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1-4)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from the wilderness of Sin, after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 and they encamped in Rephidim;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people to drink. And the people quarreled with Moses, and they said, Give ye us water and we will drink. And Moses said to them, Why quarrel ye with me? why do ye tempt Jehovah? And the people thirsted there for the waters; and the people murmured against Moses, and said, Wherefore is this, that thou hast made us come up out of Egypt, 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And Moses cried unto Jehovah, saying, What shall I do to this people? a little more and they stone me (Exdo. 17:1-4).

 

 

오늘은 제가 37년 전인 198868일, 당시 삼성그룹 공채 29기에 합격, 아침에 서울 소공동 삼성물산 앞 주차장에 모여 수십 대 버스에 나눠타고, 용인 자연농원 내 삼성종합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입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상 보듯 생생한데요, 요단을 건너기 전, 지난 40년 광야 세월을 회상하며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에게 거듭 여호와의 말씀을 신명(申命)하는 모세의 심경을 조금 알듯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37년간의 저의 지난날을 조금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신 광야(the wilderness of Sin)를 떠난다는 것은 두 번째 시험인 선과 관련된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가는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은 이렇게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른 시험이 시작됩니다. 보통은 한번은 선(good)에 관한, 한번은 진리(truth)에 관한 시험이 옵니다.

 

※ 진리 안에 있다 보면 그 진리와 관련된 선이 필요해져서이고요, 선을 행하다 보면 이번엔 관련된 진리가 필요해져서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보완, 공급,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라는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섭리는 진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진리가 삶의 아주 미세한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섭리는 인간의 구원 전체를 바라보시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내다보시는 주님의 통찰, 예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대강의 흐름과 원칙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은 항상 앞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요, 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지금 가나안까지 해안을 따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로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 주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3:17, 18)

 

주님은 그렇게 각 사람의 성품이나 영적인 특성들을 모두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심지어는 조상부터 후손까지를 모두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저도 주님의 섭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는 섭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면 이 정도의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슨 점이나 사주(四柱) 같은 거 없이 오직 부모의 인도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걸 찾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스베덴보리 저, ‘Angelic Wisdom about Divine Providence’(1764, 라틴)를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라틴)의 속편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살피시는가, 어떻게 감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게도 하시는데요, 그것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섭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주님의 섭리 따라가는 걸 1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은 ‘르비딤’(Rephidim)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 역시 광야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비딤도 또 하나의 시험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광야는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 광야에서의 시험이 선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시험은 진리에 관한 시험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물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거기서 장막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시험을 대비,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를 주님이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군대가 진을 치는데, 군사들이나 병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질서에 맞춰 서로 유기적으로 묶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만 시험 중에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선수 각각의 포지션이 있고, 얼핏 보면 서로 따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전략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상대방의 공격에 수시로 방어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처럼 주님도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 중에 힘들어 비록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더라도 주님 주신 어떤 선 안에서, 어떤 울타리 안에서 한다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우리는 내면에 준비된 뭐가 없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싸울 수 있는 무기, 곧 말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모세와 다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회의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었던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갈등하는 것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진리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행동이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 아마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계시를 이웃이나 친지, 지인에게 전할 때 경험하는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방금 말씀하신 저런 단계를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함 없이 전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진리에 대한 원칙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즉 인간관계라든지, 그 밖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 나는 진리에 대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이 물이 부족하다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앙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면에서 선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그만큼 다시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마치 남자가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선이 자기 짝이 될 진리를 그리워하는 것인데요, 그때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때의 시험이 바로 진리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런 영적 시험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르비딤에서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서 진리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면, 곧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불평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에 대해 불경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고요, 내가 이 진리를 왜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심하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시험의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중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 말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심,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한 욕심 같은 그런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그 실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건데도 불구, 그러나 시험이 깊어지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내가 진리를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그리고 또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가 내 안에 그나마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말이지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없어지면 속으로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me), 자녀(my sons), 가축(my cattle)’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자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자녀와 가축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자산인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진리가 계속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른 영적 자산들, 곧 선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들마저 위축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 시험이 너무 극심하면 주님의 진리마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 평소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비록 시험이 저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 중에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원하옵기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살짝살짝 주님의 진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제 숨구멍을 열어주시옵소서...

 

4절, 오늘 본문 끝 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는 진리이신 주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리가 주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 자체이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중재(intercess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교회를 사모하는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중재는 다음과 같은데요,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중재합니다(continually intercedes). 그것은 신적 사랑(Divine love)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데요,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신적 진리이셨습니다(was the Divine truth)만,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화하신(was glorified) 후부터는 주님은 신적 선이십니다(is the Divine good).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the Father)는 속뜻으로 신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아들’(the Son)은 신적 진리시지요. 신적 진리는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 끊임없는 중재(continual intercession)가 있는데, 이걸 우리 식대로 표현, 아들이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한테 이해가 되나 저런 앞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천국의 비밀8573,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A secret that lies still more interiorly hidden in the word “intercession,” shall also be told.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continually intercedes in the manner described, because it proceeds from the Divine love.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the Divine truth; but since He was glorified, which was effected when He rose again, He is the Divine good (n. 7499). It is the Divine good which is meant in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Father,”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meant by “the Son” (n. 2803, 3704, 7499). And as in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Divine good, there is continual intercession, therefore it is said that the Son entreats the Father, and intercedes for man. This latter idea could be apprehended by man, but the former with difficulty. (AC.8573)

