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속뜻,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가 들어 있어 ‘궁창’이라, ‘하늘’이라 합니다. 저녁은 불신앙, 아침은 신앙, 저녁은 사람의 것, 아침은 주님의 것, 저녁은 주님의 떠나심, 아침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날’은 때 혹은 상태를 말하며, 사람의 거듭남 과정 중 이 속 사람, 겉 사람 구별 단계를 두 번째 상태라 합니다.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및 ‘날’(day)의 의미는 위 5절에 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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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2)(DLW.27, 2023/6/9)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AC.27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신(神, the Divine, 하나님, 주님)은 나눌 수 없다(the Divine is not divisible)는 걸 모르겠습니까? 또 무한자(無限者)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혹은 신이라는 것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는 것도 말이지요. 어떤 제정신이 아닌 사람(one destitute of reason)이 선언하기를, ‘다 가능하다. 복수의 무한자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그리고 신이라는 것들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신 나간 주장을 하면서, 그리고 계속해서 ‘만일 그들이 하나의 동일 본질(one identical essence)을 가진다면, 그러면 이것이 그들을 하나의 무한자, 창조되지 않은 자, 전능자, 그리고 하나님이 되게 할 수 있다’ 주장한다면, (사실 이 주장은 좀 뒤죽박죽,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인데요) 이 하나의 동일 본질이 사실은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요? 하나의 아이덴티티(identity, 正體, 신원)라는 건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여러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존재가 다른 것에서 나왔다고 해야 한다면, 다른 것에서 나온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신이, 하나님(God)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주장, 논란, 입장에도 불구, 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만물이 말미암는, 만물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다’(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라는 사실입니다. (DLW.27) Who that has sound reason can help seeing that the Divine is not divisible? Also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 Suppose one destitute of reason were to declare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possible, if only they have one identical essence, and this would make of them one infinite, uncreate, omnipotent, and God, would not the one identical essence be one identity? And one identity is not possible to several. If it should be said that one is from the other, the one who is from the other is not God in himself; nevertheless, God in himself is 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 (see above, n. 16). (DLW.27)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일곱 번째 주제, ‘만물이 말미암는 한 분의 신-인이 계신다(There is one God-man, from whom all things com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7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오늘 위 메인 본문은 사실 매우 신학적, 철학적 논거여서 대부분, 읽어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들 않으실 겁니다. 저 자신, 사실 저는 이런 걸 매우 안 좋아합니다. 제가 신대원 시절,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조직신학이었거든요. 날마다 무슨 ‘(性), 성, 성’, ‘(論), 론, 론’, ‘(的), 적, 적’ 하는 게 저는 정말 와닿질 않았고, 매우 매우 불편했는데요, 칼빈에 대해서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입장도 그의 대표적인 저작, ‘기독교 강요’(1536)를 읽고는 그냥 질려버렸지요. 당시 시대적 특성을 따라 스콜라식 저술 형태로 충만한 이 책을 읽고는 저는 그만 질식하는 줄 알았고... 나중에 영계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나 대화했던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접하고는 완전... 네, 뭐, 하여튼 저는 이쪽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무슨 교리적 전반적 이해는 또 꼭 필요해서 날마다 꾸욱 꾹 마치 무슨 달팽이 기어가듯 그렇게 번역, 풀고 있습니다. 그냥 휙 읽는 것과, 이렇게 풀이식 번역으로 정리, 정돈하는 건 또 완전 차원이 다른 작업이군요!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여러 사람 중 캘빈에 관한 기록입니다.

 

캘빈이 처음 영계에 들어왔을 때는 그가 태어났던 세상에 그대로 사는 줄로 생각했었다. 그는 처음 그에게 다가온 천사들로부터 그가 죽어서 영들의 세계에 와 있다고 들었지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동일한 몸을 가지고 있고, 손도 동일하고, 또 감각도 전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즉 그가 지상에서는 실체적인 몸이 물질적인 몸을 입고 있었으나 이제 그 물질적인 몸은 벗고, 대신 실체적인 몸이 남아 있어서 이 실체적인 몸에 의해 사람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을 그는 처음에는 이해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예전 이념으로 되돌아가서 그는 아직도 그 자신이 태어났던 세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까닭은 그는 관능적 사람이었으므로 신체적 감각의 대상에 의해서 배운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성언(聖言)에 의해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총명에 의해서 그의 믿음의 모든 독단적 교리들을 취했던 이유이다. 그는 사람들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만 성언에서부터 인용을 했던 것이다.

