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 (16:25-29)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5-29) And Moses said, Eat ye this today, because today is a sabbath to Jehovah, today ye shall not find it in the field. Six days ye shall gather it, and on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it shall not be in it. And it was on the seventh day, there went out some of the people for to gather, and they found none. And Jehovah said unto Moses, How long do ye refuse to keep My commandments and My laws? See ye, because Jehovah hath given you the sabbath, therefore He giveth you on the sixth day the bread of two days; rest ye everyone in his place, let no one go forth from his place on the seventh day (Exdo. 16:25-29).

 

 

오늘은 안식일의 속뜻인 선과 진리의 결합(the sabbath,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16번 글 중,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진리들은 스스로는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과, 선이 진리들을 채택, 자기들 곁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치 내적 시야 아래 펼쳐진 밭처럼 있는데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이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과 일치하는 진리들 가운데서 골라 스스로를 그 진리들하고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는 진리들은 위에 있는 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데요, 이는 완전히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으로 흘러가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 man must know further that truths do not of themselves enter into good, but that good adopts truths and adjoins them to itself; for the truths of faith lie in the memory of a man as in a field extended beneath the interior sight. Good from the Lord flows in through this sight, and chooses from them, and conjoins with itself the truths which are in agreement with it. The truths which lie beneath cannot flow into the good which is above; for it is quite contrary to order, and even impossible, for the lower to flow into the higher. (AC.8516:2)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배우는 진리들은 늘 말씀드리지만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데, 진리들이 이 창고 안에 차곡차곡 어떤 질서에 따라 저장되는 모습은 내적 시야(the interior sight)로 볼 때는 마치 들판에 진리들이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내적 시야로 거기 있는 진리들을 마치 스캔하듯 훑고 나서 필요한 진리를 선택,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삶에 적용하려 할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바로 ‘만나’라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라는 선은 내적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오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진리들 가운데 자기와 맞는 것을 선택, 그것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만나, 즉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은 처음부터 진리와 결합한 상태가 아니고, 들어올 땐 선으로 들어와서는 나중에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결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진리를 준비하면 그때 주님이 선을 보내주시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진리를 보통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데, 사람이 신앙하고, 그러므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 참고로 주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좋게 여기도록 여러 즐겁고 기쁜 일들(things that are pleasant and delightful)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원하는 만큼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여러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즐겁고 기쁜’ 일들을 허락하셔서 이 진리들이, 그리고 그 지식들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을 붙들고 살았더니 내 삶이 형통하네!’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배우기는 선은 의지(will)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는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들어온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가지 그릇인 이해와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해는 진리를, 의지는 선을 받는 그릇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만나라고 하는 선은 의지가 아닌, 이해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 영어 understanding에 대한 ‘이해’(理解)라는 번역이 좀 이상하시면 ‘이성’(理性)으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understanding을 ‘이해력’, ‘사고력’, 혹은 ‘이해하는 능력’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곧이곧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하고는 반대인데요,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아직 진리와 결합한 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지 안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을 먼저 이해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이해 가운데 있는 진리와 결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모종 옮기듯 의지 안으로 옮겨심어 주시지요.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의 본성상 이해와 진리는 어울리지만, 이해와 선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만나는 선 상태로 처음부터 이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해 가운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단 진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에게 진리의 옷을 입혀주시는데, 겉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만나를 ‘작고 둥글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4)

 

