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1-38)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TCR.68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68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is he did not only that he might institute baptism for the future, himself setting the example, but also because he glorified his human and made it divine, as he regenerates man and renders him spiritual. (TCR.684, Ager 역) //
※ 본래 ‘침례’(浸禮)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로 통일하겠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채택된 것은, 광복 전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여 연락이 수월했던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나 바닷가 농어촌 선교에 힘써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표기 문제 때문인지 일본어 성경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혹시 메시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속뜻으로 본다면, 요한과 주님은 모두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과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와 내적 진리를 모두 포괄하는 반면,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 즉 겉 글자인 문자적 의미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으로 표상되는 진리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는 주님께로 나아올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거듭나서 구원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다음은 더 나아가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지식만 가지고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속으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야 하며,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과 불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하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한 것입니다. 성령과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진리뿐인 진리가 아니고요, 사랑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요한에게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도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1절입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주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인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장면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3:13-15)
주님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684번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거듭나 구원받는 것처럼, 주님 역시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인성(人性, human), 마리아를 통해 유전한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여느 인간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예배와 관련된 모든 표징, 표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의 양식이라든가 기물들, 그리고 번제와 희생제물의 영적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예전만 남기셨는데요,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식에서 이마에 물을 바르거나 침례식에서 물속에 잠기고,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무교병(떡, 빵)을 먹는 건 그냥 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참고로, 이마에 물을 바르는, 어디서는 손에 물을 따라 머리에 붓는, 세례는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좀 쉽고 편하게 하자고 생긴 편법이지요. 주님이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浸禮)였습니다. 영어로는 뱁티즘, 원어인 헬라어로는 밥티조마라 합니다.
주님은 이 예전들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새 교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 의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가지 예배의 전례(典禮)를 친히 만드셨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속 사람의 개혁과 겉 사람의 거듭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속 사람의 개혁을 의미하고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같은 방법으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신 것과 인간이 거듭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일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듭나는 사람들 안에서 치욕을 당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에서 물러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속뜻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선이 있는 진리, 완전한 진리로 계속해서 바뀌어 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한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백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의 인성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 있어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세례를 받을 때, 속 사람이 열리며, 천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은 속 사람이 닫힙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는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듭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비둘기 같다’ 표현한 까닭은, ‘비둘기’는 속뜻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나타냅니다. ‘신적 인성’이란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아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깥으로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일차적인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바깥으로, 겉으로 드러나심인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님은 이차적인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여호와를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요, 그분에게서 비롯한 이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이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통합에서 유아세례 및 주일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에 처음 출석,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침례교 신학을 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하여 신대원 어느 조직신학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음 접하고, 무척 감동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 참... 하며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개신교 거의 모든 교인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소 좀 뿌연 생각인데요, 수년 전 무슨 금식기도를 배우러 대전 어느 대형 교회 유명 세미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 주 강사이신 목사님도 하나님들을 따로따로 부르며 기도하시더군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거듭나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세례의 전례를 직접 선포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서는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가 30세쯤이라고 합니다. 30이란 수는 5와 6을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내적 싸움 중에도 작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숫자 6은 내적 싸움을 의미하고, 숫자 5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숫자들, 가령 창5에 나오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의 나이들은 그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1, 2, 3, 4, 5, 6, 7, 8, 9, 10 등의 수들 및 그 복합수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례를 받으실 즈음의 주님은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이기신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은 아주 사소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아 있는 큰 싸움이 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과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의 그런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4절로 37절까지는 요셉으로부터 조상들에 이르는 가문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표면상으로 주님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로 비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오늘 말씀에서는 무려 14절에 걸쳐 요셉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요셉의 가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7절에 나오는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상징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노아는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또 한참 내려가 야곱이 나오는데, 야곱 역시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3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나타내고, 유다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는 진리를 의도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배운 다음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 즉 유다는 어떤 상태입니까?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는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정, 또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그것을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선은 바로 애정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은 영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24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요셉의 가계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한 것은, 그동안 모든 교회를 다스리던 주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주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한 요셉의 족보를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니케아, 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당시에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는 요셉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또 그러세요.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 안에 드는 교파에 소속된 어떤 교인이 주님을 요셉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교회의 교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분의 사적 견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지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는 세례의 전통을 제정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시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이든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아멘
원본
2017-05-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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