 

이 초기 후에 그는 천사들을 떠나서 옛날 예정론을 믿은 자들을 찾아서 배회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이 어느 멀리 떨어진 지하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 지하 동굴에는 뒷길을 통해서 들어가는 문 이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그들과 조우할 수 없었다. 그 동굴로 들어가지 못한 캘빈은 이번에는 그 동굴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서 나와 아직도 자유로운 방황을 허용받고 있던 고트샬크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영적인 언어로 피리스라고 칭해지는 곳에서 때때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캘빈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뒤 그들의 모임 장소에 인도되어졌다. 그가 그들 중에 왔을 때 그는 환희에 차서 그들의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트샬크의 종들이 동굴 안의 그들의 형제들에게 다시 보내지자 그 후 캘빈은 자신의 그런 삶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단순한 마음의 종교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어떤 사회에로 피난처를 구해 갔다. 그러나 그들이 예정론에 대해서 아는 바 없고, 또 도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사회 변두리로 나가서 종교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섭리된 것은 그가 예정론에 관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함과 아울러 도르트 종교회의 이후 그 혐오스러운 이단 사설에 스스로를 고착시켜 온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수가 차게 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런 자들이 서서히 그 지하 동굴 안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현대 예정론자들 사이에서 캘빈은 어디 있는가? 하는 아우성 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캘빈이 사회 변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캘빈은 스스로 예정론에 감염된 어떤 장관 앞에 인도되었고, 그 장관은 그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주님에 의한 새 천계가 형성될 때까지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보호자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쫓겨났을 때, 캘빈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집으로 가서 한동안 거기 머물렀다. 그러던 중 그가 여기저기를 배회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까지 와서 나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주님의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에 의거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이 역시 지적 시인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들로 구성되고 있는 새 천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주님과 아버지를 한 분으로 믿고 또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심을 믿으며, 주님을 보고 안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또 알며, 이와 같이 교회와 천계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처음에는 통상적인 침묵을 유지했으나 약 반 시간 후에 갑자기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요. 요셉과 혼인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으로 예배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 속량주와 구주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십니다. 이 말에 그는 응대하기를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성은 주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성부에게만 속합니다. 내가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인성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캘빈이 말하기를 천계의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부 앞에서 가진 겸비와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한 고난에서 증명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그의 기억에 저장되었던 미망들로 그리스도 예배를 논박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예배는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 예배를 모독하려 했으므로 나와 함께 있던 천사들이 그의 입술을 닫아버렸다.

 

그를 회심시키고자 하는 내 열정 때문에 나는 주 우리 구주께서 단지 하나님과 사람이실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이시고, 사람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울의 말, 즉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로 증거하였고, 나아가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선언되고 있는 바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이들은 한 인격 안에 있기를 사람 안에 영혼과 몸처럼 계신다는 것으로 증명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대꾸했다. 그 모든 성언의 인용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요. 성언의 인용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돌아가는 풍차와 같아서 이단들도 모두 성언의 인용으로 지탱되고 있소. 예정론만이 모든 다른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정론은 회중들의 장막과 같고 득의와 구원을 산출하는 믿음이 그 성소요 안치소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은 영적인 것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고, 구원은 자유로운 은사요. 예정론에 대한 반론은 내 귀에는 배에서 올라오는 트림 소리 같고, 설사를 일으킨 것 같이 들리오. 예정론 이외의 교리로 가르쳐지는 교회의 회중들은 양과 이리들의 혼합과 같아서 이리들이 율법으로 제재되어서 양들을 공격할 수 없게 해야 마땅하오. 나는 양들을 예정된 자들이라 믿고 있소. 그리고 그런 교회의 설교를 아무리 웅변적으로 해도 딸꾹질 이상으로 여기지 않소. 그러나 내게 내 자신의 믿음을 서술하게 해주시오. 즉 하나님 한 분이 계시며, 그분은 전능하시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선택되고 예정된 자가 아니고는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다. 그 모든 다른 자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격분해서 말했다. 가버려라. 이 악한 영아! 너는 주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 네 믿음은 어떤 자는 천계로 예정되고, 어떤 자는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이 폭군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만을 자기 도성에 들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고문하는 집에 넘겨준다고 믿고 있구나. 부끄러움을 알아라. 그리고 나서 캘빈의 일치신조에서 다음과 같은 발췌를 읽어주어 이것이 그의 정확한 교리를 서술한 것인지를 확인하였다. 일치신조에,

