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못 하게 된 사가랴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저는 주일설교 준비에 거의 한 주를 다 씁니다.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번역의 일이 있음에도, 그리고 원본이 따로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수시로 렌더링, 그러니까 되새김질을 하지요. 보고 또 보고, 늘 다듬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존 설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실 어떤 설교든 그 설교자가 주님과 결합, 성령의 퍼셉션이 있으면 그 설교는 살아있는 겁니다. 이천 년 전, 아니 수천 년 전 신구약 성경이 오늘 우리를 살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누가복음 시리즈는 아쉽게도 맨 처음 몇 편, 그러니까 두 편 정도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분실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그러나 이도 주님의 섭리이지 싶습니다. 나중에 주님 허락 있으시면, 저라도 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따라서 앞에 빠진 부분은 본문 리딩으로 대신합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17)

 

 

복음서의 시작이 예사롭지가 않지요? 이 복음서 저자, 그러니까 대필자인 누가의,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시작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는 등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와 같은 기술(記述)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328)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그 맨 처음 글인 318번 글입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주219 (HH.318)

 

주219. 이교도들도 크리스찬과 더불어 똑같이 구원받는다 (AC.932, 1032, 1059, 2284, 2589, 2590, 3778, 4190, 4197). 저세상에 있는, 많은 수의 교회 밖 나라들과 사람들 (AC.2589–2604) 교회는 특별히 그곳에 말씀이 있으며, 그로 인해 주님이 알려진 곳이다 (AC.3857, 10761). 그럼에도 불구, 말씀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이 알려진, 그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교회 때문이 아닌, 단지 체어리티와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AC.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주님의 교회는 자기 종교를 따라 선하게 살며, 신(神, a Divine)을 시인하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다. 그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지며, 천국에 들어간다 (AC.2589–2604, 2861, 2863, 3263, 4190, 4197, 6700, 9256). //

 

19절입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 다음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51-58)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 공동체를 말한다. (HH.52) //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 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 우리가 그동안 배운 삼위일체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잘은 모르겠으나 하나이신 삼위일체였다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바로잡아 주신 삼위일체는, 속 사람(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해처럼 방사하시는, 즉 활동하시는(Divine Operation)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계신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입니다. 이는 우리 한 인간이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일상 가운데 활동하는 것과 정확히 매칭됩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입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절,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22절,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86번 글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That “a vision” denotes inmost revelation, which is that of perception, may be seen from the nature of visions, which take place in accordance with the man’s state.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closed, a vision is very different from what it is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open. (AC.1786, Clowes 역, 창15:1)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절,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원본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세 번째 설교

2025-04-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13(D1)-주일예배(2593, 눅1,18-25), '말을 못 하게 된 사가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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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39.357-365.'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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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7.51-58.'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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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ana_coelestia_02(창10-17, 1114-2134), 63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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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 오늘은 본래 준비하던 다른 본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틀 전인 지난 4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의 너무나도 이상한 선고로 우리는 멀쩡한 대통령을 또 한 번 잃었습니다. 김문수 장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파면하는 게 말이 되느냐?’ 저는 목사이지만, 그러나 망망대해 태평양 무슨 외딴섬 목사가 아니며, 저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 좀 별난 사역에 힘쓰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저 우주 어떤 외딴 별나라 사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은 태어난 자기 조국을 사랑하며, 마땅히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이 나의 조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 역시 작금의 이런 상황에 가슴속 울분과 화가 넘쳐나지만, 그러나 저의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 모든 참 신앙인은 다 같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펴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십자가 달려 운명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다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밤의 한 장면입니다.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자, 주님께 집중하자, 가장 근원적인 질문,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나에 집중, 전에 나눴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말씀을 조금 더 다듬어 다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오실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개역개정에서는 ‘호적하라’이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인데요,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법도, 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고 이해했는데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 곧 선과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무슨 학교 교육하듯 일률적으로 가르치며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맞게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히 맞춤식으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지요. 비록 그것이 크고 중요한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 역량에 맞게 우리 페이스에 맞춰 아주 천천히, 아주 기초부터 오랜 세월 끝까지 말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은,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시 예를 들면, ‘퍼셉션’(perception)이나 ‘오운’(own)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난처한 표현입니다. 난처하다는 말씀은, 원래 그 의미와 뉘앙스가 이만큼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확 다 사라지고 하나만 남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부득이 이 역시 그냥 ‘래셔널’(rational)로 적겠습니다. 보통은 우선은 그냥 이성(理性)이나 추론하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래셔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이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 래셔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에서 인용했습니다.

 

말씀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천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의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은 글자의 뜻 그대로 이집트인과 아시리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받아들여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융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서 내적 의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spiritual)은 ‘이스라엘’, 자연성(natural)은 ‘이집트인’, 그리고 그 중간 기능인 합리성(rational)은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룬다. 천사는 영적으로, 사람은 자연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천사와 사람은 거의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듯이 결합된다. 실제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영혼이고, 문자 의미는 말씀의 몸인 것이다. 이것은 말씀 전체에 해당된다. 이상으로 말씀이 천국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매체이고, 그 문자 의미는 기초와 바탕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H.307:3, 김은경 역)

 

즉, 우리가 말씀을 지상의 언어로 읽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천국의 언어, 곧 영적으로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중간에서 이 래셔널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가리켜 주님의 첫 번째 래셔널, 곧 human rational이라 하고, 이삭을 가리켜 주님의 두 번째 래셔널, 곧 Divine rational이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아직 아브람 시절, 곧 아직 주님 안에 마리아로 유전한 human이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차곡차곡 그것을 벗고, Divine Human, 곧 아브라함 시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

 

※ 하나 더, 다음은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라는, ‘천국과 지옥’ 4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합리적 기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하겠다. 진정한 합리성은 진리로만 형성되고, 그릇된 것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떤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진리에는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세 종류가 있다. 사회적 진리는 국가의 법과 다스림에 관한 사항이며, 일반적으로 나라 안의 정의와 평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도덕적 진리는 대인관계에 관련된 개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며, 일반적으로는 정직과 올바름, 구체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덕성에 관한 문제들이다. 영적 진리는 천국과 교회에 속한 일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HH.468, 김은경 역)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사회적, 도덕적 진리가 영적 진리가 되도록,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진리가 우리의 도덕적, 사회적 진리로 흘러 들어가도록 천국의 천사들처럼 행하며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이 래셔널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비록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기가 막히는 엄중한 상황에 부득이 갑자기 바뀐 설교이지만, 그러나 덕분에 다시 한번 주님의 탄생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래서 우리의 첫 출발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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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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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 아브람과 롯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창13:7-11)

 

