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of faith),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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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of faith),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전 장 3절과 4절에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그들의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한다(AC.482, 487-488)는 것과, 태고인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들(AC.487:2)을 상징하기 위해 숫자들의 서로 다른 조합들을 사용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그들이 그 교회와 관련된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숫자 조합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That by 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 is signified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appears from what has been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5:3–4), concerning “days” and “years” signifying times and states; and also from the circumstance of the most ancient people from numbers variously compounded signifying states and changes of states in the church; but the nature of their ecclesiastical computation is now totally lost.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3-4)

 

본 절 이 ‘백이십 년’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숫자 역시 같은 방식이며, 그래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one, 1)에서 ‘열둘(twelve, 12) 및 기타 등등 그 각각의 숫자에 감춰진 의미들부터 먼저 알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분명한 건, 그 안에 뭔가 비밀스러운 게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이십 년’이라는 인간의 수명과 선행절들하고는 맞지가 않기 때문이며, 홍수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봐도 사람들이 딱 백이십 년만 산 게 아닙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셈의 경우,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셀라는 에벨을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에벨은 벨렉을 낳은 후, ‘사백삼십 년’을, 그리고 노아는 홍수 후, ‘삼백오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숫자 ‘백이십(one hundred and twenty, 120)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ten, 10)과 ‘열둘(twelve, 12)의 의미로만 나타나는데, 이 둘이 곱해져서 백이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들 숫자를 이루는 숫자 성분들의 상징으로부터, ‘백이십 년’은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숫자 ‘’은 ‘십분의 일(tenths, tithes 십일조)과 함께 리메인스를 상징하고 표현합니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한편, 숫자 ‘열둘’은 신앙, 혹은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숫자 ‘백이십’이 이들 숫자 성분들의 조합으로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Here in like manner numbers of years are mentioned, whose signification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understand, unless he be first acquainted with the hidden meaning of each particular number from “one” to “twelve,” and so on. It plainly appears that they contain within them something else that is secret, for that men were to live a “hundred and twenty years” has no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part of the verse, nor did they live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as is evident from the people after the flood (chapter 11), where it is said of Shem that “he lived after he begat Arphaxad five hundred years”; and that Arphaxad lived after be begat Selah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Selah lived after he begat Eber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Eber lived after he begat Peleg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that Noah lived after the flood “three hundred and fifty years” (Gen. 9:28), and so on. But what is involved in the number “one hundred and twenty,” appears only from the meaning of “ten” and “twelve,” which being multiplied together make one hundred and twen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component numbers it may be seen that “one hundred and twenty”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The number “ten” in the Word, as also “tenths,” signify and represent remains, which are preserved by the Lord in the internal man, and which are holy, because they are of the Lord alone; and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all things relating to faith in one complex; the number therefore that is compounded of these,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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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esh, )은 사람이 육-중심(body-centered)이 된 것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말씀에서 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거기 보면, 두 가지, 곧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육-중심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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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esh, )은 사람이 육-중심(body-centered)이 된 것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말씀에서 ‘’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거기 보면, 두 가지, 곧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육-중심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요엘서에서, 모든 사람을 넌지시 나타내기 위해 쓰였습니다. That “flesh” signifies that man had become corporeal,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flesh” in the Word, where it is used to signify both every man in general, and also,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It is used to signify every man, in Joel: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8)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flesh,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Joel 2:28)

 

만민(flesh)은 사람들을, ‘’은 주님에게서 나와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선과 진리, 곧 인플럭스를 나타냅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spirit” the influx of truth and good from the Lord. In David: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65:2) Thou that hearest prayers, unto thee shall all flesh come, (Ps. 65:2)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In Jeremiah: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17:5) Cursed is the man that trusteth in man, and maketh flesh his arm, (Jer. 17:5)

 

육신’은 사람을, ‘’은 파워를 상징합니다. 에스겔입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arm” power. In Ezekiel:

 

