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AC.8705,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AC.8705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 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한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이런 이유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자연계의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로 된 피조세계 밖에 계신 주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둘 사이를 잇는 그 무엇으로 오시는 방법뿐이며, 그것이 바로 생육신(生肉身) 하신 주님이시고, 나중에 성육신(聖肉身), 곧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말하는 ‘중재자’이며, ‘중보자’이며, 한 분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겉인 신적 인성과 주님의 속인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 간 커뮤니케이션이 곧 ‘중재’요, ‘중보’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 또는 신성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2023-06-15(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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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1)(DLW.11, 2023/6/13)

 

 

하나님에 관한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DLW.11

모든 천국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신관(神觀, idea of God) 말고 다른 건 없습니다. 이는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모두 사람 형태(form like a man)를 띠고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천사들에게 있는 신성(神性,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이며, 천국에서는 생각(thought)이라는 것이 천국 형태(the form of heaven)를 따라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천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 자신 내적으로(interiorly), 즉 자신의 영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이 그 형태에 있어 완전한 사람인 것은 바로 이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결과는 천국의 형태에서 오는데요, 천국은 가장 큰 데와 가장 작은 데 어디서도 그 모습이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사람과 같은 형태라는 것은 저서, ‘천국과 지옥’ 8, 9, 10, 11장(글 번호로는 HH.59-86)에서 보실 수 있으며,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도 관련 글(HH.203, 20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창세기(1:26-27)를 통해 알려졌는데요,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DLW.11)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1번 글입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모두 3부 6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를 참고하세요.

 

1부 천국(Part I: Heaven)(1-43)

2부 영들의 세계와 인간의 사후 상태(Part II: The World of Spirits and Man’s State after Death)(44-55)

3부 지옥(Part III: Hell)(56-63)

 

※ 아래는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는 8-11장 제목입니다.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59-67)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68-72)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73-77)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78-86)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천국의 형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치 우리가 3차원 공간인 자연계에 갇혀(?) 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 사고방식 자체가 ‘시간과 공간’, 즉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천국 모든 구성원 역시 그곳 형태에 기반한 모든 사고 및 인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천국 형태의 출발점, 곧 천국이 비롯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형태를 따라 주님의 모든 신성이 온 피조 세계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의 사람인 것도, 그리고 이런 사람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천국 수많은 사회도,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전체로 이루어지는 천국 전체의 모습도 주님 앞에는 한 사람 모습인 것은 곧 주님이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a)를 우리는 지금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제 나눈 HH.59번 글과 비슷한 글인데요,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천국 형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글입니다.

 

천국이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임을 밝힌 이유는, 이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앞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천국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개념도 가질 수 없고, 주님과 천국 간의 결합이나 천국과 사람 간의 결합, 또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에 대한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이 모든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 전제로 천국의 형태를 미리 설명한 것이다. (HH.67)

 

 

2.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다들 꼭 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 그래도 가장 포퓰러한 책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입문서라 해도 괜찮은 책인데요,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접하신 분들은 그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 읽는 순간, 마치 개안(開眼)을 하듯 영이 열리며, 그 모든 내용을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쭈욱쭉 흡수하시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셔요... 참고로, 저는 전자의 경우였고요, 후자와 같은 경우는 참...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스베덴보리가 남긴 글을 읽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아래는 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그냥 편의상 알려드리는 것이고요, 저는 이 서점과 무슨 관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https://bit.ly/45XE1jr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3. 다음은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고 한,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 23장, ‘천국의 형태가 구성원 간의 관계와 교통을 결정한다(The Form of Heaven That Determines Affiliations and Communications There) 203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천국 형태를 띠는 정도만큼 천국에 있고, 사실상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HH.57) 따라서 그 정도만큼 지성과 지혜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의 사고력(understanding)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그리고 의지(will)에서 나오는 모든 애정은 천국의 형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두루 퍼져나가 그곳 공동체들(societies)에 전달되며, 반대로 그 공동체들의 모든 생각과 애정도 개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감정은 모두 자기 안에 있고 밖으로 뻗어나가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기에 생각은 멀리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우리 시각이 멀리 있는 물체에 가 닿아 거기 보이는 형체에 초점을 맞추듯이, 우리 내적 시각(the interior sight)인 사고력의 시각도 영계에서 그렇게 뻗어나간다... (HH.203)

 

 

일곱 배로 밝은 빛 가운데 거니시는 하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23-06-13(D3)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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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속뜻,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주님은 아주 부드러운 것들로 시작, 하나하나 심으시는데, 그것을 각각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이것들을 가지고 선도 행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하는 줄 압니다.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는 한, 아직 그는 참 신앙, 곧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어서 그를 못 움직이는 식물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조차 기뻐하십니다. 그는 머잖아 움직이는 동물, 곧 참된 애정으로 신앙의 생명(생활)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은 이렇게 ‘저녁’과 ‘아침’의 반복이지만 점진적으로 우상향(右上向), 결국 거듭남의 종점인 ‘안식’ 상태에 들어갈 것입니다.

 

 

AC.29

‘땅’(the earth), 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인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면, 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 곧 ‘풀’(the tender herb)을, 그리고 뭔가 좀 더 유용한, 그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곧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를,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곧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처음 상태, 퀄러티(quality)는 다음과 같은데요,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압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건데도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자기로 말미암는 줄로 아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생활)(the life of true faith) 가운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는 나중에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런 게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겨우 신앙의 생명(생활)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걸로,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상태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주님이 복음서 여러 본문에서 마지못해 친히 언급하신 것처럼, 주님은 씨 뿌리는 농부요, ‘씨’(the 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the earth)은 사람입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19-24)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37-39)

 

같은 취지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태셨습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the universal heaven)를, 그보다 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the true church)를, 그리고 특별하게는 참된 신앙(true faith)의 사람, 즉 신앙생활을 통해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또한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인데요, 주님이 친히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입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 연속 단계 중 세 번째 상태인데요, 이 상태는 뉘우침의 상태, 곧 그늘에서 빛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하는 상태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하신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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