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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