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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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12-22(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44MB
축도.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24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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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다음 주(22일)가 주님 오신 성탄인데 그 전 주인 오늘(15일) 주님의 부활 본문을 만나니 이 또한 새롭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입니다. 그전에 매일예배 본문으로 하다가 작년 5월, 9장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니, 만일 처음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면 만 3년 정도가 걸리는 대장정이 될 뻔했습니다. 이 귀한 누가복음 속뜻 강해의 길을 먼저 걸으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지금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지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목사님의 이런 원본 설교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용 허락이 있었기에 저 같은 사람이 용기를 내어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듭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과 5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나이 육십 되기까지 태어나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칠 년 전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갑자기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 위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ㅎㅎㅎ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도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이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 다음 주일(22일)은 성탄 주일로, 그리고 성탄절인 25일(수)은 성탄 예배로 드립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29일은 송년 예배로, 2025년 첫 주일인 1월 5일은 신년 예배로 드립니다. 이 송년 예배와 신년 예배는 각각 성찬이 있으며, 올해부터는 밤늦은 자정에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쉬겠습니다. 나중에 교회 규모가 커지고, 또 특별히 많은 요청이 있으면, 그때 가서 재개를 고려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이 24장 속뜻 강해는 2025년 1월 둘째 주일인 1월 12일 주일부터 계속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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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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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0-56)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주님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놀라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란 사람이 나타나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본문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주님이 계시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점령지마다 자치정부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보낸 총독의 감독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의원으로 있는 산헤드린이라 하는 공회는 이를테면 유대의 자치정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그 아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율법에 밝은 엘리트들 70명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셉이었습니다.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모여 앉다)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입니다.

 

※ 산헤드린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습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유고 시 그의 직계가 직무를 자동 승계하는데,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로마는 대제사장의 임면(任免)권을 파견된 총독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직이 종신직이어서 한번 대제사장 된 사람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릴 수가 없었던 반면, 로마는 저들을 통제하느라 그때그때 파면 및 임명을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본문의 배경 된 당시는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종신직 대제사장 안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가야바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지요.

 

요셉 말고도 공회 의원 중에서 주님을 지지했던 사람은 저 유명한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다고 전합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본문에는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란 이름은 속뜻으로는 영적인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의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의 눈이 열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일찍부터 주님이 선과 진리이신 분이라는 걸 알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처럼 선하고 의로운 바람, 사모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반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주님 편에 섰고, 주님이 운명하신 후에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달라한 것입니다. 52절과 53절에는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말씀에서 무덤이나 매장은 속뜻으로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는 모든 과정은 주님의 편에서는 부활의 마지막 과정, 즉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 유전 악이 묻어 있는 인성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는 마지막 과정을 의미합니다.

 

※ 유대 산지는 대부분 화강암 지대라 조금만 파도 바로 암석이 나와 우리나라처럼 봉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 시신을 보관하는 형태로 매장을 하는데, 부자들은 그 규모가 커 바위 안에 생전에 살던 집 모양을 그대로 구현, 방을 여러 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매장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큰돈이 들어 일반 백성은 주로 평토장을 해야 했습니다. 평토장(平土葬)이란 한 30센티 정도만 파 관도 없이 시신을 묻고는 대충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는 매장을 말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낯선 표현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신앙인의 편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인들이 생명 없는 말씀, 즉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말씀을 살아있는 진리, 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하는 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달라 하는 주님의 시신은 신앙인들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의 아직 생명 없는 말씀 지식, 즉 말씀을 일단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반면, 주님의 몸은 말씀의 외관인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처음 배울 때, 그것들은 일단 기억이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그때의 진리의 지식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책처럼 아직 생명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꺼내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실천,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그 지식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할까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좋지 않은 버릇을 끊으려 할 때, 또는 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악습, 그 버릇을 계속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걸 원치 않으심을 알고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그걸 포기하는 것, 그것이 죽었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고,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서 말씀의 지식을 얻으려 했을까요? 교회의 마지막 때는 부패한 교회의 눈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고, 교회 밖 사람의 단순한 눈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말씀에는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가 주님을 보고 바로 진리로 인정한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23:4)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19-22)

 