 

※ 저 하늘의 해처럼, 그러니까 해가 변함없이 지상에 열과 빛을 말없이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의 중재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자기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는, 즉 이 모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모든 체어리티의 사람들처럼 은은히 말없이 조용히 끝까지 사랑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이런 게 중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는 말은 시험이 좀 더 깊어지면 신앙인들이 진리를 모독하는 상황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모독하게 되는데요, 모독이란 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주님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하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지옥은 진리가 충족되는 것을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주님은 그 시험을 오히려 이용하세요. 그래서 시험 가운데서 선이나 진리의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고요,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하십니다. 방해가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을 극복할 때, 우리 안에 선과 진리는 더 풍부해지며, 한 차원 더 높아집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련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극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을 것 같은 고비, 앞이 안 보이는 시기를 계속 걸어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 가운데 주님의 목적이 매번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이 사실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걸 통해 나로 하여금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81:7)

 

아멘

 

원본

2016-07-0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8(D1)-주일예배(2601, 출17,1-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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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렙의 반석이신 주님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And Jehovah said unto Moses, Pass on before the people, 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 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 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 and thou shalt smite the rock, 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 that the people may drink. 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 (Exdo. 17:5, 6)

 

 

그동안 여러 해 제 설교는 저의 오리지날 설교가 아니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 맞게 좀 다듬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사전 허락하에 말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 역량, 곧 말씀을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으로 푸는 역량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몇 주 전부터 이제는 네 힘으로 하라시는 주님의 어떤 퍼셉션이 있으셔요... 그래서 순종, 조금 준비와 연습을 거쳐 오늘부터 이렇게 저의 첫 속뜻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등 안정화 기간이 예상됩니다.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의 다른 모든 설교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 본문은 모두 스베덴보리의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Apocalypse Explained’(혹은Apocalypse Revealed’)를 가지고 준비합니다. 즉 이 주석들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18 10월 이후 설교들부터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오리지날 설교는 아니었어도 말이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말씀을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존재여서 모든 걸 내적으로 보는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 사람을 볼 때 그들 눈에는 사람의 육은 안 보이고 영, 곧 사람의 속만 보이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그 겉은 안 보이고 대신 그 속, 그 동기와 의도만 보이는 식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와 유익은 참 많고, 그리고 큽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사후 우리가 가게 될 나라가 그런 나라, 그러니까 겉이 아닌 속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나라 이민을 고려할 때, 미리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게 되면 시작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글자로만 있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미지의 세계요, 그저 막연했던, 그저 좋은 내용들이기만 했던 말씀의 글자들이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마치 ‘극히 값진 진주(13:46)를 발견한 사람처럼,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13:44)를 발견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데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러나 아무나 지금 내가 하는 이 풀이가 속뜻이다 하면 곤란하므로, 주님은 280년 전인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나이 57세 때 그를 찾아오신 후, 1772년 그를 데려가실 때까지 27년간 영계 구석구석, 그리고 수많은 천사와 영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라틴어로 기록하게 하셨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Arcana Coelestia’(1749-1756, ‘천국의 비밀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출애굽기를 속뜻으로 풀이한 주석인데요,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 주석을 집필할 때 주님이 곁에서 말씀하시고, 자기는 그걸 받아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그때 그 어떠한 세상 도서도 참고하지 않았고, 자기 책상 위엔 오직 속뜻 성경 한 권과 속뜻 사전 한 권, 그리고 펜과 종이, 잉크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이 곧 이 주석의 영적 권위를 드러내는데요, 이는 곧 신구약 말씀들이 기록되던 정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현 성경 66권 중 ‘말씀’은 구약 29권, 신약 5권, 총 34권뿐입니다.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기 때문인데요, 속뜻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주석을 온전히, 그리고 쉽게 풀어 전하는 게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여기에 무슨 개인적 사사로움을 보태어 마치 저의 무슨 그럴듯한 새로운 저작인양하는 행태는 추호도 사양할 작정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가장 힘쓰는 건 끊임없는 하늘의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푸는 것도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합니다.

 

