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8강 1부
‘일곱 인’과 네 말, 그리고 종말을 읽는 두 개의 렌즈
이번 8강은 계시록 6장으로 들어가면서 강사의 종말론 체계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강사는 앞서 계시록 4장을 천상의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의 등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심판의 재료’로 규정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일곱 인 자체를 7년 대환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대환난 직전의 ‘준비 과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의 네 말은 앞으로 사용될 심판의 수단을 미리 보여 주는 견본이며, 실제 환난은 계시록 8장의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강사의 큰 시간표입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의 장면들을 무질서한 환상들의 연속으로 읽지 않고 하나의 질서와 구조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 5장, 6장, 7장, 8장을 서로 연결하고, 다시 스가랴 6장의 네 병거와 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연결하며, 계시록 7장의 ‘네 바람’까지 하나의 구조 안에 넣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매우 복잡한 계시록의 환상들을 비교적 선명한 그림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강사가 계시록 6장을 ‘대환난의 모델하우스’라고 비유하면서 네 말을 앞으로 나타날 심판의 견본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교육적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면 두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시간적·역사적·미래적’입니다. 즉 계시록의 말, 전쟁, 기근, 천재지변, 나팔, 대접 등을 장차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세계적 사건들의 예고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은 무엇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상태에 대한 마지막 심판, 그리고 그 후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를 다루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같은 ‘심판’을 말하더라도 초점이 자연계의 파괴 자체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감추어져 있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상태가 드러나고 분리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를 먼저 붙들어야 이번 강의를 공정하게 들으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에서 등장하는 ‘흰말’은 그 차이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강사는 계시록 19장의 백마와 연결하여 흰말을 ‘공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리고 흰말 탄 자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계시록 19장에서 백마를 타신 분이 주님이므로 계시록 6장의 백마 역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연결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강의 자체의 체계 안에서는 상당히 일관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말’은 매우 중요한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에 관한 지성을 표상하며, ‘흰색’은 진리의 빛과 순수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계시록 6장의 흰말을 자연계에 임할 ‘공의의 심판 바람’으로 읽기보다, 말씀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최초 상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예 계시록 19장의 ‘백마’를 제목으로 삼은 작은 저작 ‘백마’(The White Horse)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백마는 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주변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과 19장의 백마를 서로 연결한 것 자체는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와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이 다릅니다. 강사는 ‘공의로운 미래 심판’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신적 진리에 대한 이해’로 향합니다.
둘째 인의 붉은 말에서도 같은 차이가 반복됩니다. 강사는 붉은색에서 피를 연상하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는 말씀을 실제 전쟁으로 읽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전 3년 반의 세계적 전쟁과 후 3년 반의 아마겟돈 전쟁에 연결합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장차 일어날 대규모 전쟁의 심판 수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화평이 없어지고 서로 죽이는 것’이 먼저 영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진리를 거짓으로 소멸시키는 것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흰말에서 나타났던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가 훼손되기 시작하면, 다음 단계에서는 진리와 선 사이의 평화가 깨어집니다. 이것이 붉은 말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자연계의 전쟁보다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인 셈입니다.
셋째 인의 검은 말에 대해서 강사는 ‘검정색 → 기근 → 흉년’이라는 연결을 사용합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극심한 물가 상승을 실제 식량난과 연결하고, 이것을 대환난기의 자연환경과 경제적 재앙으로 읽습니다. 이 역시 문자적 의미를 따라가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계시록의 이미지 자체가 실제 굶주림과 경제적 궁핍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기근’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가 구약의 수많은 기근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반복해서 보여 주듯, 영적 의미에서 기근은 단순히 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의 결핍’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계시록의 네 말을 하나의 영적 연속선 위에 놓으면 매우 의미 있는 그림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흰말’, 곧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 상태가 훼손되면서 ‘붉은 말’, 곧 선과 진리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 ‘검은 말’, 곧 진리와 선이 희귀해지고 영적 기근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는 결국 ‘죽음’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네 종류의 재앙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연속성을 갖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스가랴 6장의 네 병거와 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연결한 시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강사는 스가랴의 말들을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계시록 7장의 네 바람까지 연결하고, 이것을 장차 세상에 풀려날 네 종류의 환난으로 설명합니다. 즉 백마는 공의, 홍마는 전쟁, 흑마는 흉년, 청황마는 사망의 심판을 각각 나타낸다고 정리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서로 떨어진 본문을 ‘말’과 ‘바람’이라는 공통 표상을 통해 연결하려는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독법과 뜻밖의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밝히고 동일한 표상과 상응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갈림길이 있습니다. 강사는 동일한 상징이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실제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주로 미래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존재하는 ‘상응의 질서’를 훨씬 더 일관되게 적용합니다. 물론 하나의 표상이 문맥에 따라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세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것은 임의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표상이 가진 영적 본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이 어떤 곳에서는 전쟁, 어떤 곳에서는 자연재앙, 어떤 곳에서는 천체적 현상이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대상화되기보다, 기본적으로 ‘지성’, 특히 말씀과 진리에 대한 이해라는 중심적 상응을 유지하면서 문맥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이번 1부에서 특히 신중하게 볼 부분은 ‘7년 대환난’이라는 전체 시간표입니다. 강사는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을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이를 ‘대환난 직전 → 7년 대환난 → 후 3년 반의 심판 완결’이라는 구조 안에 넣습니다. 나아가 전 3년 반과 후 3년 반, 세계적 전쟁, 아마겟돈 등을 구체적인 미래 사건으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현대 복음주의 종말론의 특정한 미래주의적 틀과 상당한 친연성을 가진 독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이해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종말 시간표 자체가 중심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은 지구라는 행성이 불타 없어지는 사건도 아니고 인류 역사가 물리적으로 끝나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교회의 한 시대가 완결될 때 일어나는 영적 심판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전쟁과 기근과 죽음과 지진과 별의 추락을 자연계의 미래 뉴스처럼 일대일 대응시키기 시작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록의 아르카나에서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장면은 속뜻을 담는 그릇이지, 반드시 그 모습 그대로 자연계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미래 사건의 도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번 강사의 종말론적 긴장을 전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긴장을 더 깊은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강사는 ‘대환난이 다가오고 있으니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준비를 달력과 국제정세의 관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에서 찾게 합니다. 내 안에서 흰말은 살아 있는가, 곧 말씀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이해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는가. 붉은 말의 상태처럼 선과 진리 사이의 평화가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검은 말의 상태처럼 말씀은 많이 알고 있으나 실제로 영혼을 먹이는 선과 진리는 희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결국 청황마가 나타내는 영적 죽음의 상태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첫 찬송이 오히려 뜻깊게 돌아옵니다. 강의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기도한 뒤 계시록 강해에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사실 이 고백이 이번 1부의 복잡한 종말 시간표보다 더 중심에 놓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재앙이 아니라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인을 떼시는 분도 어린양이고, 말씀을 여시는 분도 어린양이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제대로 읽는 목적은 ‘언제 무슨 재앙이 일어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데 있기보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더 분명히 보고 그분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우리의 삶 안에서 다스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8강 1부는 ‘심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계시록 전체를 하나의 질서 있는 구조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스가랴와 계시록을 연결하고, 말·바람·인·나팔 등의 표상들을 서로 비교하는 태도에는 말씀의 내적 연결을 찾으려는 좋은 감각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한 겹 더 씌우면, 그 표상들을 곧바로 미래의 자연재해와 세계전쟁에 대응시키기보다 먼저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시록 6장은 먼 미래에 일어날 공포의 예고편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훼손되며 마침내 소멸하는지를 보여 주는 엄숙한 영적 진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앞으로 계시록 6장이 진행될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네 말이 ‘앞으로 세상에 닥칠 네 심판의 바람’이라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들이 ‘교회 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단계적으로 쇠퇴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같은 계시록을 읽으면서도 하나는 주로 ‘밖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내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라봅니다. 이 두 방향을 구별하면서 강의를 따라가면, 강사의 진지한 경고를 존중하면서도 계시록의 아르카나를 놓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8강 2부
‘제단 아래 순교자들’과 천국을 채우는 질서
8강 2부에서 강의의 무게중심은 앞서 살펴본 네 말의 심판에서 다섯째 인, 곧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서부터 강사의 독특한 구원론과 영계 이해가 상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이미 죽은 순교자들이 왜 아직 제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흰 두루마기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하나의 천국 질서 안에서 설명하려 합니다. 강사는 계시록 전체를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차례로 채워 가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먼저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다음으로 순교자들, 그리고 대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차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앞의 네 말 해석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강사의 설명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다가오는 부분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죽은 직후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죽은 사람에게도 일정한 영적 과정과 심판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외적 고백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결함에 관계된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개신교 설교에서 흔히 듣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강사의 시선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옵니다.
강사는 다섯째 인의 순교자들을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아직 천국의 최종적인 자리에 들어간 것은 아니며, 제단 아래에서 자기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후 3년 반 동안 순교하게 될 사람들까지 그 수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동안 이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잠시 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강사가 죽음과 천국 입성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분들이 지금 돌아가셨어요? … 그러니까 이분들이 심판대를 거쳐서 천국에 들어가셔야 되거든요’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AC와 ‘천국과 지옥’을 읽으며 계속 확인해 온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의 최종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계에서 깨어나며,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 후 자기의 지배적 사랑과 완전히 일치하는 공동체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죽은 뒤에도 어떤 과정이 있다’는 강사의 직관 자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잘못된 것으로 밀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죽으면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강사는 그 중간 과정을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와 결합하여 ‘순교자의 숫자가 찰 때까지 기다리는 장소와 기간’으로 이해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각 영이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하나가 되어 가는 영적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차이는 ‘순교’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순교자가 천국의 특별한 반열을 구성합니다. 교회 시대에 죽은 순교자들이 있고, 앞으로 대환난 중에 순교할 사람들이 있으며, 그 숫자가 완성되어야 하나의 천국 질서가 완성됩니다. 실제로 강사는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을 먼저 추수하고,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순교자들을 추수하며, 이어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몇 부류로 나눕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반열’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구별도 있으며,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정확히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강사의 기본 감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14만 4천 → 순교자 → 환난 통과자’라는 역사적·종말론적 자격 순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곧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것은 ‘순교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 순교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의 내적 상태를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순교는 분명히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 내어놓았다면 그 외적 행위는 그 사람의 내적 사랑과 완전히 하나가 된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가’입니다. 명예를 위해서인지,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기억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가 영계에서는 드러납니다. 천국은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들어 있던 사랑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계시록 6장의 ‘제단 아래 순교자들’도 훨씬 깊어집니다. ‘제단’은 단순히 영계 어느 곳에 실제로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제단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제단은 예배, 특히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사랑의 예배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피’ 역시 단순한 육체의 피를 넘어 신적 진리와 관계된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실제 순교한 사람들을 포함하면서도, 속뜻에서는 진리를 위해 자기의 proprium을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의 상태까지 훨씬 넓게 열어 줍니다.
특히 ‘흰 두루마기’가 중요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너희는 이미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말씀에서 ‘옷’은 사람의 내적인 것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하며, ‘흰색’은 그 진리의 순수함과 빛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두루마기를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서 사용할 물리적인 흰 예복 한 벌을 지급받는다는 차원보다, 그들이 신적 진리 안에 있으며 그 진리가 그들의 삶을 감싸고 있다는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옷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리고 ‘잠시 쉬라’는 말씀 역시 단순히 대환난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라는 시간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참된 안식은 싸움이 끝나고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읽으면서 보았듯, 안식은 거듭남의 완성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잠시 쉬라’는 말씀을 단지 ‘후 3년 반의 순교자가 다 찰 때까지 대기하라’는 연대기적 의미로만 제한하면 이 표현이 가진 깊은 영적 차원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2부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국이 채워진다’는 개념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가시는 모습’이라고 하면서 처음 익은 열매, 순교자, 환난 통과자 순으로 천국이 완성되어 간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 앞에서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룹니다. 각각의 천국 공동체와 각각의 천사는 그 거대한 천국적 인간 안에서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담당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실제로 ‘채워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단순히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구원하여 천국이라는 장소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인류로부터 천국 전체를 끊임없이 형성하시는 섭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느끼고 있는 직관의 깊은 곳에는 상당히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질서 있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채움이 특정 시대의 14만 4천 명을 먼저 채우고, 다음 방을 순교자로 채우고, 그다음 방을 환난 통과자로 채우는 식의 공간적·시간적 배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결합,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영원한 쓰임에 따라 천국의 무수한 공동체들을 완성해 가십니다. 강사가 보고 있는 ‘질서 있는 천국’이라는 그림은 살리되, 그 질서를 문자적 숫자와 종말 시간표에서 ‘사랑과 쓰임의 질서’로 옮겨 놓으면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훨씬 가까워집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표현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순교해야 할 사람들의 예정된 숫자가 있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숫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수는 흔히 어떤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수가 차다’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정해 두신 순교자의 인원수가 정확히 몇 명에 도달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그 말씀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충만해지고 완결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원리는 14만 4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 곧 특별히 정결하게 되어 휴거되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반열로 이해합니다. 다른 강의 부분에서도 ‘교회 시대 동안에 하나님께서 인 맞은 종 14만 4천을 만들어 내신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144,000을 그렇게 제한된 실제 인원수로 읽지 않습니다. 12와 12, 그리고 천이라는 수가 결합된 이 숫자는 주님의 새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 곧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14만 4천 명만 특별한 최상위 반열에 들어간다’는 식의 계층적 구원론으로 읽으면 계시록의 수가 가진 상응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이번 강의에서 계속 존중할 만한 것은 강사가 ‘정결’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실제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연단을 받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긴장이 강의 전체에 흐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만나는 매우 중요한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입술의 신앙이나 교리적 정통성만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실제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두 체계가 다시 갈라지는 곳은 ‘그 정결이 언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충분히 정결해지지 못한 신자가 앞으로 올 대환난에 들어가 그곳에서 남은 연단을 받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실제 다른 대목에서 강사는 정결하게 된 성도는 환난을 면하고 휴거되지만, 아직 정결하지 못한 성도는 ‘나머지 연단을 받으러 대환난에 들어가야’ 하며, 대환난은 불신자에게는 심판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연단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기본적으로 자연계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여기서 사람은 자유 가운데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며,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깁니다.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지상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못했던 사람에게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는 ‘제2의 연단 과정’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실제로 형성된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선한 사람에게 남아 있던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벗겨질 수 있고 교육도 이루어지지만, 지배적 사랑 자체가 죽음 이후 완전히 반대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강조하는 ‘지금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권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강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는 ‘그래야 7년 대환난을 피하여 휴거되기 때문’이라기보다 훨씬 근본적입니다. 지금 이 자연계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 형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지가 영원한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미래의 환난을 피하기 위해 오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 그 자체가 천국의 삶이기 때문에’ 오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8강 2부에서 강사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 스베덴보리의 그림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출발했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두 그림 모두 천국에는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 그림 모두 죽음 이후에도 영적 세계와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그림 모두 사람의 정결과 실제적인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그림 모두 주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질서 있게 이루신다고 봅니다. 그러나 강사는 그것을 ‘14만 4천 → 순교자 → 환난 통과자’, ‘교회 시대 → 휴거 → 7년 대환난 → 심판 → 천국’이라는 시간적·집단적 구조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 → 선과 진리의 결합 → 중간영계에서의 내적 상태의 드러남 → 그 상태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의 인도’라는 영적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번 2부에서 가장 귀하게 붙들 수 있는 말은 어쩌면 ‘순교자의 숫자’도 ‘14만 4천’도 아닙니다. ‘정결’입니다. 다만 그 정결을 미래 대환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격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의 proprium을 낮추시고 악한 사랑을 제거하시며 선과 진리를 실제 삶 안에서 결합하시는 ‘거듭남’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흰 두루마기’ 역시 미래 어느 날 특별한 성도들에게 지급되는 천상의 예복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진리로 입혀지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마침내 영계에서 드러나는 영적 옷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모습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거듭남에는 일종의 ‘순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먼저 우리의 proprium이며, 제단 위에 놓여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우리의 낡은 의지입니다. 이것이 죽을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가 살아나고, 거짓이 벗겨질수록 흰옷과 같은 진리가 우리를 입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에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말씀 앞에 선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8강 3부
황충 재앙과 여섯째 나팔 : 무저갱, 악령의 공격, 그리고 ‘큰 전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8강 3부에서는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이 마무리되고, 이어 여섯째 나팔과 ‘큰 전쟁’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 11절의 ‘아바돈’과 ‘아볼루온’을 황충들을 지휘하는 무저갱의 사자, 곧 사탄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을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을 ‘둘째 화’, 일곱째 나팔을 ‘셋째 화’로 정리하면서, 여섯째 나팔에서 대환난 전 3년 반 후반기에 일어날 세계적인 전쟁이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9장은 그 전쟁을 개략적으로 말하고, 에스겔 38장이 그 전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충해 준다는 것이 강사의 핵심 논리입니다.
