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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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성’(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성’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12-22(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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