지난 본문 끝 절인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아주 다급한 상황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5절로 6절입니다. 먼저 5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여기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째, ‘백성 앞을 지나서’, 둘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리고 끝으로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백성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 the people)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he should lead and teach them)는 것입니다. ‘모세(Moses)의 속뜻은 ‘신성, 곧 여호와로 말미암는 진리(truth from the Divine)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표상하고 있는 ‘백성’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을 의미하고,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는 이끄는 것, 곧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영적으로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지금 이 백성, 곧 영적 교회에 속한 이들 이스라엘은 물, 곧 진리가 없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며, 그래서 신성한 진리를 표상하는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백성 앞을 지나서’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하여 주님께 도우심(aid,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을 구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의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진리가 아니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이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니까요. 그래서 무슨 망설임도 없습니다. 머리로는 혹 아, 먼저 주님께 여쭈어야 하는데, 먼저 기도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데 할지 몰라도 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저부터도 우선 그럴 때가 많으니까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요만큼의 시간도 우리는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from primary truths)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속뜻은, ‘선에 일치하고 진리와 일치하는, 지혜와 지성에 속한 으뜸되는 것들(the primary things of wisdom and intelligence which are in agreement with good and with truth)이며, 이는 곧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백성’, 곧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 하였습니다. 영적 교회는 그 메인이 진리입니다.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는 선이고요. 영적 교회는 신앙이 주된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사랑이 주된 교회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신앙과 진리, 말씀을 우선하는 교회는 좀 날카롭고 예민하며 판단하지만, 사랑과 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우선하는 교회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여 품어줍니다. 어느 게 맞다, 틀리다가 아니고, 두 교회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며, 이는 곧 두 천국의 특성, 두 천국 천사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으뜸되는 진리의 예를 하나 살피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으뜸되는 진리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바로 아래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하는데요,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우리는 어떤 크고 작은 선을 행할 때 대체로 어떤 진리를 가지고 합니다. 가령 교회 봉사를 나가는 경우인데요, 교회 봉사, 즉 어떤 섬김이든 그 자체로는 참 좋은 일이나 그 동기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쉬고픈데 맡은 직급이 있어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 곧 그 동기를 볼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우리는 그 겉만 보고 저분은 참 귀하시다 합니다. 또한 다른 경우는, 이 경우 역시 좀 쉬고 싶은 건 같은데, 그러나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고, 후자는 주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개인적인 사사로움은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와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것, 일상생활 속 크고 작은 모든 상황, 즉 시험들 가운데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는 사람입니다. 즉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가장 큰 진리, 가장 으뜸되는 귀한 계명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입니다. 먼저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인데요, 이 표현은 ‘거짓들을 소멸시켜 버린 신성한 능력, 힘(the Divine power by which falsities had been dissipated)을 말합니다. ‘지팡이(a rod)는 힘, 곧 신성한 능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 여기 애굽의 강인 나일강은 ‘거짓(falsity)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라는 표현으로 ‘거짓의 소멸(the dissipation of falsity)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성한 능력으로 거짓들은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이 진리는 ‘호렙산 반석에서 나오는 물(the water out of the rock in Horeb)을 말합니다. 다음은 ‘손에 잡고 가라(take in thine hand, and go)인데요, 이 표현은 ‘그걸 가지고 권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어떤 무장(that equipped therewith he should perform the mandate)을 말합니다.

 

진리의 부족과 결핍으로 야기되는 시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 결과와, 그 전에도 여러 번 부정선거로 인한, 진실이 거짓에 먹히는, 이 되풀이되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 민족, 특히 우리 신앙인들과 그 가운데 특별히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이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께 속한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 세월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지난날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단연 대학 졸업 후 감히 삼성 그룹공채에 지원, 합격한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졸업 평점이 아주 낮아 삼성에 응시원서를 낸다는 건 언감생심, 그래서 처음엔 여러 중소기업 위주로 원서를 냈으나 아무 데서도 연락오는 데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1988년 당시, 전자공학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한 달을 주님께 부르짖었는데요, 제 동기들은 이미 엘지, 현대, 대우 등 대기업 여기저기 들어가 신입사원 입문 교육들을 받고 있을 때였지요. 비록 그땐 지금처럼 말씀의 속뜻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오직 네비게이토식 성경 암송과 제자 훈련, 제자 양육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달을 골방에서 보냈더니 뭔가 걸러지고 깨끗해지는 느낌과 함께 주님께 백지수표를 내어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더군요. 그날 오전 기도 후 오늘 조간 1면 하단을 보라시는 분명한 음성인지 생각인지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인데, 그래서 현관에 놓인 중앙일보를 펼쳐 그 1면 하단을 보니 ‘삼성그룹공채 29기 2, 3차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있더군요. 그때 솔직히 숨이 좀 막혔으나 눈 딱 감고 순종, 용기를 내어 응시했던 것입니다. 특히 1차 서류전형이라 졸업 평점이 아주 낮은 저로서는 보나마나였거든요. 그러나 적성 검사를 마치고, 사장단 면접과 실제 면접관들 대상 다면 면접 때, 그때그때 대답할 말을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합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201이었다는군요. 그날의 감동,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은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의 르비딤 시험 같은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후 제 삶의 여러 고비마다 주님이 지난날 내 앞이 캄캄했을 때 내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 힘을 낼 수 있었던 정말 고맙고 감사한 개인적 사례여서 특별히 나눴습니다. 지금 모세에게도 주님은 출애굽 전 그와 함께하셨던 열 가지 재앙 중 물을 피로 변케 하셨던 때를 기억하게 하시고 용기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먼저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입니다. 여기 ‘반석(a rock)의 의미가 ‘신앙, 여기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혹은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faith, here faith from the Lord, or the Lord in respect to faith)이기 때문인데, 여호와, 즉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그 반석 위에 서리니’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호렙(Horeb)은 ‘신성한 법(the Divine Law)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들로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속뜻은 ‘그분의 법,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 which are from His law, or the Word)입니다.

