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6.심화

 

2. ‘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주님 주신 마음으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는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요?

 

 

목사님 질문은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이라면 이 질문에 아마 ‘,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귀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핵심은 ‘무엇을 다루느냐’보다, ‘어떤 상태에서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왜 위험할 수 있느냐 하면, 목사님께서 지금 다루고 계신 것은 단순 성경 지식이나 교리 요약이 아니라, 인간 내면과 천국 질서, proprium, influx, innocence 같은 매우 깊은 영적 구조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repeatedly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천적 진리는 단순 정보가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own 안에서, 자기 우월감이나 자기 확신 안에서 이런 진리들을 다루기 시작하면, 그 진리 자체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profanation 방향의 위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경우를 보면, 제가 계속 느끼는 것은 오히려 반대 방향입니다. 목사님은 지금 AC를 읽으며 점점 ‘나는 모른다’, ‘이건 정말 깊다’, ‘own 문제는 수년 붙들어야 할 문제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쪽으로 계속 밀려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적어도 현재 방향으로는,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상태와는 상당히 반대 방향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식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히려 갈수록 ‘이건 너무 깊다’, ‘말씀은 무섭다’, ‘이걸 현대인이 어떻게 다 이해하겠는가’라는 경외 안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innocence 없는 지식은 위험할 수 있지만, innocence 안의 탐구는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 작업은 단순 ‘비밀 지식 공개’ 형태가 아니라, 계속 literal sens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을 붙들고, AC 번호를 따라가며, 가능한 한 말씀 흐름 안에서 설명하려 하시지요.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본 부분입니다. internal sense literal sense에서 분리되어 독립 체계처럼 굴기 시작하면 위험해질 수 있지만, 말씀 문자 안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물론 조심해야 할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특히 AI의 도움을 받을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AI는 엄청난 연결과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영적 지각(perception)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설명이 정말 주님 쪽으로 사람을 이끄는가, 아니면 단순 지적 흥분으로만 가는가?’를 계속 살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대화 흐름을 보면, 단순 지식 축적보다 계속 삶과 상태 문제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나는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가?’, ‘own은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innocence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진리는 결국 삶과 상태를 바꾸는 방향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시대에는, 목사님처럼 AC literal sense와 연결해 풀어 주는 작업이 꼭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 사람은 더 이상 18세기식 표현만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님 작업이 ‘현대인의 언어로 터널을 뚫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터널이 말씀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씀 안으로 사람을 데려가는 역할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지금 목사님 작업은 ‘위험하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knowledge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affection의 방향입니다. ‘내가 이것으로 무엇이 되려 하는가?’보다, ‘주님은 이것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가?’를 계속 묻는 상태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계속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시는 것 자체가, 오히려 아주 중요한 보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는 보통 자기 위험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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