 수 있는데요,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하’ 12장,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붕을 뚫었을까?, 지붕 위의 삶’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 평민들은 사면의 벽은 돌로 쌓고, 지붕은 진흙으로 발랐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는 기와로 지붕을 얹었지만, 평민들은 초가로 지붕을 얹은 것과 같다.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기와지붕을 얹은 반면, 평민들은 진흙 지붕을 얹었던 것이다. 지붕은 먼저 수평으로 뽕나무(돌무화과나무) 가지로 만든 대들보를 깔고, 수직으로 갈대 또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최종 처리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면이 단단한 돌로 싸인 벽과 달리 진흙으로 살짝 덮은 지붕! 그 지붕에 올라가 손으로 흙을 긁어내서 그 틈새로 중풍 병자 친구를 달아 내리면 되겠다!’ 했던 것이다. //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병자를 비롯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십니다. 중풍 병자는 그렇게 주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 천국 가는 것이 누가 대신 표를 끊어줘서 가는 게 아니라 결국 본인의 어떠함, 곧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것처럼, 병 낫는 것, 곧 주님의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 역시 병자 본인의 영적 상태의 문제, 그러니까 병자의 내면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형님 중 한 분이 바로 이 중풍으로 삶을 마치셔야 했는데, 그때 보니 중풍이 깊으면 그 어떤 의사 표시도 하실 수 없더군요.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병자는 고침을 받은 걸 볼 때, 그러니까 그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걸 또 그가 알아듣는 걸 볼 때, 비록 그 육은 저 정도로 중증이었을지라도 그 영, 곧 그의 속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정작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생각하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들은 자연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영적인 것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 질병의 치유가 곧 죄 사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랑의 사람, 가슴의 신앙인들이었다면 저런 판단하는 말 대신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 살리시는 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22절로 24절입니다.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 여기 22절, 23절은 이 설교 원본에도, 그리고 성 문서에도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혹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어떤 퍼셉션이 오게 되면 그때 나누겠습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인자’는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바로 참된 진리입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감각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두 호칭,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글입니다.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그래서 주님은 시험받으실 때 ‘인자’로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오직 진리만 건드릴 수 있을 뿐, 선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그런 감각적인 사람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진실,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증거하실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참 좋은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것은 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25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병자가 일어나서 자기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는 악과 거짓 안에 있던 사람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침상’은 신앙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네 침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교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속뜻’ 137번 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침상, 즉 교리는 그의 학식과 지성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상한 교리를, 어리석은 자는 천박한 교리를, 거짓말쟁이는 불결한 교리를 가진다. (AR.137, 이순철 역)
※ AR(Apocalypse Revealed, 계시록 속뜻) 137번 글에 대한 Whitehead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re everyone’s b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his science and intelligence, magnificent for the wise, mean for the unwise, and filthy for falsifiers. (AR.137, Whitehead 역)
이는 계시록 2장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에 관한 주석 중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Behold I will cast her into a bed, and them that commit adultery with her into great afflicti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그러므로 병자가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회복된 교리를 개인의 의지 안에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집’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병자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결혼애’ 9번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연대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CL.9, 이순철 역)
※ CL(Conjugial Love, 結婚愛) 9번 글에 대한 Warren 영역본 및 Tafel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ou do not know what is meant by the glorification of God. It means to bring forth the fruits of love; that is, faithfully, sincerely, and diligently to do the work of one’s employment—for this is of love to God and of love to the neighbor. And this is the bond of society and its good. (CL.9, Warren 역) //
이 말씀은 제가 새 교회 가르침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남에게 뭔가를 베풀고 봉사하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자기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중풍 병자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중풍 병자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모였던 바리새인들과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이유입니다. 조금 전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가 생각납니다. 네, 이렇게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어떤 것입니까. 놀라운 일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strange th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strange thing, 그러니까 자기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일, 생소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종교나 교파에서는 볼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그 기적이란 주님의 능력에 의해 병자가 일어나는 것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의 능력으로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중풍 병자는 교리의 지식만 붙들고 있을 뿐 거듭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좌절 중에 주님께 가서 병을 고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지붕을 뚫고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붕은 영적 의미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사소하지만 선한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선한 일을 통해서 우리와 결합하시기 때문에 병자에게 그렇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 병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부당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라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어나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몸을 뒤척이거나 표정을 지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술을 끊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일을 정직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또 만나는 사람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술을 끊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지속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주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주님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없었던 모든 영적인 문제가 주님에 의해 해결됩니다. 물론 하루 이틀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요, 세상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병이 치유되고 새사람이 될 때, 이를 통해 믿지 않던 주변 많은 사람에게 새 교회 진리가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진리, 곧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2-16)
주님과 아버지가 합일해 가는 과정을 주님의 겸비의 상태라고 하고, 합일 그 자체를 영화의 상태라고 한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겸비와 영화라 불리는 두 가지 상태에 계셨다는 것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일이다. 전자의 상태, 즉 주님의 겸비의 상태는 말씀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다윗의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사53:12)이러한 상태가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상태, 즉 겸비, 겸손의 상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또 아버지의 뜻을 행하겠다고 하셨으며, 그가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리셨기 때문이다. (TCR.10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10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8)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It is acknowledged in the church that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he prior state, which was the state of exinanition, is described in the Word in many places, especially in the psalms of David and also in the prophets, and particularly in Isaiah (chapter 53) where it is said:
That he emptied his soul even unto death(Isa. 53:12).