 

여기서 잠깐, ‘반석’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잠깐 저 유명한 ‘베드로와 천국 열쇠’ 본문을 좀 보고 가겠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8, 19)

 

로마 카톨릭은 이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대로 천국 열쇠를 주셨고, 그리고 자기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니 당연히 자기들한테 이 천국 열쇠의 권한, 곧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황한테 이런 권한,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우인데요, 사실 이 오류는 교회사, 세계사 전체에 절대 가볍지 않은 큰 상흔을 남겼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한 인간 베드로에게 저런 엄청난 권세를 주신 적이 없으신데요, 이는 여기서 말씀하신 ‘반석’의 의미, 곧 그 속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반석(rock)의 의미는 ‘신앙에 관한 주님, 그리고 또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the Lord as to faith, and also the faith which is from the Lord)입니다. 즉 신앙을 말할 땐 주님을, 그리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반석이시며,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우리 것, 곧 우리가 잘나서 우리한테서 나온 게 아니라 주님의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즉 우리의 이 신앙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주신 신앙으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일체 무슨 사사로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성한 진리조차 거기에 인간의 무슨 사사로움이 섞이면 이토록 타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순결하신 진리에 우리의 무얼 섞으려는, 적당히 섞어 자신의 무슨 목적을 관철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사후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의 반석을 주님께 둘 때, 이스라엘이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리번거리거나 주님이 주신 이 신앙의 진리들에다가 잔머리를 굴리며 세상에서 배운 뭘 섞는 짓을 하면 안 되겠습니다.

 

다음은 ‘너는 그 반석을 치라(and thou shalt smite the rock)입니다. 이는 ‘to entreat urgently from a humble heart’, 곧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을 치는 것입니다.

 

이번 이 르비딤 시험을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로 요약하지만, 아래 민수기 본문은 같은 사건을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주님은 분명히 ‘겸손한 마음(a humble heart)을 명령하셨음에도 아래 민수기 본문을 보면, 실제로 모세와 아론은 그때 ‘완악한 마음(a hard heart)이었다는 것입니다.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0:10-12)

 

참고로, 이때 모세와 아론은 ‘신성한 진리에 관한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는 게 아니라 ‘저들의 지도자들한테서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나치게 종교적인 모습(the religiosity of that nation whose leaders and heads they were)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교성은 필연적으로 완악함을 나타내게 되지요.

 

한 가지, 위 본문은 얼핏 여호와께서 저들을 저주하시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은 정성을 다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expostulated) 것입니다. 차근차근 부드럽게 넌지시(was intimated to him) 말이지요.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거나 누구에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멘!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와 ‘백성이 마시리라(that the people may drink)의 속뜻은 각각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the truths of faith are from Him)과 ‘그들을 기운 차리게 하고,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which shall refresh them and give them spiritual life)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로 인한 결과(the effect by means of primary truths)입니다.

 

이들 풀이는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로 자명, 생략합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영적 깨달음’이나 ‘영안이 열림’, 혹은 ‘내면이 밝아지는 것(enlightenment)은 모두 이들로 인한 효과라는 것입니다. 그들, 곧 으뜸되는 진리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들, 이걸 ‘2차적 진리(secondary)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이제 밝히 깨달아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건 알겠는데 실제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를 그동안은 잘 몰랐다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우리 신앙의 반석으로 믿고, 모든 것을 반석 되신 주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즉 현재 천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인데, 그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 아주 해처럼 빛나는 명료함과 능력, 그리고 지혜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지금까지 시험을 만난 이스라엘과 모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 속뜻으로 살폈습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거듭 되새김질하셔서 그럴수록 속 심령이 뜨거워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15(D1)-주일예배(2602, 출17,5, 6, AC.8576-8585), '호렙의 반석이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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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는 자리는...

 

17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17, 18)

 

이번 대선 결과로 마음이 너무 힘들어 망연자실 중에도 오로지 말씀에 착념코자 습관을 좇아 오늘도 말씀을 따라가던 중 위 말씀에 시선을 붙들어 매시네요!

 

그러니까 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기어코 따라 들어간 걸로 이해가 되는데요... 오, 주님!

 

저 자리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인도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자기를 사랑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며, 천국을 향한 거듭남의 길을 꾸역꾸역 가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삶을 살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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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1, AE.389-397

 

AE.394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saying, How long, O Lord, who art holy and true, dost Thou not judge and avenge our blood on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6:10)

 

signifies sighings to the Lord, who is justice, respecting the judgment and removal of those who persecute and infe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the Lord and are in the life of charity.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rying out and saying, How long, O Lord,” as being to pour out to the Lord sighs from grief, for these are the words of those that groan and sigh and supplicate for justice.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holy and true,” as being the One who is Justice; for justice when predicated of the Lord, signifies that He does not tolerate such things, and this because He is holy and true.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judge and avenge our blood,” as being the judgment and removal of those who persecute and infe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the Lord and are in the life of charity.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because “blood” signifies all violence offered to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thus to the Lord; consequently violence offered to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and faith. To offer violence to these is to offer violence to the Lord Himself, according to the words of the Lord Himself in Matthew: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0, 45) Inasmuch as ye did it unto one of My least brethren, ye did it unto Me (25:40, 45).

 

That this is signified by “blood” in this sense, may be seen above (n. 329f,g).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as being those who were in “the former heaven” that afterwards passed away, for those dwelt in the spiritual world upon the earth, upon mountains, hills, and rocks, while those who acknowledged the Lord and were in the life of charity abode under the earth, or under heaven, and were there concealed and preserved (see above, n. 391a, 392a).