※ 개역 성경에는 롯이 ‘동으로 옮기니’로 되어 있고, KJV나 NIV 번역에도 ‘toward’, 또는 ‘eastward’로 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에 맞는 번역은 ‘from the east’, 즉 ‘동쪽으로부터’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을 이루는 세 가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합리성과 기억의 지식과 외면의 감각적인 것이다. 합리성은 안쪽에 있고, 기억의 지식은 바깥쪽에 있으며 감각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있다. 합리성을 통해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해 하나가 된다. (천국의 비밀 1589, 이순철 역) There are three faculties which constitute the external man, namely, the rational, that of memory-knowledge, and the external sensuous. The rational is interior,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is exterior, and this sensuous is outermost. It is the rational by means of which the internal man is conjoined with the external; and such as is the rational, such is the conjunction. (AC.1589, Clowes 역)

 

※ 이는 오늘 본문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중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에 관한 AC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은 아브람(Abram)과 롯(Lot)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예전 이름이고, 롯은 아브람의 형제 하란의 아들, 그러니까 그의 조카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창11:27)

 

오늘 본문 창13은 주님의 겉 사람을 다루는데요, 이는 나중에 주님의 속 사람과 결합하게 되지요. 겉 사람은 인간 본질(the human essence)이고, 속 사람은 신(神) 본질(the Divine essence)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롯으로, 후자는 아브람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됩니다. 아브람은 인성 가운데 계시는 주님(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을 표상합니다. 참고로 창12부터 이어지는 아브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영유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두 마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속 사람은 무엇이고 겉 사람은 무엇일까요? 속 사람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속 사람보다는 바깥쪽에 있는 마음이며, 그곳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나 귀 같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고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정말로 ‘산다’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이 ‘산다’는 상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말하는데 인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며, 특히 소위 신앙인이라 하는 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 이유는, 그 주된 관심사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이 다분히 ‘’에 기반한, 세상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노후나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이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처럼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비로소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의 자아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즉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천국의 비밀’ 1594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삶 가운데 있기(he lives in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때문이며,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 있기(he lives in no charity, and when he is living in no charity it cannot be apparent to him that a life of the love of self and its yearnings is so contrary to heavenly lov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물질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질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오로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뿐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도 자신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진리를 떠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는 까닭은 대개 진리를 섬기기보다 진리가 자신을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둘은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하나가 됩니다. 사람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 안에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에게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갈등하고 그 갈등을 극복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글자의 뜻 그대로만 보면,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보면, 그러니까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보면, 아브람은 주님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고, 롯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속 사람은 선과 진리에 따라 살려 하고, 겉 사람은 세상 욕망과 쾌락을 좇아 살려는 것입니다.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은 주님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 악을 뜻하고, 브리스 사람은 유전 악에 바탕을 둔 거짓된 생각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고, 그 불러들인 시험을 이기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교통 정리하신 후라야, 곧 정하신 선을 벗어나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던 지옥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후라야 영계를 포함, 이 피조 세계 전체가 균형을 되찾고, 그래야 인간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때, 먼저 베를린을 점령당한 독일의 항복에 이어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일본마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항복, 전 세계 온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어 아시아에도 종전이 오고, 드디어 우리 대한민국에도 광복의 날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또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다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이 원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둘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때가 앞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아브람이 계속해서 롯에게 말합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속 사람을 대적하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바로 그 악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그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 여기 나를 떠나가라’의 앞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에 대한 내용 역시 주석에는 있으나 제가 그걸 쉽게 풀어드리지를 못하겠어서 부득이 뺐습니다. 나중에 좀더 준비가 되면 그때 싣겠습니다.

 

그러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영적인 빛으로 인해 주님의 겉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요단 지역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단 지역의 이런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했을 때 주님의 겉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교회에 선과 진리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요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 또는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곧 교회를 이루는 진리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가 태고교회처럼 순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 교회의 지식들 속에 선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소알이라는 지역은 선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애굽은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세상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요단 지역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 대항하는 것들이 물러났을 때의 겉 사람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서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게 대적하는 악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롯이 떠나는 것은 주님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결별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 안의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모르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모든 악은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의 사주(使嗾, 남을 부추겨 좋지 않은 일을 시킴)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신앙인들은 교만해지지 않고, 또한 지나친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291-302) 292번 글입니다. 위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그리고 아래는 위 ‘주204’ 내용입니다.

 

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그러므로 부언하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五感, 다섯 감각, 시, 청, 후, 미, 촉)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자칫 악한 영들을 통해 지옥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브람과 롯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각각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신 이유는,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가르치시며,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사모하거나, 또는 그와는 반대로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그것이 모두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신 안에 여호와가 주장하시는 마음이 있고, 지옥이 주장하는 마음이 있어 서로 다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이 겉 사람의 악과 결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이것은 앞으로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절에서 롯은 요단 지역을 택해 떠났다고 합니다. 요단 지역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지역을 택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의 내면에 세워지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 교회가 되기를 결심할 때,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동안 속 사람을 대적하던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롯이 ‘동으로’(from the east) 옮겨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동쪽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 즉 주님의 교회가 설 자리인 겉 사람의 중심을 속 사람에게 양보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단이란 각자의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 결단이 설 때 속 사람을 대적하던 모든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아멘

 

 

2020-10-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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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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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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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in the midst of his tent.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the shoulder, both of them,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 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창9:21-23)

 

※ 오늘부터는 본문에 영문도 함께 싣겠습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이순철 역)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reby fell into error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drunkard” in the Word. They are called “drunkards” who believe nothing but what they apprehend, and for this reason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And because this is done by means of sensuous things, either of memory or of philosophy, man being what he is cannot but fall thereby into errors. (AC.1072, Clowes 역)

 

※ 위 인용은 AC(Arcana Coelestia, 라틴,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 1072번 글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창세기 9장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중 ‘취하여’에 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먼저, 오늘 배경입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었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는데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함은 그냥 자기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아니 그러는 게 더 나았을 일을 형제들에게로 가 알려요. 점잖게 말해 ‘알렸다’이지 아마 키득키득 천박, 경박하게 알렸을 겁니다. 함의 말을 듣고 그의 형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가서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이 일은 작은 사고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 말씀에는 영적 교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노아와 그 자손들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의 몰락 후, 주님에 의해 새로 세워진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聖) 문서(스베덴보리가 주님의 계시로 기술한 그의 모든 저작, Writings)에 의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들, 즉 아직 지상에도 퍼셉션(perception)이 있었던 시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말씀을 그때그때 직접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天的, Celestial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 위 퍼셉션에 관해 전에 정리했던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 직관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

 