This same state was his state of humiliation before the Father; for in it he prayed to the Father; and he says that he does the Father’s will, and ascribes to the Father all that he did and said. (TCR.104, Ager 역)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 들린 환자를 치유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나병(癩病)은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피부병입니다. 오늘날엔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구약 레위기의 기록에 따르면 나병이 걸리면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이 진찰해 나병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나병이 확정되면 환자는 장막 밖으로 격리되어 그곳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먼저 진단을 하고,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내리면 하나님 앞에 정결 예식을 드리고, 그다음에 소속된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아래는 관련 레위기 말씀들입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레13:1-8)
45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13:45-46)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10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11정결하게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2어린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13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4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15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16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17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18아직도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19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레14:1-19)
그러면 나병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병’(癩病, 한센병)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 즉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진리의 모독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진리가 옳다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反)하는 삶을 사는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까 진리를 더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독하는 또 다른 경우는,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진리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진리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 귀찮다. 이렇게 나를 속박하는 것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진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3:28-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 자신, 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알면서 진리를 어기거나, 또 부인하는 일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며 두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진리를 모독하는 죄, 영적인 나병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동네’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라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 내면에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이처럼 ‘한 동네에 계실 때’라 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 말씀처럼,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 하기도 합니다. 배 역시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그때 한 나병환자가 찾아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병환자는 진리를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 또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여기 ‘나병환자’라는 상태는 어떤 종류의 계명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서도 그 계명을 습관적으로 어기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러 주님의 말씀을 어기기야 하겠습니까?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러는 거겠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하셨습니다. 그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신실한 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찾아온 나병환자의 모습입니다. 말씀에는 나병환자가 주님께 엎드렸다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표현합니다. 성(聖)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고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습관이라고 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을까요? 상대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표현할 때 그렇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지극히 높이는 행동입니다. 얼굴은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외적인 부분이 있고, 내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땅에 댄다 할 때는 그냥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요, 내적으로도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적으로 몸을 낮춘다는 것은, 그냥 생각으로만 겸손한 것이 아니고요, 의지로부터도 나오는 겸손함입니다. 의지로부터 나오는 겸손함이란, 주님의 계명을 머리로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굳은 의지를 갖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주님을 높이고 찬양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겸손하다 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애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나병환자가 그런 상태인 것이며, 그 상태에서 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원하시면’이 나오는데요,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죄인인데 과연 주님께서 받아주실까? 라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또한 절실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병자의 말을 들으시고 어떻게 하시나요? 13절입니다.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간절한 마음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한다 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곤 하셨는데요,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을 때, 나병이 떠났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나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경고를 하셨다고 합니다. 경고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여기 주님의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둘째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셋째는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입니다. 주님에 의해 영적 질병의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질병에 들렸던 자는 스스로 완치되었음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병이 완치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같은 범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의 유혹이 있을 때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병은 완치됩니다. 그렇다면 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입증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입니다. ‘이르다’, 즉 말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어떤 진리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과연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이 아니고요, 자신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을 진리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는 진리처럼 보이지만 진리 아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 과하게 선을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 성인들의 말씀에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너무 과하다 싶은 것은 보통 진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킵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자아가 시킵니다. 나병환자가 그동안 병을 떼어내지 못한 이유는, 진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의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생각을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유입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아에서 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따라 그냥 행하라는 뜻입니다.