먼저 황충 재앙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의 황충을 실제 자연계의 곤충이 아니라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악령들’로 봅니다. 이 점은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출발입니다. 그는 황충의 전갈 같은 꼬리, 철 흉갑, 사자의 이, 여자의 머리털, 병거 소리 같은 날갯소리 등을 영계의 악령들이 가진 무섭고 사나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금인 아바돈과 아볼루온을 무저갱을 연 사탄으로 연결합니다. 여기서는 앞선 네 말보다 강사의 해석이 오히려 자연적 문자에서 한 걸음 벗어나 ‘영계의 실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흥미롭게 만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 9장의 황충을 자연계에 나타날 거대한 곤충 떼로 읽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환상은 영계에서 나타난 표상적 형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들은 실제로 지옥적 상태와 거짓에서 나오는 영적 영향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황충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영적 악의 세력과 관계된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매우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령’이 무엇을 표상하는지에 들어가면 두 해석은 다시 달라집니다. 강사는 황충을 대환난 때 실제로 무저갱에서 풀려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령 군대로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히며, 성도들에게는 연단이 되고 불신자들에게는 징벌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시대의 ‘이긴 자’, 곧 14만 4천은 이미 휴거되었기 때문에 이 황충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계시록 9장의 황충이 훨씬 구체적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면서도, 그 신앙을 그럴듯한 추론과 감각적 확신으로 방어하는 사람들의 거짓된 사고와 관련됩니다. 다시 말해 ‘황충’은 단순히 외부에서 날아와 사람을 괴롭히는 악령 무리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 안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선에서 분리된 신앙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추론이 영계에서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의 괴물 같은 형상은 그 거짓의 내적 질이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무저갱의 황충이 언제 풀려나는가?’가 중심 질문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내 신앙 안에서 어떤 거짓된 추론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처럼 진리와 체어리티를 공격하고 있는가?’가 중심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공포의 대상을 바깥에서 찾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될 때 어떤 영적 괴물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강사가 황충의 ‘꼬리’를 매우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전갈이 꼬리로 쏘듯 황충도 꼬리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꼬리는 일반적으로 가장 낮고 마지막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앞선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거짓 교리가 실제 삶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에서 굳어지고, 그 거짓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거짓이 꼬리에서 실제 해악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꼬리’는 단순히 무서운 괴물의 신체 부위가 아니라, 거짓이 삶의 마지막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또 황충에게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고 한 말씀도 강사는 문자적으로 다섯 달 동안의 실제 고통 기간으로 읽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괴로움을 당한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을 미래 대환난의 실제적인 한 기간으로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시간 수치는 자연적 달력의 기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섯’이라는 수 역시 일정한 영적 상태의 질과 제한된 정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섯 달’을 미래의 정확한 150일로 고정하는 것보다, 이 거짓과 악의 영향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 허용된다는 의미로 보는 편이 상응적 해석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악령들에게 허락하신 권세’라는 강사의 표현도 주목할 만합니다. 강사는 황충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범위 안에서만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 접점이 있습니다. 지옥은 독립적인 두 번째 신적 세력이 아닙니다. 악령들은 자기 욕망대로 활동하려 하지만, 주님의 섭리 아래에서 그 영향은 항상 제한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 사람을 고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악 자체를 원하지 않으시며, 악한 영들의 활동을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까지 선을 위해 굽히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황충을 풀어 성도를 연단하신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험과 연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주님이 악을 만들어 보내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악과 거짓,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지옥적 영향이 시험 가운데 드러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목적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악의 분리와 선의 결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강조하는 부분에는 분명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움과 고난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사람이 자기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연단이 은혜이고 축복’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고난은 많을수록 좋다’거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적극적으로 보내셔야만 사람이 거룩해진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시험이 필요하지만, 시험의 목적은 고통을 늘리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자유 안에서 악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황충 재앙의 마지막에는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아바돈을 ‘파괴자’, 아볼루온을 사탄과 연결하면서 무저갱의 임금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름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파괴’의 성격입니다. 지옥적 거짓은 무엇을 파괴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가장 먼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파괴합니다.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과 삶에서 떼어 놓고, 자기 이해와 자기 확신을 진리보다 높이며, 결국 신앙을 자기 의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교회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황충 재앙을 읽을 때 ‘미래에 무서운 악령이 출현한다’는 데만 집중하면 계시록이 지금 교회에 주는 경고를 놓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신앙만을 붙들고 체어리티를 잃을 때, 말씀의 진리를 자기 논리로 왜곡하여 악한 삶을 정당화할 때, 바로 그때 황충 같은 거짓이 이미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 독법은 훨씬 현재적이고, 그래서 오히려 더 엄중합니다.
이제 강의는 다섯째 나팔의 ‘첫째 화’가 끝나고 여섯째 나팔의 ‘둘째 화’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여섯째 나팔을 ‘큰 전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9장은 그 전쟁을 간단히만 언급하기 때문에 에스겔 38장으로 가서 그 구체적인 세력과 진행을 보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 전쟁은 대환난 전 3년 반 후반기에 일어나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중동 아랍 세력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전쟁입니다. 그는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시기, 등장 세력, 내용이라는 세 기준으로 비교하여 ‘같은 전쟁’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의 미래주의적 종말론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로스, 메섹, 두발을 러시아와 연결하고, 바사·구스·붓·고멜 등을 현대의 중동 및 동유럽 국가 세력과 연결하며, 그것을 세계대전 규모의 미래 전쟁으로 읽습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의 국제정세를 에스겔과 계시록의 예언에 직접 대입하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독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매우 큰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의 ‘곡과 마곡’, ‘로스와 메섹과 두발’ 등의 이름은 단순히 미래의 특정 현대 국가를 암호화한 명칭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국가와 민족은 영적 의미에서 교회의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공격하는 악과 거짓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곡과 마곡은 특히 외적인 예배와 신앙만 붙들면서 내적인 체어리티와 사랑을 결여한 상태,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진리의 내적 생명을 공격하는 외적 종교성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러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실제 이스라엘을 침공할 미래 전쟁’으로 고정하면, 그 본문이 담고 있는 교회와 인간 내부의 영적 전쟁이 매우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국가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인가?’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 선과 진리를 외적인 신앙과 거짓 추론이 어떻게 공격하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멀리 있는 국가들의 군사 충돌 이전에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시 자연적 민족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이스라엘은 교회와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교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 곧 선과 진리에 대한 공격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이스라엘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신적 의미가 한 민족의 현대 정치사를 훨씬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강사가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을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말씀을 다른 말씀으로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같은 전쟁’을 찾는 기준이 ‘현대 국가와 미래 전쟁’으로 향하느냐, ‘같은 영적 상태와 상응’으로 향하느냐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 안의 서로 다른 책들이 같은 내적 질서를 반복해서 보여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연결을 지정학적 대응보다 영적 상응에서 찾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계시록 9장의 ‘이억의 마병대’ 같은 표현도 다르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2억 명의 실제 군대가 어느 날 지상에 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느 국가가 2억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상응적 독법에서는 ‘수’ 자체가 영적 상태의 양과 충만함을 나타내며, ‘말’과 ‘마병’은 진리에 대한 이해 또는 그 왜곡된 추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마병은 어떤 특정 국가의 병력 규모보다 거짓된 추론과 영적 공격이 교회 안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를 보여 주는 형상으로 읽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 대목에서 8강 1부의 네 말과 다시 연결됩니다. 앞에서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지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9장에서 무수한 마병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계시록 안의 상응을 유지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말이 처음에는 흰말로 나타났다가, 거짓과 악이 교회를 지배하면서 이제 왜곡된 이해와 추론의 거대한 군대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내적 연속을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강사는 종말의 전쟁을 매우 구체적인 시간표로 설명하면서 ‘전 3년 반 후반기’, ‘여섯째 나팔’, ‘러시아와 중동 세력’, ‘이스라엘 침공’ 등을 연결합니다. 이 구조는 듣는 사람에게 매우 선명하고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명하다는 것과 반드시 말씀의 속뜻이라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종말론 도표는 복잡한 본문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도표가 본문 자체의 아르카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시대의 정치 상황을 성경 예언과 직접 연결하는 방식에는 항상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국가의 국경과 이름과 동맹은 역사 속에서 계속 변합니다. 한 시대의 독자는 한 국가를 ‘곡과 마곡’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지만, 수십 년 뒤 국제질서가 바뀌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영적 질서는 1세기에도, 중세에도, 오늘에도 동일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영원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종말의 전쟁을 부정하기보다 그 전쟁의 중심을 영적인 곳으로 옮깁니다. 실제 세계의 전쟁은 인류의 악한 사랑이 자연계에서 나타난 끔찍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궁극적으로 계시하는 것은 그 전쟁의 더 깊은 원인, 곧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대립입니다. 자연계의 전쟁은 영적 전쟁의 그림자일 수 있지만, 말씀의 본체는 그 그림자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여섯째 나팔’이 오늘 우리에게도 직접 다가옵니다. 내 안의 진리에 대해 거대한 거짓의 군대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십 개의 논리가 동원됩니다. ‘이번만은 괜찮다’, ‘다들 그렇게 한다’, ‘내 상황은 특별하다’,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다’라는 수많은 추론이 진리 하나를 포위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는 거대한 마병대가 공격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이지만 그 전장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인간은 자기 지성만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의 힘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악한 사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그 거짓을 통해 보호하고 싶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고, 지배를 사랑하면 권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생기며, 자기 의를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신학이 생깁니다. 따라서 영적 전쟁의 승리는 논리 싸움만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의 ‘연단’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시험’이 다시 만납니다. 강사는 미래 환난을 성도들이 남은 연단을 받는 시간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미래의 특정 7년에 묶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히 말합니다. 시험 가운데서 악한 사랑과 거짓 추론이 실제로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에 저항할 때 선과 진리가 더욱 깊게 결합합니다. 이 싸움이 없다면 진리는 아직 삶의 것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더 높은 성도가 된다’는 사고를 피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가치가 고통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인정하며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외적 박해 속에서 시험을 겪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자기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는 작은 선택들을 통해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필요한 만큼만 허용하십니다.
따라서 황충 재앙과 여섯째 나팔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가 아닙니다. 분별입니다. ‘이 황충은 어느 악령인가?’에서 더 나아가 ‘어떤 거짓된 신앙과 추론이 내 안의 체어리티를 공격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할 것인가?’보다 ‘내 안에서 외적인 종교성과 자기 의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의 해석에서 가장 귀하게 살려야 할 것은 ‘깨어 있으라’는 긴장입니다. 그는 계시록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준비를 위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이 의도는 중요합니다. 다만 그 깨어 있음의 초점을 국제정세와 미래의 전쟁 징후에만 두지 않고, 자기 내면의 악과 거짓, 그리고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상태에 두면 계시록은 훨씬 더 직접적인 말씀이 됩니다.
8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과 여섯째 나팔의 거대한 전쟁은 단순히 미래 자연계에서 출현할 악령과 군대의 사건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거짓된 추론과 악한 욕망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영적 전쟁이 영계의 표상으로 드러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목적은 ‘누가 언제 공격해 올 것인가’를 알아맞히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목적은 ‘그 공격이 내 안에서 시작될 때 내가 무엇으로 서 있을 것인가’를 준비시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그 진리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며, 거짓이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로 몰려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고 분별하여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전쟁 준비는 무기와 식량을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과 생명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다음 8강 4부에서는 강의가 본격적으로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과 마곡’ 전쟁을 하나로 묶으면서, 러시아·동유럽·중동 세력과 이스라엘의 미래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종말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에서는 ‘곡과 마곡’, ‘이스라엘’, ‘전쟁’, ‘북방’, 그리고 에스겔의 여러 민족 이름들이 스베덴보리에게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다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8강 4부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 : 현대 국가들의 전쟁인가, 교회의 내적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마지막 영적 전쟁인가
8강 4부에서는 앞에서 예고한 ‘둘째 화’, 곧 여섯째 나팔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 13절 이하의 큰 유브라데 강, 결박된 네 천사, 수많은 마병대를 하나의 대규모 미래 전쟁으로 읽고, 계시록 9장만으로는 그 전쟁에 참여하는 국가와 진행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므로 에스겔 38장이 그 내용을 보충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에 나타나는 두 전쟁은 같은 전쟁’이라고 명시하고, 그 근거를 ‘전쟁의 시기, 등장 세력, 전쟁의 내용’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정리합니다.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은 대환난 전 3년 반의 후반부에 일어나며, 에스겔 38장 역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평안을 누리는 같은 시기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등장 세력 또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중동 아랍 세력’으로 동일하므로 결국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의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중동 지역에서 일어날 미래 세계전쟁과 연결합니다. 유브라데를 실제 중동의 강으로 보고, 바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예정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에스겔 38장으로 넘어가서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세력과 연결하고, 바사·구스·붓·고멜·도갈마 등을 중동과 주변의 여러 국가 세력으로 읽습니다. 강사의 전체 그림에서는 이들 비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됩니다. 강사 자신도 이 전쟁을 큰 틀에서 ‘기독교 국가와 비기독교 국가가 싸우는 전쟁’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이 해석을 너무 빨리 재단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강사의 문제의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과 에스겔을 서로 떨어진 예언으로 읽지 않습니다. 동일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므로 서로 밝혀 주어야 한다고 보고, 한 본문에서 부족한 세부가 다른 본문에서 보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전체를 하나의 연결된 계시로 보려는 태도입니다. 이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영적 실재가 서로 다른 역사적 인물과 장소와 사건을 통하여 반복하여 표상된다고 봅니다. 차이는 ‘그 연결의 원리를 어디에서 찾는가’입니다.