이 역시 주님이 진정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의 사람인 요셉은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에게 가서 말씀의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건 신앙인들이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말씀을 조금씩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신을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위는 진리를 뜻하고, 팠다는 것은 가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덤은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배울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생각이 섞일 때가 있고, 때로는 본래의 의미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돌을 파낸 자기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방법으로 참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요셉 말고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55절은,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 가운데 특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요셉의 삶에서 죽은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하는지를 지켜봤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같은 것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요셉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56절에서는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들을 서로 느끼고, 또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 여자들이 돌아갔다는 것은 요셉에게서 진리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그들도 무덤을 찾아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향품과 향유는 진리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 안쪽에 있는 내적 진리를 마치 방부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향품과 향유를 시신에 바름으로써 그가 생전에 획득한 선과 진리를 훼손됨 없이 영계에까지 가지고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했던 이유는 뭘까요? 말씀의 지식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가지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들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품과 향유는 신앙인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다시 주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유대인의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 해질녘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례를 마치느라 다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시신 처리에 대한 승낙도 받아야지, 사람들을 시켜 나무에서 내려 시신 수습, 곧 세마포로 싸야지, 얼른 무덤에 넣어 두어야지... 무슨 제대로 된 염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시신에 대한 염, 즉 시신에 향품과 향유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시신 상태를 봐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 후 새벽같이 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이 일을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더듬거려가면서라도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10252:7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세상에서 입으셨던 몸 그대로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무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보고 영을 본 것으로 생각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10252:7, 이순철 역) It is known that the Lord rose again with the whole body which he had in the world, differently from other men, for he left nothing in the sepulcher; and therefore he also said to the disciples, who when they saw the Lord supposed that they saw a spirit, “Why are ye troubled? Behold my hands and my feet,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8, 39). (AC.10251:7)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신성한 인간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 살아있는 말씀이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매일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이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처럼, 또는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과 같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은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육신의 욕구들을 다스림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말씀은 살아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인들에게 내려졌던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아멘

 

2023-04-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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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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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숨지시니라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눅23:44-49)

 

 

주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읽다 보면, 유대인들은 왜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어떻게 진리를 그렇게나 미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904번을 보면,

 

사람에게는 적어도 두 악령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 악령은 사람에게 있는 악을 부추기나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북돋운다. (AC.904, 이순철 역) There are with every man at least two evil spirits and two angels. The evil spirits excite his evils, and the angels inspire things that are good and true. Every good and true thing inspired by the angels is of the Lord; (AC.90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할 때, 그는 계속해서 악령의 손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을 대적하기까지 이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었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선을 넘더니 결국 악령이 시키는 대로 주님을 없애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 에서의 유명한 장자권 이야기이지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34)

 

물론 이 본문의 속뜻은 따로 있지만, 겉뜻만으로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본문입니다. 즉 에서의 저런 행동이 저 날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더 선을 넘게 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

 

오늘 본문 44절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본문에서 육시와 구시, 그러니까 정오와 오후 세 시는 모두 3의 배수여서 속뜻으로는 3과 같은 의미, 즉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 오늘날은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가 하루이지만, 성서 시대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때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가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아침 6시가 영시, 아침 7시가 일시, 오전 8시가 이시 등등, 그러므로 본문의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세 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삼시, 곧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시, 곧 정오를 지나 구시, 곧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시는 것은 주님의 편에서는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실 때까지 거쳐야 할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은 단계별로 옵니다. 그리고 그 시험들을 하나하나 완전하게 이겨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시간은, 내적으로는 당신이 영화롭게 되기까지 겪으신 모든 시험의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육시에서 구시까지의 시간은 교회가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지다가 결국 완전히 문을 닫을 때까지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어가시는 것은 곧 교회에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에는,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는 주님을 뜻하고, 땅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둡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에 관한 지식과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신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둠이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9는 3의 세 배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 안에 빛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로서의 사명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본문 45절과 46절입니다.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주님이 숨지신 것을 영어 성경은 영혼을 ‘포기’한(give up) 걸로 표현합니다. 주목할 점은, 앞에서 주님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실 때는 spirit, 즉 영이라 하고, 뒤에 영혼을 포기하셨다 할 때는 ghost, 즉 망령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포기하신 ghost는 무엇이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무엇일까요? 포기하신 ghost는 마지막까지 주님 안에 남아 주님을 시험했던,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전적 자아(human self)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버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는 신성한 자아(Divine Self)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셨을 때, 주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자아를 남김없이 벗으시고, 대신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한 자아로 갈아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생명인 자아는 그냥 생각으로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 의지해서 죽기를 무릅쓰고 끊어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방법으로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아를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내면에 계신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하셨고,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며,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4772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대교회의 외적인 것은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표상했고, 또한 주님의 나라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사랑과 인애와 그것에서 비롯한 믿음을 표상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기독교회에 속한 것을 표상했다. 그러므로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꺼풀이 벗겨지듯 밝혀졌을 때 기독교회가 나타났다. 말씀에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AC.4772, 이순철 역)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church were all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his kingdom, that is, of love and charity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consequently of such things as are of the Christian church. Thus when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and also of the Jewish church, are unfolded and as it were unwrapped, the Christian church is disclosed. This was signified also by the veil of the temple being rent asunder (Matt. 27:51; Mark 15:38; Luke 23:45). (AC.4772)