4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겔21:4-5) That all flesh may know. (Ezek. 21:4–5)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슥2:13) Be silent, all flesh, before Jehovah, (Zech. 2:13)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2] 육(flesh)은 특별히 육-중심적인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it signifies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is evident from Isaiah: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사31:3) The Egyptian is man and not God, and his horses are flesh and not spirit, (Isa. 31:3)

 

그들의 지식은 육-중심 수준임을 상징합니다. 여기 및 말씀 어디에서나 ‘말들’은 합리적 수준, 이성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계속해서 signifying that their memory-knowledge is corporeal; “horses” here and elsewhere in the Word denoting the rational. Again: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9:20) He shall withdraw to the right hand, and shall be hungry; and he shall devour on the left hand, and they shall not be satisfied; they shall eat everyone the flesh of his own arm, (Isa. 9:20)

 

‘고기’는 사람의 고유한 것들, 곧 육-중심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같은 이사야입니다. signifying such things as are man’s own, which are all corporeal. In the same: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사10:18) He shall consume from the soul, and even the flesh, (Isa. 10:18)

 

여기 ‘몸’은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육-중심의 모든 걸 상징합니다. 계속해서 where “flesh” signifies corporeal things. Again: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40:5-6) The glory of Jehovah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the voice said, Cry; and he said, What shall I cry? All flesh is grass, (Isa. 40:5–6)

 

여기 ‘육체’는 모든 육-중심, 몸-오리엔티드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flesh” here signifies every man who is corporeal.

 

[3]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 (사66:16) In fire will Jehovah dispute, and with his sword with all flesh, and the slain of Jehovah shall be multiplied, (Isa. 66:16)

 

‘불’은 왜곡된 욕망에 가해지는 형벌을, ‘칼’은 거짓에 가해지는 형벌을, 그리고 ‘혈육’(flesh)은 육-중심, 몸 관련 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각각 상징합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where “fire” signifies the punishment of yearnings; the “sword,” the punishment of falsities; and “flesh” the corporeal things of man. In David: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78:39) God remembered that they were flesh, a breath that passeth away, and cometh not again, (Ps. 78:39)

 

이 말씀은 광야에서 살(flesh)과 고기(meat)를 탐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몸-중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육(flesh)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그들은 그저 육-중심, 몸 수준 보상만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speaking of the people in the wilderness desiring flesh, because they were corporeal; their desiring flesh represented that they desired only things corporeal (Num. 11:32–34).

 

32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11: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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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forever reprove man)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다루어 온 내용들과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분명한데요,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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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forever reprove man)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벌어진 상황들(what has gone before)과 이어지고 있는 상황들(what follows)을 보면 분명한데요, That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forever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from what follows;

 

※ 여기 ‘그렇게’라는 것은 태고교회의 특징인 퍼셉션으로 인도받는 걸 말합니다. 태고교회가 끝나고 새롭게 일어날 교회는 퍼셉션이 아닌 새로운 것, 곧 ‘양심’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앞서 벌어진 상황들로부터는 사람들이 그렇게, 즉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이나 진리들을 갈망 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from what has gone before in that men had become such, through the immersion of the doctrinal things or truths of faith in yearnings,

 

※ 여기 ‘갈망’(渴望)으로 번역한 yearnings 말인데요, 기본적으로 참된 신앙인이라면, 그리고 참된 영적, 천적 인간이라면, 신앙 관련, 교리적인 것들과 진리에 대해 자신의 무슨 yearnings이 있나요? 어린아이처럼 주님에 관한 정돈된 진리들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따르는 것 외에 무슨 자기 의견이 있으며, 자신의 yearnings이 있나요? 종말을 목전에 둔 이 사람들의 상태가 정말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상태인지가 좀 느껴지며, 그래서 사실은 ‘갈망’이라는 무척 점잖은 번역이 아닌, 뭔가 생생한, 그리고 처절한 새 용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우선은 ‘더러운 갈망’, ‘타락한 욕망’ 정도로 표현했으면 합니다.