 

만일 심중의 신뢰와 믿음이 주님의 신성에 의지해서뿐 아니라 주님의 인간 성정에 의거해서 그리스도에게 두어진다면, 또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모두에게 향해진다면 그것은 저주받아야 할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지 않으시고,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대다수의 사람을 영벌에 처하도록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회심하여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큰 죄를 범하고 각종의 범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선택된 자들과 이미 중생한 자들은 믿음과 성령을 상실하지 않으나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정죄되어 첫 번 세례를 받고, 날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들의 능력껏 거룩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게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이프찌히판, 1756년, 837. 838쪽)

 

이 발췌를 읽고 나자 그는 그것이 그의 교리를 대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낱말들 자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주님의 사자들은 모두 그를 떠났고, 그는 급히 가증스러운 예정론으로 자신들을 다진 자들의 동굴로 향하였다. 나는 후에 이들 중 몇과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노동을 강요당하고, 또 서로가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 상해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생활의 환희였다.

 

※ 주) 스베덴보리가 전하여주는 루터와 캘빈에 대한 영계에서의 이러한 모습들은 아직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의 빛깔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로 그때까지 그들의 내면은 세상적인 요소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 대개 이런 영적 상태를 거치며, 점차 겉 사람에 형성된 외적인 요소들을 지우고,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그들의 주도적인 내적 상태과 일치하는 외부의 주변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천국과 지옥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스베덴보리가 만난 그들의 상태는 아직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2. 오늘 저 메인 본문은 어려운 표현들, 일상 중엔 잘 안 쓰는 용어들 때문에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절대 여럿으로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걸 저렇게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지요... 스베덴보리는 일종의 논문 형식으로 저술 중이기 때문인데요, 스베덴보리가 그의 모든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그 첫 번째 이유는, 스베덴보리는 그 첫 번째 독자층을 당대의 학자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두 번째 이유는, 라틴어는 이미 사어(死語)라 더 이상 시대 변화에 따른 언어적 변화가 없어 그 원어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습니다.

 

 

3. ‘하나님에 관한 생각, 즉 신관(神觀)’을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의 기초라는 생각을 붙들고 함께 이 씨름을 해나가시기를 권합니다. 반드시 천국 입성을 향한 굳건한 반석이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9(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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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속뜻, 속 사람, 겉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은 먼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신 후, 속 사람 안에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를 두십니다. 겉 사람 안에는 사람의 것이 있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조차 사실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러는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시며, 주님의 섭리로 사람의 이 모든 오류와 탐욕을 주님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강제로 바로잡으시거나 끄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AC.24

하나님의 영, 즉 주님의 자비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낮(day, 날)안에 생긴 다음, 처음으로 빛이 비취는데요, 이 빛은 곧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선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 후, 주님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간 일종의 어떤 구분, 구별을 두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주2)간 구별이 됩니다. ‘궁창’(expanse)은 속 사람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을,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은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을 각각 말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하물며 속 사람이라는 것의 본성(nature)및 퀄러티(quality)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는 속 사람, 겉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하기도 합니다. 그 자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들까지도 그동안 가라앉게 했기 때문이며, 심지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것들까지도 무슨 혼란스럽고 흐릿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먼저 이르시기를,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이어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처럼,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먼저 말씀하신 게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그 다음 관찰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즉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선과 진리라는 것, 오직 주님께만 속한 선과 진리라는 것이 이 속 사람이라는 것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은 거듭나고 있을 때, 선을 행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아는 그런 본성 가운데 여전히 있지만, 사실은 주님에게 속한 이 선과 진리에 의해 인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일종의 구별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국에 관한 일종의 아르카눔(arcanum, 秘義, 감추어진 비밀, 신비, 복수는 아르카나 arcana)인데요, 인간은 자기 본성에 속한 것들에 의해, 그리고 감각에 속한 거짓과 뿐만 아니라 온갖 탐욕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진리와 선 쪽으로 인도되며 구부려진다는 사실, 그래서 거듭남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일반적으로든 아니든,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궁창, 즉 속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이지요.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AC.25

‘땅을 펼치며 하늘을 펴는’(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서에서 흔히 말하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그리고 다시, 주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을 드러내어 말하는 데를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멈추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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