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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