 

이 글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인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그동안 주님을 표상해 오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같은 표상의 교회는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교회인 기독교회가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전의 성소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위에서 아래로 휘장이 처져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볼 때, 휘장 바깥쪽에 있는 성소는 교회의 외적인 것,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과 예배의 의례, 성전의 기물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에 비해 휘장 안쪽의 지성소는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교회의 내적인 것, 즉 사랑과 체어리티, 신앙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른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지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그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그때부터 인류는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과 직접 교통함으로써 그동안 표상에 가려져 왔던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내적 비밀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신성한 인간이 되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지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통해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직접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소의 휘장이 주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찢어진 이유는 뭘까요? 그때 주님은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Human)을 입으셨으며,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운명하셨을 때, 군중은 모두 기뻐했을까요? 꼭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47절로 4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마태복음 8장에도 믿음이 깊은 백부장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 자기 종교의 교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라고 하는 군대의 지휘관은 속뜻으로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신앙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말씀에는 그가 그동안의 일을 모두 봤다고 전합니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숨을 거두시기까지 조롱하는 군중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며, 강도의 간구와 신앙고백을 듣고,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주님이 진리시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님이 의인이시며 진리시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백부장 말고도 또 있었는데요,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백부장처럼 이방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음속에 교회가 세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교회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들 역시 멀리서 주님이 운명하시기까지의 모든 일을 봤습니다. 그들이 본 건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주님이 조롱받고 죽어가는 모습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본 건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부정한 인간을 벗고, 신성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시는 장면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인류의 구속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런 교회 밖 이방인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들을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의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구약 말씀의 모든 문자적 의미와,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동안 주님을 나타냈던 이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즉 그 역할을 다한 것이지요.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동안 주님의 본래 모습을 가리던 표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실체로서의 주님이 바로 신적 인성, 또는 말씀의 신성한 내적 의미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의인으로 인정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그에 대해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전합니다. ‘그 된 일을 보았다’는 건, 성경의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보고,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3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일이며, 선이기 때문이다. (AE.815:3, 이순철 역)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방인과 같이 어두운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아멘

 

 

2023-03-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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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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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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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아멘

 

2023-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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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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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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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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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없음)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눅23:13-25)

 

 

헤롯에게 보냈던 예수를 그러나 헤롯이 다시 자기에게 돌려보내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그리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4절로 16절 말씀입니다.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대제사장과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모두 일종의 왕이고, 왕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총독 빌라도, 그리고 헤롯 왕은 당시 유대인들을 자연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 등급)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은 교회에 속한 진리를 나타내고, 빌라도는 세상의 법을, 헤롯 왕은 이방 종교의 진리나 도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진리가 여러 등차로 존재하는 것과 관련, ‘계시록 해설’ 351번 글의 2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흘러나온다. 즉 말씀으로부터 중심이 되는 빛이 나와 주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간다. (AE.351:2,이순철 역) The light of heaven, or the light in which are the angels of heaven who are from this earth, is from the Lord by means of the Word; from this as from a center light is diffused into the circumferences in every direction, thus to those who are there, who, as was said, are the Gentiles that are outside of our church. (AE.351:2)

 

