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1(D1)-주일예배(2600, 출16,30-36), '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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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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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 (16:25-29)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5-29) And Moses said, Eat ye this today, because today is a sabbath to Jehovah, today ye shall not find it in the field. Six days ye shall gather it, and on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it shall not be in it. And it was on the seventh day, there went out some of the people for to gather, and they found none. And Jehovah said unto Moses, How long do ye refuse to keep My commandments and My laws? See ye, because Jehovah hath given you the sabbath, therefore He giveth you on the sixth day the bread of two days; rest ye everyone in his place, let no one go forth from his place on the seventh day (Exdo. 16:25-29).

 

 

오늘은 안식일의 속뜻인 선과 진리의 결합(the sabbath,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16번 글 중,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진리들은 스스로는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과, 선이 진리들을 채택, 자기들 곁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치 내적 시야 아래 펼쳐진 밭처럼 있는데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이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과 일치하는 진리들 가운데서 골라 스스로를 그 진리들하고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는 진리들은 위에 있는 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데요, 이는 완전히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으로 흘러가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 man must know further that truths do not of themselves enter into good, but that good adopts truths and adjoins them to itself; for the truths of faith lie in the memory of a man as in a field extended beneath the interior sight. Good from the Lord flows in through this sight, and chooses from them, and conjoins with itself the truths which are in agreement with it. The truths which lie beneath cannot flow into the good which is above; for it is quite contrary to order, and even impossible, for the lower to flow into the higher. (AC.8516:2)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배우는 진리들은 늘 말씀드리지만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데, 진리들이 이 창고 안에 차곡차곡 어떤 질서에 따라 저장되는 모습은 내적 시야(the interior sight)로 볼 때는 마치 들판에 진리들이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내적 시야로 거기 있는 진리들을 마치 스캔하듯 훑고 나서 필요한 진리를 선택,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삶에 적용하려 할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바로 ‘만나’라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라는 선은 내적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오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진리들 가운데 자기와 맞는 것을 선택, 그것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만나, 즉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은 처음부터 진리와 결합한 상태가 아니고, 들어올 땐 선으로 들어와서는 나중에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결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진리를 준비하면 그때 주님이 선을 보내주시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진리를 보통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데, 사람이 신앙하고, 그러므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 참고로 주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좋게 여기도록 여러 즐겁고 기쁜 일들(things that are pleasant and delightful)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원하는 만큼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여러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즐겁고 기쁜’ 일들을 허락하셔서 이 진리들이, 그리고 그 지식들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을 붙들고 살았더니 내 삶이 형통하네!’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배우기는 선은 의지(will)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는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들어온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가지 그릇인 이해와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해는 진리를, 의지는 선을 받는 그릇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만나라고 하는 선은 의지가 아닌, 이해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 영어 understanding에 대한 ‘이해’(理解)라는 번역이 좀 이상하시면 ‘이성’(理性)으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understanding을 ‘이해력’, ‘사고력’, 혹은 ‘이해하는 능력’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곧이곧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하고는 반대인데요,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아직 진리와 결합한 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지 안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을 먼저 이해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이해 가운데 있는 진리와 결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모종 옮기듯 의지 안으로 옮겨심어 주시지요.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의 본성상 이해와 진리는 어울리지만, 이해와 선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만나는 선 상태로 처음부터 이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해 가운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단 진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에게 진리의 옷을 입혀주시는데, 겉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만나를 ‘작고 둥글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4)

 