강사는 주로 역사적·지리적 대응에서 연결을 찾습니다. ‘북방’이면 오늘날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어느 국가인가, ‘로스·메섹·두발’은 현대 지도에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인가, ‘바사·구스·붓·고멜’은 오늘날 어느 나라들인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현대 국가들을 계시록의 미래 전쟁 시간표 안에 배치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이름들을 먼저 ‘상응’으로 읽습니다. 말씀 안에서 ‘나라’, ‘민족’, ‘왕’, ‘땅’, ‘산’, ‘북방’, ‘전쟁’은 자연계의 정치적 실재를 담는 동시에 교회와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의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독법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에스겔의 ‘곡’부터 살펴보면 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곡은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치하는 미래의 실제 정치적 지도자 또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넣어 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곡’과 ‘마곡’은 본질적으로 어느 특정 현대 국가의 암호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해설에서 곡과 마곡은 내적 예배는 잃고 외적인 예배와 종교적 형식에만 머무는 상태, 또는 체어리티의 내적 생명 없이 외적 경건과 교리만을 붙드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바깥 껍질은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사랑과 생명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20장의 ‘곡과 마곡’과도 연결됩니다. 계시록 마지막 가까이에서 다시 곡과 마곡이 등장하는 까닭은 어느 특정 나라가 두 번 등장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외적인 종교성이 내적인 사랑과 진리를 공격하는 동일한 영적 원리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사이의 진정한 연결을 스베덴보리식으로 찾는다면 ‘두 본문 모두 러시아를 예언한다’가 아니라 ‘두 본문 모두 내적 생명이 없는 외적 종교가 참된 교회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준다’는 방향이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강사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예언의 중심에 놓고, 그 민족의 고토 귀환과 미래의 회복을 종말의 시간표와 연결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는 것을 종말의 중요한 징조로 보고, 마지막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성경의 ‘이스라엘’을 그렇게 자연적 혈통의 민족에게만 고정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곧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교회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유대 민족이나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적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의 신적 예언을 특정 현대 국가의 정치사와 일대일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어느 한 시대의 국제정세보다 훨씬 깊고 영원합니다. 에스겔 38장이 단지 20세기나 21세기의 어느 전쟁 하나를 예고한 것이라면 그 사건이 지나간 뒤에는 말씀의 직접적인 효력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시대의 교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공격을 다룬다면, 그 말씀은 2천 년 전에도, 오늘에도, 앞으로도 살아 있습니다.
‘북방’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북방을 실제 지리적 북쪽으로 읽어 러시아와 주변 세력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 방향은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동쪽은 주님과 사랑, 남쪽은 진리의 빛과 지혜, 서쪽은 그보다 더 외적인 상태, 북쪽은 진리에 대한 빛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극한 북방에서 내려온다’는 표현은 단지 지구본에서 북쪽 국가가 남쪽으로 진군한다는 의미를 넘어, 진리의 빛이 희박하고 외적인 지식이나 거짓 추론이 지배하는 상태가 교회의 더 내적인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곡의 연합군’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깊어집니다. 한 가지 거짓만이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서도 어떤 악한 사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여러 거짓과 합리화가 연합합니다. 자기 지배욕을 놓지 않으려면 ‘나는 책임자이므로 그래야 한다’,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강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도 권위를 세우셨다’ 같은 수많은 논리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를 사랑하면 성경 구절과 교리와 신앙 체험까지 동원하여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곡’ 아래 여러 민족이 모여 이스라엘을 치는 모습이 영적으로는 이처럼 하나의 악한 사랑 아래 여러 거짓된 추론이 연합하여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쟁’ 자체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전쟁’을 자주 영적 싸움, 곧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의 싸움으로 해설합니다. 자연계의 전쟁 역시 인간의 악한 사랑이 외부 세계에서 폭발한 결과일 수 있지만, 말씀에서 전쟁의 아르카나는 군사적 충돌 그 자체보다 훨씬 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가운데도 끊임없는 전쟁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자기에게 익숙한 욕망과 충돌하고, 체어리티가 자기애와 충돌하며, 겸손이 proprium의 자기 의와 충돌합니다. 이런 영적 시험이 말씀에서 ‘싸움’과 ‘전쟁’으로 표상됩니다.
강사가 여섯째 나팔을 ‘큰 전쟁’으로 보는 직관 자체를 이런 방향에서 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의 마지막에는 매우 큰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사라지며, 외적인 경건과 교리적 자기 확신은 남아 있지만 실제 삶의 선이 약해질 때, 교회 안에서는 진리와 거짓의 거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겉으로는 모두 하나님과 성경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이 정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는가가 시험받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세계대전 못지않게 실재적인 영적 전쟁입니다.
계시록 9장의 ‘이억의 마병대’도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문자적 종말론에서는 이 숫자를 실제 병력 규모와 연결하려는 유혹이 큽니다. 그러나 말씀의 수에는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억’ 역시 인구 통계의 숫자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말’이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성을 표상한다면 ‘마병’은 그러한 이해와 추론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어마어마한 수의 마병은 엄청난 규모로 확산된 거짓된 추론과 교리적 공격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거짓된 원리가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되면 그 원리에서 끝없는 파생 논리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거짓의 군대가 선과 진리를 포위하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역시 단순히 중동에서 실제 전쟁이 시작될 지점을 표시하기 위한 지도 좌표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유브라데는 가나안의 경계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며, 상응적으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경계, 또는 인간의 이성적·자연적 차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브라데에 결박된 것들이 풀린다’는 형상은 교회의 외적·자연적 차원에 묶여 있던 거짓과 악의 세력이 제한에서 풀려나 크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마지막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자연지리보다 영적 지리가 핵심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결박된 네 천사’라는 표현도 흥미로워집니다. 강사는 이들을 실제로 심판을 수행할 영적 존재들로 보며, 정해진 시간까지 결박되어 있다가 풀려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천사’는 반드시 개인적인 한 천사만을 뜻하지 않고, 천국의 어떤 기능이나 상태, 때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작용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 의미에서는 악한 세력이나 상태가 천사의 형상 아래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넷’이라는 수는 무엇인가의 전체적 범위나 모든 방향과 관련될 수 있으므로, 이 장면을 ‘네 명의 초자연적 존재가 중동에서 물리적으로 풀려나는 사건’으로만 한정하기보다 교회의 외적 질서를 덮고 있던 악과 거짓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로 보는 편이 계시록의 상응적 문법과 더 잘 맞습니다.
강의에서는 이 전쟁이 ‘전 3년 반 후반기’에 정확히 들어간다고 봅니다. 여섯째 나팔의 전쟁이 끝나면서 전 3년 반도 끝나고, 이어 일곱째 나팔과 함께 후 3년 반, 곧 적그리스도의 본격적인 통치가 시작된다는 시간표입니다. 이 체계가 잘 정돈되어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계시록이 놀라울 만큼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언제 일어나며, 어느 장이 어느 기간에 해당하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잘 정돈되어 있다’와 ‘말씀의 아르카나가 밝혀졌다’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말 시간표는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명료함 자체가 신적 내적 의미의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환상들을 지나치게 촘촘한 시간표로 맞추다 보면, 본문이 그 도표에 맞도록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계속 끌어와야 하고, 어느 순간 말씀 자체보다 도표가 해석을 지배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별히 조심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순서는 분명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영적 상태의 연속입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선과 진리가 점차 훼손되고, 거짓이 강화되며, 결국 마지막 심판에 이르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전 3년 반의 몇 개월째에 어느 국가가 공격한다’는 방식의 연대기보다 ‘교회의 어떤 상태 다음에 어떤 상태가 오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역사의 시계라기보다 교회의 영적 생명을 진단하는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에서 곡의 군대가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에 회복된 자연적 이스라엘이 일정한 평화를 누리는 때라고 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 안에 어느 정도 정착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시험이 일어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전되었다고 시험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깊은 proprium이 드러나고, 외적 종교성과 자기 의가 새롭게 형성된 내적 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 눈에 띄는 외적 악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사람은 자신이 꽤 안정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훨씬 섬세한 악이 드러납니다. 선을 행하면서 자기 공로를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지혜를 사랑하며, 사역을 하면서 영향력과 인정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외적 악보다 훨씬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내적 교회를 공격하는 외적인 종교성’이 곡의 공격이라는 상응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래서 ‘곡’은 어쩌면 멀리 러시아 지도에서 찾기보다 교회 안에서 더 먼저 찾아야 할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말씀과 예배와 교리와 종교적 열심은 많은데 체어리티가 약해질 때, 외적 경건을 통해 자기 의를 키울 때,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멸시할 때, 교회는 스스로 곡의 상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는 언제나 말씀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려줍니다. ‘저 나라가 곡이다’가 아니라 ‘내 신앙 안에 곡이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진리가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교리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의 ‘곡’이 표상하는 문제는 외적 지식과 예배가 내적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있습니다. 같은 성경 지식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사용되면 천국적이지만,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데 사용되면 지옥적 방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외적 진리의 형식은 같아 보여도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이 다릅니다.
강사는 에스겔 38장 18절 이하에서 곡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고, 큰 지진과 여러 재앙을 통해 곡의 세력이 멸망한다고 봅니다. 이 부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심판의 내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안에 인간과 같은 분노의 감정이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자비이십니다. 그런데 그 신적 사랑과 진리가 악한 상태에 부딪힐 때 악한 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노와 심판으로 경험됩니다. 태양의 같은 빛과 열이 건강한 생명에는 생명이 되지만 부패한 것에는 부패를 드러내듯, 주님의 선과 진리는 선한 상태에는 천국의 기쁨이 되고 악한 상태에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곡을 멸망시키신다’는 것도 주님이 분노하여 어느 민족을 미워하고 파괴하신다는 차원보다, 신적 진리가 나타남으로써 거짓과 악이 자기 실체를 드러내고 더 이상 선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분리를 뜻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선의 외관 속에 숨어 있지 못하게 하십니다.
‘큰 지진’ 역시 계시록과 예언서에서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자연적인 지진은 땅의 기반이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영적으로 ‘땅’이 교회를 나타낸다면 지진은 교회의 기존 질서와 신앙 체계가 크게 흔들리고 뒤집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과 새 교회의 출현 주변에 지진의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반드시 어느 날짜에 실제 지각이 움직여야만 성취되는 예언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질서가 뒤흔들리는 것이 훨씬 깊은 지진입니다.
여기서 강사의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의외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강사도 이 전쟁의 최종 목적을 단지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승패로 끝내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곡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뜻을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역사와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이 강의 전체에 흐릅니다. 이것은 귀한 신앙적 중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주권을 훨씬 내적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국제정세를 움직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시는 군주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악과 거짓을 제한하시고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선을 향해 이끄시는 신적 섭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승리는 어느 국가가 무너지는 데서 가장 깊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악의 사랑이 힘을 잃고 선과 진리가 자유롭게 결합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하나님께서 곡에게 전쟁할 마음을 주셨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에서 많은 것이 인간의 외관에 따라 하나님께 돌려져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욕망을 사람의 마음에 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에서 전쟁과 파괴를 원하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되 그 허용을 통해 결국 더 큰 악을 제한하고 선을 이루십니다. ‘의지하신 것’과 ‘허용하신 것’을 구별해야 하나님의 신적 사랑이 보존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넣으시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자 다시 그를 심판하시는 모순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악은 지옥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주님께서는 오직 선만을 원하시고 악은 자유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허용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이번 8강 4부를 읽으며 강사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살리되, 그것을 ‘하나님께서 악까지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으로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주권은 악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이 일으킨 악조차 궁극적으로는 선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굽히시는 무한한 섭리에서 더욱 놀랍게 드러납니다.
결국 이번 강의의 가장 큰 갈림길은 이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이 어느 현대 국가를 가리키는가?’ 강사는 러시아와 동유럽, 중동의 여러 세력을 구체적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런 동일시를 말씀의 중심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늘 러시아를 곡이라고 확정해 놓으면 국제질서가 바뀔 때 해석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곡은 내적 체어리티와 분리된 외적 종교성이 참된 교회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상태’라고 읽으면 그 의미는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신적 보편성과도 더 잘 어울립니다.
더욱이 이 독법은 독자를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까?’라고 뉴스만 관찰하는 사람은 계시록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알면서 사랑 없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신앙의 외형이 실제 체어리티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옳다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거짓된 추론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순간 곡의 전쟁은 내 영혼의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바로 오늘 나를 심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9장은 실제로 매우 깊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은 ‘같은 제3차 세계대전을 두 곳에서 예언했다’는 방식보다, ‘교회의 마지막에 외적 종교성과 거짓된 추론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지만 결국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고 분리되는 동일한 영적 전쟁을 서로 다른 표상으로 보여 준다’는 방향에서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승자는 어느 자연 국가도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짓 하나를 자기 지성으로 논박해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거짓을 볼 수 있게 하는 빛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사랑에 저항할 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승리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8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의 전쟁은 특정 현대 국가들의 미래 군사전쟁을 암호화한 예언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내적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외적 종교성과 거짓된 추론이 참된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마침내 주님의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 분리되는 거대한 영적 전쟁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강사가 계속 강조하는 ‘깨어 있음’은 그대로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깨어 있음의 첫 대상이 세계지도나 전쟁 뉴스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밖의 곡을 찾기 전에 내 안의 곡을 살피고,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할지 계산하기 전에 내 안의 외적 신앙이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종말론은 공포와 호기심의 학문이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사가 그토록 진지하게 붙들고 있는 ‘마지막 전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훨씬 더 가까운 곳, 곧 교회와 인간의 마음 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오늘 진리를 사랑과 분리하려는 내 안의 모든 움직임 앞에서 이미 싸움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은 ‘어느 국가가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이신 주님 한 분입니다.