천적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즉 사랑이나 선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신앙, 또는 진리가 따라오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노아로 상징되는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靈的, Spiritual Church)입니다. 영적 교회는 지성의 교회입니다. 즉 신앙이나 진리가 먼저이고, 다음에 사랑과 선이 따르는 교회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랑의 교회라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종의 천국에 관한 공리(公理,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 거의 심비(心碑,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일반적, 종류별, 그리고 세부적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나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세 천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사회공동체(societies)로 나누어진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고 하기 때문이다. (HH.20)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HH.21)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HH.22)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서로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HH.23)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聖職)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성경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王權)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성경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the celestial Divine the Lord)에서 ‘예수’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HH.24)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즉시(at once)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perceive),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 34)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는 것’(the taught of Jehovah)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45, 46절에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5, 46) (HH.25)

 

앞서 말한 대로, 이 천적 천사들이 지혜와 영광에 있어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신적 진리를 생활 속에 직접, 즉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적 진리를 듣자마자 그것을 의도하고 행하며(will and do), 결코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천사들은 어떤 진리를 들으면, 주의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즉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directly) 들어가시고,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님은 선 안으로는 직접 유입하시지만, 진리 안으로는 선을 거쳐 간접적으로 유입하신다. 왜 두 가지가 같은 말이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동에 속한 것은 선이라 부르며, 기억과 거기서 나오는 생각에 속한 것은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진리는 사람의 의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선으로 바뀌어 사랑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그냥 기억과 생각 안에만 머무는 진리는 선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으며,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의지와 의지에서 비롯된 사고 능력(understanding, 이해, 이성)으로 인해 사람인 것이며, 의지를 떠난 사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HH.26) //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했던 천적 교회의 사람들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는데요,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 그리고 네피림과 같은 괴물이 출현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이어 고대교회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는 세 종류, 곧 감람(橄欖,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들 나무는 각각 천적(celestial), 영적(spiritual), 그리고 자연적(natural)인 것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본래 진정한 신앙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릇된 신앙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고, 그릇된 신앙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주님 신앙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입으로만 주님을 신앙할 뿐, 삶은 정반대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또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비밀’ 1072번 글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진정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반대로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합니다.

 

※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 안에는 순진함, 천진난만함(innocenc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행이 이상하게 순진하지가 않다면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닌 겁니다.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 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에서 인용 //

 

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나 말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릇된 교리가 양산되었습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이를테면 오늘 노아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들인 것입니다. 말씀에는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 ‘벌거벗은지라’는 교회 안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추론하거나 왜곡하는 교회에는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잠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것은 고대교회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함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22절입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은 노아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되는 아들로, 영적으로는 부패한 교회를 뜻합니다. 부패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천국의 비밀’ 1076번 글은 부패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지만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해서 신앙을 그 본질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며, 그로 인해 신앙을 죽은 것으로 만든다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 (AC.1076, 이순철 역) A church is said to be corrupted when it acknowledges the Word and has a certain worship like that of a true church, but yet separates faith from charity, thus from its essential and from its life, whereby faith becomes a kind of dead affair; the result of which necessarily is that the church is corrupted. (AC.1076, Clowes 역)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뿐, 삶에 있어서는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는 교회가 부패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부패한 교회의,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들이 생각할 때 잘못된 교리나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는 그들, 곧 잘못된 교리나 신앙을 가졌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날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만약 비난을 할 목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우리는 여기 함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잘못이 아니겠지요. 함의 말을 듣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갑니다. 23절입니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함과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지요. 속뜻으로 셈과 야벳은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은 고대교회 예배의 내적인 것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리고 ‘야벳’은 예배의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즉 제사의 제물들과 의례들을 뜻합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오직 외적이기만 한 예배는 생명 없는 죽은 예배입니다. 반대로 예배의 내적인 것만 있고, 외적인 것이 없다면 내적인 것은 허공중에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만 있고 지상의 교회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의 내면에 속 사람만 있고 겉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없이 어떻게 천국의 시민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 안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안에 동시에 있는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옷을 가져다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뜻하고, ‘하체를 덮었으며’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깨는 힘과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벗은 몸을 똑바로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함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마치 공모를 하듯 진심으로 잘못된 행동에 동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 다음은 셈, 함, 야벳 요약입니다.

 

, 참된 내적(internal) 교회

야벳, 참된 외적(external) 교회

, 부패한(corrupted) 내적 교회

가나안, 부패한 외적 교회 (AC.1227)

 

어떤 예배가 참되다 하는 것은 그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사랑의 애정(affection)을 가지고 드려지고 있다는 뜻이고, 어떤 예배가 부패했다 하는 것은 그런 애정 없이 형식적으로, 즉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사랑의 애정을 말하는데, 이걸 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배웠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아들 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달려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로 보고 장점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무섭게 추궁하고 마음속으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의 말을 듣고 급히 옷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깨에 옷을 메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이유 없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 제가 알기로 근처 개신교 교회들이 와서 시위를 하고, 민원을 넣는 등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개축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건축이 늦어지면서 시공비는 엄청나게 인상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잊으라고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듯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생각하고, 분풀이를 하려 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 항상 체어리티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이 잘못을 할 때,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되 결코 동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1, 3)

 

아멘

 

2022-0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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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0.25MB
천국과지옥.1.4.20-28.'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pdf
0.3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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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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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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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8:5-12)

 

 

사람 스스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러므로 불순하고 부정한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순하고 부정한 원천으로부터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공로와 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업신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천국의 비밀 874, 이순철 역) ...that they suppose they do what is good and think what is true from themselves; and because they are as yet in great obscurity, the Lord also leaves them so to imagine. But still all the good they do and all the truth they think while in such imagination is not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or whatever man produces of himself cannot be good, because it is from himself, that is, from a fountain which is impure and most unclean. From this impure and unclean fountain no good can ever go forth, for the man is always thinking of his own merit and righteousness; and some go so far as to despise others in comparison with themselves (as the Lord teaches in Luke 18:9–14),... (AC.874, Clowes 역, Potts 개정)

 

 

※ 오늘 설교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부임(2016년 12월) 이듬해부터 시작된 성전 건축을 마치고, 새 성전에서 2019년 신년 예배로 드린 설교입니다.

