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표현, 그러니까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같은 수동 표현이 거의 다인데요, 이걸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처럼 능동 표현으로 바꾸면 무슨 큰 오류일까요? 여기 AC에서는 왜 거의 다 수동 표현을 쓰나요?

 

 

먼저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를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로 바꾸는 것이 ‘즉각적인 이단이나 결정적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표현 하나로 인해, 스베덴보리가 AC(Arcana Coelestia) 전체에서 지키고자 한 ‘인간 이해의 중심축’이 미세하나마 분명하게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문법이 아니라 ‘주체가 어디로 이동하느냐’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서 결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결합했다’는 표현은, 어떤 주체가 의도적으로 두 요소를 묶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행동을 결합했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같은 말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 작업’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AC에서 말하는 신앙과 사랑, 이해력과 의지의 결합은 그런 종류의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시도해서 성취하는 통합’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 질서의 재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합을 언제나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말합니다. 결합은 어떤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준비, 유입, 허용, 정렬의 결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결합되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무엇을 했다는 느낌을 최대한 제거하고, 변화된 상태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 영어와 라틴어에서 수동 표현은 주체를 감추기 위한 문법이 아니라, 주체를 보존하기 위한 문법입니다.

 

AC의 원문인 라틴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굳이 능동으로 쓸 수 있는 자리에서도 반복해서 수동이나 비인칭 구조를 선택합니다. 이는 문체상의 습관이 아니라, 명백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proprium’(자기 본성)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과 질서의 실제 작용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신학적 긴장을 문장 구조 속에 그대로 심어 놓은 것이 바로 AC의 수동 표현들입니다.

 

셋째, ‘is conjoined’, ‘is vivified’, ‘is regenerated 같은 영어 표현은 단순한 문법 선택이 아니라, ‘비인칭 신적 작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수동 표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습니다. 영어 독자는 ‘is conjoined’를 보며 ‘누가 했지?’를 묻기보다, ‘, 이런 상태가 되었구나’라고 읽습니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결합되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딱딱한 대신, ‘결합했다’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자는 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AC의 영어 수동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표현’을 택한 결과가 아니라, ‘독자의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훈련시키는 장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조차, ‘내가 했다’는 생각보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넷째, 그렇다면 능동 표현은 언제 문제가 되고, 언제 허용될까요? 핵심 기준은 이것입니다. 그 문장이 행위의 근원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위의 현상을 말하고 있는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생명의 부여, 거듭남, 조명, 인도와 같은 표현은 모두 ‘행위의 근원’을 다룹니다. 이 경우 능동으로 바꾸면, 인간이 그 근원의 주체인 것처럼 읽힐 위험이 큽니다. 반면 ‘그는 말한다’, ‘그는 행한다’, ‘그는 분별한다’처럼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할 때는 능동 표현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서 말한다’는 표현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전자는 ‘표현의 방향’이고, 후자는 ‘존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서 항상 수동만 고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번역 본문과 해설, 설교는 동일한 언어 공간이 아닙니다.’

 

번역 본문은 독자가 아직 구조를 모를 가능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동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반면 해설이나 설교에서는 이미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능동 표현을 사용해도 오해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수동만 쓰면 한국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독자가 내용을 따라오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균형이 가장 좋습니다. 본문 번역에서는 ‘결합되었을 때’를 유지하고, 해설에서는 ‘결합했을 때’라고 말하되, 한 번쯤은 ‘이 결합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라고 짚어 주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에서 수동 표현은 문법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 훈련입니다.’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내가 주체다가 아니라 나는 수용자다라는 감각 안에 머물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결합되었다’를 ‘결합했다’로 바꾸는 것이 당장 큰 오류는 아니지만, 그 방향이 반복되면 AC 전체의 호흡, 즉 ‘주님 중심–인간 수용자 중심이라는 축’이 서서히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1에 나오는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창1:26에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창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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