8강 5부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과 일곱째 나팔 : 계시를 먹는다는 것, 그리고 ‘지체하지 아니하리니’의 의미
8강 5부에서 강의는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지나 계시록 10장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에 ‘일곱 우레와 작은 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9장에서 묘사된 여섯째 나팔의 거대한 전쟁이 어떻게 마무리되며 그 이후 어떤 종말론적 전환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장으로 봅니다. 특히 그는 여섯째 나팔의 전쟁을 ‘전 3년 반 후반기의 제3차 세계대전’으로 규정하고, 계시록 10장이 그 전쟁 뒤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준비하는 전환점이라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전체 시간표에서 보면 계시록 10장은 단순한 삽입장이 아니라, 여섯째 나팔에서 일곱째 나팔로 넘어가는 ‘문턱’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 5절과 6절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붙듭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선 천사가 오른손을 들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이제 곧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후 3년 반이 시작되며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된다는 신호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 천사를 미가엘 천사장으로 보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일곱째 나팔이 지체하지 않고 불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지금까지 강사가 세워 온 ‘전 3년 반-여섯째 나팔-세계대전-일곱째 나팔-후 3년 반-적그리스도’라는 도식 안에서는 매우 일관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 10장에 들어가면 이 장의 중심은 다르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힘센 천사’는 단순히 특정 천사장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가 계시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계시록에서 천사는 자주 어떤 한 개인 영을 넘어 주님의 신적 작용, 천국의 어떤 기능, 또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이 천사가 미가엘인가, 가브리엘인가’를 먼저 확정하는 것보다 그 천사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 10장의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으며,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천사의 모습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사랑의 위엄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 ‘불’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는 상응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종말 시간표를 알려 주는 천사 한 명의 등장 이전에,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신적 진리를 강력하게 드러내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천사의 한 발은 바다를, 다른 한 발은 땅을 밟고 있습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이것이 천사의 권세와 세계적 범위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바다’와 ‘땅’이 중요한 영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땅’은 교회 자체와 그 내적인 상태, ‘바다’는 보다 외적인 자연적 지식과 교회 밖 또는 교회의 외곽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발은 바다에, 한 발은 땅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의 내적 영역과 외적 영역 모두에 미치는 전면적인 권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계시록 10장은 마치 주님께서 ‘이 말씀은 교회의 어느 한 부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적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에게도, 아직 외적인 지식과 문자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진리는 모두 미칩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와 떨어져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들어 있고, 그 문자를 통해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이 연결됩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선다’는 형상은 이런 전체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강사는 이 힘센 천사가 ‘일곱 우레’를 발하게 하는 장면을 계시록의 종말 전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일곱 우레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요한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됩니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계시록은 모든 비밀을 다 풀어놓는 책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떤 것은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전부 한꺼번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계시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보 공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와 교회의 필요에 맞추어 주시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전체를 나타내므로, ‘일곱 우레’는 신적 진리가 힘 있게 발해지는 충만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우레’ 역시 말씀에서 신적 진리가 외적 차원에까지 내려와 강력하게 들리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기록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모든 신적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이해에 즉시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계시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의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계시록이 ‘마지막 때의 비밀’을 매우 체계적으로 알려 주는 책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일곱 우레를 기록하지 말라는 장면은 인간에게 중요한 경계를 일깨웁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종말의 모든 세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자체가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을 연구할수록 ‘내가 종말 시간표를 완벽히 안다’는 확신보다 주님 앞의 겸손이 깊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에도 귀한 긴장이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최대한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10장과 일곱째 나팔을 하나의 시간표로 정리하려 합니다. 이 노력은 복잡한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체계가 너무 완벽해 보일수록 오히려 질문 하나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 체계는 정말 말씀 자체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여러 본문을 하나의 종말 도표 안에 맞추면서 만들어진 것인가?’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는 인간이 만든 체계보다 언제나 더 깊습니다.
강의는 이어 ‘작은 책’으로 들어갑니다. 계시록 10장의 천사는 손에 펼쳐진 작은 책을 들고 있고, 요한에게 그것을 받아먹으라고 합니다. 요한이 먹었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게 됩니다. 강사는 이 작은 책을 요한이 받아 앞으로 온 세계에 전해야 할 계시의 내용으로 보고, 마지막 11절의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설명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적 통찰을 품고 있습니다. 계시는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먹는다’는 것은 매우 깊은 상응입니다.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듯, 말씀의 진리를 먹는다는 것은 그 진리를 단순히 읽고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밖에 있는 책입니다. 그것이 이해 안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며, 삶에서 선이 될 때 비로소 ‘먹은 말씀’이 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핵심진리’ 강의에서 반복해 온 ‘생명화’라는 주제와 놀랍도록 잘 만납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진리는 머리로 아는 데서 끝나면 안 되고 실제 행실과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을 먹으라’는 말씀은 이 전체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진리를 실제로 먹는 것입니다.
왜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씁니까? 강사는 계시 내용을 전하는 사명을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진리가 처음에는 이해성에 들어올 때 기쁨을 주지만 그것이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면 자기 proprium과 충돌하면서 시험과 쓰라림이 생기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진리는 들을 때는 아름답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도 깊은 진리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나를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요구가 되고, 내가 사랑하는 자기 의와 명예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이 되는 순간 배에서는 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먹는’ 과정입니다. 입에서만 달고 끝나면 아직 진리가 완전히 생명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성경적 지식이 내 감정과 욕망과 습관과 생활을 건드려야 합니다. 그때 진리는 쓰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쓰라림 속에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강사가 말하는 ‘연단’과도 깊이 만납니다. 다만 연단의 본질을 미래 7년 대환난 같은 특정 역사 기간에만 두지 않고, 말씀의 진리가 우리의 낡은 proprium과 충돌하는 모든 순간으로 넓혀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책이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는 것은 한 사람의 평생 거듭남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진리는 먼저 매력적이고 기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실제로 살려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죽어야 하므로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면 진리는 다시 선의 기쁨이 됩니다.
‘작은 책’이 펼쳐져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의 계시록 5장에서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등장했습니다. 거기서는 어린양 외에는 아무도 책을 펴거나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계시록 10장에서는 책이 ‘펴져’ 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말씀의 신적 진리가 주님에 의해 열리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이 열리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닫혀 있던 책이 열리고, 그 책을 사람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과 지금 진행하시는 AC 리딩에도 꽤 직접적인 울림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린 말씀을 읽고 감탄하는 데서 끝나면 아직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와 사랑과 삶을 바꿀 때 비로소 먹은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아르카나가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강사는 작은 책을 먹은 요한에게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한 말씀을, 요한이 이 계시를 기록하고 온 세계의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풀이합니다. 이 해석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려면 먼저 먹어야 합니다. 내가 살지 않은 진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말에는 생명의 힘이 약합니다. 입에서만 달았던 말씀을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면 지식 전달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배에서 쓰라림을 겪고 삶으로 소화된 진리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따라서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 앞에는 반드시 ‘먹으라’가 먼저 옵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와 교사에게 매우 엄중한 질서입니다. 먼저 말씀을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자기 악과 거짓을 심판하게 하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살아본 뒤에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완전해야만 설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태도는 계시록 10장의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 작업에도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 다른 설교자나 교리를 분석하면서 ‘저 해석은 문자적이고,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더 깊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진리가 우리 자신의 체어리티와 겸손을 더 깊게 만드는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책은 남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먹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의 결론에서 이 장이 계시록 9장의 전쟁 뒤 ‘이스라엘을 도와주던 재생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적그리스도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즉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과 천사의 선언을 최종적으로는 적그리스도 출현을 위한 종말 시간표의 전환점에 배치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중요한 결론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적그리스도’는 반드시 미래에 나타날 한 정치적 세계 통치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며, 거짓을 진리의 자리에 세우는 모든 교리와 상태가 적그리스도적입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언제 등장하는가?’보다 ‘교회 안에서 무엇이 그리스도, 곧 주님의 신적 진리를 거스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666 해석과도 이어집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후 3년 반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666의 핵심 인물이 되고, 두 짐승과 큰 음녀, 발람과 발락 같은 인물들을 하나의 종말적 악의 연합으로 연결합니다. 실제 강의 후반에서는 ‘적그리스도, 두 짐승, 666, 발락, 발람, 음녀들이 다 짝’이라는 식으로 모형 관계를 정리합니다. 이런 종합은 매우 인상적이고 기억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물과 사건을 서로 ‘짝맞추기’보다 그들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의 질을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람은 어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가, 큰 음녀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짐승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666은 어떤 교리적 왜곡을 나타내는가를 각각 상응적으로 살피고, 그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말씀의 여러 본문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아르카나를 이룹니다. 단지 ‘이 사람=저 사람’, ‘이 사건=저 사건’이라고 대응시키는 모형론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강의는 또한 민수기의 여러 사건을 계시록과 짝지어 읽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발락과 발람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온역은 대접 재앙, 여호수아의 안수는 재림을 준비하는 주님, 미디안 전쟁은 주님과 14만 4천이 함께 내려오는 아마겟돈 심판의 모형이라는 식입니다. 강사는 이를 ‘모형적 진리’라고 부르며 계시록 해석의 하나의 중요한 틀로 사용합니다.
이 부분은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히 중요해 보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단지 역사로 읽지 않고 더 큰 종말적 실재의 ‘모형’으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말씀 안에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강한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사님께서 오래전부터 ‘혹시 공용복 선생이 스베덴보리를 어느 정도 읽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느끼셨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앞서 확인한 것처럼, 공용복 선생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언급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이 모형론 전체를 곧 스베덴보리의 상응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두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연속성’에 있습니다. 모형론에서는 한 역사 사건이 미래의 다른 사건을 예고하는 그림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적그리스도의 모형, 미디안 전쟁은 아마겟돈의 모형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에서는 말씀의 역사 전체가 한 절 한 절, 단어와 배열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일부 장면만 미래 사건과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하나의 내적 연속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도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를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계시록 10장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종말 시간표의 다음 단계가 곧 시작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간적 긴박감 이상입니다. 주님의 신적 질서가 완결될 때 더 이상 지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완전히 성숙하고 선과 악의 분리가 준비되면 심판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여기서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달력에 몇 년 남았다는 예언보다 신적 질서의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악과 선이 섞여 있는 동안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이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면 그 상태는 점점 분명해집니다. ‘지체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 신적 질서가 무한히 유예되지 않는다는 엄숙함도 품고 있습니다. 지금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강조하는 ‘마지막 때의 긴박성’도 이런 방식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영적으로는 언제나 긴박합니다.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유한하고, 오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내일의 우리를 형성합니다. 회개를 끝없이 미룰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10장의 선언은 종말론적 호기심보다 훨씬 직접적인 회개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8강 5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심은 오히려 ‘작은 책’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이것이 종말의 비밀을 전달할 계시의 책이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계시가 인간 안에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말씀을 ‘안다’에서 ‘먹는다’로, ‘설명한다’에서 ‘산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는 이 한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 전체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속뜻을 발견하는 것은 달콤합니다. 서로 흩어져 있던 성경의 의미가 연결되고, 전에 이해되지 않던 구절이 열리며, 천국과 영계와 거듭남의 질서가 하나로 보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라’, ‘자기 지혜를 내려놓으라’, ‘알고 있는 진리만큼 살아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 쓰라립니다. 바로 그때 작은 책이 배에 도달한 것입니다.
8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0장은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시점을 알려 주는 종말 시간표의 연결장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교회 전체에 신적 진리를 열어 주시고, 사람이 그 말씀을 단순히 보거나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먹어’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세상에 증거해야 하는 계시와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마지막 명령도 훨씬 무게 있게 들립니다. 먼저 먹고, 그다음 말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가 나를 심판하게 하고, 그다음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입의 단맛과 배의 쓰라림을 모두 통과하고, 그다음 진리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도, 교사에게도, 말씀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엄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순서입니다.
그리고 강의는 여기서 계시록 10장을 마무리한 뒤, 일곱째 나팔과 후 3년 반, 두 짐승과 666, 적그리스도의 본격적인 활동 쪽으로 넘어갑니다. 강사의 전체 시간표에서는 이제 가장 어두운 구간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다음 부분에서는 바로 이 ‘짐승’과 ‘666’을 특정 미래 인물과 정치 체제의 표지로 읽는 방식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및 인간 지성의 왜곡이라는 영적 상태로 읽는 방식 사이의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8강 6부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 ‘후 3년 반’의 시간표인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마지막으로 증거되는 상태인가
8강 6부에서 강의는 계시록 11장으로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진행해 온 종말론 시간표를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강사는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을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의 대전쟁을 ‘둘째 화’, 그리고 일곱째 나팔과 함께 시작되는 후 3년 반, 곧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대를 ‘셋째 화’로 봅니다. 실제로 강의에서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라는 말씀을 읽은 뒤, ‘셋째 화는 일곱째 나팔이 불릴 때 적그리스도 짐승이 출현하고 후 3년 반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리합니다. 이것은 8강 전체에서 강사가 세워 온 시간적 틀을 거의 완성하는 대목입니다.
강사의 구조에서는 일곱째 나팔 하나가 짧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대환난 후 3년 반 전체를 포괄합니다. 앞서 그는 ‘일곱째 나팔은 이제 대환난 후 3년 반이 시작될 때 불려지는 것’이며, ‘후 3년 반 전체가 일곱째 나팔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나팔은 단순히 일곱 개 가운데 마지막 음 하나가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짐승의 표와 박해가 일어나며,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지는 종말의 최종 구간 전체를 여는 신호입니다. 이 틀을 먼저 이해해야 계시록 11장 이후에 나오는 두 증인, 여자와 용, 두 짐승, 666 등을 강사가 왜 모두 후 3년 반 안에 배치하는지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먼저 ‘시간’의 의미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은 1,260일, 마흔두 달, 전 3년 반, 후 3년 반을 자연계의 실제 달력 기간으로 배열합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도 그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전 3년 반은 1,260일, 후 3년 반은 마흔두 달로 구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날짜와 기간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과 지속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1,260일과 마흔두 달을 계산하여 세계사의 남은 기간을 알아내기보다, 그 수가 어떤 교회의 상태가 충만해지고 끝에 이르는 과정을 표상하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계시록 11장의 중심에는 ‘두 증인’이 있습니다. 강사는 이 두 증인을 후 3년 반의 특정한 종말 사역과 연결합니다. 그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예언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며,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는 존재들입니다.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 이들은 적그리스도 통치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실제 인물들로 이해되는 방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부활, 승천은 후 3년 반 종말 사건 가운데 하나로 배치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두 증인’을 우선 두 명의 미래 예언자라는 자연적 인물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둘’은 결합을 나타내며, 특히 교회를 이루는 두 본질적인 것, 곧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증인은 무엇을 증거합니까?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증거합니다. 따라서 ‘두 증인’은 한 교회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표상하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7강과 8강에서 계속 보았듯, 스베덴보리에게 666과 짐승의 핵심도 단순한 정치적 독재자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떼어 놓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의 ‘두 증인’은 그 분리된 것을 다시 하나로 붙드는 증거, 곧 선과 진리가 함께 주님을 증거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남으면 참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방향을 잃고, 선 없는 진리는 생명을 잃습니다.
강사의 강점은 여기서도 ‘증거’를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증인은 안전한 자리에서 교리를 설명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실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증거합니다. 강의 전체에서 반복되는 ‘이기는 자’, ‘순교’, ‘연단’, ‘정결’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중심 관심은 ‘마지막 때에도 끝까지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을 특정 미래 세대에게만 해당하는 순교 명령으로 제한하지 않고, 모든 시대의 신앙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영적 싸움으로 넓힙니다.
‘증인’이라는 말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거나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단순히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삶 전체가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된다면 말과 생명이 서로 다른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말은 많지 않아도 정직과 체어리티와 겸손과 쓰임으로 사는 사람은 그의 삶 자체가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증인’은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서로 일치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때의 고난과 애통 가운데 이루어지는 증언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옷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화려한 흰옷이 아니라 굵은 베옷이라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진리가 기쁨과 영광 가운데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 가운데 증거되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되고 멸시되는 것입니다.