 

새로 지은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니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문득 노아의 방주 생각이 났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 홍수를 피하는 것이 새 교회의 시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노아는 오백세 가까이 되었을 무렵에 하나님의 명을 받고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백 년에 걸친 역사 끝에 방주가 완성되자 그 후 사십 일간 밤낮으로 큰비가 쏟아집니다.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그래서 결국 모든, 육지 생물이 다 죽습니다.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창7:11-12, 17-24)

 

※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자기가 지은 생명체들을 저렇게 죽이시는 잔인한 신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그것이 악하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지옥도 소멸시키지 않으시며, 여전히 천국 빛을 비추십니다. 물론 지옥은 필사적으로 이를 차단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주님의 신성한 아르카나(arcana, 秘義), 그러니까 곧 주님을 사랑함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마지막 영원한 운명을 보여 주는, 겉뜻과 달리 그 안에 이런 신적 속뜻이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여기 등장하는, 사람 외의 모든 생물은 사실은 사람 안에 사람과 함께 있는 다양한 애정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온 땅에 가득했던 물이 거의 말라갈 때, 노아는 방주에서 나올 준비를 합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그러나 영적 의미로는 아담으로 상징되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의 몰락과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인 고대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 세속화될 때가 교회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새 진리를 선포하시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알리시지요. 그리고 그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존 교회의 잘못된 신앙을 거부, 새 교회로 이동합니다.

 

※ 이런 일은 인류 역사, 곧 현재까지 네 번의 교회 시대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있었고, 노아의 방주에 오른 사람들은 그 첫 번째 사람들, 곧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이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현 기독교회 시대를 마감, 이어질 다섯 번째 교회 시대인 새 교회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네 번의 교회 시대는 순서대로,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입니다.

 

※ ‘노아’라는 이름은, 그 속뜻으로는,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완전히 침식, 그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던, 그 당시 종말을 앞두고 있던 태고교회 안에서 유일하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까스로 고백하던, 아주 희귀한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이었으며, 또한 이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새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바로 삶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의지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는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즉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는데요, 이런 것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방주가 사십 일 동안 계속된 홍수 속에서 물이 많아져 땅에서 떠올라 물 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가 그치고 온 땅에 가득한 물이 완전히 마르는 과정은 낡은 교회가 무너지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진통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그러므로 새 교회 또는 새 교회인들이 어떻게 본격적으로 거듭남의 길로 들어서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먼저 5절입니다.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은 보통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은 새 교회인들의 마음속에 거짓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이란,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속 사람은 보통 진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지만, 겉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의 뜻대로 하면 겉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속 사람은 나보다 이웃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이웃의 행복보다 나의 행복이 먼저라 주장하면서 속 사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겉 사람이 하는 행동은 이기적이며, 거짓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계속되면 그러한 거짓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거치는 동안 겉 사람이 겸손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에게 복종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거짓이 사라지는 것이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은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은, 신앙인들이 비로소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라는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거짓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진실한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에 거짓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우리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러한 상태가 바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사십 일’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광야를 헤맨 것이나, 노아 때 사십 일간 비가 쏟아진 것, 주님이 공생애 전 광야에 나아가 사십 일간 금식하시며 보내신 것은 모두 시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 ‘사십 일을 지나서’는 시험이 끝난 다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그때 노아가 방주에 낸 창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창문’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이 열렸다는 것은, 시험을 겪은 다음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통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할 때, 다시 말하면, 속 사람이 시키는 대로 거짓 없이 행동하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열립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고, 진리를 통해 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합니다. 그것이 방주의 창이 열리는 것입니다.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말씀에서 ‘’는 진리를 표상하거나, 또는 거짓을 표상합니다. 비둘기같이 깨끗하고 순결한 새는 진리를 뜻하고, 올빼미나 까마귀같이 추한 새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까마귀를 내놓으매 날아 왕래하였더라’는 표현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은 열렸지만, 여전히 삶 가운데 거짓이 많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통해 사물을 보기 시작은 했지만, 아직도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는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그 각각의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진리들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 삶의 각종 상황에서 적용해야 할 개별적인 진리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모든 상황에서 똑같지 않은 것이지요. 때로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하지만, 때로는 엄하고 냉정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성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는, 지금은 진리라 믿고 행동하는 일들이 시간이 흘러 보면 사실은 진리가 아니고 까마귀로 판명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저 개인적으로도 2025년 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국 관련, 생각나는 정말 부끄러운 일 중 하나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저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레거시 신문과 방송, 특히 중앙일보와 JTBC에서 떠드는 내용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 찬성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믿고 지지했던 터라 그랬는지 그에 비례하여 굉장히 분노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조작으로 판명난 지금은...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송하고... 아, 나이를 헛먹었구나 싶습니다. 생각하면 참 귀가 얇았었지요. 그래서 더더욱 이번에는 정말 실수하지 말아야지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각이 아닌, 주님의 진리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위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본문에 ‘까마귀를 내놓으매 날아 왕래하였더라’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까마귀가 거짓을 뜻한다면 ‘비둘기’는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신앙의 진리란, 신앙인들이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방주 밖으로 비둘기를 내놓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를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의지 안에 아직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던 진리가 가슴으로 내려오기는 했는데, 가슴에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제힘으로 한다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선을 행하는 그 공로를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때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인간의 능력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자칫 제힘으로 행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인간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그런 걸 다 아시면서도 그냥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는 저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마치 어린 손주들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이쁜 짓으로 여겨 받아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 어린 손주들에게 무슨 성숙한 태도를 기대하는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말씀에서 ‘칠 일’은 거룩한 것을 뜻하고, 거룩한 것이란 이웃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았다는 것 역시 계속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비둘기가 돌아왔습니다. 비둘기는 돌아오지 말아야 합니다. 비둘기가 돌아오는 것은 이웃을 위해 한 일을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때 비둘기 입에 감람나무 잎이 물려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고,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다는 것은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태는, 노아가 단순히 손을 뻗쳐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좀 더 거듭난, 좀 더 성숙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비둘기가 돌아왔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선한 일을 하고 그 공을 완전히 주님께 돌리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내세울 때가 있지요. 그런 때를 말씀에서는 ‘’이라고 합니다. 밤은 마음에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주님이나 이웃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며, 그래서 본문에는 비둘기가 저녁때 돌아왔다고 한 것입니다.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는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것은 계속해서 거룩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자기가 한 모든 선한 일의 공을 이제는 온전히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방주 밖에는 더 이상 물이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모진 시험을 겪은 다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아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과정이 나오는데, 하나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으려면 반드시 ‘저녁’이라는 상태가 선행된다는 말입니다. ‘저녁’은 자기 본성의 상태, ‘아침’은 주님의 상태, 곧 자기 본성을 떠나 주님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하지요. 그동안 새 예배당을 지으면서 우리도 이런 수많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우상향 상태를 반복했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이제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말씀에서 ‘’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겉 사람이 낮아지지 않으면 속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더라도 바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홍수 후 땅이 서서히 마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서서히 변합니다. 시험이 끝난 후, 변화의 첫 단계를 말씀에서는 산봉우리가 보이고 방주의 창이 열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깊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변화의 두 번째 단계는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했지만, 겉과 속이 아직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모습입니다. 변화의 세 번째 단계는 방주 밖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돌아오는 것은 진리에 따라 계속 체어리티의 삶을 살면서, 그러나 동시에 그 공을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변화의 마지막은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선의 공로를 이제는 온전히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때 비로소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와 땅을 밟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의 겉 사람 안에 진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은 겉 사람, 또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잘 견디고 이기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새해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매일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성도들님들의 가정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아멘

