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1-38)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TCR.68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68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is he did not only that he might institute baptism for the future, himself setting the example, but also because he glorified his human and made it divine, as he regenerates man and renders him spiritual. (TCR.684, Ager 역) //

 

※ 본래 ‘침례’(浸禮)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로 통일하겠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채택된 것은, 광복 전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여 연락이 수월했던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나 바닷가 농어촌 선교에 힘써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표기 문제 때문인지 일본어 성경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혹시 메시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속뜻으로 본다면, 요한과 주님은 모두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과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와 내적 진리를 모두 포괄하는 반면,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 즉 겉 글자인 문자적 의미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으로 표상되는 진리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는 주님께로 나아올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거듭나서 구원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다음은 더 나아가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지식만 가지고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속으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야 하며,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과 불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하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한 것입니다. 성령과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진리뿐인 진리가 아니고요, 사랑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요한에게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도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1절입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주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인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장면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3:13-15)

 

주님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684번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거듭나 구원받는 것처럼, 주님 역시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인성(人性, human), 마리아를 통해 유전한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여느 인간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예배와 관련된 모든 표징, 표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의 양식이라든가 기물들, 그리고 번제와 희생제물의 영적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예전만 남기셨는데요,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식에서 이마에 물을 바르거나 침례식에서 물속에 잠기고,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무교병(떡, 빵)을 먹는 건 그냥 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참고로, 이마에 물을 바르는, 어디서는 손에 물을 따라 머리에 붓는, 세례는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좀 쉽고 편하게 하자고 생긴 편법이지요. 주님이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浸禮)였습니다. 영어로는 뱁티즘, 원어인 헬라어로는 밥티조마라 합니다.

 

주님은 이 예전들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새 교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 의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가지 예배의 전례(典禮)를 친히 만드셨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속 사람의 개혁과 겉 사람의 거듭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속 사람의 개혁을 의미하고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같은 방법으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신 것과 인간이 거듭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일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듭나는 사람들 안에서 치욕을 당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에서 물러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속뜻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선이 있는 진리, 완전한 진리로 계속해서 바뀌어 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한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백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의 인성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 있어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세례를 받을 때, 속 사람이 열리며, 천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은 속 사람이 닫힙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는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듭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비둘기 같다’ 표현한 까닭은, ‘비둘기’는 속뜻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나타냅니다. ‘신적 인성’이란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아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깥으로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일차적인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바깥으로, 겉으로 드러나심인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님은 이차적인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여호와를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요, 그분에게서 비롯한 이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이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통합에서 유아세례 및 주일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에 처음 출석,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침례교 신학을 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하여 신대원 어느 조직신학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음 접하고, 무척 감동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 참... 하며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개신교 거의 모든 교인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소 좀 뿌연 생각인데요, 수년 전 무슨 금식기도를 배우러 대전 어느 대형 교회 유명 세미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 주 강사이신 목사님도 하나님들을 따로따로 부르며 기도하시더군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거듭나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세례의 전례를 직접 선포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서는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가 30세쯤이라고 합니다. 30이란 수는 5와 6을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내적 싸움 중에도 작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숫자 6은 내적 싸움을 의미하고, 숫자 5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숫자들, 가령 창5에 나오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의 나이들은 그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1, 2, 3, 4, 5, 6, 7, 8, 9, 10 등의 수들 및 그 복합수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례를 받으실 즈음의 주님은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이기신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은 아주 사소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아 있는 큰 싸움이 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과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의 그런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4절로 37절까지는 요셉으로부터 조상들에 이르는 가문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표면상으로 주님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로 비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오늘 말씀에서는 무려 14절에 걸쳐 요셉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요셉의 가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7절에 나오는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상징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노아는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또 한참 내려가 야곱이 나오는데, 야곱 역시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3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나타내고, 유다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는 진리를 의도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배운 다음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 즉 유다는 어떤 상태입니까?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는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정, 또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그것을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선은 바로 애정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은 영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24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요셉의 가계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한 것은, 그동안 모든 교회를 다스리던 주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주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한 요셉의 족보를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니케아, 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당시에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는 요셉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또 그러세요.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 안에 드는 교파에 소속된 어떤 교인이 주님을 요셉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교회의 교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분의 사적 견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지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는 세례의 전통을 제정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시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이든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아멘