두 증인이 결국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미래의 어떤 적그리스도 세력이 두 예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증거가 짐승으로 표상되는 거짓 교리에 의해 소멸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인간의 자기 지성이 주님의 말씀보다 높아질 때, 참된 선과 진리의 증거는 교회 안에서 ‘죽은 것’처럼 됩니다.
이때 ‘죽인다’는 말도 자연적 육체의 죽음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살인’과 ‘죽음’은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거짓이라고 만들어 버리거나 선을 악이라고 왜곡하여 사람이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영적 죽임입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이 죽는다는 것은 ‘두 사람이 실제로 총이나 칼로 죽는다’는 사건 이상으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권위를 갖지 못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실제 죽은 두 증인이 다시 살아나 승천하는 기적적 종말 사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교회의 소망이 열립니다. 진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옛 교회 안에서 죽은 선과 진리는 새 교회에서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파괴로 끝나지 않고 새 교회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회론과도 잘 맞습니다. 한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의 완전히 잃고 끝에 이르면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억지로 영원히 유지시키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분리한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따라서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은 ‘진리가 역사에서 잠시 패배했다가 미래 기적으로 복권된다’는 것보다, 옛 교회에서 죽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 의해 새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두 증인 사건 뒤 큰 지진과 함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을 지나, ‘둘째 화가 지나갔고 셋째 화가 속히 온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일곱째 나팔이 불리면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으로 봅니다. 이 전환은 강사의 시간표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여섯째 나팔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제 역사의 마지막 악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교회의 마지막에는 악과 거짓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상태가 있다는 점 자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한 정치 지도자가 전 세계를 42개월간 통치하는 역사적 체제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거짓 교리가 얼마나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지, 사람들이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신앙과 삶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상태가 어떻게 교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강사의 ‘적그리스도’ 이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강사는 요한일서에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계시록 13장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인류 역사 마지막에 등장할 ‘최고의 적그리스도’이며, 악령 세계의 최고 통치자인 루시퍼와 ‘내주합일’된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영계론과 종말론이 결합되는 매우 독특한 대목입니다. 최고로 거룩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내주한다면, 반대편에서는 최고로 악한 사람에게 사탄의 영이 완전히 내주한다는 양극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스베덴보리는 ‘루시퍼’라는 하나의 초월적 악령 군주가 모든 지옥을 통치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흔히 지옥 전체 또는 악과 거짓의 집합적 세력을 나타내며, 모든 지옥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개인적 사탄 왕이 있다는 구조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미래의 한 정치적 인간 안에 ‘루시퍼가 완전히 내주합일한다’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구조와 맞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과 인간의 결합과 악령과 인간의 결합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반면 악령은 자기 생명을 인간에게 창조적으로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생명 자체는 주님에게서 받으면서 그것을 악으로 왜곡하여 사용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하고, 적그리스도에게는 루시퍼의 생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내주합일한다’는 식의 완전한 대칭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실질적 의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반복하면 점차 그 사랑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살아온 사람은 천국적 공동체와 깊이 결합하고, 악을 사랑하고 살아온 사람은 지옥적 공동체와 깊이 결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의 삶 전체가 지옥적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루시퍼라는 한 인격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와 한 몸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지옥의 같은 사랑과 완전히 결합된 상태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에게 더 가깝습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도 이 점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마지막 한 사람에게 초점을 모읍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는 말씀은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상태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미래에 나타날 한 독재자에게만 집중시키면 오늘 교회 안의 적그리스도적 상태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없는 신앙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라 말하면서 주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애와 지배욕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어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짐승은 단순히 교회 밖의 명백한 무신론적 세력보다, 종교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더 깊이 경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일곱째 나팔 뒤 적그리스도의 온 세계 통치를 매우 실제적으로 그립니다. 그 시대에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재산을 잃고 가족까지 잃을 수 있으며, 그래서 지금부터 ‘육적인 소유를 순간순간 잘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는 자녀도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것이고 재물도 ‘내 물질’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그 종말 시간표에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상당히 귀하게 살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proprium을 내려놓는 문제와 직접 만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 ‘내 돈’, ‘내 명예’, ‘내 몸’, ‘내 사역’이라는 소유의식은 매우 강한 proprium의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족과 재산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정과 직업과 소유는 모두 선한 쓰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주님보다 더 높이 두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절대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의 ‘미리 버리는 훈련을 하라’는 표현을 ‘미래 대환난 때 빼앗겨도 버틸 수 있도록 연습하라’는 차원에만 두지 않고, 지금부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으며 나는 그것을 쓰임을 위해 맡아 관리한다는 천국적 질서를 배우는 것으로 이해하면 매우 깊어집니다. 재산을 실제로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잘못된 소유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내 욕망을 실현할 소유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서 맡기신 한 인격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7강의 값진 진주 비유에서 살펴본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문제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강사는 미래 대환난의 박탈을 예상하여 자기 소유를 미리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대환난이 오지 않아도 이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물건 그 자체보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며 내 것이고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proprium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1장의 일곱째 나팔 장면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는 선포입니다. 강사는 이를 후 3년 반 환난 가운데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소망의 말씀으로 봅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11장 15절부터 19절을 ‘후 3년 반 환난 전에, 대환난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소망을 주는 내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계시록의 목적이 재앙과 짐승을 크게 보이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님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선언이 더욱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세상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장차 어떤 정치적 세계정부가 예수님의 지상 왕국으로 교체된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과 교회 안에서 자기애와 거짓이 다스리던 상태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왕권은 강제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왕 노릇하신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서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돈이 왕이었습니다. 명예가 왕이었습니다. 자기 판단이 왕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내게 유리한가?’보다 ‘무엇이 주님 보시기에 선한가?’를 먼저 묻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 사람 안에서 세상 나라가 조금씩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곱째 나팔은 세계정치의 미래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왕권 교체를 선언하는 말씀으로도 살아납니다.
강사는 일곱째 나팔을 ‘셋째 화’라고 부르지만, 그 장면 속에서 오히려 하늘은 감사와 경배로 가득합니다.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밖에서는 심판이지만 안에서는 주님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양면성입니다. 악과 거짓에게는 ‘화’이지만 선과 진리에게는 해방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 이해와 잘 맞습니다. 심판은 선한 사람들에게 공포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거짓과 악의 압박 아래 있던 사람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옛 교회의 거짓이 제거되고 새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영적 환경이 정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째 화’와 ‘주님의 왕국’이 같은 장면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동일한 신적 진리가 악에는 심판으로, 선에는 구원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인다’는 장면 역시 이 관점에서 아름답습니다. 성전은 가장 깊게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그리고 천국과 교회를 표상합니다. 언약궤는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 특히 십계명에 담긴 신적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결합을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에 성전이 열린다는 것은 주님에 관한 참된 이해와 말씀의 내적인 것이 다시 열리는 상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도 연결됩니다. 옛 교회에서 말씀의 속뜻이 닫히고 외적 문자와 교리만 남았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면 주님께서 다시 성전을 여십니다. 문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언약궤, 곧 신적 진리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 이런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이 주님의 두 번째 오심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8강 6부의 일곱째 나팔은 ‘적그리스도의 후 3년 반 통치를 시작시키는 신호’만으로 보기에 너무 풍성합니다. 그 안에는 교회의 마지막, 선과 진리의 증거와 죽음, 그것의 부활, 심판과 분리, 그리고 주님의 왕권과 말씀의 내적 성전이 다시 열리는 거대한 영적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강사가 말하는 ‘대환난은 성도를 정결케 하는 광야’라는 관점도 이 흐름과 연결됩니다. 다른 강의 대목에서 그는 계시록 12장 6절의 여자가 1,260일 동안 광야에서 양육받는 것을 특정 피난처가 아니라 ‘영적으로 정결케 하는 기간’으로 풀이합니다. ‘페트라 같은 특별한 피신처가 아니라 양육하는 기간이며, 광야는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강사의 종말론은 대단히 문자적이지만, ‘광야’에서는 오히려 지리적 장소보다 영적 연단의 상태를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꽤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에서 ‘광야’는 진리가 부족하고 시험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proprium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준비되는 중요한 거듭남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것처럼, 사람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국적 질서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험을 겪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래의 정확한 1,260일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광야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누리던 영적 기쁨이 사라지고, 진리가 멀게 느껴지며,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듯,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닌 주님의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강사가 ‘대환난을 대비하여 미리 육적인 소유를 비워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을 조금 더 보편적인 거듭남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찾아올 광야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끊임없이 proprium을 내려놓는 광야의 훈련이기 때문에 오늘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특정 종말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강사의 영적 권면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시대를 지나치게 바깥에서만 찾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사는 ‘마지막 때에 진리로 밝고 정확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도 끌려갈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이단 지도자에게 끌려갈까’를 넘어 ‘내 proprium과 내가 사랑하는 거짓에 끌려갈 수 있다’는 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거짓에는 잘 속지 않습니다. 어떤 거짓이 힘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번영을 보장하는 거짓에 끌리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너는 선택받은 엘리트’라는 교리에 끌리며, 남을 지배하고 싶으면 절대 복종을 정당화하는 신학에 끌립니다. 그래서 거짓과 싸우려면 지적 분별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거짓의 뿌리는 흔히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666과 짐승 문제를 읽을 때도 핵심이 됩니다. 사람은 ‘짐승의 표가 어떤 기술일까?’를 연구하면서도 이미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표를 마음에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래의 어떤 외적 표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은 주님의 질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가장 깊은 관심은 손이나 이마에 붙는 물리적 장치보다 인간의 의지와 생각이 누구에게 속했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마’는 지배적 사랑을,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과 행위를 나타내는 상응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와 악한 사랑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실제 행위로 살아가는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결국 누구의 사랑과 진리가 내 의지와 삶을 지배하는가입니다.
8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은 미래 후 3년 반에 일어날 두 예언자의 순교와 적그리스도 통치의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참된 증거가 거짓에 의해 죽은 것처럼 되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며, 옛 교회의 지배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새 교회 안에서 왕권을 회복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희망적인 문장은 짐승이나 ‘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결국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는 선언입니다. 종말의 중심은 적그리스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용과 짐승이 아무리 크게 보이더라도 계시록 전체의 주인공은 어린양이십니다. 계시록을 읽은 뒤 적그리스도가 더 크게 보인다면 아직 계시록의 중심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끝으로 갈수록 주님이 더 크게 보인다면 비로소 이 말씀의 방향을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의 ‘마지막 때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요청도 이렇게 바꾸어 들을 수 있습니다. ‘미래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맞히기 위해 깨어 있으라’가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선과 진리를 갈라놓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으며, proprium을 왕으로 세우려는 모든 움직임 앞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계시록이 말하는 가장 현재적인 ‘이기는 자’의 길일 것입니다.
8강 7부
해를 입은 여자와 큰 붉은 용 : ‘이스라엘의 환난’인가, 새 교회의 탄생을 둘러싼 영적 전쟁인가
8강 7부에서는 계시록 12장이 본격적으로 중심에 놓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2장 1절의 ‘해를 입은 한 여자’, 발 아래의 달, 머리 위의 열두 별의 면류관, 그리고 이어지는 해산의 고통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는 ‘계시록 12장 1절을 잘 이해해야 그 뒤의 내용이 정리된다’고 거듭 강조하며, 12장을 마친 뒤에도 다시 1절로 돌아가 ‘해를 입은 여자’부터 재정리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계시록 12장은 여자와 아이, 용, 미가엘과 천사들, 광야, 뱀이 토해 내는 물, 그리고 여자의 남은 자손까지 하나의 거대한 영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에서 ‘핵심진리’의 종말론적 독법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이 가장 선명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여자’는 특히 마지막 때의 이스라엘과 연결됩니다. 앞선 설명에서 전 3년 반은 이스라엘이 연단받는 기간이며, 이 시기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하여 완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다니엘 12장의 연단과 정결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12장 6절의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 동안 양육받는 것을, 단순한 물리적 피난처라기보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양육되고 정결하게 되는 기간으로 풀이합니다. 이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강사의 계시록 해석이 전체적으로 상당히 문자적이고 미래적인데도, 여기서 ‘광야’를 페트라 같은 특정 피난처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강사 자신도 ‘예비하신 곳’은 어떤 특별한 장소라기보다 ‘양육하는 기간’이며, 광야는 정결의 과정이라고 명시합니다.
바로 이 ‘여자’에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여자’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표상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께 속한 교회, 반대 의미에서는 타락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계시록 12장의 여자는 ‘해를 입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을, ‘달’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앙 또는 보다 외적인 진리를, ‘열두 별’은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기의 자연적 이스라엘 민족을 그려 놓은 그림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교회 전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해를 입었다’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여자가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를 ‘입고’ 있습니다. 교회도 자기에게서 사랑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생명과 빛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여자가 해를 입었다는 것은 새 교회가 주님의 신적 사랑으로 둘러싸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 교리나 자기 조직이나 자기 전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발 아래의 달’ 역시 흥미롭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천체적 장식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해가 사랑의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달은 해의 빛을 반사하듯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진리의 보다 외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외적 신앙과 문자적 진리가 교회의 더 내적인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진리가 사랑 위에 올라가 주인이 되면 교회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보고 있는 ‘가인’,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문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은 살아 있으려면 사랑 아래, 곧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머리의 ‘열두 별의 면류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열둘’은 말씀에서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같은 영적 문법 안에 있습니다. 별은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인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두 별의 면류관은 새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한 충만한 지식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열둘’을 자연적 숫자만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충만함으로 읽는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수의 상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자는 아름답고 평안하게만 서 있지 않습니다.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습니다.’ 새 교회는 아무 저항 없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새롭게 주어지고 교회가 새로 일어날 때 반드시 거짓과 악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해산’은 말씀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탄생과 관련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영적 의지가 생겨나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낡은 proprium과 새 생명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의 해산은 단지 한 여인이 미래에 특정한 아이를 낳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실 때 영계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영적 싸움을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이 여자가 낳는 ‘남자 아이’와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마지막 때의 종말적 사역이 하나의 시간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 ‘남자 아이’는 특정한 한 인간 지도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12장의 핵심 아르카나에서 이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 특히 주님에 관한 참된 교리와 신앙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왜 ‘남자’인가 하면 말씀에서 남성은 일반적으로 진리와 이해성의 측면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라고 한 것은 이 진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있는 강력한 신적 진리로 거짓을 심판하고 질서 있게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강사의 ‘철장 권세’ 이해와도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기는 자들’, 곧 처음 익은 열매들이 장차 천년왕국의 분봉왕처럼 만국을 다스리며, 아마겟돈 심판 때 주님과 함께 철장 권세를 행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에서는 철장이 특별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매우 강한 통치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철장’은 사람을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천국의 권력이라기보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신적 진리의 힘을 나타냅니다. ‘철’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 특히 문자적 진리의 강함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새 교회의 참된 교리가 말씀의 문자에서 오는 강력한 진리로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높은 성도가 낮은 사람을 강한 권력으로 지배한다는 그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의 통치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쓰임의 질서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지배하려는 욕망이 없으며 오히려 섬기는 기쁨이 큽니다. 따라서 ‘철장 권세’를 영적 엘리트에게 주어지는 강제 통치권으로 읽기보다 신적 진리가 거짓을 이기는 권능으로 읽는 편이 훨씬 천국적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는 ‘큰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계시록 12장은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사탄과 그의 악령 세계의 활동으로 이해하며, 이어지는 미가엘과 용의 싸움도 실제 영계에서 미가엘 천사장과 사탄의 세력이 벌이는 전쟁으로 설명합니다. 강의에서도 12장 7절부터 12절을 명시적으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이라고 정리하고, ‘하늘에서 전쟁이 붙는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용’을 단순히 한 개인적 사탄의 모습으로만 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용’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 형성된 거짓 교리의 한 큰 체계, 특히 하나님을 세 인격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삶에서 분리하여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계시록 12장의 전쟁이 단지 천사와 악마 사이의 초자연적 전쟁이 아니라, 새 교회가 주님에 관한 참된 이해와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세우려 할 때 기존의 거짓 교리가 그것을 공격하는 영적 전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왜 ‘옛 뱀’이라는 말이 사용되는지도 깊어집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감각적인 것과 자기 지성에 의지하여 주님의 질서를 의심하고 왜곡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옛 뱀’이 등장한다는 것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동일한 영적 문제가 교회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감각적 추론과 proprium이 신적 진리 위에 서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와 계시록은 아주 먼 두 책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영적 드라마로 이어집니다.