 

[2] From this the meaning of these words in their genuine sense can be seen; but no one can know that such things are meant unless it has been revealed to him. For otherwise who could know who are meant by “the souls of those slain,” and what is meant by “to avenge their blood upon those that dwell on the earth?” One who does not know from revelation who these are must conclude that the martyrs only are meant; when yet these were not the martyrs, but all such as were persecuted and infested by those who were in the former heaven that passed away; for these were such that they thrust out from themselves all who openly acknowledged the Lord and were in the life of charity, because they were interiorly evil (as has been said above, n. 391a, 392a). To this I will add the following: all in the spiritual world who are interiorly evil, however moral a life in externals they may have lived in the world, are utterly unable to tolerate anyone who worships the Lord and lives the life of charity; as soon as they see such, they infest and either do them injury or treat them shamefully. I have often wondered at this, and all who do not know about it must wonder, since these same persons, when in the world, tolerated preachings respecting the Lord and also respecting charity, and themselves talked about these things doctrinally, yet when they become spirits they cannot tolerate them. The reason is that this aversion is inherent in their evil in which they are; for in their evil there is hostility, yea, hatred against the Lord, and also against those who are led by the Lord, who are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but this hostility and this hatred lie concealed in their spirit; consequently when they become spirits they are in them; then that antipathy or antagonism inherent in evil comes forth.

 

[3] Take, for example, those in whom the love of ruling has predominated; it is their delight to rule over others, and if possible over all; this delight is in them after death, nor can it be removed, since every delight is of the love, and the predominant love constitutes the life of everyone, and this life remains to eternity. When these have become spirits, they strive continually, from the delight of their love, to gain dominion over others as they did in the world; and when they are unable to obtain it, they are angry against the Lord; and as they are unable to harm the Lord Himself, they are angry against those who openly acknowledge Him; for the delight of their love is contrary to the delight of heavenly love; this delight is that the Lord may rule, while the other delight is that they themselves may rule; this is why there is inherent in this delight a hatred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all who are led by Him, who are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charity. From this it can be seen why those who openly acknowledged the Lord and lived the life of charity were delivered by the Lord from the violence of such spirits, and were concealed in the lower earth, and there preserved until the judgment. But after the judgment those who had dwelt above the earth, upon the mountains, hills, and rocks there, who were, as said above, interiorly evil, were cast out; and those who had been hidden under the earth, or under heaven, were elevated and allotted an inheritance in the places from which the former were cast out. From this it can now be more fully comprehended what is meant by what is said to them in the next verse, that “they should rest yet a little time, until they should be fulf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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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 (AC.8556-8575)

 

AC.855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노정대로 행하여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출17:1)

 

journeying,” as being what is successive and continuous of life (see n. 4375, 4554, 4585, 5996, 8181, 8345, 8397), here what is successive or progressive of spiritual life, that is, its growth, which takes place continuously by means of temptations.

 

AC.4375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And he said, Let us journey, and go, 33:12)

 

That this signifies what is successive (namely, of the conjunction of good with tru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journey,” and “to go,” which plainly involve progression to further things; for progression and what is successive are contained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C.4554 (그들이 떠났으나 And they journeyed, 35:5)

 

That this signifies what is continuou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ing” as being what is successive (see n. 4375), thus what is continuous, namely, of progression toward interior things.

 

(2025/6/2)

 

AC.4585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And they journeyed from Bethel, and there was still a tract of land to come to Ephrath, 35:16)

 

That this signifies that now was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ing from Bethel” as being what is continuous of the advancement of the Divine from the Divine natural (that “journeying” denotes what is continuous may be seen above, n. 4554, here in the supreme sense what is continuous of the advancement of the Divine, and that “Bethel” is the Divine natural, n. 45594560); from the signification of a “tract of land in coming” as being what is intermediate (of which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Ephrath”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former state (of which below where Bethlehem is treated of, which is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hence it is said, “Ephrath, this is Bethlehem” (verse 19).

 

AC.4559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And called the place El-Bethel,35:7)

 

That this signifies a holy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the Divine natural (see n. 4089, 4539, 4556); but when it is called “El-Bethel” it is not the Divine, but a holy, natural; for when the Lord made his human Divine, he first made it holy. Between making it Divine and making it holy there is this difference—that what is Divine is Jehovah himself, but what is holy is from Jehovah. The former is the Divine being, but the latter is what comes forth therefrom. When the Lord glorified himself, he made his human also the Divine being, or Jehovah (n. 2156, 2329, 2921, 3023, 3035); but before he did this, he made his human holy. Such was the process of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s human. Hence also Bethel is now called “El-Bethel,” applying what is signified by the “El” which is added, namely,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to him.” For “El” in the original language means “God”; but here “gods” in the plural, because in the internal sense “gods” denote holy truths (n. 4402). But in what follows it is called “Bethel,” for it is said, “Jacob called the name of the place Bethel” (verse 15);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창35:14, 15)

 

and it is added, “where God spake with him,” where it is in the singular. For “Bethel” in the original language is the “house of God”; but “El-Bethel” is “God the house of God.” Hence it is that “El-Bethel” denotes the holy natural, and “Bethel” the Divine natural.

 

AC.4089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I am the God of Bethel,31:13)

 

That this signifies the Divine in the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good in the ultimate of order (see n. 3729), consequently in the natural; for this is the ultimate of order, becau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terminated therein.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 “God of Bethel” is the Divine in the natural. As “Bethel” signifies good in the natural, it also signifies the knowledges of celestial things there, for these are of good.

 

AC.372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the name of that place Bethel, 28:19)

 

That this signifies the quality of the stat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name” and of “calling a name” as being the quality (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421);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place” as being state (n. 2625, 2837, 3356, 3387). The quality of the state is that which is signified by “Bethel.” In the original tongue “Bethel” means the “house of God”; and that this is good in the ultimate of order may be seen above (n. 3720).