 

※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자신들의 yearnings에 잠기게 한다는 건, 주님의 뜻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뜻,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추구하는 걸 말합니다. 이런 건 주님 사랑 아닌, 정말이지 자기 사랑의 끝판왕 같은 것이며, 그래서 과연 이래서 태고교회가 종말을 맞이했구나 싶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책망 받을 수 없는(they could no longer be reproved), 즉 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that they could no longer be reproved, that is, know what evil is;

 

※ 이 표현을 개역개정에서는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로 번역했는데, 이는 곧 주님이 손을 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들의 상태가 이젠 선을 넘어버려서 더 이상의 책망, 관심은 오히려 이들을 괴롭히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이고요, 진리와 선을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자신들의 설득(persuasions)을 통해 소멸되어 버린 나머지, 자신들의 설득에 동조했던 것들만 참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all capacity to perceive truth and good having been extinguished through their persuasions, so that they believed that only to be true that was in conformity with their persuasions;

 

※ 

 

그리고 이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보자면, 홍수 후, 교회 구성원들이 달라졌는데요, 퍼셉션을 대신하여 양심이 그 자리를 계승한 것입니다. 이 양심을 통해 사람들이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게, 즉 계속해서 여호와의 함께하심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의 책망(Reproof by the spirit of Jehovah)은 그래서 일종의 내적 딕테이트, 퍼셉션, 혹은 양심을 상징하며, ‘여호와의 영(the spirit of Jehovah)은 또한 이사야에서처럼, 참되고 선한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상징합니다.  and in regard to what follows, that after the flood the man of the church became different, in that with him conscience succeeded in place of perception, through which he could be reproved. “Reproof by the spirit of Jehovah” therefore signifies an inward dictate, a perception, or a conscience; and the “spirit of Jehovah” signifies the influx of what is true and good; as also in Isaiah: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사57:16) I will not contend to eternity, neither will I be forever wroth, for the spirit would overwhelm before me, and the souls I have made. (Isa. 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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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의 속뜻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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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always reprove man)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for that he is flesh)는 그들이 육(肉)-중심(corporeal)의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는 그들은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traces)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앞으로 다가올 교회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always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for that he is flesh” signifies because he had become corporeal;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It is also a prediction concerning a futur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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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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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비록 이들 리메인스가 사람 안에 머물지라도 그는 이 리메인스를 양심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럽혀진 사고(思考, thoughts)로 또 다시 리메인스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성모독은 일종의 굳은살을 만들어 모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마치 댐처럼 차단, 흡수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훼손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원리, 가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한테는 진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When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mmerses the truths of faith in his insane yearnings, he then profanes the truths, and deprives himself of remains, which although they remain cannot be brought forth, for as soon as they are brought forth they are again profaned by things that are profane; for profanations of the Word produce as it were a callosity, which causes an obstruction, and absorbs the goods and truths of remains. Therefore let man beware of the profanation of the Word of the Lord, which contains the eternal truths wherein is life, although one who is in false principles does not believe that they are tru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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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이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sons)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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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이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sons)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바로 위, 그리고 앞 장 4절, ‘아들들’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내용 참조, AC.489) 교회의 진리는 교리 형태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으며, 본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참으로 여겼습니다. 태고인들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이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갈망을 가리켜 ‘사람의 딸들(the daughters of man)이라 부르기 때문에, 비교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본 절에서는 이 교회 사람들의 퀄러티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즉 이들은 본래 거룩했던, 교회의 진리를 자기들의 갈망으로 잠기게 했고, 그렇게 해서 더럽혔으며(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더욱 더 신념으로 확고하게 삼았습니다(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가지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원리들과 신념들에 착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들과 일치시키려 하고 조화시키려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완고하게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이런 설명이 지금 논의 중인 인종(人種, race)에 딱 맞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그들의 가공할 신념들을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573, 580-586a, 607:3, 619-637, 659-662, 792-813) 참 말씀드리기 생소한 것은,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 주위 영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죄다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의 가르침들과 그들의 욕망 둘을 하나로, 실제로 어떤 종류의 무슨 욕망이든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That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doctrin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ons” (concerning which just above, and also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4,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church). The truths of the church are doctrinal things, which regarded in themselves were truths because those here treated of had them by tradition from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erefore they are called the “sons of God”; they are so called also relatively, because yearnings are called the “daughters of man.” The quality of the members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and 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How this occurred may be easily conceived by anyone, from observing what passes in himself and others: those who persuade themselves in regard to any subject, confirm themselves in such persuasion by everything which they imagine to be true, even by what they find contained in the Word of the Lord; for while they cling to principles which they have received, and have become persuaded of, they make everything favor and assent to them. And the more anyone is under the influence of self-love, the more firmly he holds them. Such was this race,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we come to treat of their direful persuasions, which strange to say are such that they are never allowed to flow in by reasonings, but only from yearnings, for otherwise they would kill everything rational in the spirits present. Hence it appears what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namely,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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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은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의미합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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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은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의미합니다. 여기 나오는 ‘딸들(daughters)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갈망(yearnings)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신앙에 속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이 교리적인 것들이 그들이 가진 갈망과 완전히 결합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갈망이 실제로 어떤 갈망이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By “daughters,” here as before, yearnings.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is signified that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conjoined themselves with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whatever.