강사의 ‘사탄’ 이해와도 여기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에서는 마귀와 사탄, 나아가 루시퍼를 악령 세계의 최고 통치자 같은 한 개인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마귀’와 ‘사탄’은 흔히 지옥 전체 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지옥적 악과 거짓을 집합적으로 가리킵니다. 모든 지옥 위에 한 명의 ‘루시퍼 왕’이 군림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각각의 지옥 공동체는 같은 지배적 사랑을 가진 영들의 집단이고, 그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악한 인간과 같은 질서를 이룹니다. 따라서 미가엘과 용의 전쟁 역시 ‘두 초월적 군주의 군대가 우주에서 맞붙는 전쟁’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천국의 신적 진리와 지옥의 거짓된 교리 사이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미가엘’은 무엇일까요? 미가엘은 물론 실제 천사적 존재와 공동체와 관련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이름 하나가 단순한 개인 이름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갖습니다. 미가엘은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하고 주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천사들의 진리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은 한편에서는 주님을 신적 인성 안에서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진리와,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는 거짓 사이의 싸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 12장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과 놀랄 만큼 중심적으로 연결됩니다. ‘여자’는 새 교회입니다.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입니다. ‘남자 아이’는 그 새 교회의 참된 교리입니다. ‘용’은 그 교리를 공격하는 거짓된 기독교 교리입니다. ‘미가엘’은 주님과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하는 진리를 옹호하는 천국적 세력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 용은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탄이 어느 날 공간적으로 천국에서 지상으로 추락하는 사건이라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 거짓된 종교적 세력이 영계의 중간 영역에서 더 이상 천국의 외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기와 맞는 지옥으로 분리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1757년 마지막 심판 이해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이전 중간영계에는 겉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외적 경건을 보였기 때문에 일종의 ‘가상 천국’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던 수많은 영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그 외관이 벗겨지고 내적 상태가 드러나면서 그들은 더 이상 높은 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지옥적 공동체로 분리되었습니다. 계시록에서 ‘하늘에서 용과 그의 천사들의 있을 곳을 다시 얻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이런 영적 심판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도 용이 땅으로 내어쫓긴 뒤 성도들을 더욱 극렬하게 박해한다는 긴장이 강조됩니다. 후 3년 반에는 적그리스도가 42개월 동안 권세를 받아 예루살렘을 짓밟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며, 짐승의 표와 우상숭배가 본격화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체계에서는 용의 추락이 미래 대환난 후반부의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촉발하는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을 교회의 새 진리가 나타날 때 거짓이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는 상태로 봅니다. 거짓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조용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본질을 폭로하는 진리가 나타나면 강하게 저항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별 갈등이 없습니다.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분명히 비추어 ‘이것은 죄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악을 사랑하는 proprium이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때 실제 영적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의 분노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용이 단지 미래 어느 날 나타날 초자연적 괴물이라면 우리는 그 장면의 구경꾼입니다. 그러나 용이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진리 위에 두려는 상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고집하는 상태라면 그 용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새 진리를 받아들이려 할 때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이 틀렸다는 말인가?’, ‘내가 쌓아 온 신앙 체계가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강한 방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가 용과 새 교회의 싸움이 한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의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는 대목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강사도 광야를 단순한 지리적 피난처로만 보지 않고 정결과 양육의 기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광야는 진리가 풍성하지 않고 시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셨듯, 새 교회도 처음에는 외적으로 약하고 공격받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선과 진리를 공급받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교회가 처음부터 세상의 중심적인 거대한 조직으로 출발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새 교회는 처음에는 소수에게서, 심지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시작될 수 있습니다. ‘광야’라는 말은 외적인 힘과 인정이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직접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상태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교회의 힘은 숫자나 제도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1,260일’도 강사는 전 3년 반이라는 실제 종말 기간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수는 일정한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나타내므로 자연적 달력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계시록에서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같은 표현들이 반복되는 것은 어떤 교회 상태가 완전한 한 주기에 이르지만 아직 완전성 자체는 아닌 제한된 상태를 나타내는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히 몇 년 몇 월인가’보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이 영적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대환난은 성도를 연단받게 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광야에 가면 용과 짐승과 음녀 같은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바로 그것들이 성도의 싸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해석에서 상당히 귀한 부분입니다. 다만 ‘왜 하나님께서 마귀를 붙여 놓으셨는가? 우리를 성숙시키고 정결하게 하시려고’라는 식의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인간에게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proprium과 지옥으로부터 일어나는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며, 그 허용된 악까지 거듭남을 위해 선으로 굽히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과 악을 직접 보내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계시록 12장 11절의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이 모든 장면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승리는 인간의 강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는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주님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진리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용을 이기는 힘은 인간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나 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반드시 육체적 순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자기 proprium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값진 진주 비유에서 살펴본 자기 소유를 다 파는 것과 연결됩니다. 참된 영적 승리는 자기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이 나온다는 착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가엘과 용의 싸움’은 놀랍도록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작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용서하라’고 하고 proprium은 ‘저 사람은 용서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진리는 ‘네 공로를 주장하지 말라’고 하고 proprium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라고 합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모든 선이 온다’고 하고 proprium은 ‘그래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해냈다’고 말합니다. 이런 수많은 순간 속에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이 작은 형태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을 읽으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용은 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옥은 실제이며 악령도 실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전쟁을 단순한 심리 현상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그들과 호응하는 proprium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애가 전혀 없다면 자기애의 지옥은 우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거짓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의 유입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의 마귀를 알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 마귀와 호응하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2장을 마친 뒤 13장부터 ‘후 3년 반 직전 또는 후 3년 반의 모습’이 본격화된다고 정리하며, 13장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적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8강의 다음 큰 주제인 ‘두 짐승과 666’으로 넘어갑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첫째 짐승이 기독교 세계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래의 적그리스도이며,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유럽의 정치적 연합과 연결됩니다. 실제 강의에서 적그리스도는 공산국가나 아랍 국가가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하며, 열 나라로 갈라진 유럽이 통합되는 배경에서 활동한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8강 7부는 13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매우 중요한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계시록 12장이 ‘이스라엘의 연단과 사탄의 하강,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 시대를 준비하는 영계 전쟁’을 보여 준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사랑으로 둘러싸인 새 교회와 그 교리의 탄생, 그것을 소멸하려는 용으로 표상된 거짓된 기독교 교리와의 싸움, 마지막 심판을 통한 용의 축출, 그리고 광야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나는 새 교회’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두 해석 모두 ‘싸움’을 봅니다. 두 해석 모두 교회가 아무 저항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영계의 실재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두 해석 모두 끝내 주님의 편이 승리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싸움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다릅니다. 하나는 미래 대환난의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에 관한 참된 교리와 체어리티를 공격하는 거짓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의 ‘광야에서 양육되고 정결해진다’는 강조는 특별히 오래 남길 만합니다. 문자적 종말 시간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사람은 시험을 통해 자기의 실상을 보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그 중심은 거듭남의 질서와 깊이 만납니다.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는 것입니다. 계시록도 ‘여자를 죽이기 위해 광야로 보냈다’고 하지 않고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험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광야에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이 상태에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무엇을 내려놓게 하시며, 어떤 선과 진리를 새롭게 형성하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훈련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고통도 주님의 섭리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을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를 입은 여자’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다시 바라보면, 계시록 12장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흔히 이 장에서는 무서운 붉은 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용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해를 입은 여자를 보여 줍니다. 악보다 먼저 주님의 사랑이 있고, 용보다 먼저 교회가 있으며, 전쟁보다 먼저 새 생명의 탄생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옥의 공격은 주님의 새 일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공격 속에서도 아이는 하나님과 그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가고,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받으며, 용은 결국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따라서 계시록 12장의 중심은 ‘용이 얼마나 무서운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보호하시는가’입니다. 악의 힘을 크게 보는 책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크게 보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을 따라갈 때에도 잊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그리스도와 짐승과 666에 대한 설명이 앞으로 훨씬 강렬해지겠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록의 중심에는 해와 같은 주님의 사랑과 어린양의 승리가 있습니다.
8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2장의 해를 입은 여자와 남자 아이, 큰 붉은 용과 미가엘의 전쟁은 미래 어느 시기의 이스라엘과 사탄 사이에서만 벌어질 종말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세워지는 새 교회와 그 교리를 소멸하려는 거짓된 신앙 사이의 영적 전쟁,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그 거짓이 분리되고 새 교회가 주님의 보호 아래 양육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장을 한 인간의 거듭남으로 가져오면 더욱 가까워집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으려 하실 때, 오래된 proprium과 거짓은 그것을 삼키려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내가 더 강한 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싸우게 하고, 나는 그 진리 편에 서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용은 조금씩 그 자리를 잃고, 새 교회는 멀리 어느 미래에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도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8강 8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666 : 미래의 한 적그리스도인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만들어 내는 ‘인간적 지성’인가
계시록 12장에서 ‘해를 입은 여자’와 큰 붉은 용의 싸움을 살펴본 강의는 이제 13장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적그리스도’와 ‘666’의 정체를 다룹니다. 강사는 12장을 마무리한 뒤 ‘13장부터 이제 후 3년 반 직전의 모습’으로 들어간다고 정리하고, 13장 1절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을 미래의 적그리스도로 규정합니다. 이어 적그리스도는 공산국가나 아랍 국가에서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하며, 열 나라로 갈라져 있던 유럽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는 정치적 배경 위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짐승의 열 뿔은 그 정치적 세력을, 일곱 머리와 열 면류관은 그의 세계적 권세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 강사가 구축해 온 종말 시간표가 계시록 13장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인물과 체제로 응축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 자체로 이해하면 구조는 상당히 선명합니다. ‘바다’는 세상이며, 그 세상에서 한 짐승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계시록 13장 18절에는 이것이 ‘사람의 수’라고 되어 있으므로, 강사는 이 짐승을 결국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 곧 적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가 열 나라의 정치적 권력을 등에 업고 등장하여 후 3년 반 동안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관점에서 666은 막연한 악의 상징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등장할 특정 인물과 그의 체제를 알아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표지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강한 흡인력을 가지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극적인 환상들이 미래 세계정세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누구인가’, ‘열 뿔은 어느 나라들인가’, ‘666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찾기 시작하면 계시록이 마치 미래 세계사의 암호문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설도 이런 방향에서 매우 체계적입니다. 계시록 12장의 용, 13장의 짐승, 뒤의 거짓 선지자와 음녀, 그리고 적그리스도를 하나의 악의 체계 안에 배치하여 듣는 이가 전체 그림을 쉽게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 13장에 들어가면, 여기에서 매우 큰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우선 미래 어느 한 정치 지도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짐승’은 인간의 자연적·감각적 차원, 특히 신앙의 문제를 자연적 추론과 인간적 지성으로 다루면서 말씀의 신적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계시록 12장의 ‘용’이 나타내는 교리, 곧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교리가 자연적 사람 안에서 확증되고 체계화된 모습을 이 첫째 짐승이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용이 교리적 원리라면 짐승은 그 원리가 인간의 자연적 사고와 추론 속에서 무장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가인’의 문제와도 놀라울 만큼 깊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독립하여 ‘나는 사랑 없이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자기 본질을 잃습니다. 계시록의 용과 짐승, 그리고 666 역시 스베덴보리에게는 바로 이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인간의 지성과 논리로 자기 독립성을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찾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그 사람이 미래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을 구원과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으며, 말씀보다 인간의 교리적 추론을 높인다면 그 상태는 이미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방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반드시 교회 밖에서 노골적으로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안의 생명인 사랑과 선을 제거할 때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적그리스도적 상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적그리스도는 오히려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한다’고 한 것은 뜻밖에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만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 정치 지도자의 출신 배경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훨씬 더 내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가장 심각한 거짓은 기독교 밖의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과 주님을 알고 있는 교회 안에서 그 진리를 왜곡할 때 생깁니다. 빛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보다 빛을 받은 뒤 그것을 자기 욕망에 맞게 뒤집는 상태가 영적으로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나타난다’는 강사의 직관은 정치지리적 적용을 벗겨 내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경고가 됩니다.