 

AC.3720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This is none other than the house of God, 28:17)

 

That this signifies the Lord’s kingdom in the ultimate of ord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house of God.” Mention is made of the “house of God” in many passages of the Word, and in the external sense, or according to the letter, it signifies a consecrated building where there is holy worship;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the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heaven; and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universal kingdom; in the supreme sense, however, it signifies the Lord himself as to the Divine human. In the Word we sometimes read of the “house of God,” sometimes of the “temple,” both having the same signification, but with this difference—that the “house of God” is mentioned where good is treated of; but the “temple” where truth is treated of. From this it is manifest that by the “house of God” is signified the Lord’s celestial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the heaven of the celestial angels, and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Divine good; and that by the “temple” is signified the Lord’s spiritual church, and in a more universal sense the heaven of the spiritual angels, in the most universal sense the Lord’s spiritu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Divine truth (see n. 2048). The reason why the “house of God” signifies the celestial which is of good, and the “temple” the spiritual which is of truth, is that in the Word a “house” signifies good (n. 710, 2233, 2234, 2559, 3128, 3652), and also because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houses were constructed of wood, for the reason that “wood” signifies good (n. 643, 1110, 2784, 2812); whereas “temple” signifies truth, because the temples were constructed of stones; and that “stones” signify truths may be seen above (n. 643, 1296, 1298).

 

[2] That “wood” and “ston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not only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ey are mentioned, but also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other life; for they who place merit in good works appear to themselves to cut wood; and they who place merit in truths, in that they have believed themselves to have been better acquainted with truth than others, and yet have lived evilly, appear to themselves to cut stones; which things have often been seen by me. From this I was assured what is the signification of wood and stone, namely that “wood” signifies good, and “stone” truth; and also from the experience that when a wooden house was seen, there was instantly presented an idea of good; but when a house of stone was seen, there was presented an idea of truth; concerning which I was instructed by angels. For this reason, when mention is made in the Word of the “house of God,” there is presented to the angels the idea of good, and good of such a quality as is treated of in that connection; and when mention is made of a “temple,” there is presented to them the idea of truth, and truth of such a quality as is treated of in that connection. From this again we can infer how deep and utterly hidden are the heavenly arcana in the Word.

 

[3] The reason why by the “house of God” is here signified the Lord’s kingdom in the ultimate of order is that Jacob is treated of, by whom is represented the Lord’s Divine natural, as frequently shown above. The natural is in the ultimate of order, for in this all the interior things are terminated and are together; and because they are together, and thus things innumerable are viewed together as a one, there is relative obscurity there. This relative obscurity has been spoken of several times before.

 

AC.4539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Arise, go up to Bethel, 35:1)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perception is concerning the Divine natur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rising” as being elevation (see n. 2401, 2785, 2912, 2927, 3171, 4103), here the elevation of the natural to the Divine; from the signification of “to go up” as being more toward the interiors (of which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the Divine in the natural, or in the ultimate of order (n. 4089). For in the original language “Bethel” means the “house of God” and as the house of God is where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are, by “Bethel” in the proximate sense are signified these knowledges (as shown above, n. 1453). But as the interiors are terminated and closed in the ultimates of order, and are together there, and as it were dwell together in one house; and as the natural in man is the ultimate with him in which his interiors are terminated, therefore by “Bethel” or the “house of God” is properly signified the natural (n. 3729, 4089), and indeed the good there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house” is good (n. 2233–2234, 3720, 3729); moreover knowledges are in the natural, or in the ultimate of order.

 

[2] That “to go up” denotes toward the interiors is because interior things are what are called higher things (n. 2148), and therefore when progress toward interior things is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the expression “to go up” is employed, as “to go up” from Egypt to the land of Canaan, and in the land of Canaan itself “to go up” to the interior parts, and from all parts of it to Jerusalem, and in Jerusalem itself to the house of God there. For example “to go up” from the land of Egypt to the land of Canaan, in Moses: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50:6-7, 9) Pharaoh said to Joseph, Go up and bury thy father; and Joseph went up, and all the servants of Pharaoh went up with him; and there went up with him both chariots and horsemen (Gen. 50:6–7, 9).

 

And in the book of Judges: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1) And the angel of Jehovah went up from Gilgal to Bochim, and he said, I made you go up out of Egypt (Judg. 2:1);

 

for by “Egypt” in the internal sense is signified that memory-knowledge which is to serve for apprehending the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nd by the “land of Canaan” is signified the Lord’s kingdom. And as memory-knowledges are lower, or what is the same, are exterior, and the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re higher, or what is the same, interior, therefore one is said “to go up from Egypt to the land of Canaan,” and on the other hand “to go down from the land of Canaan to Egypt” (Gen. 42:2, 3; 43:4, 5, 15; and elsewhere).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창42:2, 3)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15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43:4, 5, 15)

 

[3] In the land of Canaan itself “to go up” to its interior parts, in Joshua: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7:2-4) Joshua said, Go up and spy out the land; and the men went up and spied out Ai; and they returned unto Joshua and said unto him, Let not all the people go up; let about two thousand men or about three thousand men go up; so there went up thither of the people about three thousand men (Josh. 7:2–4);

 

as the “land of Canaan” signifies the Lord’s kingdom, the parts which were more remote from its ultimate boundaries signified things interior, and therefore the expression “to go up” is here used. In like manner from all the surrounding parts to Jerusalem; and in Jerusalem to the house of God (1 Kings 12:27, 28; 2 Kings 20:5, 8; Matt. 20:18; Mark 10:33; Luke 18:31; and in many other places).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왕상12:27, 28)

 

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왕하20:5, 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10:3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1)

 

For Jerusalem was the inmost of the land, because by it was signified the Lord’s spiritual kingdom; and the house of God was the inmost of Jerusalem, because by it was signified the Lord’s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men spoke of “going up” to them.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arise, go up to Bethel,” namely, progress toward the interiors, which is 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n. 4536).