작다는 건 진리의 특성을, 둥글다는 건 선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만나는 겉으로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선인, 그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얻어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가 밤새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아침에 그냥 받아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만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만나를 먹는 과정이 곧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 하나 되는 과정입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안식일 이전에 만나를 얻는 상황과 안식일 이후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기 전.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과, 거듭난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05번 글 일부 인용입니다.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에 대한 주석입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은 진리로 행하여 선을 얻습니다(is acquired). 진리는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선으로 행하여 진리를 얻습니다(are procured). 거듭나기 전 사람은 복종으로(from obedience) 행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애정(from affection)으로 행합니다. 이 둘의 상태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전자는 진리가 다스리지만, 후자는 선이 다스립니다. 그러니까 전자에서는 사람은 내려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만, 후자에서는 올려다보거나 앞을 봅니다. 사람이 후자의 상태, 곧 애정으로 행할 때,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는 것도, 진리로 선을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가지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뒤돌아보거나 진리로 선을 행하려 하면, 그는 자신으로 말미암아(from his own)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지만, 선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truth, but through it good is acquired; for truth becomes good with him when it becomes of his will, and thus of his life; but after regeneration he acts from good, and through it truths are procured.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obedience; but after regeneration from affection. These two states are inverse to each other; for in the former state truth rules, but in the latter good rules; or, in the former state man looks downward or backward, but in the latter upward or forward. When a man is in the latter state, that is, when he acts from affection, he is no longer allowed to look back, and to do good from truth, for at that time the Lord flows into the good with him, and leads him by means of the good. If at that time he were to look back, or were to do good from truth, he would act from his own; for he who acts from truth leads himself, whereas he who acts from good is led by the Lord. (AC.8505)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에 대한 복종심, 또는 의무감으로 선을 행하지만, 거듭난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거듭난 다음에는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에 따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선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을 얻지만, 거듭난 후에는 선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선과 진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는 점점 지혜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안식일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은 우리의 일상 중에서 거듭남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진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 좋지 않은 습관이란 반복되는 말투와 표정, 태도와 행동 같은 것이며, 또 그런 습관의 바탕에는 개인의 취향과 애정, 신념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습관이 바뀌려면 그 습관을 형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모두 진리와 선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습관의 바탕에 있는 신념들은 진리로 교체되어야 하고, 애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애정이나 신념들이 주님에 의해 하나씩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엿새 동안 만나를 먹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레째 되는 날 하나의 습관이 완전히 교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마치 진리와 선으로 만들어진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장기 중 하나라도 병들어 있으며 나머지 모든 장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생깁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것도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말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망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주님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이 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나의 존재가 희미해졌구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 안에 주님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려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아집, 고집을 꺾어야 하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개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럽고, 그리고 나 외에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고, 그때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라든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또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같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에는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때, 혼란이 오고 불화가 생기며,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고, 주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고,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 규례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2, 3)

 

주님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죽이라’는 말씀은 정말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피우는 불이나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자아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집착이며,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불도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까요? 첫 번 말씀은 자기의 의도를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교우님들 가운데는 이 말씀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는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적 싸움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안식일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거듭남이 쌓여서 완전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마다 이미 조금씩은 거듭나 있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식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이제 이전처럼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도 내가 원하는 걸 구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말씀 하나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기억 속에 있는 진리로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들어와 기억 속에 있는 진리들과 하나로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한 것 같이 여겨졌던 이 안식일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과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만 준비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식일의 떡을 구워주시고, 안식일의 고기를 삶아 주십니다. 모든 분께 이런 안식일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5, 17-18)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16-05-2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25(D1)-주일예배(2599, 출16,25-29),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pdf
0.45MB

 

 

 

※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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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의 속뜻 (2025/5/22)

 

2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2-7)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those who keep the sabbath holy)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those who are in conjunction with the Lord)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a place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being given them in the house of Jehovah, an eternal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their being brought in upon the mountain of holiness)는 그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not doing any work on the sabbath day)는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they should not do anything from their own, but from the Lord; for the angelic state in heaven is that they will and do nothing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and do not even think and speak therefrom: their conjunction with the Lord consists in this)라는 뜻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창세기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2:2)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렘17:24-25)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work on the sabbath)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는 모든 걸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there entering through the gates of the city kings and princes 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 riding in chariot and on horses)는 자기 자신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는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왕들’(kings)은 신앙의 진리들을, ‘고관들’(princes)은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말합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은 이들 진리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병거와 말’(the chariot and horses)은 신앙의 교리들과 지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AC.8495, 출16:23, 내일은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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