‘바다’의 의미에서도 두 독법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강사는 계시록 17장의 ‘많은 물’을 세상 사람들과 연결하여 바다를 ‘세상’이라고 풀이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상징 해석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바다는 특히 교회의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 자연적 지식과 기억지식이 있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온다’는 것은 거짓 교리가 단순히 지옥에서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사고와 감각적 추론에서 힘을 얻어 올라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그 악을 정당화할 논리가 반드시 생깁니다. 자기 공로를 사랑하면 ‘나는 이만큼 했으니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고, 지배를 사랑하면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지배욕을 신성화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우월감을 사랑하면 ‘우리가 진리를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을 멸시해도 된다’는 식의 태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한 사랑이 자연적 지성과 결합하여 자기를 방어하기 시작할 때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과 같은 영적 형상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도 특정 국가 숫자를 찾는 문제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머리’는 지혜나 지성, 또는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지성을 나타낼 수 있고, ‘뿔’은 능력을 나타냅니다. ‘일곱’과 ‘열’도 완전함이나 전체, 많은 것과 관련된 수의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은 거짓된 교리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강력하게 확증된 상태를 보여 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교리도 수많은 논리와 성경구절과 전통적 권위를 붙여 매우 거대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참람된 이름’이 중요합니다. 강사는 이를 적그리스도의 하나님 대적과 연결합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가장 깊은 참람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데 ‘내 선’이라고 하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데 ‘내 지혜’라고 하며, 말씀의 권위를 자기 교리 체계의 권위로 바꾸는 것입니다. proprium이 신적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인간은 말로 하나님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666으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666이 결국 미래 적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을 식별하는 수입니다. 계시록 13장 18절의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는 말씀을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바로 이 ‘사람의 수’라는 표현이 오히려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말씀에서 지혜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왜곡된 상태, 곧 신앙의 진리를 인간적 지성으로 측정하고 판단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666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한 암호로 보지 않습니다. 특히 ‘6’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는 신앙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어 불완전하게 된 상태가 충만해진 것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6’은 ‘7’에 앞서는 수입니다. 7이 거룩함과 완성, 선과 진리의 충만한 결합을 나타낸다면, 6은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666으로 충만하게 확증될 때, 신앙은 겉으로 대단히 완성된 신학 체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666은 나쁜 숫자’라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수는 마술적 숫자가 아닙니다. 어떤 물건에 66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지옥적인 것도 아니고, 신용카드나 바코드나 컴퓨터 시스템에 우연히 666이 들어갔다고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수는 영적인 질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666의 위험은 외부의 세 자리 숫자보다 ‘신앙을 사랑과 삶에서 분리하는 교리와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666은 훨씬 가까워지고 오히려 훨씬 엄중해집니다. 미래의 누군가를 기다리면 나는 그 짐승과 무관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려는 상태는 지금 내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실제 삶은 그다음 문제다’, ‘예수를 믿었으니 어떻게 살든 구원과는 별개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사랑이 좀 부족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666의 영적 원리가 이미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만’을 비판하면서 정작 스베덴보리의 교리 지식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는다면 구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AC 번호를 많이 알고, 상응을 많이 설명하고, ‘계시록 밝힘’의 해석을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기독교인을 멸시한다면, 진리는 다시 체어리티에서 분리됩니다. 교리 내용은 달라졌어도 ‘가인’의 원리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를 적용할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강사의 ‘핵심진리’에도 바로 이 대목에서 귀하게 살릴 요소가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가르침과 이 강의는 계속해서 ‘행실’, ‘연단’, ‘정결’, ‘자기 소유를 내려놓음’, ‘이기는 자’를 강조해 왔습니다. 즉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로 끝내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와 연결하려는 긴장이 매우 강합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666을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라고 보는 스베덴보리와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입술로만 믿고 삶이 변하지 않는 신앙은 충분하지 않다’는 중심적 문제의식은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에는 첫째 짐승뿐 아니라 땅에서 올라오는 둘째 짐승도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적 적그리스도라면 강사의 체계에서 둘째 짐승은 그를 돕는 종교적 세력, 곧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666, 큰 음녀 등이 하나의 종말적 악의 연합으로 연결됩니다. 앞선 강의에서도 강사는 ‘적그리스도, 두 짐승, 666, 발락, 발람, 음녀들이 다 짝’이라는 식으로 여러 성경의 인물과 이미지를 하나의 모형 구조 안에 배치했습니다. 이 방식은 ‘핵심진리’ 특유의 종합적 모형론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째 짐승 역시 특정 미래 종교지도자 한 사람이라기보다 첫째 짐승의 거짓된 원리를 성경과 교리의 외관으로 정당화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어린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모습은 어린양과 비슷합니다. 기독교적이고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용의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종교의 가장 위험한 모습입니다. 노골적인 악보다 선의 모습으로 위장한 거짓이 훨씬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처럼 보이나 용처럼 말한다’는 한 표현 안에 계시록 13장의 영적 위험이 거의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 은혜, 복음, 성경, 구원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실제 결과가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만들며 인간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외형은 어린양인데 말은 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판단할 때 단지 ‘예수라는 말을 많이 하는가’를 넘어 그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만으로’ 교리를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만으로’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구원한다고 주장할 때,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을 밀어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창세기 4장의 아르카나와 연결됩니다. 진리가 사랑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피한다’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미래의 특정 표식을 기술적으로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면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내려보내야 하고, 진리를 말할수록 더 겸손해야 하며, 교리를 알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그 진리가 proprium과 결합하여 짐승의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의 ‘표’를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다고 합니다. 이마는 앞서 14만 4천의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말씀에서도 보았듯 지배적 사랑과 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과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거짓된 원리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한 행위가 나오는 상태입니다. 결국 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표’가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의 이름입니다. 문제는 피부에 어떤 글자가 찍히는가보다 내 의지와 삶이 무엇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짐승의 표가 후 3년 반에 등장할 실제 제도와 연결되며, 그것을 받지 않으면 매매할 수 없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문자적 긴장 때문에 강사는 지금부터 세상 소유를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의 중심은 앞 6부에서도 보았듯 충분히 귀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유를 조금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특정 경제 통제를 견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돈과 소유가 우리의 지배적 사랑이 되면 이미 세상 사랑의 ‘표’가 우리 의지와 행위에 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진리를 버린다면, 문제는 아직 666이라는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양심을 거스르고, 사람의 인정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숨긴다면 ‘매매’의 원리는 영적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팔고 자기 유익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표를 미래로만 밀어낼수록 오히려 오늘의 영적 선택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매매’도 말씀에서 흥미로운 상응을 갖습니다. 진리를 얻고 나누는 일과 관련하여 ‘사고판다’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매매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연경제의 봉쇄만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특정 거짓 교리의 인정 아래 통제되는 상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 체계가 교회를 지배하면 그 체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말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 안에 속한 사람만 신학적 권위를 인정받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교회 안에서 여러 형태로 반복되어 온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짐승의 권세는 정치적 독재보다 더 미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고 자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 틀 밖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교리를 의심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 체계와 다른 진리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순간 인간의 영적 자유가 억압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시는데, 종교가 강제로 사고를 통제한다면 오히려 짐승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짐승’이라는 표현의 본질도 보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은 이성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결합될 때 인간은 천국적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지성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감각과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면 인간의 이성은 짐승적 차원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사람의 수’이면서 동시에 ‘짐승의 수’라고 말합니다. 인간적 지성이 신적 진리에서 독립하여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을 때 인간은 겉으로는 매우 지성적이면서 영적으로는 짐승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그림입니다.
여기에는 현대를 향한 매우 깊은 경고도 있습니다. 과학과 철학과 기술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입니다. 문제는 이성이 자기보다 높은 신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참이다’라고 선언할 때입니다.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사랑과 선보다 효율과 힘을 절대화하며, 인간의 욕망을 가장 높은 가치로 만드는 순간 이성은 더 이상 천국을 섬기지 않고 짐승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666의 가장 깊은 반대는 어떤 다른 숫자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입니다. 자기 지혜를 신뢰하는 대신 주님의 지혜를 받고,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사는 대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지 않고 실제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공포스러운 숫자를 연구하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의 ‘마지막 때에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미혹되지 않는다’는 권면도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진리를 안다’는 것을 종말 시간표의 정확한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 13장에서 미혹을 이기는 가장 깊은 진리는 ‘적그리스도가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가’를 맞히는 지식보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신앙과 체어리티가 왜 분리될 수 없는지를 생명으로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은 거짓이 아무리 그럴듯한 기독교 언어로 나타나도 어느 정도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짓이 사랑과 겸손과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종말론 지식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어도 자기애와 공포와 집단적 우월감이 강하다면 다른 형태의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진리는 머리뿐 아니라 사랑을 밝히는 빛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서도 중요한 균형을 요구합니다. 강사의 666 해석을 읽으며 ‘아, 이것은 문자적이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게 안다’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스베덴보리의 지식이 새로운 자기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666의 해설을 읽을수록 ‘나는 신앙을 실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고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내가 남보다 옳다는 느낌을 강화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666의 말씀을 정말 ‘먹은’ 것이 됩니다.
8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장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666은 미래 유럽에서 등장할 한 정치적 적그리스도와 그의 개인 식별번호를 예언한 말씀으로만 읽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그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자연적 지성과 추론에 의해 강력하게 확증되어 마침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적하는 완성된 거짓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해석의 유익은 분명합니다. 666을 미래로 밀어내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을지도 모르니 상관없다’고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진리를 사랑에서 분리할 때, 오늘 자기 지성을 주님의 말씀보다 높일 때, 오늘 교리를 가지고 이웃을 멸시할 때, 오늘 외적 신앙으로 내 악한 사랑을 덮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짐승의 원리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 작은 체어리티 하나를 선택하고,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며, 악 하나를 주님께 죄라고 인정하여 피하고, 자기 공로 하나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다른 표를 받아 갑니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이름이 조금씩 이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은 결국 ‘어떤 숫자를 몸에 받을 것인가’보다 ‘어떤 사랑을 생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8강 9부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과 짐승의 표 : 미혹의 절정과 ‘이마와 손’에 새겨지는 것
8강 9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첫째 짐승에 이어 ‘땅에서 올라오는 다른 짐승’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강사는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을 후 3년 반 동안 세계를 지배할 적그리스도로 이해했습니다. 이제 둘째 짐승은 그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뒷받침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종교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둘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자이며, 큰 이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마침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따라서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에서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미혹이 결합하여 후 3년 반의 세계적 통제 체제를 완성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악은 처음부터 악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계시록 자체가 둘째 짐승을 ‘어린양같이’ 보인다고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와 비슷하고 종교적이며 신령한 능력까지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용처럼’ 말합니다. 따라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미래 정치체제를 알아맞히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초자연적 현상과 이적에 압도되어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오인하지 않도록 ‘진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둘째 짐승을 미래의 한 거짓 선지자라는 개인에게 집중하기보다, 거짓된 교리가 종교적 외관과 말씀의 외관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상태로 들어가 봅니다. 첫째 짐승이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한 교리를 자연적 이성과 추론으로 확증하는 상태라면, 둘째 짐승은 그러한 거짓을 마치 하나님의 진리인 것처럼 말씀으로 입증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짐승을 단순히 무섭게 생긴 괴물로 그리지 않고 ‘어린양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계시록 13장의 핵심을 찌릅니다. 거짓이 ‘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며 오면 분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성경을 들고, 주님을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은혜와 구원을 말하면서 들어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외관만 보면 어린양입니다. 문제는 ‘용처럼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실제로 어디로 사람을 이끄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특히 ‘신앙만으로’라는 교리와 관련하여 매우 예민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은혜’, ‘믿음’, ‘구원’이라는 말 하나하나는 모두 기독교의 귀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을 사용하여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과 본질적인 관계가 없다’, ‘체어리티와 선한 삶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간다면, 외관은 어린양과 같으나 그 결과는 주님의 계명과 삶을 신앙에서 분리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리가 사용하는 단어만 보지 말고 그 교리가 만들어 내는 영적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울이나 개신교 전체를 간단히 ‘둘째 짐승’이라고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나 교단에 표찰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살피는 것입니다. 어느 교단 안에서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도 교리를 지식으로만 붙들고 체어리티가 없다면 같은 분리의 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짐승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둘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합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을 후 3년 반에 실제로 일어날 초자연적 이적으로 이해하며, 그러므로 이적을 보고 참과 거짓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경고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도 이적의 존재 자체가 그 가르침의 진실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는 것은 더 내적으로 읽힙니다. 좋은 의미의 불은 주님의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가 불을 내려오게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신적 사랑과 천국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짓된 외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기애와 지배욕에서 나온 열정인데도 그것을 ‘성령의 불’,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 종교적 열광과 내적 사랑을 구별해야 한다는 매우 섬세한 경고가 됩니다.
사람이 격렬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깊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열정적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체어리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놀라운 영적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경험의 근원이 자동으로 천국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현상의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겸손과 자유, 선한 쓰임으로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핵심진리’ 강의를 읽을 때도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공용복 선생이나 강사들의 영적 체험 여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의 진위를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보았는가, 영계를 체험했는가, 특별한 계시를 받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주님의 말씀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입니다. 공용복 선생 자신과 관련하여 목사님께서 오래 기억하고 계셨던 ‘선생님은 천국을 실제로 가보셨지요?’라는 질문 앞에서 그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조심스럽게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침묵을 ‘갔다 왔다는 인정’으로도, ‘아니라는 부정’으로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입니다.
계시록 13장의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여기서 ‘우상’은 매우 깊은 주제입니다. 자연적으로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고 신이라고 섬기는 형상입니다. 영적으로는 인간이 자기 지성과 자기 교리를 절대화하여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 교리는 말씀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리 체계가 말씀 자체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모든 성경을 그 체계에 맞추어 읽기 시작하면 인간이 만든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바로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다’는 기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짓 교리가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죽은 체계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말씀의 구절들을 끌어와 확증하면 마침내 살아 있는 진리처럼 말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만들어 놓은 교리가 성경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교파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했다’는 문장이 말씀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귀한 도구이지만, 목적은 언제나 주님과 말씀을 더 깊이 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님을 가리는 렌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렌즈는 대상을 더 분명히 보기 위한 것이지 렌즈 자체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 둘째 짐승은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이 ‘짐승의 표’가 후 3년 반의 실제적인 세계 통제 수단이 됩니다. 그 표가 없으면 매매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는 성도들은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극단적 상황을 맞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앞서부터 반복하여 ‘지금부터 소유를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에 집과 돈과 직장과 심지어 가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종말 시간표와 분리해도 상당히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표’ 자체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봅니다. 왜 하필 ‘이마’와 ‘손’일까요? 말씀에서 신체 부위도 상응합니다. 이마는 사람의 가장 내적인 사랑, 특히 지배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얼굴은 내적 상태가 밖으로 드러나는 곳이고, 그 가운데 이마는 의지와 사랑의 방향을 표상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위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손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는다는 것은 그 거짓과 악을 사랑과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손’에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계시록의 표는 단순한 외적 표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삶 전체를 말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무엇을 행하는가입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다른 ‘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계시록 7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을 받고, 14장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종류의 표를 대조합니다. 짐승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입니다. 결국 인간의 이마에는 무엇인가가 기록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배적으로 사랑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얼굴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이것이 더욱 실제적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내면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외적 얼굴이 점차 내적 사랑과 일치하게 됩니다. 사람이 평생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의 영적 형상에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임의로 붙였다 떼는 스티커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반복적으로 사랑하고 선택한 것이 마침내 그의 생명의 형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찍히는 것만을 두려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매일 조금씩 자기 이마와 손에 무엇인가를 새기며 살아갑니다. 돈을 최고의 선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반복적으로 행동하면 세상 사랑이 생명에 새겨집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기쁨을 사랑하고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지배욕이 새겨집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며 반복해서 살아가면 천국적 사랑이 생명에 새겨집니다.