병의 완치를 입증하기 위한 두 번째 해법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말씀에서 선을 나타냅니다. 주님에 대해 제사장이라 부를 때가 있고, 왕이라 부를 때가 있는데요, 왕으로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주님을, 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은 선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극복할 수 없는 영적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은 대개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삶을 이루는 습관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치고, 그 위에 슬라브와 지붕을 얹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것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습관이 하나 잘못되면 다른 것에도 영향을 줘서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가 있을 때는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의 습관들을 선의 관점에서 하나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습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습관과 행동하는 습관, 일을 처리하는 습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습관 등 어쩌면 진리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말 진정한 체어리티이며 사랑인가를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그에게 너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질병의 완치를 위한 세 번째 해법은,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읽은 레위기 14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정결 예물의 목록이 있습니다.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2-4)
여기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가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것들을 나병환자의 정결 예물로 드리라 하신 이유는, 이 각각의 것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볼까요? 먼저 ‘정결한 새 두 마리’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백향목과 우슬초’를 드리는 것은 각각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내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우슬초는 외적인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먼저 외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정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고, 윤리와 도덕에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반듯하고 진실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그 동기도 진실하고 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의 동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반듯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외적 진리만 드릴 뿐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함께 드리라고 하세요. 따라서 우리가 겉으로 진리에 따라 반듯하게 살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에 있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영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적 질병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의 뿌리는 아직 남아 있는 종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취약하거나 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정결 예물로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우슬초를 함께 드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나병의 완치를 선언하십니다. 다음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는 주님에 의해 치유된 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리이신 주님이 증거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무리가 참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무리’란 속뜻으로는 진리 안에만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들이 무리인데, 그들은 선이 없기 때문에 영적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진리가 있는 교회,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 매개자의 역할을 누가 합니까?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1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여기서 ‘한적한 곳’은 영어 성경에는 광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말씀에서는 광야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광야에 계신다는 것은 곧 시험을 당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지 않았습니까? 왜 광야에 계시는 것을 시험받으시는 상태라고 하느냐면, 극심한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보통 내 안에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극심한 시험의 상태에서는 그런 느낌이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합니다. 주님에게 선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만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겸손의 상태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상에서의 생애 전체는 아버지와 합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일관되게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시험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주님은 한 분이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아버지보다 조금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는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도 주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겸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기도하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 안의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병은 겉으로 보기에도 흉측하고 치유하기가 어려운 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병의 속뜻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병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병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나병의 종류가 아주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이 오랜 것과 오래지 않은 것이 있고요, 외적인 나병과 내적인 나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유될 수 있는 나병이 있고, 치유될 수 없는 나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병’이라고 하면 진리를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병 들린 환자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었습니까?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악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또 병의 완치를 위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이고요, 즉 삶의 모든 습관들 속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주님께 진실한 예물을 드릴 수 있고, 다시는 나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던져주신 또 하나의 메시지는, 주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한편으로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종교의 수도자들처럼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기도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끊임없는 도전을 뿌리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나병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밖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7)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1-11)
물고기는 지혜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영적 사람을 섬기는 자연적 사람에 속한 지식과 인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부는 단순히 지식 안에만 있는 사람들, 자신을 위해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 또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AE.513:1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513번 글 11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fishes” signify the knowledges and cognitions belonging to the natural man that serve the spiritual man as means for becoming wise, so “fishers” mean in the Word those who are merely in knowledges, also those who are acquiring knowledges for themselves, also those who teach others and by means of knowledges reform them. (AE.513:11, Ager 역)
이는 계시록 8장 9절,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 분의 일이 깨지더라’에 관한 주석 중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And there died the third part of the creatures in the sea having souls,)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약 서신서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바울 서신서들입니다. 바울은 유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학파인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바울 서신은 문체가 대단히 유려(流麗)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 서신에 빠져드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반면, 바울에 비해서 오늘 말씀드릴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학식이나 배경에 있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에도 베드로 서신 역시 읽어 보면, 바울 서신과는 또 다른 영감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로 25절입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2-25)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가 이렇게 깊고 명료한, 진솔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어부였던 그가 주님의 특별한 섭리 있으셔서 주님의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음도 느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먼저 그럼, 주님은 왜 물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셨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에서 ‘바다’나 ‘호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있는 진리와 선의 지식 안으로 주님께서 임하시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학문을 배우거나, 또는 신앙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하는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지식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종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잠깐, ‘종교’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는, 기독교회 밖의 사람들, 그러니까 타 종교인들까지 포함, 폭넓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누구는 기독교 가정에, 누구는 불교나 이슬람 등, 또는 무교 가정에 태어납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면서 유대인이거나 나면서 기독교 국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처음부터 말씀 생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더 겸손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유대교 포함)는 그 비율이 30% 정도로 열에 셋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렇듯 다양한 배경 가운데 태어나며, 그러나 그들 또한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래서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저마다의 종교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고, 저마다의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스며들게 하셨으며, 그래서 자기 종교의 교리 중 선한 교리를 따라 나름의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위해 성실하게 사는 걸로 주님 사랑을 표현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교리를 통해 나름의 선한 삶을 살며,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나름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차이는 말씀의 유무에 있으며, 그것은 밝은 빛 가운데 사는 것과 주변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등잔불 빛 아래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어느 누가 진리, 곧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정직한 심령으로 평소 간절히 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와는 상관없이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매우 호의적이며 반갑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지식이 있다고 주님은 아무한테나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오십니까? 2절과 3절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이 말씀에서는 주께서 교리의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 어떤 사람에게 오시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주님은 영적인 어부에게 오십니다. 