 

 

원본

2017-05-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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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속뜻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remains derived from victor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ithes” as being remains (spoken of before, n. 576). But what remains are may be seen above (n. 468, 530, 560–561, 661, 1050), namely, that they are all the states of love and charity, and consequently all the states of innocence and peace, with which a man is gifted. These states are given to man from infancy, but less by degrees as the man advances into adult age. But when a man is being regenerated, he then receives new remains also, besides the former, thus new life. For it is from remains, or by remains, that a man is a man; for without the state of love and charity, and without the state of innocence—which states instill themselves into the other states of his life—a man is not a man, but is worse than any wild beast. The remains acquired in the combats of temptations are those which are here meant. These remains are what are signified by the tithes given to Melchizedek by Abram; and they are all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which the Lord procured to himself by the continual combats and victories by which he was continually being united to his Divine essence, until his human essence in like manner became love, or the being of life, that is, Jehovah.

 

이해가 되시나요? 좀 어렵지 않으신지...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장 28절,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4:28-29)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 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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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눅3:15-20)

 

 

사람은 마지막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 결합한다. 즉 자연적 사람은 세상의 것들 안에 있고, 영적 사람은 천국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의 결합이 일어난다. 말씀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 기록되고 그 속에 천국의 것들인 영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즉 말씀의 글자의 뜻은 자연적이지만 그 속에 영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E.475:2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475:21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heaven is conjoined to man when man is in ultimates, that is, in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in regard to his natural man, while he is in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in regard to his spiritual man; in no other way is conjunction possible. This is why baptism was instituted; also the holy supper; likewise why the Word was written by means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while there is in it a spiritual sense, containing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that is, tha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is natural, while in it there is a spiritual sense. (AE.475:21, Ager 역)

 

이는 계시록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에 관한 주석 중 ‘그 옷을 씻어’에 대한 내용 일부입니다. //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와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리가 요한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묻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과 ‘먹을 것’은 겉뜻으로는 우리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이지만, 속뜻으로는 영적인 옷과 음식, 즉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여분의 옷과 음식은 주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에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 같은 것들이 섞이면 그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더 이상 진리 아닌 것이 되고, 선은 선 아닌 것이 되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분의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 중에는 진리를 대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어떤 틀이 있다는 것은 얼핏 바람직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아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정보를 이해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갖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대단히 유연한 것입니다. 마치 물이 어떤 모양의 그릇에도 담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틀 역시 유연해야 합니다. 그 유연성은 어디서 옵니까? 자아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 틀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시는데요, 그렇게 자기가 만든 틀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열어주시는 그대로의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씀이 이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조바심이 납니다. 이것을 알아야 말씀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왜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가? 하고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결국 저를 위한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여분의 음식과 옷을 갖지 않는 것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요한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라는 말은 그들이 요한에 거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요한이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메시아 사상은 고대교회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유대교회만의 믿음이 아니고 지구상의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있었던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 속에 등장하는 미륵 신앙 역시 메시아 사상입니다.

 

※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Arcana Coelestia 4680번 글에는 고대교회에 관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홍수 후 주님에 의해 세워진 고대교회는 일종의 표상 교회로, 예배와 관련, 전반적으로 외적으로는 주님 나라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인 것들을,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그 자체(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를 표상하는, 그러면서도 내적으로는 체어리티(charity, 이웃사랑)와 연결되는 그런 속성을 갖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아시아 전역으로,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을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set up by the Lord after the flood was a representative church, and was of such a nature that all and each of its externals of worship represented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 but all and each of its internals of worship bore relation to charity. This church was spread over a large part of the Asiatic world, and through many kingdoms there; (AC.4680)

 

그래서 아마 한반도에까지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는 미륵 신앙으로 표현되었나 봅니다. //

 