여기에서 ‘매매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경제적 통제로 읽습니다. 미래 적그리스도의 세계에서 표가 없으면 물건을 사고팔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고판다’는 것은 말씀에서 진리를 습득하고 전달하는 것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는 성경적 표현도 그런 영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가 없는 사람은 매매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 체계가 지배하는 교회에서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격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어떤 교리 체계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면 그 체계 밖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단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금지되고, 기존 교리와 다른 해석을 말하는 순간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자유롭게 교류되지 못합니다. ‘표를 가진 사람’만 매매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경계나 이단 분별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교리 체계를 절대화하여 말씀 자체가 새롭게 들려올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폐기하지 않으시며 강제로 신앙을 주입하지도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에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자유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표를 받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는 매우 강합니다. 문자적으로 계시록 14장도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것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이유가 외적 표식 자체에 어떤 마술적 저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마와 손, 곧 사랑과 행위로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임의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사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보시고 ‘너는 666을 받았으니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사랑하고 선택한 것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고, 사후에는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자유롭게 찾아갑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적 공동체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한 사람은 지옥적 공동체에서 자기 생명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표’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나타내는 영적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666이 다시 등장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미래 적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세어 보라’는 말도 단순한 숫자 계산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세다’는 것은 어떤 것의 질을 살피고 알아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는 것은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여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찾아내라는 암호풀이보다, 그 짐승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질이 무엇인지 지혜롭게 분별하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을 주님에게서 분리하여 자기 지성으로 만들면 바로 그 ‘사람의 것’이 짐승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666은 인간 지성 자체를 정죄하는 숫자가 아니라, 신적 진리에서 분리된 인간적 지성이 신앙의 일을 판단하고 확증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지점에서 ‘가인’이 다시 떠오릅니다. 가인도 처음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기대 속에서 등장합니다. 신앙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섬길 때는 귀한 도구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면 진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계시록 13장의 짐승 사이에는 이런 깊은 영적 평행이 있습니다.
그래서 666의 반대편에는 단순히 ‘777’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666 대신 777을 선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이 보여 주는 실제 반대편은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하나는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형성된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형성된 생명입니다.
이 차이는 ‘누구를 예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예배는 주일에 누구에게 찬송하는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모든 판단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실질적으로 그의 예배 대상이 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부르면서 돈이 모든 결정의 최종 기준이라면 실질적 삶에서는 돈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사람을 이용한다면 자기 자신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도 반드시 미래 어느 동상 앞에 절하는 장면에만 국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인정하고 그 거짓에 따라 사는 것이 영적 의미의 경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인정하고,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며, 무엇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지가 곧 예배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이 가진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말씀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막연한 상징으로 흐리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재산과 직장과 생명을 잃더라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상당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긴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나는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묻기 전에 ‘오늘 작은 이익과 진리가 충돌할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대한 대환난의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수많은 작은 선택을 통해 형성됩니다.
만원의 이익 때문에 작은 거짓말을 할 것인가,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을 것인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공정하게 대할 것인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정직할 것인가, 내 교리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할 것인가. 이런 선택들이 영적 이마와 손에 조금씩 무엇인가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보면 ‘짐승의 표’는 공포의 교리라기보다 거듭남의 엄숙한 말씀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영적 성품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날마다 진리를 보여 주시고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를 주십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선을 형성하시고, 거짓을 물리칠 때마다 진리를 더욱 깊게 심으십니다.
여기에서 리메인스의 원리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저장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은 훗날 시험 가운데 우리를 붙드는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짐승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사용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히 ‘내가 결심해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보존하신 것을 통해 나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강사의 ‘마지막 때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권면도 여기서 더욱 깊어집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적그리스도의 특징을 암기하고 종말의 순서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킵니다. 진리를 알수록 겸손해지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고, 악을 더 분명하게 죄로 알아 피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우리만 안다’는 우월감이 강해지고, 두려움과 적대감이 커진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본질적으로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인간의 기억과 지성 안에 머물 뿐 생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핵심진리’를 읽는 우리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와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상당히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사가 붙들고 있는 중심적 열망, 곧 ‘주님께 끝까지 충성하고 미혹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종말론적 도식을 말씀의 상응과 내적 의미를 통해 더 깊은 거듭남의 질서로 옮겨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해야 할 일이지, 사람을 판정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가 단순히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데 머물지 않고 ‘정결’, ‘연단’, ‘행실’, ‘자기 소유를 내려놓음’을 계속 강조한다는 점은 기억할 만합니다. 종말론의 외적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진리가 실제 삶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는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접점을 살리면서 차이는 차이대로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해설일 것입니다.
8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장의 둘째 짐승과 짐승의 표는 미래 후 3년 반에 한 거짓 선지자가 초자연적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적그리스도의 경제통제 표식을 받게 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거짓 신앙이 어린양과 같은 기독교적 외관과 말씀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고, 마침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인 ‘이마’와 실제 삶인 ‘손’을 점유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질문은 결국 ‘666이 무엇으로 만들어질 것인가?’보다 ‘오늘 내 이마와 손에는 무엇이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손은 그 사랑을 따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것이 실제 쓰임과 체어리티로 나타난다면, 요한계시록의 종말은 단지 두려운 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8강 10부
14만 4천과 어린양, 세 천사의 복음과 마지막 추수 : 계시록의 결론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입니다
8강 10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두 짐승과 666이라는 어두운 장면을 지나 계시록 14장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크게 전환됩니다. 13장 마지막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악의 세력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14장이 열리자 요한의 시선은 즉시 어린양에게로 옮겨갑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말씀은 짐승에게 마지막 말을 주지 않습니다. 666 다음에 어린양이 나타나고, 짐승의 표 다음에 주님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중심을 짐승과 적그리스도와 666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어둠을 통과하여 결국 보여 주려는 것은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에서 14만 4천은 매우 특별한 무리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구원받는 모든 성도와 동일한 무리가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특별히 준비되고 정결하게 된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들의 무리로 이해됩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들에서도 이들을 대환난을 통과하여 특별한 위치에 이르는 성도들과 연결했고, 장차 주님과 함께 철장 권세를 행사하며 천년왕국에서 특별한 통치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강사의 전체 구원론 안에서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동일한 영적 성숙과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단과 정결을 통해 특별히 준비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사람마다 영적 상태와 천국의 쓰임이 같지 않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 사람은 자신의 지배적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몇몇 영적 엘리트가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계급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내가 높은 자다’라는 의식으로 다른 천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14만 4천을 ‘특권적 통치계급’으로 보기보다 그 숫자가 나타내는 영적 질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44,000은 ‘12×12×1,000’이라는 구조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도 같은 상응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열둘과 결합하고 천이라는 충만함의 수로 확대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는 수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짐승의 표가 이마와 손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 13장과 14장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짐승의 이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마는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권 같은 표식을 붙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성품을 자기 힘으로 소유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그의 생명 안에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우시므로 그 사람도 자비를 배우고, 주님께서 용서하시므로 그 사람도 용서하며,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므로 그 사람도 이웃의 선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질이 인간의 사랑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13장의 ‘짐승의 표’와 14장의 ‘어린양의 이름’ 사이의 대조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미래 어느 날 우리의 피부에 무엇이 새겨지는가가 아니라 평생 무엇이 우리의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중심이 되어 모든 진리를 자기 유익에 맞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진리를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싸움은 결국 두 사랑 사이의 싸움입니다.
14만 4천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노래는 아무나 배울 수 없고 오직 그들만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떤 비밀 지식이나 천국의 특수한 암호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노래는 기쁨 가운데 이루어지는 진리의 고백과 관련됩니다. 특히 ‘새 노래’는 새로운 교회에서 주님을 새롭게 인정하고 예배하는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나 배울 수 없다는 것은 지적인 암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와 같은 사랑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 그 진리의 내적 기쁨을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누구나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해친 사람을 주님 안에서 용서해 본 사람에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노래’가 됩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교리도 머리로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주님만을 의지하게 된 사람에게 그 말씀은 생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의 새 노래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배우는 노래입니다.
이어 14만 4천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묘사됩니다. 이것을 자연적 성관계나 독신의 문제로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계시록의 의미가 크게 좁아집니다. 말씀에서 음행과 간음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과 결합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순결하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거짓과 섞지 않고 보존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영적 순결의 본질은 진리가 선과 올바르게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미래 사건을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인도하실 때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따르며, 선으로 인도하실 때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따르는 것입니다. 결국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의 본질은 특별한 종말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삶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처음 익은 열매’를 특별한 이기는 자들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에는 귀하게 살릴 부분이 있습니다. 영적 생명에도 성숙이 있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처음 익은 열매’를 다른 구원받은 사람보다 높은 특권계층이라는 방향으로 가져가기보다, 주님께서 새 교회 안에서 처음 형성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질서에 더 가깝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이 절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그의 내적 의도가 주님께 향하고 진리와 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천국의 완전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흠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시도록 끊임없이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이제 계시록 14장에는 세 천사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심판을 앞둔 최후의 복음 선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짐승의 권세가 극에 달한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한 복음’의 중심은 특정한 종말 시간표가 아닙니다.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배는 앞서 보았듯 단순한 종교의식보다 깊습니다.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가입니다. 짐승은 인간의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을 경배하게 하지만 천사는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두 예배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도 공포에 떨라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거룩한 두려움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벌이 무서워 부모에게 순종하는 단계에서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단계로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형벌의 공포는 점차 사랑에서 오는 거룩한 경외로 바뀝니다.
둘째 천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 바벨론과 큰 음녀는 마지막 시대의 타락한 종교 체계와 연결됩니다. 앞으로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 이미 그 심판이 선언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벨론은 매우 분명한 영적 원리를 가집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를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악입니다. 세상 권력을 원하는 사람이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그 성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과 말씀과 교회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까지 지배하려 한다면 훨씬 깊은 차원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심에는 ‘내가 사람 위에 서고 싶다’는 지배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특정 교단 하나를 손쉽게 가리키는 표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가 강하게 나타났는지를 논할 수는 있지만, 영적 의미의 바벨론은 어느 종교 공동체에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양심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구조를 만들며, 종교적 권위를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한다면 바벨론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면서 은밀히 ‘저 사람이 내 말을 인정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주님께 가까워지는 것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을 더 원한다면 아주 작은 형태로나마 바벨론의 씨앗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모든 심판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후 3년 반 동안 실제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의 최종 운명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13장의 경고를 더욱 강화합니다. 경제적 생존 때문에 표를 받는 선택이 일시적으로는 편안해 보여도 영원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을 외적 표식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형벌을 가하시는 장면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의지와 행위로 자기 생명에 받아들인 결과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후의 상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만들어 내시는 고문이 아니라 악한 사랑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불과 유황’ 같은 계시록의 강렬한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불은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사랑이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악한 욕망의 불을 나타냅니다. 유황도 악에서 나오는 거짓과 그 욕망의 파괴적 성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불은 하나님께서 밖에서 붙이는 물리적 불이라기보다 악한 사랑 자체가 가진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와 지배욕과 복수심이 사람을 안에서 태우는 것입니다.
이어 매우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자니라.’ 이 한 구절은 지금까지의 666 논의를 정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짐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성도는 단지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신앙’을 함께 지키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결합을 특별히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명’과 ‘신앙’입니다. 삶과 신앙입니다. 선과 진리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입니다. 어느 하나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가 짐승의 핵심이라는 해석과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참된 성도의 인내는 ‘나는 믿는다’는 고백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실제로 지키면서 그 신앙을 생명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핵심진리’가 계속 행실과 정결과 이기는 삶을 강조해 온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적어도 ‘입술의 신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는 상당한 접점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대목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른 가르침을 볼 때 소중합니다. 무엇이 다른지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 안에 이미 존재하는 진리의 씨앗과 접점을 함께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 proprium을 내려놓는 거듭남의 과정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가 죽고 주님의 사랑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죽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씀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사후에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그가 입으로 고백했던 교리 목록만이 아닙니다. 그의 ‘행한 일’이 따라갑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에게 행위는 외적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위 안에 있었던 의지와 사랑 전체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에서 행동했는지가 그 사람의 생명의 질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선행으로 천국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실제 행위 속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이 실제로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계시록 14장의 후반부에는 이제 ‘추수’가 등장합니다.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의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라는 선언과 함께 추수가 시작됩니다. 강사의 시간표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심판과 성도들의 구원, 그리고 이어질 아마겟돈의 최종 심판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추수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선과 악이 완전히 성숙하여 분리될 수 있게 된 때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곡식이 익어야 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이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을 때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어 그 최종 질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충분한 자유와 기회를 주면서 그가 무엇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형성하도록 허용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인내가 갑자기 끝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상태가 성숙하여 분리가 가능해진 때 이루어지는 신적 질서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와 곡식 비유와도 잘 연결됩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즉시 뽑으려 하자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이라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해치지 않으면서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섭리하십니다.
이 원리는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면 당장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대개 긴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한꺼번에 모든 악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보여 주시고, 자유 안에서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게 하시며,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조금씩 형성하십니다. 이것도 작은 의미에서 ‘추수’를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송이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매우 무서운 그림이지만 이것 역시 단순한 물리적 학살의 예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포도는 좋은 의미에서는 체어리티와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악한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그것이 완전히 익었다는 것은 악과 거짓도 자기 상태의 끝까지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선과 악을 더 이상 섞어 둘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와 포도주 틀은 모두 ‘분리’의 말씀입니다. 심판의 본질은 분리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함께하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과 함께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임의로 두 집단으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를 자기와 같은 공동체로 이끕니다.
이렇게 보면 8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자’의 의미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지옥과 연결되는 사랑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천국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큰 승리는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에도 새로운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종말론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사랑의 열매입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가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백 번 읽어도 그것이 삶에 내려오지 않으면 아직 열매가 아닙니다. 작은 진리 하나라도 실제로 살아 이웃에게 선이 되면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은 13장의 666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은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 하지만 어린양도 자기 사람들의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짐승은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하지만 천사는 ‘창조주를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바벨론은 자기 욕망의 포도주로 사람들을 취하게 하지만 14만 4천은 어린양을 따라갑니다. 짐승은 강제하지만 어린양은 인도하십니다. 짐승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만 주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따르게 하십니다.
이 대조가 계시록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면 오히려 계시록의 시선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짐승을 보여 준 뒤 곧바로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라고 합니다. 시선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짐승을 충분히 보았으면 이제 어린양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을 공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종말 공부가 깊어질수록 두려움과 음모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주님은 점점 배경으로 밀려난다면 방향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을 제대로 읽을수록 어린양이 더 크게 보여야 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짐승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입니다.
강사의 강의 역시 이 점에서는 귀한 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을 매우 실제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결국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라’, ‘세상 소유에 매이지 말라’, ‘정결하게 살라’, ‘미혹되지 말라’,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 중심을 살리고, 그 바깥을 둘러싼 종말 시간표는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을 통해 다시 조명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8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과 세 천사와 마지막 추수는 미래 대환난에서 특별히 선발된 영적 엘리트와 세계 종말의 시간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짐승으로 표상되는 자기애와 거짓 신앙의 지배에 맞서 주님의 이름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에 새겨지고, 신앙과 계명이 삶에서 하나가 되며, 마침내 각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의 질에 따라 선과 악이 완전히 분리되는 새 교회와 마지막 심판의 영적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국 8강 전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도, ‘666은 무엇인가?’도, ‘대환난은 언제 시작되는가?’도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입니다. 계시록 14장은 14만 4천을 가리켜 아주 단순하게 말합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종말론 전체를 통과하고도 이 한 문장이 남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계시록의 중심에 상당히 가까이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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