 

2019-01-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09(D1)-주일예배(2588, 창8,5-12), '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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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09(D1)-주일예배(2588, 창8,5-12), '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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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속뜻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인애(charity)가 없는 신앙(faith)의 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며 자체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348, 이순철 역)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AC.348)

 

※ 윗글은 오늘 본문 중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에 나오는 ‘땅의 소산’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 오늘 설교는 원래 추수감사절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인과 아벨처럼 각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예물은 어떻게 보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급기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 즉 그 속뜻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보통 아담과 하와라고 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의 그런 겉뜻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의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 곧 속뜻으로 ‘아담’과 ‘하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즉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시던 그때부터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인간과 만나시고, 교회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시며, 그렇게 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신앙이 생긴 걸 말합니다.

 

※ 교회로 말미암는 자녀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신앙을 첫아들, 곧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를 그 아우, 곧 ‘아벨’(Abel)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옳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진리로 말미암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깁니다. 바로 그 신앙이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입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 이를테면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 같은 것, 즉 자아 사랑, 세상 사랑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극복,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그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내면에 있는 좋지 않은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아직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사랑 없는 신앙, 사랑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직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상태인 것이지요.

 

※ 모든 것이 완전, 온전했던 태고교회도 점차 변질, 기울어져 그 끝은 노아의 홍수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태고교회는 대략 여덟 번 정도의 상태변화를 겪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상태변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부분부터입니다. 이 부분부터 아담, 즉 태고교회는 자신의 자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perception, 주님으로부터 내 영으로 들려오는 일종의 내적 음성)으로 모든 것, 곧 주님에 관한 모든 것, 천국에 관한 모든 걸 100% 무슨 별도 학습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바로 답이,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100% 온전한 답이 자신의 열린 영으로 들려오니 굳이 따로 교리화하여 학습할 필요가 없었지요. 마치 천적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소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면서 이 퍼셉션의 해상도(?), 수신 감도가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일어난 것인데요,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리니 영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며, 주님이 일일이 다 알려주시니 부족한 거 없이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들이, 어린 영유아들이 무슨 신앙이 있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주님 아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퍼셉션 감도가 흐릿해졌으면서도 그걸 커버하느라 이런 쪽, 그러니까 전에는 저절로 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글로 정리, 교리화하여 그때그때 주님 찾을 필요 없이 꺼내볼 수 있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 겁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만 바라봄으로써 선조들처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2절입니다.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 부부에게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이 바로 체어리티인데요, 이 체어리티를 아벨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부부에게 아벨이 태어난 것은, 할 수 없이 생긴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제는 이 신앙으로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걸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신앙만 있을 때는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리에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 즉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 신앙과 사랑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신앙과 사랑의 분량이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보다 사랑이 더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신앙이 더 많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21번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성향, 곧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지, 아니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지를 잘 살피면 나중에 나는 어떤 천국으로 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양치는 자 ‘아벨’은 사랑, 즉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이었고, 농사짓는 자 ‘가인’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고교회 안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사랑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고,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신앙보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뚜렷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보다는 신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뚜렷하다,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즉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3절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인과 아벨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인’, 즉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나빠졌고,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만약 그러지 않고 ‘신앙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게 되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사랑의 상태’로 나아간 사람은 신앙이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의 수준에 맞는 진리, 즉 신앙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체어리티로 사는 아벨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신앙으로 사는 가인은 영적으로 쇠퇴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나타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물’은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이 드린 제물입니다. 반면 ‘양의 새끼로 드린 제물’은 이웃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셨다기보다 받으실 수가 없었다가 맞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진리를 믿는다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진리에 따라 그렇게 살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선자의 삶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애, 체어리티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헌금과 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러니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살다가 예배를 드릴 때만 경건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1-12)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제물을 안 받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조금 있는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안색을 붉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양심을 통해 그의 사랑이 식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 양심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걸 바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은 주님으로부터 양심을 통해 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걸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원망의 마음이 커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8절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랑 없이 신앙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 즉 체어리티를 모두 잃어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신앙’, ‘신앙’, ‘교리’, ‘교리’하며 마음이 돌덩어리같이 딱딱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그동안 여러 시대의 교회, 곧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도 그랬고,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오늘날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앙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앞에 세 교회 시대처럼 이 기독교회도 교인들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높이고,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신앙과 삶을 분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 곧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 물론 이는 마틴 루터 당시 극도로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반발, 저들의 엉터리 같은 ‘행위’를 극단적으로 고발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이번엔 완전 반대쪽 극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랑을 죽이는 일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데요, 이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순수한 지각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였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 또는 진리와 선이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고, 진리와 선을 분리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신앙, 그러니까 진리를 주시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그다음에 사랑, 그러니까 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인애의 선을 만들어주신다. (계시록의 속뜻 935, 이순철 역) the Lord produces the goods of charity with a man according to the state of truth with him. (AR.935)

 

그것을 본문에서는 ‘하와가 먼저 가인을 낳고 그다음에 아벨을 낳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교회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런 신앙을 ‘앉은뱅이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사랑의 단계로 나아갔다가 후퇴해서 다시 신앙의 단계로 내려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잘못하면 내면에 있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어떤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인의 예물을 가지고 온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올 한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 심장이 뛰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러한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아멘

 

2019-11-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02(D1)-주일예배(2587, 창4,1-8), ‘가인’과 ‘아벨’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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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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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02(D1)-주일예배(2587, 창4,1-8), ‘가인’과 ‘아벨’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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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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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서 故 권성조(權聖祚, 1923 生 - 2015 卒, 享 91세), 김정자(金貞子, 1926 生 - 2005 卒, 享 79세), 두 분의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1절

 

 

본문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6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멀리 대전에선 6시에 출발했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10주기 기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 삼일절입니다. 특히 올 삼일절은 현 시국과 관련, 그 정신과 의미가 마치 106년 전 그날과 같아 저 자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곳을 와야 하나 저곳을 가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만큼, 오늘 이 예배가 짧지만, 큰 의미가 있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곳은 묘원,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곳이며, 그러므로 이곳에 오면 자연스럽게 생과 사, 삶과 죽음, 사람의 사후 상태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했습니다. 두 분은 지금 어떤 상태이실까? 사람의 사후, 영혼으로 가는 그 나라에서 두 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궁금했습니다.