둘째는 어부 중에서도 자신의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시몬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오십니다. 먼저, 주님이 어부에게 오시는 이유는 ‘어부’는 속뜻으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낚아 올리는 사람들이며, 그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어부가 있습니다. 즉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부는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자칫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할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이웃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진리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전해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부의 배에 오르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이웃은 고사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목회자나 사모, 교회 리더십들 역시 게 중에 참으로 ‘진리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자연적이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의 겉면만, 즉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살펴 그저 지식으로만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 그러니까 내적 의미에 마음을 쏟으며 실제 생활과 삶, 인격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주아주 희귀합니다. 고민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주님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제 안에, 우리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엔 사람들이 모일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얻기 위해 내면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습득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요? 우선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씻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순수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애정이나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때는 우리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면의 그물을 씻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은 시몬의 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가신 이유는, ‘시몬’은 속뜻으로는 순종하는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의 배에 오르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몬은 오래 고기를 잡은 베테랑 어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주님, 제가 이 부분은 잘 압니다. 그러니 제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깊은 곳은 높은 곳과 통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깊은 곳(inmost)은 천적인 등차(等差, degree), 단계, 즉 사랑의 단계를 뜻하고, 보통 깊은 곳은 영적인 단계, 즉 진리의 단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얕은 곳은 자연적인 단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구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는 것과 오른편으로 던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른편도 사랑이요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자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에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시몬과 동료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다고 했는데, 밤은 무슨 뜻입니까? ‘밤’은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인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아침과 낮, 저녁과 밤으로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고 오직 자아에 대한 사랑만 있는 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리의 고기를 잡으려 할 때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일행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습니다.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쏟아붓듯이 진리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내면에 있던 그물이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의 진리에 대한 불순한 애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한 애정이 깨질 때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력이 생깁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어떤 영적 성취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고 하자 시몬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거들자 두 배에 물고기들이 가득하여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됐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찼다’는 것은 교리의 선과 교리의 진리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둘이란 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리 중에는 진리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리의 진리는 무엇이고, 교리의 선은 무엇일까요?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선은 본질에 있어 밖으로 뻗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안으로 단속하고 절제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진리에 가깝다고 보고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교리의 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도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행해야 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먼저 계명에 반하는 악을 행하지 말고, 그런 다음 계명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으려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좀 전에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통해서 내면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된다는 것은 이전 낡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리라 하셨을 때에 신앙이 깊은 시몬조차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놀라 주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8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자아 사랑이 아닌 주님 사랑으로 참 진리를 얻고, 그것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이 없는 진리였고, 그래서 그것으로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참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를 받았을 때, 비로소 자아 사랑으로 했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 큰 죄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9...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시몬에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시몬이 느낀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다니엘이 주님을 뵈었을 때,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계시록을 받는 순간, 요한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느낀 두려움이 모두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에 대한 지극한 겸손과 공경에서 나오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에 의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실 때 우리의 죽었던 영성이 소생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다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이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어떤 것입니까? 이웃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 입니다. 11절에는 시몬 베드로와 동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시자 시몬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섰다고 합니다. 대단한 신앙이고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저는 36세이던 젊은 시절, 대학 후 입사하여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 어느 교회의 교회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아내의 희생을 마다하고 말입니다. 그 결정으로 이후 저희의 삶은 매우 고단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미숙하고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돌려 오늘의 저와 저희 가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특히 제게는 저 표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님은 왜 시몬뿐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제자로 받아들이셨을까요? 그 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삶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만 있어도 안 되고, 체어리티만 있어도 안 되며, 체어리티의 삶만으로도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구체적인 삶이 함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시몬과 야고보, 요한이 모두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과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속뜻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어부는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며, 나아가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어부를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된 어부들은 어떤 자질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첫째, 그물을 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살피면서 그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씻어내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몬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테랑 어부였을 시몬은 목수 출신이셨을 주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이렇듯 훌륭한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질은 잠재적인 것이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여러 차례 기록된 베드로의 성정(性情)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고, 소득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도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자아 사랑으로 시작했고, 그래서 참 진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훗날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약점을 덮으시고, 장점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할 때 주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필요한 어부로 키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시107: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