작다는 건 진리의 특성을, 둥글다는 건 선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만나는 겉으로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선인, 그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얻어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가 밤새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아침에 그냥 받아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만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만나를 먹는 과정이 곧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 하나 되는 과정입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안식일 이전에 만나를 얻는 상황과 안식일 이후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기 전.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과, 거듭난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05번 글 일부 인용입니다.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에 대한 주석입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은 진리로 행하여 선을 얻습니다(is acquired). 진리는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선으로 행하여 진리를 얻습니다(are procured). 거듭나기 전 사람은 복종으로(from obedience) 행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애정(from affection)으로 행합니다. 이 둘의 상태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전자는 진리가 다스리지만, 후자는 선이 다스립니다. 그러니까 전자에서는 사람은 내려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만, 후자에서는 올려다보거나 앞을 봅니다. 사람이 후자의 상태, 곧 애정으로 행할 때,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는 것도, 진리로 선을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가지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뒤돌아보거나 진리로 선을 행하려 하면, 그는 자신으로 말미암아(from his own)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지만, 선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truth, but through it good is acquired; for truth becomes good with him when it becomes of his will, and thus of his life; but after regeneration he acts from good, and through it truths are procured.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obedience; but after regeneration from affection. These two states are inverse to each other; for in the former state truth rules, but in the latter good rules; or, in the former state man looks downward or backward, but in the latter upward or forward. When a man is in the latter state, that is, when he acts from affection, he is no longer allowed to look back, and to do good from truth, for at that time the Lord flows into the good with him, and leads him by means of the good. If at that time he were to look back, or were to do good from truth, he would act from his own; for he who acts from truth leads himself, whereas he who acts from good is led by the Lord. (AC.8505)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에 대한 복종심, 또는 의무감으로 선을 행하지만, 거듭난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거듭난 다음에는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에 따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선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을 얻지만, 거듭난 후에는 선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선과 진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는 점점 지혜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안식일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은 우리의 일상 중에서 거듭남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진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 좋지 않은 습관이란 반복되는 말투와 표정, 태도와 행동 같은 것이며, 또 그런 습관의 바탕에는 개인의 취향과 애정, 신념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습관이 바뀌려면 그 습관을 형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모두 진리와 선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습관의 바탕에 있는 신념들은 진리로 교체되어야 하고, 애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애정이나 신념들이 주님에 의해 하나씩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엿새 동안 만나를 먹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레째 되는 날 하나의 습관이 완전히 교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마치 진리와 선으로 만들어진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장기 중 하나라도 병들어 있으며 나머지 모든 장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생깁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것도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말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망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주님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이 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나의 존재가 희미해졌구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 안에 주님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려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아집, 고집을 꺾어야 하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개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럽고, 그리고 나 외에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고, 그때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라든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또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같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에는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때, 혼란이 오고 불화가 생기며,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고, 주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고,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 규례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2, 3)

 

주님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죽이라’는 말씀은 정말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피우는 불이나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자아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집착이며,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불도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까요? 첫 번 말씀은 자기의 의도를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교우님들 가운데는 이 말씀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는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적 싸움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안식일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거듭남이 쌓여서 완전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마다 이미 조금씩은 거듭나 있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식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이제 이전처럼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도 내가 원하는 걸 구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말씀 하나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기억 속에 있는 진리로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들어와 기억 속에 있는 진리들과 하나로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한 것 같이 여겨졌던 이 안식일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과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만 준비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식일의 떡을 구워주시고, 안식일의 고기를 삶아 주십니다. 모든 분께 이런 안식일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5, 17-18)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16-05-2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25(D1)-주일예배(2599, 출16,25-29),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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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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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의 속뜻 (2025/5/22)

 

2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2-7)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those who keep the sabbath holy)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those who are in conjunction with the Lord)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a place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being given them in the house of Jehovah, an eternal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their being brought in upon the mountain of holiness)는 그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not doing any work on the sabbath day)는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they should not do anything from their own, but from the Lord; for the angelic state in heaven is that they will and do nothing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and do not even think and speak therefrom: their conjunction with the Lord consists in this)라는 뜻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창세기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2:2)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렘17:24-25)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work on the sabbath)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는 모든 걸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there entering through the gates of the city kings and princes 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 riding in chariot and on horses)는 자기 자신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는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왕들’(kings)은 신앙의 진리들을, ‘고관들’(princes)은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은 이들 진리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병거와 말’(the chariot and horses)은 신앙의 교리들과 지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AC.8495, 출16:23, 내일은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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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  (16:21-24)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16:21-24) And they gathered it morning by morning,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d the sun grew hot and it melted. And it was that on the sixth day they gathered bread double, two omers for each one; and all the princes of the assemblage came and told Moses. And he said unto them, This is what Jehovah spake, A rest, a sabbath holy to Jehovah, is the morrow; what ye will bake, bake ye; and what ye will boil, boil ye; and all that is left over, this lay ye by for you to keep until the morning. And they laid it by till the morning, as Moses commanded, and it did not stink, and the worm was not in it. (Exod. 16:21-24)