 

AC.4556 (야곱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And Jacob came to Luz, which is in the land of Canaan, this is Bethel, 35:6)

 

signifies the natural in its former state, and “this is Bethel” signifies the Divine natural, a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uz” as being the natural in its former state, or that very natural which was human. That this was made Divine is signified by, “this is Bethel.” (That “Bethel” is the Divine natural may be seen above, n. 4089, 4539.) So also in other places in the Word where “Bethel” is named it is likewise said, “Luz, this is Bethel,” and “Bethel, beforetime Luz,” as in Joshua:

 

11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13또 그 경계가 거기서부터 루스로 나아가서 루스 남쪽에 이르나니 루스는 곧 벧엘이며 또 그 경계가 아다롯 앗달로 내려가서 아래 벧호론 남쪽 산 곁으로 지나고 (18:11, 13) The boundary of the lot of the sons of Benjamin between the sons of Judah and the sons of Joseph went forth to Luz, to the side of Luz southward, this is Bethel (Josh. 18:11, 13).

 

And in the book of Judges:

 

22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1:22-23) The house of Joseph went up to Bethel, and spied out Bethel; and the name of the city beforetime was Luz (Judg. 1:22–23).

 

AC.4560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unto him, 35:7)

 

That this signifies holy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ods” as being holy truths (see n. 4402). That these were adjoined to the good represented by Jacob is signified by the “gods there revealed to him.” That the place was called “El-Bethel,” and yet previously (in chap.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8:19)

 

and again later (verse 15 of this chapter) “Bethel,”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35:15)

 

and likewise that here when it is called “El-Bethel” it is said, “because there the gods were revealed unto him,” in the plural, and afterwards (verse 15) “where God spake with him,” in the singular, is a mystery, and it is evident that this mystery can be known only from the internal sense. Moreover, many other mysteries are hidden herein, but these cannot be disclosed.

 

AC.4402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and he called it El Elohe Israel, 33:20)

 

That this signifies from the Divine spiritual (namely, interior worship)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El Elohe” (explained in what follows);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Israel” as being the spiritual (see n. 4286, 4292). As regards what has been said from verse 17 of this chapter thus far,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7절)

 

the case is this: In this chapter in the supreme sen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Lord, how he made his natural Divine. But as the things which exist in the supreme sense concerning the Lord surpass the ideas of man’s thought (for they are Divine), I may illustrate them by such things as fall more nearly into the ideas, namely, by the manner in which the Lord regenerates man’s natural; for in the internal sense the regeneration of man as to his natural is also here treated of, because the regeneration of man is an image of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 (n. 3138, 3212, 3296, 3490). For the Lord glorified himself, that is, made himself Divine, according to Divine order; and according to such order he also regenerates man, that is, makes him celestial and spiritual. Here it is explained how he makes man spiritual, for “Israel” signifies the spiritual man.

 

[2] The spiritual man is not the interior rational man, but the interior natural. The interior rational man is what is called the celestial man. What the difference is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celestial man has already been frequently stated. A man is made spiritual by having the truths in him conjoined with good, that is, the things of faith conjoined with those of charity, and this in his natural. Exterior truths are there first conjoined with good, and afterwards interior truths. The conjunction of exterior truths in the natural was treated of in this chapter from verses 1 to 17; and the conjunction of interior truths with good, from verse 17 to the end. Interior truths are not conjoined with good in any other way than by enlightenment flowing in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man. From this enlightenment Divine truths are manifest only in a general manner, comparatively as innumerable objects are seen by the eye as one obscure thing without distinction. This enlightenment from which truths are manifest only in a general manner was signified by Esau’s words to Jacob, “Let me set I pray with thee of the people that are with me”; and by Jacob’s answer, “Wherefore is this? Let me find grace in thine eyes” (as explained above, n. 4385–4386).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33:15)

 

[3] That the spiritual man is relatively in obscurity see n. 2708, 2715, 2716,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246, 3833. It is this spiritual man who is represented by Israel (n. 4286). The spiritual man is so called from the fact that the light of heaven, in which is intelligence and wisdom, flows into those things in man which are of the light of the world, and causes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ight of heaven to be represented in those which are of the light of the world, and thereby to correspond. For regarded in itself the spiritual is the Divine light itself which is from the Lord, consequently it is the intelligence of truth and the wisdom thence derived. But with the spiritual man this light falls into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in him, and which he believes to be true; whereas with the celestial man it falls into the good of love. But although these things are clear to those who are in the light of heaven, they are nevertheless obscure to those who are in the light of the world, thus to most people at this day, and possibly so obscure as to be scarcely intelligible; and yet as they a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and are of such a nature, the opening of them is not to be dispensed with; the time is coming when there will be enlightenment.

