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그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곧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곧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조심, 신앙에 대한 언급조차 꺼렸다는 설명을 위에서 드렸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주님은 ‘왕’, 천적 인간은 ‘왕의 아들’로 말이지요.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산들’(mountains)과 ‘작은 산들’(hills)은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는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표상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한 것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30:26 말씀도 참조) By the “sun” is signified love; by the “moon,” faith; by “mountains” and “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 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3] 태고교회와 그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잠시 태고교회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부터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상징되는 이단과 분파가 얼마나 심각한 변질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본래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준이 없으면 변질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먼저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는 순서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지각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존재하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따로 떼어 말하는 순간,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것을 믿는다’는 고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생명의 상태였습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알았으므로, 굳이 신앙을 독립된 무엇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이었는지도 드러납니다. 가인의 출발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신앙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질서에서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교리적 차이가 아니라 ‘교리가 왜곡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러한 천적 질서를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자연계에서 달빛이 본래 자기 빛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비추듯, 영적으로도 신앙은 사랑에서 오는 빛을 받아 존재합니다. 신앙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그 생명과 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의 관계는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 질서 가운데 있었는지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산’은 높은 사랑, 특히 주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던 것은 바로 그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교회의 가장 높은 것은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지혜가 흘러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없어진다는 것은 진리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구별되는 별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단지 ‘믿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고 기쁘게 살아갈 때, 진리는 그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고백을 넘어 사랑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이 다시 하나가 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신앙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서 그 완성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목적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결국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런데 [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 한 문장을 놓치면 AC.337을 잘못 적용하기 쉽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는 그 질서가 그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섭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에서 살펴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앞선다’는 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목적과 가치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덧붙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주어지고,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신앙은 그 안에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적, 과정적으로는 신앙이 먼저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어리티가 중심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셋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먼저’라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AC.335에서 셋 역시 새로운 ‘신앙’이라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된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반면 셋이 상징하는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같은 ‘신앙’이라 해도 하나는 자신에게서 끝나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37 마지막의 ‘그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도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말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신앙을 따로 고백했다’는 것이 왜 그토록 심각했는지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 그것을 처음 분리한 것은 단순한 용어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창4는 바로 그 작은 분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으로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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