 

다음은 주님의 허락으로 생전에 천국과 지옥 등 영계를 두루, 그러니까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시작, 27년간 수시로 왕래한 모든 기록을 주님의 허락을 받아 라틴어 원고 수만 장으로 남긴,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분의 여러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간 영계(The world of spirits)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의 지역, 즉 상태(state)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만큼 머물고 난 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is raised up)지옥에 던져진다(is cast down). (HH.421)

 

중간 영계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모든 사람이 사후에 일단 그곳에서 만나고, 거기서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고, 준비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몇 주 또는 몇 년 동안 머문다. 그러나 삼십 년을 넘지는 않는다. 머무는 기간의 이런 차이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이 상응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 중간 영계에서 사람이 어떻게 여러 상태를 거치며 준비되는가를 설명하겠다. (HH.426)

 

사람들이 사후에 중간 영계에 들어가자마자 주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분류하신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 살 때, 그들의 중심적 사랑(ruling love)으로 이어져 있던 바로 그 지옥 공동체에 즉시 연결되고, 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love)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그리고 신앙(faith)으로 이어져 있던 천국 공동체에 즉시 연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어져 있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친하게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 특히 부부와 형제자매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만나고, 함께 얘기한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여섯 아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는 많은 이들도 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dispositions)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 그러나 중간 영계를 지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간 영들은, 그들의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성격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한다.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HH.427)

 

내용이 이해되시나요? 살짝 보충 설명을 좀 드리자면,

 

① 영계는 이곳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다.

 

②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갈 수 있다.

 

③ 사람은 누구나 ‘’(善, good) 몇 %, ‘’(惡, evil) 몇 % 상태로 죽는다. 그래서 대부분 죽자마자 천국, 혹은 지옥으로 바로 갈 수는 없고, 어딘가 준비하는 곳이 필요한데, 거기가 바로 이 ‘중간 영계’, 곧 ‘영들의 세계’다.

 

④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육, 즉 몸은 그 안에 영을 담기 위한 그릇이며, 다른 말로는 영이 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입고 다니는 옷이다.

 

⑤ 사람은 또한 ‘겉 사람’(external man, 外的)과 ‘속 사람’(internal man, 內的)으로 되어 있으며,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은 속 사람이다.

 

⑥ 겉 사람은 몸을 포함, 영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속 사람은 주님께 속하며, 주님은 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속 사람은 사람이 주님 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살 때, 그러니까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실천할 때 형성된다.

 

⑦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은 상태로 지내는 곳이다. 이 세상은 겉과 속이 달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그렇지 않다. 영계에서는 속이 선하면, 겉도 선하며, 속이 악하면, 겉도 악하다.

 

⑧ 이 세상에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은 그 모습과 외관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겉은 무척 멋있거나 아름다워도 속은 괴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늙고 추해도 속은 천사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의 허락으로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놀란다.

 

등... 이 외에도 계속 이어지지만 아직은 이 정도만 하지요. 이런 진리들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일종의 수학이라는 학문을 떠받치는 공리(公理) 같은 것입니다. 공리란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없는 진리를 말하지요. 우리의 신앙은 이런 신학적 공리에 기초, 주님도, 천국도, 그리고 인간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진리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두 분은 여전히 함께 지내시거나 두 분 중 준비가 끝나 100% 상태가 되신 분은 먼저 해당 천국에 올라가 기다리고 계시지 싶습니다. 제 기억에 두 분은 참 선하고 진실하셨으며, 비슷하셨기 때문이지요.

 

천국이나 지옥을 가기 전, 이런 사전 준비가 필요한 이유는, 천국은 선 100%의 나라여서 천국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악은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지옥은 악 100%의 나라여서 마찬가지로 지옥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을 역시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모든 것이며, ''이란 모든 것의 근원되신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는 호칭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우리의 영에 해당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육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활동에 해당하는 '성령'을 한 분으로 모으는 호칭입니다.

 

위 427번 글에,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는 건, 영계의 특성, 즉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비록 같은 식구요, 호적상 같은 가족이었어도 영계에서는 선악의 문제, 진리와 거짓의 문제, 즉 주님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 자기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엔 반가움으로 만났어도 곧 헤어지게 되지요. 그러므로 부부의 경우나 가족의 경우, 사후에도 계속 함께하고프면 서로 비슷해져야 합니다.

 

하나 더,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같은데요, 앞서 ⑧번 설명을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이 어떤 모습인지, 즉 자신의 속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모릅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후 이 두 번째 상태인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는 속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게 되는데, 생전에 나도 본 적 없는 내 속 사람 모습을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으므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우리의 결론은, 인생의 목표는 천국 가는 것이요, 목적은 창조주의 뜻,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인 쓰임새(use)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쓰임새가 있어 창조하셨고, 우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가 그 쓰임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평생 곁에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 즉 나라의 일상이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악과 거짓, 불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그나마 살짝 숨어서 했다면,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합니다. 정체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옥이 ‘그래, 나는 지옥이다. 어쩔래?’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 역시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1]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2]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3] 재판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장 한장 펼쳐져 읽힌다.

 

[4]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연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5]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연되었다.

 

[6]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히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7]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8]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다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9]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주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그러나 안심하세요. 이런 폭로는 오직 악한 영들, 즉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한테만 일어납니다. 주님은 선하고 진실한 삶,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산, 겸손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영들의 과거까지 무분별하게 들춰내시는 고약한 신이 아니십니다.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현 시국, 특히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정말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대통령을 탄핵, 끌어내리려는 모든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일컬어 국가 전복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을 경우, 이들의 사후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게 의롭고 올바르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종교가 다르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예수 믿지 않아도 이런 ‘의로움과 올바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이며, 이 ‘의로움과 올바름’은 주님 신성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다니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을 가장 잘 환히 비추는 성경 말씀이 기독교에,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밝고 환한 빛 아래서 주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지름길의 삶을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길, 다른 종교, 다른 가르침들은 비록 거기에도 여러 형태로 주님의 신성이 부분적으로 스며들어 있어도 마치 초롱불, 등잔불 불빛 같아 흐릿하여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유로 비록 이 세상 살 때는 예수를 믿을 수 없었을지라도 사후 중간영계에서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 인정,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건, 이 세상에서 교회 다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즉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 예수를 믿지 못하였어도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즐겁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입니다. 어찌어찌 어렵게라도 속 사람이 그렇게 형성된 사람들은 말입니다. 반면, 비록 이 세상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도 정작 삶이 엉망이어서 자기 속 사람 준비에 소홀했던 사람들은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등을 돌립니다. 거기서는 각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며, 그걸 거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든, 이제는 은퇴하여 남은 삶을 손주 돌보며, 조용히 지내든, 무엇을 하든 그 자리, 그 역할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은 모두 나의 이웃입니다. 나의 핏줄과 혈육, 직장과 교회 등 모든 인간관계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건 이웃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앞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의인이든 불의한 자이든 그는 주님이 지으신 자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주님의 신성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꼭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사랑과 지혜, 부유함과 능력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이런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삶이 형통하며, 이 모든 것이 겉 사람으로도 흘러들어가 나이 들어 자연스런 노화, 노쇠의 상태로 평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육체라는 둔탁한 옷을 벗으시고, 이제는 그 영적 오감이 몇 배나 더 활짝 열려 상상할 수도 없는 영광의 삶을 살고 계실 두 분을 기억하며, 내년 이맘때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2절, 3절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추모예배를 통해 들려주신 이 세상 삶의 목적과 목표,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그래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등에 관해, 그동안 안개처럼 흐리고 뿌옇던 시야가 맑아져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5-03-01(D7)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2025-03-01(D7)-추모예배(2586, 눅12,2-3), '2025 故 권성조(10주기), 김정자(20주기) 추모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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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속뜻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천사 또는 사람 안에서 결합한 선과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때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선이고, 진리는 선을 바탕으로 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선과 진리의 결합은 마치 사람이 의도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과 같고, 그때 생각과 의지가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다. (천국과 지옥 372, 이순철 역) Good and truth conjoined in an angel or a man are not two but one, since good is then good of truth and truth is truth of good. This conjunction may be likened to a man’s thinking what he wills and willing what he thinks, when the thought and will make one, that is, one mind; (HH.372)