그러니까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말씀이 있는 교회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종교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세상의 법과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식으로 각 사람에게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갖고 있는 교회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말씀을 마음대로 조작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교회의 말씀 가운데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 곳곳으로 연결된 진리의 통로 또한 막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교회로부터 배척당하시고, 그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핍박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진리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장 높은 진리인 교회의 진리가 가장 낮고 비천한 진리가 되고,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의 법이 가장 높은 진리가 되어 진리의 질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로 오신 주님을 지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하고, 세상의 법과 도덕을 표상하는 빌라도와 헤롯이 오히려 주님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때리는 것’은 교회, 곧 유대인의 생각대로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때려서 놓아주겠다’라는 건 진리를 아주 없애버리지는 않고, 그들 입맛에 맞게 고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간혹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객관적으로는 분명한 진리임에도 불구, 그건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니 애초에 씨를 말려야 한다 주장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습니다. 그때 공정해야 할 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지요. 그리고 진리를 아주 없애지는 않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고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진리일지 모르나 세태에는 맞지 않으니 대중의 취향에 맞게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때려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과 19절에서 무리가 소리칩니다.

 

※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0명에 대제사장 포함,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무리를 유월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 전체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주님 당시 유대 유월절 관례 중 하나는 사형수 하나를 풀어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빌라도는 이를 이용, 주님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 잣대로 심판한다는 게 내심 찜찜하기도 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며, 그의 아내가 이른 아침, 급히 사람을 보내 이 예수라는 사람은 의인이니 그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그로 인해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가장 낮은 세상 법으로 가장 높은 신성한 법을 심판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직감적으로 안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때려 놓아주면 어떻겠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며, 무리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주님 당시 아람어 ‘바르아빠’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아들’이란 영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선,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바는 그 반대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악의적인 거짓이 바로 바라바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건 참된 교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속뜻으로 성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민란이나 살인은 교리를 왜곡하는 짓, 이를테면 참된 교리로부터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빼고, 믿음만 남겨 놓는 것입니다. 믿음, 즉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며, 중요한 건 거기 담기는 내용, 즉 체어리티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민란이며, 바라바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을 없애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 하는 것은 말세에 부패한 교회들이 체어리티의 교리를 없애고,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구원의 진리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지성이 마비될 때, 대중은 정의를 거짓으로 몰아 핍박하고, 반대로 거짓을 정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추앙합니다.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것이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는 일입니다.

 

※ 2024년 11월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이재명을 가장 선호하는 것과, 그리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좌파 성향을 보이는 걸 보면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와 그 실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빌라도는 계속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것을 21절과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세상의 법으로 교회의 진리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치는 않으나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4세기 초인 325년에 니케아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의 별궁인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파를 교회에서 축출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후, 로마 황제가 교회의 일에 관여했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교회의 비진리를 단죄한 사건이었고, 비교적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11세기 초인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로마의 황제와 가톨릭교회가 야합한 반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와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는 것 역시 지극히 반 지성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로 상징되는 참된 진리를 말살하는 게 옳지 않다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라며 무리를 끝까지 설득했습니다. 본문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세 번 말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는 계속해서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23절에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말합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함으로써 참된 진리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죽여 없애길 원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풀어주고, 주님을 그들에게 넘겨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리는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는 모든 교회가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만의 신앙, ‘오직 믿음’ 신앙을 고집합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대교회가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 살리는 걸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949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만 있고 인애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성질이 까다롭고, 어떤 일도 참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고, 벌하려고 하며, 동정심이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굽힐 궁리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을 선으로부터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AC.1949:2, 창16:12, 이순철 역) The man whose rationa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s solely in truth—even though it be the truth of faith—and who is not at the same time in the good of charity, is altogether of such a character. He is a morose man, will bear nothing, is against all, regards everybody as being in falsity, is ready to rebuke, to chastise, and to punish; has no pity, and does not apply or adapt himself to others and study to bend their minds; for he looks at everything from truth, and at nothing from good. (AC.1949:2)

 

이 구절을 읽으며 이건 나의 모습인데...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태에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두 가지 합리성(rational)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위 내용은 첫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때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고, 오직 진리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두 번째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은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합리성입니다. 말씀에서는 전자의 합리성을 들나귀(창16:12), 또는 이스마엘로 표현하고, 후자의 진정한 합리성을 이삭으로 표현합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삭으로 표현되는, 지혜로우면서도 따뜻한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 신앙을 버리면 햇볕이 들지 않는 방처럼, 또는 주님을 죽인 유대인들처럼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질 것입니다.