 

※ 지난주부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1장이 아닌 16장부터 갑자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 앞부분 원본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훗날 제 역량이 준비가 되고, 주님의 허락 있으시면 그때 마저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을 1절부터 지난주 본문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20)

 

※ 이스라엘의 어느 한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시는 성지순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광야 체험 코스를 반드시 권하신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가이드를 부탁하시는 분들에겐 절대 사양하신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광야의 백성이기 때문에 광야를 자동차 타고 대충 둘러보는 걸로는 참된 순례의 정신을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두 발로 하루를 걸어보아야, 예를 들면, 오늘 이 출애굽기 16장 같은 본문, 그러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하는 그 정황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선교사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다음 말씀들을 보면 실제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한낮 광야 그 타는 열기에서는 구름 기둥으로, 한밤 광야 그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서는 불 기둥으로 돌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1-22)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민14:14)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9:19)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처럼 자기 자녀를 훈련을 빙자, 혹독하게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인생들이 겪는 혹독함은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본인들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 불의의 사고라는 것조차도 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우주에서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 주님을 의뢰하는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돌봄과 보살핌의 약속을 하시는 분입니다. //

 

만나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고 새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 ‘선한 진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통해서나 또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배운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 알았던 진리가 단순히 지식에 그쳤다면 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선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선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선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삶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주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긴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만나라고 하는 진리의 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전에는 잘 변하지가 않아요. 진리 속에 들어있는 선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를 받아먹으면 이전에 즐기던 악한 것, 거짓된 습관들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주님보다 나를 더 믿었다면 이제는 나보다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기서 ‘아침마다’의 속뜻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일단 진리의 선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선을 받는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각 사람의 역량, 곧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 즉시 생활로 옮기는 사람의 역량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선을 많이 주세요. 흘러들어오는 선을 방해할 무슨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선을 받아서 그것을 생활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안 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못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자꾸 더럽히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본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분량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삶으로 살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에 따라 만나를 받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의 속뜻입니다. 말씀에서 햇볕은 보통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반대니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concupiscence)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은 우리 마음에 세상적 욕망이 뜨겁게 일어날 때, 즉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울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 일단 선의 물꼬가 터지면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선의 유입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많이, 어떨 때는 잠시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에는 선이 많이 흘러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많을 때에는 선의 흐름이 중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할 때, 즉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을 내게 주신 주님의 목적 자체에만 충실할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활발하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그 일의 결과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할 때는 선이 흘러들어오다가 딱 멈춥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선의 흐름을 그때그때 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우리의 인생은 천국을 향한 준비 과정이며, 그래서 현재 거듭남의 풀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만나를 소홀히 여기는데요,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11:4-6, 10)

 

그들은 만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며, 그리고 만나 속에는 온갖 순진함과 평화, 안전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갓난아이와 어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며 돌보듯 주님에게 만나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우리도 주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는 세상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걸 몰랐습니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하찮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이나 진리는 청정한 공기와 물,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햇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잠시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바라볼 때, 아니면 가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생명같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자의 내면 상태를 보시고, 그것에 따라 선의 흐름을 조절하십니다.

