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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9:30:18 1. 눅1:18-25,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1

※ 엊그제인 2월 2일 주일 설교를 끝으로 지난 2년간 달려온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쳤습니다. 세어 보니 총 144편의 설교였습니다. 이 설교 인용을 허락하신 원 저자, 전 청주 새 교회, 그리고 이후 서울 새 교회 담임이셨던 이순철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이 전체 설교를 한 편의 pdf로 만들 필요가 생겨 고민 중, 이 전체를 다시 한번 깊이 살피라는 주님의 퍼셉션(perception) 또한 있어 순종하고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강해이면서도 맨 처음 본문인 눅1:1-17이 없는 이유는 설교 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 저자께도 문의드렸으나 분실하셨는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죽 가시다 보면, 한 구절이 빠졌거나 몇 구절이 통째로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원 저자의 단순 실수이신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혹시 중간중간 설명 부호인 ''가 나오는 부분은 특별히 무슨 배경이 되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어 제가 더한 것입니다. 전반적인 어투나 뉘앙스, 에피소드 등은 저희 교회에 맞게 다듬었다는 점, 참고하세요. 아, 그리고 원본의 '믿음'은 전부 '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특별한 데서는, 그러니까 'believe'의 뜻을 살려야 하는 데서는 원본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기도 했고, 그 밖에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 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기술(記述)이 사실 굉장히 예민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진리이기에 용기를 내어 말씀하심인 줄 압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김은경 역)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공동체를 말한다. (HH.52, 김은경 역)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했습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 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의 비밀 1786번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그것에 대해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3-02-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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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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