 

※ 오늘날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오직 믿음’(Faith Alone)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저렇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려서는 개신교 장로교회 통합측, 커서는 개신교 침례교회에 속해서 나름 개신교를 경험했지만, 대부분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 몇 %, 신앙, 그러니까 교리 몇 % 식으로 구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저 정도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 당시 여전히 문제가 많은 교황파 사람들 중 리더십들 내지는 개혁교회 내 소수의 극단적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확실한 건,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도 사실 얼음장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런 게 무슨 신념이나 신조라고 한번 어긋난 사람은 다시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와 같은 입장이어야만 사랑하는 그런 상황이지요. 타 종교는 물론, 심지어 같은 개신교, 같은 교파와 교단,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오직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참으로 숨 막히는 그런 곳이 바로 오늘 대한민국 개신교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한 걸 풀고,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용서와 화해, 양보와 물러남 등을 기꺼이 하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쉽지 않은,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내 ‘오직 믿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들의 현주소요, 진면목인 것입니다. 참 부끄럽지만, 오히려 타종교인들 중에 정감넘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록 그들에겐 참 진리, 곧 말씀이 없어 그 빛이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나 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알면서 범하기 때문에 더러워지지만,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더러워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양상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진리의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 질서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대안은 계시록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예언된 마지막 교회의 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진리로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얼음장 같은 이 사회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새 교회로부터 불길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렘14:22)

 

아멘

 

2023-02-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0.43MB
축도.2024-11-10(D1)-주일예배(2569, 눅23,13-25), '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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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눅23:1-12)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보이신 후에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기도 하셨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셨고,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음에도, 그런데도 주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의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 붙잡혀 해를 입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과 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어떤 것은 문자적인 뜻 그대로 이루셨고, 또 어떤 것은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습니다.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4절에는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는 시험 가운데서 주님 홀로 싸우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레미야 46장 10절에는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님이 이루셨다는 구약의 예언들은 대개는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수많은 시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이 있기까지 당신이 메시아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셨습니다.

 

그러셨던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이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22:70)라고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이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라면서 주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빌라도에게 주님을 데려가 고발합니다.

 

※ 이들이 주님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간 것은,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비록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이방인이 성전 안뜰을 함부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 집행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 평소엔 저쪽 지중해 해안가 가이사랴에서 대왕 헤롯의 궁전을 관저로 삼아 지내지만, 이 기간엔 예루살렘에 와 전반적인 치안 살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지내는 건 유독 이때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며, 만에 하나 이때 로마에 대항하는 민란이라도 나는 날이면, 총독의 목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 1, 2절입니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백성을 속이시거나 미혹하신 적이 없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물었고, 주님은 그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셨지요. 가이사는 로마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섬기는 건 세상 법도를 따르는 삶, 즉 자연적 삶입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늘의 법을 따르는 삶이며, 영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조화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삶을 위해 자연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되고, 자연적 삶을 위해 영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삶은 영적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것이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가 바로 자연적 삶 속에 담아야 할 영적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유대는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선에 대한 사랑이 같은 뜻인 이유는,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한 것은 속뜻으로는 ‘네가 선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이냐’ 또는 ‘네가 선을 동반한 진리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볼 때 아무리 봐도 주님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고발한 자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심하게 소리 지르며,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유대는 여기서는 유대교회 사람들을 뜻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말씀의 맥락에 따라 그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주님이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회 사람들에게까지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재판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주님은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무슨 형사 사건이 아니라 단지 무슨 신학적, 철학적인 문제요, 저들의 그저 질투심 어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에게로 주님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이 헤롯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아들로서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아버지 대왕 헤롯이 다스리던 유대 땅을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삼 분할, 세 아들에게 나눠 주었고, 그중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맡았으나 이 기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걸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에 세례(침례) 요한의 목을 잘라 헤로디아의 딸에게 준 자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심판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 그리고 총독 빌라도, 끝으로 헤롯 왕은 영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겁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는 이들이 누군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대제사장들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세상을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낸다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의 무리는 교회의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하고, 총독 빌라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 즉 세상의 법을 뜻하며, 갈릴리의 왕 헤롯은 이방 종교의 진리, 또는 도덕적 진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들 중 ‘말씀에 관한 교리’ 2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있다. 처음의 것은 중간의 것을 거쳐 마지막의 것에 이르러 실체가 드러나며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것은 기초이며 그릇이다. (이순철 역) In every Divine work there is a first, a middle, and a last (or ultimate); and the first passes through the middle to the last (or ultimate), and so comes into manifest being and subsists. Hence the last or ultimate is the basis. But the first is in the middle, and through the middle in the ultimate; so that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as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the basis, it is also the support. (SS.27)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할 때는 교회의 진리가 처음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는 중간 것,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의 법이 있습니다. 진리의 질서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도덕적 진리를 거쳐 세상 법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차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반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질서가 반대가 됩니다. 즉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 법이 처음의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가 중간 것, 교회의 진리가 가장 마지막 것이 되지요. 이런 경우에는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나쁜 풍조가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헤롯에게 차례로 심판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참된 진리가 거짓 진리에 의해 박해를 당합니다.