 

※ 여기 결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는 신앙의 교리, 신학, 가르침을 자신의 갈망, 자신의 욕구, 욕망을 해소, 해결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 곧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순전함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마음은 전혀 없고, 대신 오로지 자신들의 갈망, 욕망을 위해서만 이용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님의 것에 사사로이 사람의 것을 섞는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 사랑의 모습이며, 결코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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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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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관련, 앞장에서 다루어 온 내용들(AC.489-491, 창5:4)을 보면 분명하며, 거기서 ‘아들들(sons)은 진리를, ‘딸들(daughters)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That “daughters” signify such things as are of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concerning “sons and daughters” in the preceding chapter (Gen. 5:4), wher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딸들’, 혹은 선은 의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그의 인식능력도, 그의 의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녀들’입니다. Daughters,” or goods, are of the will, but such as a man is, such is his understanding and such his will, thus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 즉, 우리의 지적 능력과 의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캐릭터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들’ 또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람은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지랄 게 없으며, 대신 원색적 욕망만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걸 의지로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설명하고 있는 그것의 퀄러티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딸들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앞서 지금까지 죽 설명해 온 대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cf. AC.560, 562-563, 565) ‘딸들’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선을 위한 게 전혀 없으면, 그때는 갈망(渴望, yearnings)을 상징하게 되며, ‘아들들’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 그때는 환상(fantasies)을 상징합니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성(sex)의 본성 때문입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의지나 탐욕(cupidity)이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disposition),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여성의 본성인 반면, 남성은 지성(intellect) 또는 이성(reason)이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남성의 본성입니다. 두 사람 간 결혼이 그래서 각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간 결혼과 비슷한 것입니다. 오늘날엔 선을 위한 의지는 없고, 대신 탐욕(cupidity)만 있으며, 약간의 지성(intellectual)이나 이성(rational)만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유대교회에 있는 그 많은 법들이 왜 남편의 특권(prerogative)과 아내의 복종(obedience)에 관한 것인지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man in a corrupt state, who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instead of will, which is supposed by him to be will, and is also so called. What is predicated is in accordance with the quality of the thing whereof it is predicated, and that the man of whom the daughters are here predicated was a corrupt man, has been shown before. The reason why “daughters” signify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ere there is no will of good, yearnings; and why “sons” signify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of truth, fantasies, is that the female sex is such, and so formed, that the will or cupidity reigns in them more than the understanding. Such is the entir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whereas the male sex is so formed that the intellect or reason rules, such also being th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Hence the marriage of the two is like that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every man; and since at this day there is no will of good, but only cupidity, and still something intellectual, or rational, can be given, this is why so many laws were enacted in the Jewish church concerning the prerogative of the husband [vir], and the obedience of the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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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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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대교회가 있었던 가나안 땅 같은 곳이지요. 지금 기독교회가 있는 유럽 또한 그렇습니다. 그 외의 지역과 나라들은 교회 지역이 아니며, 이것이 곧 오늘 본문, ‘땅 위(the faces of the ground)의 의미입니다. 홍수 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로 둘러싸인 땅들을 보고도 알 수 있겠는데요, 이 강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 경계로 자주 언급된 강들입니다. (cf. 