 

22절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여섯째 날’은 영적인 어떤 상태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그다음 날이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날, 즉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동안 수많은 영적 상태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태 안에서도 여러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일주일에 일곱 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째 날이 지나면 둘째 날이, 둘째 날이 지나면 셋째 날이, 그렇게 해서 여섯째 날이 지나야 하나의 상태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진리와 선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큰 목걸이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째 날인 마지막 단계에 주님은 평소보다 만나를 두 배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뜻으로는 다음 날은 쉬는 날이니까 두 배로 거두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다릅니다. 둘이라는 숫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이란 숫자의 속뜻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두 배를 거두라는 말씀은 그동안 주님이 주셨던 선과 진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반대되는 악이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매일 먹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구요, 또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전, 그러니까 만나를 받기 전에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깁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확실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싸움에서 이긴다고는 하는데, 때로는 완전히 이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때, 그때에는 완전히 이기는 게 아닙니다. 또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대로 선을 행할 때인데요,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백성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직 선과 진리가 결합되었다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까지의 내적 싸움과 수고를 묶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둔지라’의 속뜻, 곧 선과 진리의 결합을 준비하라, 안식일을 준비하라시는 뜻입니다.

 

각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인데요, 여기서 ‘오멜’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능력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두 오멜씩 거두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내가 너희에게 줄 터이니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도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죠.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지금까지 잘했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자’, 그리고 ‘내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 유종의 미를 거두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앞에 두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안식일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 안에 신적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은 원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에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도, 거듭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모든 능력이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지옥과의 싸움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인성 안에 여전히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즉 유전악에 속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과연 완전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옥과 싸워 온전히 이기심으로 불완전한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거룩한 인간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의미는 주님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 되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걸 위해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구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씨앗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씨앗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곧 영적 싸움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 ‘휴일’이라 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를 말하구요, 우리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가 거룩한 것입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울 것을 굽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은 진리이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선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으로는, 즉 ‘오직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바탕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선 없는 진리는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와 선을 하나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의 속뜻입니다. ‘나머지’라는 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선과 진리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선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부터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다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하는 거야. 주님의 명령이니까...’ 하면서 한다면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아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늘 나쁘게 말하지만,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아가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아의 기쁨을 존중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여기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아, 잘난체하고 나만 잘되려는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구요, 거듭남에 따라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천국적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자아를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거듭남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떠날 때까지 타고난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살겠지요.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싸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듭남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습니다. 그 천국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하는 것 같은 기분과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다. 왜 거역했을까요?

 

※ 아마도 ‘내일 염려’(care for the morrow)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일 또 주신다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덜 먹고 아침까지 남깁니다. 오늘 다 먹었다가 혹시 내일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 말입니다. 다음은 천국 천사들의, 이 ‘내일 염려’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HH.278:2)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 18절에,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랬더니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구요, 악취가 풍겼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만나를 남겨두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선이 아닙니다. 그러니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겠죠. ‘악취’라는 것은 그 행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악한 의도입니다. 여기서 악한 의도란 자기만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치 선을 행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 즉 자기를 높이려 한다거나 자기를 선하게 포장하려 하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악취입니다. 그런데 악취가 나는 곳에는 보통은 또 벌레도 생기는데요, 그래서 ‘벌레’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주님은 5절에,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위해 갑절의 만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선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벌레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적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나는 진리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넘어서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을 만나를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밋밋하게 느끼고요, 여전히 세상에서 오는 자극적인 즐거움들을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래서 자아로부터 수시로 욕망이 올라온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 가운데는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욕망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이 사실은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흐름이 중단될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욕망을 따라 사니까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기가 부족하거나 물이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하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이 있구요, 그리고 실질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일같이 영적으로 끌어올리며,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 아침을 열어주시고, 만나를 우리 마음의 지면 위로 하얗게 내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만나가 주는 평화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무언가 모르는 안정감과 은근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선과 진리를 우리 속에서 하나로 만들라는 뜻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선과 진리가 우리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진리에 입각해서, 즉 주님 주신 진리에 기초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선과 연관된 진리가 결합하는 일이 거듭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 되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23절에,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구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가 즐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6-7)

 

아멘

 

 

※ 설교가 길다고 다들 시험 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점일획도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꼭 원고를 함께 제공하는데요, 그 이유는 첫째, 설교 중 제가 무슨 사사로운 말을 할까 봐서이고, 둘째, 설교 중 다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 곧 설교자를 주목할까 봐서입니다. 

 

 

 

원본

2016-05-1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8(D1)-주일예배(2598, 출16,21-24),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pdf
0.55MB

 

 


※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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