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그러니까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전자공학을 하던 저는 더더욱...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최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시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시는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저는 주일설교 준비에 거의 한 주를 다 씁니다.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번역의 일이 있음에도, 그리고 원본이 따로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수시로 렌더링, 그러니까 되새김질을 하지요. 보고 또 보고, 늘 다듬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존 설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실 어떤 설교든 그 설교자가 주님과 결합, 성령의 퍼셉션이 있으면 그 설교는 살아있는 겁니다. 이천 년 전, 아니 수천 년 전 신구약 성경이 오늘 우리를 살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누가복음 시리즈는 아쉽게도 맨 처음 몇 편, 그러니까 두 편 정도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분실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그러나 이도 주님의 섭리이지 싶습니다. 나중에 주님 허락 있으시면, 저라도 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따라서 앞에 빠진 부분은 본문 리딩으로 대신합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17)
복음서의 시작이 예사롭지가 않지요? 이 복음서 저자, 그러니까 대필자인 누가의,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시작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는 등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와 같은 기술(記述)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328)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그 맨 처음 글인 318번 글입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주219 (HH.318)
주219. 이교도들도 크리스찬과 더불어 똑같이 구원받는다 (AC.932, 1032, 1059, 2284, 2589, 2590, 3778, 4190, 4197). 저세상에 있는, 많은 수의 교회 밖 나라들과 사람들 (AC.2589–2604) 교회는 특별히 그곳에 말씀이 있으며, 그로 인해 주님이 알려진 곳이다 (AC.3857, 10761). 그럼에도 불구, 말씀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이 알려진, 그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교회 때문이 아닌, 단지 체어리티와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AC.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주님의 교회는 자기 종교를 따라 선하게 살며, 신(神, a Divine)을 시인하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다. 그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지며, 천국에 들어간다 (AC.2589–2604, 2861, 2863, 3263, 4190, 4197, 6700, 9256). //
19절입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 다음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51-58)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 공동체를 말한다. (HH.52) //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 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 우리가 그동안 배운 삼위일체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잘은 모르겠으나 하나이신 삼위일체였다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바로잡아 주신 삼위일체는, 속 사람(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해처럼 방사하시는, 즉 활동하시는(Divine Operation)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계신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입니다. 이는 우리 한 인간이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일상 가운데 활동하는 것과 정확히 매칭됩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입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절,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22절,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86번 글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That “a vision” denotes inmost revelation, which is that of perception, may be seen from the nature of visions, which take place in accordance with the man’s state.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closed, a vision is very different from what it is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open. (AC.1786, Clowes 역, 창15:1)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절,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저는 61년 소띠입니다. 올해로 만 63세네요. 저는 100세는 바라지도 않고, 소명으로 받은 지금 이 일을 어느 정도 마치면 그저 깔끔하게 이 육신을 벗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더욱 바람이 있다면, 천국에서도 제 아내와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인데요, 제 아내는 틀림없는데 저는 암만 생각해도 좀 간당간당하거든요. 웬만큼 제 아내와 주님 속을 썩였어야 말이죠 ㅎㅎㅎ 참고로, 천국은 서로의 선이 비슷해야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30년대 전후반 태생이신 분들은 슬슬 떠날 생각들을 진지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여전히 이 세상 삶에 더욱 마음 기울이고 계신가요? 이제는 슬슬 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한데... 그런데 이런 말씀드린다고 언짢아들 하실까 봐 좀 걱정됩니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말씀에 보면, 이 글 제목처럼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 오세라’, ‘기운이 다하여 죽어’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표현들은 그 겉뜻으로도 그냥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지만, 그러나 그 속뜻이 참 놀라워서 오늘 특별히 제가 이해하는 데까지만 좀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주님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즉 지금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내면 상태와 그 변화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의 속뜻은, 주님 안의 인성(human) 상태가 머잖아 신성(Divine) 상태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육의 어머니 마리아로 말미암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생은 이 인성을 벗고 신성을 입는 과정이었습니다. 거듭 주님은, 속 사람으로서는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활동하시는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한 분 주님이시며, 이것을 생각하면, 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 되셔야만 하셨나를 살짝 깨닫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주님의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대로는 이 피조세계에 나타나실 수 없어 반드시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신적 인간(Divine Human)의 형태로만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들은 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을 지금 자기들이 와있는 사람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나이가 많다’, ‘늙었다’ 같은 지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여기 지상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영적 존재라 지상 언어는 못 읽고, 다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 곧 말씀의 영인 속뜻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런 표현을 접하면, 상태와 그 변화, 곧 인간을 벗고, 천국을 입는 것(to put off what is human, and put on what is heavenly)으로 이해합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나 천국 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실 테니까요. 팔십 평생 이룬 게 많아 덕스럽고 복 받은 인생 살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와 눈물만 남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두 인생이 사후 그 상태가 그 속 사람이 어떤지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국은 속 사람 상태로 들어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고, 눈을 들어 천국을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세상을 꽉 쥐고 살아오셨다면 이젠 놓으시고, 천국을 바라보시며 천국 옷으로 새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이 드는 것’이며, ‘늙는 것’입니다. 말씀 생활에 힘쓰시고, 그동안 이런저런 아쉬웠던 모든 관계를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시고, 진리의 삶으로 마무리하시고요. 천국 가는 건, 흐릿한 데 있다가 밝고 또렷한 데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