 

 

새 교회에서는 결혼은 남녀의 순결한 사랑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은 남녀의 정서적, 육체적 필요에 따른 결합이며, 자손을 번식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영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했다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고, 또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도 순결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마태복음 19장 3절 이하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주님께서는 결혼한 부부 중 어느 하나가 순결의 의무를 깨지만 않는다면 결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신서에 보면, 바울도 결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결혼보다는 독신을 지지했던 것 같은데요, 그의 서신 몇몇 구절들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전서 7장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7:25-26, 28)

 

그는 또 결혼이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하는데,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7:32-35)

 

서신서의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드는 생각은, 바울은 결혼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 바울은 ‘결혼’의 내적 의미,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속뜻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런 상담의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시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결혼을 생각할 때 변함없이 ‘속 사람’이라는 목표, 관점으로만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의 완성이 결혼이며, 그래야 천국에 올라가 그곳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라 하면, 그때는 박해의 시대였고, 그리고 사도들은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으로 가르쳤으며, 그래서 당시 성도들은 ‘이제 잠시 후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친 건 그들 역시 주님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말씀에는 결혼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요, 그중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남녀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만 창조하시지 않고, 오히려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상’은 사람의 영적 생명 중에서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을, 그러니까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은 폐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그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는 진리, 이해(understanding)를, ‘여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 의지(will)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에 대한 신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그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순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주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점점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가 그의 마음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신앙과 사랑은 처음에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생깁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생기지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 마지막에 겉 사람 안에까지 생기는 모습을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여기서 ‘부모’는 속 사람을 뜻합니다. 속 사람을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뿌리내리는 모든 진리와 선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표현은 속 사람 안에 있던 진리, 또는 신앙이 겉 사람 안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표현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의 자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은 자아,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을 반대하던 자아가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2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기,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단하고 차갑기만 하던 자아가,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의 생명이 들어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단단한 ‘갈빗대’는 타고난 자아를 뜻하고, 그것을 들어낸 자리에 채워지는 ‘’은 주님의 생명이 담긴 따뜻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아가 변할 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의 구애에 화답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사람들의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소통할 정도로 영이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녀의 결혼이 육체의 결합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영적 결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고,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이성과 의지의 결혼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남녀의 순결한 결혼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거룩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수했던 태고교회가 무너지면서 결혼의 순수한 의미도 퇴색되어 버렸고, 그 결과 노아의 고대교회를 지나 모세의 유대교회에 이르러서는 결혼의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은 시작하면서 살핀 본문인데요,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위와 같은 대화가 저렇게 오갔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결혼의 영적 의미에 대해 무지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연계의 결혼이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그러므로 결혼의 파기는 선과 진리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계시록 해설’ 710번 글의 20항을 보면, 주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은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만난 주님의 천사와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그런 집요함(tenacity)을 나타내는데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집요한 요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직접 밝히신 내용입니다.

 

신명기 9장 6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9:6)

 

유대교회 사람들처럼 완악한 사람들은 순결한 결혼을 반대하고, 오히려 간음의 기쁨을 원합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허락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 위 ‘계시록 해설’ 710번 글(계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의 속뜻 주석)의 20항에 의하면, 야곱과 그의 후손, 즉 열두 지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그저 자연적이기만 했으며, 그 결과 천국의 선과 교회, 양쪽에 모두 반대되는, 즉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Jacob and his posterity even from their fathers down were merely natural, and therefore were opposed to the good of heaven and the church)고 하며, 그럼에도 그들이 성경에서 저런 위치에 있는 것은 그들의 성정이 집요하고 고집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상은 그들은 선택된 게 아니라 하도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허락하신 거(That the Israelitish and Jewish nation was not chosen, but was accepted to represent a church, because of the tenacity with which their fathers and Moses persisted)라는 말이지요.

 

이런 비슷한 일이 현 기독교, 개신교에서도 여전히 비일비재합니다. 가령, 자신의 그 무엇을 관철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그것도 여러 번을 말이죠, 무슨 솔로몬의 일천번제, 즉 천일예배나 천일기도를 드려 주님의 보좌를 흔든다든지 등,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신앙생활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걸 또 무슨 영적 계급장처럼 자랑하고 다닌다든지... 물론 이런 것도 그 속뜻을 따라 하는 것이면 그 순기능이 크지만, 저들 유대인들처럼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의 그 어떤 걸 이루기 위해서 저렇게 집요하게, 저렇게 고집부리며 무리를 하는 것이라면, 나중에 혹시 그게 이루어지더라도... 글쎄요, 그게 과연 ‘이루어진 것’이며, ‘기도 응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런 일련의 모든 황소고집 같은 태도는 그 결과, 자신의 속 사람의 성장, 내면의 열림 등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 후, 그의 꿈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시는데요, 그것은 그의 내면이 한 단계 열려 비로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그전까진 자연적이기만 했던 솔로몬이 비로소 영적 인간이 된 것이죠. 우리 역시 어떤 큰 기도, 정말 진지한 나아감이 필요할 때는 저들 야곱의 후손들처럼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생떼를 쓰는 태도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를, 참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 내면이 한 단계 더욱 높이, 그리고 깊이 열리기를 구하는 그런 태도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모든 복은 우리 내면, 우리의 속 사람의 크기만큼만 담기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동안 내 삶이 정말 많이 불행했다면 그것은 그저 내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조금도 담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구나 하시면 틀림없으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런 내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저 우주공간 햇볕처럼 영원히 공급되는 주님의 복을 넘치도록 담는 그런 속 사람의 태도로 변화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왜 유대인들은 결혼을 자연적으로만 생각했는지,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집요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이 신성한 이유는 순결한 결혼은 천국을 만드는 온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천국의 천사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부부의 순결한 사랑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어떤 방법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로 흘러들어올까요?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먼저 남편에게 진리를 보내주시고, 그것이 남편의 지혜를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흘러 들어가 거기서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결합한 사랑이 다시 남편에게로 흘러 들어가 남편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아내를 순결하게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사랑이 있는 진리가 생기고, 남편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진리가 있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남녀의 결혼을 거룩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불순한 결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간음이나 불륜 같은 것입니다. 간음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탐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만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순결한 부부의 사랑이 모든 천국의 기쁨의 원천이라면, 간음의 사랑은 지옥의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절대로 가까워질 수도, 섞여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 하시고,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14간음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4, 17)