창15:18; 신1:7; 11:24; 수1:4; 왕상5:9) 그 장소는 또한 이어지는 내용들, 가령, 네피림이 ‘거기에(in the land)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민수기 13장 33절 말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에 관한 말씀 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ll that region is called the region of the church where those live who are instructed in the doctrine of true faith; as the land of Canaan, when the Jewish church was there, and Europe, where the Christian church now is; the lands and countries outside of this are not the region of the church, or the “faces of the ground.” Where the church was before the flood, may also appear from the lands which the rivers encompassed that went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by which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are likewise described the boundaries of the land of Canaan; and also from what follows concerning the Nephilim that were “in the land”; and that these Nephili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the sons of Anak: that they were “of the Nephilim” (Num. 13:33).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1:7)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신11:2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1:4)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대상5:9)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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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the faces of the ground, 地面)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면(ground)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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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the faces of the ground, 地面)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면(ground)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는 ‘지면(ground)과 ‘(earth) 둘 사이 구분을 아주 정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면(ground)은 어디서 언급되든지 교회를 상징하거나 교회의 어떤 면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인간 이름의 기원인 ‘아담(Adam, man)인데, 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지면(ground)입니다. ‘(earth)은 말씀 여러 곳에서 교회가 없거나 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이 그 보기인데요, 거기 보면, 오직 ‘(earth)만 나옵니다. 아직 교회, 곧, 거듭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면(ground)은 2장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그때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내용이 이곳과 다음 장에 나옵니다. 4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창7:4, 23) 이는 교회가 있었던 지역을 의미합니다. 같은 장 3절을 보면,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7:3) 이는 생겨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지면(ground)은 말씀 어디서나 그 가리키는 바가 동일합니다. 이사야입니다. That by the “faces of the ground” is signified all that region where the church wa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for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made between “ground” and “earth”; by “ground” is everywhere signified the church, or some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nd from this comes the name of “man,” or “Adam,” which is “ground”; by “earth” in various places is meant where there is no church, or any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s in the first chapter, where “earth” only is named, because as yet there was no church, or regenerate man. The “ground” is first spoken of in the second chapter, because then there was a church. In like manner it is said here, and in the following chapter (Gen. 7:4, 23), that “every substance should be destroyed from off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ying in the region where the church was; but in Gen. 7:3, speaking of a church about to be created, it is said, “to keep seed alive on the faces of the ground.” “Ground” has the same signification everywhere in the Word; as in Isaiah:

 

1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2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사14:1-2) Jehovah will have mercy on Jacob, and will yet choose Israel, and will set them upon their own ground, and the peoples shall take them, and shall bring them to their place, and the house of Israel shall inherit them on the ground of Jehovah, (Isa. 14:1–2)

 

이 말씀은 이미 형성된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는 장소에 관해서는 같은 장 9, 12, 16, 20, 21, 25 및 26절에서 ‘(earth)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church that has been made; whereas where there is no church it is in the same chapter called “earth” (Isa. 14:9, 12, 16, 20–21, 25–26).