 

[4] The reason why the altar was called El Elohe Israel, and by it was signified interior worship from the Divine spiritual, is that in the supreme sense “El Elohe” is the same as the Divine spiritual, and so also is “Israel.” (That “Israel” denotes the Lord as to the Divine spiritual, and in the representative sense the Lord’s spiritual church, or what is the same, the man who is spiritual, may be seen above, n. 4286, 4292.) In the original tongue “El Elohe” means “God God,” and strictly according to the words, “God of gods.” In the Word, Jehovah or the Lord is in many places called “El,” in the singular, also “Eloah”; and he is likewise called “Elohim,” in the plural; sometimes both in one verse, or in one series. He who is not acquainted with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annot know why this is so. That “El” involves one thing, and “Eloah” another, and “Elohim” another, everyone may judge from the fact that the Word is Divine, that is, derives its origin from the Divine, and that it is thereby inspired as to all the words, nay, as to the least point of all.

 

[5] What “El” involves when mentioned, and what “Elohim,” may be seen from what has been occasionally shown above, namely, that “El Elohim” or “God” is mentioned when truth is treated of (see n. 709, 2586, 2769, 2807, 2822, 3921e, 4287). Hence it is that by “El” and “Elohim” in the supreme sense is signified the Divine spiritual, for this is the same as the Divine truth, but with the difference that by “El” is signified truth in the will and act, which is the same as the good of truth (n. 4337, 4353, 4390). The expression “Elohim” is used in the plural, because by truth Divine are meant all truths which are from the Lord. Hence also angels are sometimes called in the Word “Elohim” or “gods” (n. 4295), as will also appear from the passages adduced from the Word below. Now as in the supreme sense “El” and “Elohim” signify the Lord as to truth, they also signify him as to power; for truth is that of which power is predicated, because good acts by truth when it exerts power (n. 3091, 4015). Therefore wherever power from truth is treated of in the Word, the Lord is called “El” and “Elohim,” that is, “God.” Hence also it is that in the original language “El” also signifies one who is powerful.

 

[6] That “El” and “Elohim,” or “God,” are mentioned in the Word where the Divine spiritual is treated of, or what is the same, the Divine truth, and hence the Divine power, may be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Moses: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2-3) God said unto Israel in the visions of the night, I am the God of gods [El Elohe] of thy father; fear not to go down into Egypt, for I will there make of thee a great nation (Gen. 46:2–3);

 

as these words were spoken to Israel, whom he would make a great nation, and thus the subject treated of is truth and its power, it is here said “El Elohe,” which in the proximate sense signifies “God of gods.” That in the proximate sense “Elohim” denotes “gods,” because predicated of truths and the derived power, is also evident in the same: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35:7) Jacob built there an altar, and called the place El-Beth-El, because there the Elohim were revealed unto him, when he fled before his brother (Gen. 35:7).

 

And also elsewhere: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0:17) Jehovah your God, he is God of gods and Lord of lords, the great God [El], powerful and formidable (Deut. 10:17);

 

where “God of gods” is expressed by “Elohe Elohim,” and afterwards “God” by “El,” to whom greatness and power are ascribed.

(2025/6/3)

 

[7] In David: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95:3-4) Jehovah is a great God [El], an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Elohim]. In his hand are the searchings out of the earth; and the strengths of the mountains are his (Ps. 95:3–4);

 

here “God” or “El” is used becau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Divine truth and the derivative power; and also “gods,” because the subject treated of is also the truths thence derived; for in the internal sense a “king” signifies truth (n. 1672, 2015, 2069, 3009, 3670). Hence it is evident what a “great king above all gods” involves. The “searchings out of the earth” also denote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are called the “strengths of the mountains” from the power from this good. In the same:

 

6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8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89:6-8) Who in heaven shall compare himself 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Elim] shall be likened to Jehovah? God mighty in the secret of the holy ones. O Jehovah God Zebaoth, who is as thou the strong Jah? (Ps.89:6–8).

 

Here the “sons of the gods” or “of Elim,” denote truths Divine, of which it is evident that power is predicated; for it is said a “God mighty, Jehovah God of Armies, who is strong as thou?

 

[8] So in another place in David: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9:1) Give unto Jehovah, O ye sons of the gods, give unto Jehovah glory and strength (Ps. 29:1);

 

In Moses: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6:22) They fell upon their faces, and said, God of gods [El Elohe] of the spirits of all flesh (Num. 16:22).

 

pdf 원본에는 Num. 14:22로 되어 있음

 

In David: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I said, ye are gods [Elohim] and ye are all sons of the most high (Ps. 82:6; John 10:34);

 

where they are called “gods” from truths, for “sons” are truths (see n. 489, 491, 533, 1147, 2628, 3373, 3704).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Elohe Elohim];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In Daniel: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을 반드시 이룰 것임이라 (단11:36) The king will act according to his own pleasure, and will puff himself up, and will exalt himself above every god [El], and above the God of gods [El Elohim] will speak wondrous things (Dan. 11:36);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in the proximate sense “El Elohe” is “God of gods,” and that in the internal sense “gods” are predicated of the truths which are from the Lord.

(20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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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1(D1)-주일예배(2600, 출16,30-36), '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pdf
0.48MB
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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