 

천국과 지옥’ 384번 글은, 간음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닫히며, 일단 천국이 닫히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나 교회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And this is why heaven is closed up to man when he commits adultery from delight; and when heaven is closed man no longer acknowledges the Divine nor anything of the faith of church. (HH.384)

 

그러므로 간음은 인류를 지옥으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악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순결한 결혼의 사랑은 천국의 모든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순진함의 원천이며, 그러므로 신성한 것입니다.

 

남녀의 결혼이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맞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스베덴보리 같은 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웁살라 대학교 재학 시절, 친구인 크리스토퍼 풀하임의 여동생을 연모했으나, 풀하임의 아버지가 교제를 허락했음에도 불구, 여자 쪽의 지나친 수줍음으로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일생에 두 번 다시 무슨 여자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는데요, 이렇게 이런 분들이 혼자 사는 이유는 주님만이 아시는 개인의 사정과 그에 따른 주님의 어떤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개인의 영적 특성이 거듭나는 데 있어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유리하다든가, 아니면 주님이 맡기시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독신으로 사는 게 더 나은 경우 같은 섭리 말입니다. ‘결혼애’ 229항에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참된 결혼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배우자를 보내주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면 천국에서 맺어 주신다. (CL.229, 이순철 역) That for those who desire love truly conjugial the Lord provides similitudes; and if they are not given on earth, he provides them in the heavens. (CL.229, Warren 역)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결혼한 부부들은 배우자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통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주님이 맡겨주시는 일을 통해 주님과 결합하고, 그 결합을 통해 천국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아멘

 

 

2020-10-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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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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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1-23)

 

 

※ 오늘은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 여자를 만드셨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세기 본문을 통해, 과연 이 본문의 속뜻, 겉 글자의 뜻이 아닌, 거기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무엇인지, 특히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거의 모든 결혼식이나 결혼 관련 글마다 언급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과연 무슨 뜻인지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본문은 사람 안의 두 자아(自我, self, own, proprium 라틴, 본성)에 대한 내용인데요, 처음 주신 자아가 본래의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자아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 이 자아는 ‘본성’(本性)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초창기 영역에서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어 역본인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 교회의 교리는 자아는 악 그 자체라고 하고,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아는 정말 그렇게 악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인데, 거듭나기 전의 자아가 있고,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악하다 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죽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 ‘’(惡, evil)이란 주님에 대한 안 좋은 태도로서, 사람이 자기 본성을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안 좋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 아래는 본문 중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만드시고’에 관한 글입니다.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AC.153, 변일국 역)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전자를 지옥적 자아라고 부르고, 후자를 천국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지옥적 자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주님이 도와주시려 해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옥적 자아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자아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자발성(voluntary)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당신에게 종속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 말고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1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것이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갈비뼈는 인간의 첫 자아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자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갈비뼈에 비유했습니다. 갈비뼈의 단단하면서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위 말씀에 대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148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런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입니다. (AC.148, 변일국 역)

 

주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들어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셨습니다. 살은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자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 있는 자아인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뼈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표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아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아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높이면서 다른 사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 화합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빗대 일부가 살로 채워졌다는 것은 생명 없는 죽은 자아가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바뀌게 되면 사람도 따라 바뀝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만 좇던 사람이 점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빗대’는 거듭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가 지옥적 자아에서 천국적 자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처음부터 천국적인 자아를 주시지 않고, 지옥적 자아를 주시고 나서 천국적 자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에게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이웃 사랑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애정에 맞는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허락하시고, 거듭나려고 애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적인 자아를 주십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456번 글 3번 항 인용입니다. 역시 같은 질문, 즉 ‘왜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아있으며,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의 모든 촉감이 살아있는 똑같은 사람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놀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산 모든 사람이 저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람의 이러한 사후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그들은 교회의 신앙에 있어 이토록 핵심적인 사실을 왜 사람들에게 환상으로라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되는 거짓을 확고히 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 안에 있을 때, 환상으로 무엇을 확신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믿겠지만, 나중에 부인하게 되고, 그것은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믿다가 나중에 부인하는 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독한 사람들은 모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낮은 무서운 지옥에 가게 된다. (HH.456:3, 김은경 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가셨을 때 아담이 한 말입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여자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겉 사람 안으로 새로운 자아를 보내 주실 때의 자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 사람 안에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뼈 중의 뼈는 겉 사람 안에 본래부터 있던 지옥적 자아를 말하고, 살 중의 살은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아도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지옥적 자아가 천국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서고, 어느 때는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섭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완전히 누를 때, 인간은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천국적 자아를 통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것’은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뜻하고, ‘남자’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이고, ‘아내’(wife)가 맞습니다. 그리고 본문 원전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한 것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처럼 속 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자아를 아내라고 부를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하게 결합한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거듭나는 데 있어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6번 글 2번 항은, ‘자아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인애에 관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76:2, 이순철 역) As good and truth so appear, so do all things of the church and of heaven, and all things of love and wisdom, and all things of charity and faith; yet none of them is man’s. No one can receive them from the Lord unless it seems to him that he perceives them for himself. (DP.76:2)

 

※ 위 문장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5장, ‘사람이 이성으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법칙 중 하나다’(It Is a Law of Divine Providence That Man Shall Act from Freedom According to Reas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기 전의 자아로 지옥적 자아이고, 또 하나는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시는 천국적 자아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아는 천국적 자아이며, 그 전의 자아는 자아의 외관(appearance of proprium)일 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적 자아가 생기기 전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자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적 자아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인간의 자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매 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지옥적 자아를 딛고, 천국적 자아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부단히 천국적 자아를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일이며,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37:5)

 

아멘

 

 

2021-1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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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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