 

9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리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21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 도륙하기를 준비하여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여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25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사14:9, 12, 16, 20-21, 25-26)

 

[2] 다시 Again:

 

17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18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사19:17-18) And the ground of Judah shall be a terror unto Egypt;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Isa. 19:17–18)

 

유다의 ‘(ground)은 교회가 있는 곳, 애굽 ‘(land)은 교회가 없는 곳입니다. 같은 이사야에서 where “ground” signifies the church, and “land” where there is no church. In the same: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21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사24:20-21) The earth shall reel to and fro like a drunkard; Jehovah shall visit upon the army of the height in the height, and upon the kings of the ground on the ground. (Isa. 24:20–2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렘14:4-5) Because of the ground that is worn, because there was no rain on the earth, the husbandmen were ashamed, they covered their heads, yea, the hind also calved in the field, (Jer. 14:4–5)

 

(earth)은 ‘지면(ground)을 둘러싼 지역을, ‘지면(ground)은 ‘(field)을 둘러싼 지역을 각각 의미합니다. where “earth” is that which contains the “ground,” and “ground” that which contains the “field.”

 

[3]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e same: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렘23:8) He brought the seed of the house of Israel from the northern l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I have driven them, and they shall dwell on their own ground, (Jer. 23:8)

 

북쪽 ‘(land), 쫓겨났던 ‘나라(lands)는 교회가 없는 곳을, 자기 ‘(ground)은 교회나 참된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다시 where “land” and “lands” are where there are no churches; “ground” where there is a church or true worship. Again: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렘24:8-10) I will give the remains of Jerusalem, them that are left in this land, and them that dwell in the land of Egypt, and I will deliver them to commotion, for evil to all the kings of the earth, and I will send the sword, the famine, and pestilence among them, till they be consumed from off the ground which I gave to them and to their fathers, (Jer. 24:8–10)

 

(ground)은 교리와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25장 5절 말씀도 같습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doctrine and the worship thence derived; and in like manner in the same prophet, chapter 25: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사25:5)

 

[4] 에스겔에서 In Ezekiel: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겔20:41-42) I will gather you out of the lands wherein ye have been scattered,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shall bring you again into the ground of Israel, into the land for which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your fathers, (Ezek. 20:41–42)

 

이스라엘 ‘(ground)은 내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곳은 ‘나라(land)라고 합니다. 말라기에서 where “ground” signifies internal worship; it is called “land” when there is no internal worship. In Malachi: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1-12) I will rebuke him that consumeth for your sakes, and he shall not corrupt for you the fruit of the ground, nor shall the vine be bereaved for you in the field and all nations shall call you blessed, because ye shall be a delightsome land, (Mal. 3:11–12)

 

너희 ‘(land)은 컨테이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토지(ground)가 교회, 혹은 교리를 가리킬 때, ‘(land)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where “land” denotes the container, and therefore it plainly denotes man, who is called “land” when “ground” denotes the church, or doctrine.

 

[5] 모세의 글에서 In Moses: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신32:43) Sing, O ye nations, his people, he will make expiation for his ground, his people, (Deut. 32:43)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들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걸 가리켜 자기 ‘(ground)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evidently signifying the church of the gentiles, which is called “ground.” In Isaiah: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사7:16) Before the child shall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the ground shall be forsaken, which thou abhorrest in presence of both her kings, (Isa. 7:1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ground will be forsaken)를 통해 교회, 혹은 신앙에 관한 참된 교리를 위해 준비된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ground)과 ‘(field)이라는 말들은 곡식 심기와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that the “ground will be forsaken” denotes the church, or the true doctrine of faith. That “ground” and “field” are so called from being sown with seed is evident; as in Isaiah: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사30:23-24) Then shall he giv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the oxen also and the young asses that labor on the ground. (Isa. 30:23–24)

 

그리고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욜1:10) The field is laid waste, and the ground hath mourned, because the corn is laid waste. (Joel 1:10)

 

이런 걸 보면, 히브리말로 ‘아담(Adam)이라고 하는 ‘사람(man)은 ‘토지(ground)에서 왔으며,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ence then it is evident that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called “Adam,” from “ground,” signifies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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