그런데 고대교회가 몰락하면서 메시아의 의미가 모두 잊혀버렸습니다. 메시아의 의미를 모르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해낼, 그리고 그들을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우월한 민족, 번영하는 민족으로 만들어 줄 그런 세속적 메시아였습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기대하는 것 또한 그런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요한이 그런 세속적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어 본 요한이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인류를 구원할 영적 메시아라는 사실을 지금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요한’은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에서 사용하는 ‘’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말씀의 지식을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 즉 말씀의 지식이 하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주님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성령과 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이구요, ‘’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 또는 선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인 성령과 불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말은 주님에 대한 겸손함을 나타내지만, 그것 말고도 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발은 신체의 가장 아래쪽 발에 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등차(degree, 등급)의 것인 사람의 육체와 감각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주님이 계신 가장 깊은 내면이 있구요, 그 바깥쪽으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차례로 있습니다. 겉 사람은 사람의 육체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을 지배하는 것들은 대개는 육신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욕망과 탐심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속 사람을 먼저 개혁을 하시고,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사모하더라도 육신의 행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 또는 육체를 영적으로 가장 낮은 등차, 등급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신발 끈’은 특히 육체에서 나오는 불결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주님의 신발 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육신으로부터 올라오는 불결한 것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도 ‘신발 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입으신 몸은 인간 마리아로부터 받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순결하거나 거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은 거룩한 인간(Divine Human)이었으며, 다만 그것을 덮고 있는 외적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기 위해서 지옥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발 끈이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벗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것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구원을 동시에 의미하는 까닭은, 주님의 영화 또는 영광스럽게 되시는 일은 2천 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거듭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주님께서는 신발 끈을 풀기 위해 지옥과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신발 끈은 곧 인류의 신발 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고백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이라야만 인류의 신발 끈을 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17절에서 요한이 주님에 대해 말합니다.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에는 타작마당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타작마당’은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농부가 수확한 것을 도리깨로 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리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라는 말씀에서 ‘’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능력으로 교회를 부단히 정화하신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교회이든 외부에 있는 교회이든,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세요.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을 분리하시고, 진리와 거짓을 분리하십니다. 교회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끝나면 쭉정이는 사라지고 알곡만 남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거짓과 악한 것들이 사라지고, 점점 신실한 믿음과 주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만 남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정화하는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 한 분 성도들의 내면에서 교회가 바로 서는 것으로 이 교회가 정화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요한이 말하는 ‘좋은 소식’, 즉 영어로 good tidings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선지자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고, 주님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은 이제는 다시 2천 년 전에 오신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새로운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 내면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매일 같이 우리 속에서 낡은 교회가 무너지고, 주님의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같이 오시고, 매일 같이 새로운 교회를 세워주십니다. 그것이 요한, 즉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과, 새 교회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과,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교회를 정화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오직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늘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과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으로부터, 또는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것으로 매일 새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19, 20절에 나오는 헤롯과 헤로디아 같은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에게는 빌립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본래 이 빌립의 아내였는데, 그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이복형인 헤롯과 재혼을 했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다는 말은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아래는 이들에 관한 배경 설명입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참고로, 대왕 헤롯은 아내가 열 명이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그들의 부정한 결혼을 지적한 것입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왕은 타락한 교회를 지배하는 거짓 진리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왕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혼은 타락한 교회에서 벌어지는 영적 간음을 말합니다.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해서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간음은 진리와 진리 아닌 것, 또는 진리와 악한 것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우자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자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은 불결한 것이고 간음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선이 아닌 것과 결합하거나, 또는 비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이 모두 영적 간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 교리를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또 주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가르쳐서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더럽히는 것이 바로 영적 간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영적인 간음은 진리와 선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3:28-29)

 

그러므로 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를 부정하다 책망한 것은 말씀의 진리를 통해 영적 간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종류의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것은 모두 영적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그동안 교회의 마지막 때 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정하다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로운 진리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서만 그것의 부정함이 드러납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이 요한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때 진실한 교회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고,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교회들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부정하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은 타락한 교회가 참된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악을 더해서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그들이 참된 진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건 진리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구절을 가지고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것이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며,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의 입을 막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지식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속으로 성령과 불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이며,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식만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진리의 지식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와 살아있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이 흘러 들어올 때, 그때 우리는 악한 습관을 끊을 수 있게 되고요, 그리고 이웃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두 벌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두 벌 옷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거룩한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아를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리고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성령과 불로 오셔서 우리 안에 교회를 매일 같이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원본

2017-04-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8(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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