 

헤롯은 주님에게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9절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또한 부패하게 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빛이 교회를 통해 윤리와 도덕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주님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결국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빛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습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주님께 빛나는 옷을 입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주님을 인정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윤리와 도덕이 그들 앞에 나타난 참된 진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애 동안 참된 진리를 만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서울교회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작될 무렵인데 좀처럼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주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문제가 풀리긴 했으나 그로 인해 8개월이면 끝날 공사가 3년을 끌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진리가 견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나 종교가 어지러워지면 세상의 법이나 풍조 또한 어지러워집니다.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진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마치 심장과 폐로부터 흘러나오는 깨끗한 피가 인체의 말단까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그 질서가 거꾸로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에게 차례로 불려 다니며 심판받고 모욕당하는 것은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될 때 생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각자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낮은 진리는 더 높은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뿐 아니라 일하는 방법과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모든 행위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부터 시작해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한 진리의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0)

 

아멘

 

2023-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0.43MB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0.23MB
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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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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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눅22:63-71)

 

 

“인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뜻하고,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한다. 신적 선은 신적 진리를 통해 전능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보리라”고 말한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의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이 있음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807:6, 이순철 역) I say unto you, Henceforth ye shall see the son of ma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and coming upon the clouds of heaven (Matt. 26:64). From henceforth shall the son of man be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the power of God (Luke 22:69).The son of man” denotes the Divine truth that proceeds from the Lord;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denotes that he has omnipotence, for Divine good has omnipotence by means of Divine truth; its being said that “from henceforth they shall see it” signifies that Divine truth was in its omnipotence after the Lord in the world had conquered the hells, and had reduced all things therein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that in this way those could be saved who would receive him in faith and love (see n. 9715). (AC.9807:6, 출28:1, ‘그의 아들들’에 관한 주석에서)

 

 

오늘 말씀에는 주님께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떤 수모를 겪으셨으며, 주님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견디셨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이 ‘지키는 사람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다’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먼저 본문 63절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여기서 지키는 사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사람들이고요,

 

※ 당시 예루살렘에는 두 종류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래 성전 경비대, 다른 하나는 식민지를 관할, 통치하는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장면은 아직 빌라도를 만나기 전이므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경비대이지 싶습니다.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 주님을 함부로 대한 것처럼 교회들이 신성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더럽힙니다. 그것이 군사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더럽히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세상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말씀이 오염되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의 부패상을 배경으로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 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하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말씀을 어떻게 더럽히는지 하는 내용입니다. 64절, 65절입니다.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군사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함으로써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의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는 곳인데, 이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27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2)

 

라고 합니다. 사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역설 중에서도 역설입니다. 내가 있어야 남도 있지 않나 그렇게 모두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도 주님은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을 향해 “거기서 내려와 먼저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하는 자들도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씀 안에 신성이 있음을 믿지 않았고,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곡해했고, 내심 말씀의 능력이 어디 있는가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적이 나타났다면 그들은 말씀이신 주님을 믿었을까요? 잠시는 믿는 것같이 했겠지만, 계속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에 대해 ‘천국의 비밀’ 7290:2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은 믿음을 강제하며 강제된 믿음은 사람 안에 남지 않고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예배의 내적인 것인 믿음과 인애는 사람의 자유 안에 심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 그것은 그의 것이 되고 그의 것이 되면 그에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But miracles are not done among those who are in internal worship, that is, in charity and faith, because to these they are hurtful, for miracles compel belief, and what is compelled does not remain, but is dissipated. The inward things of worship, which are faith and charity, must be implanted in freedom, for then they are appropriated, and what is so appropriated remains; whereas that which is implanted in compulsion, remains outside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because nothing enters into the internal man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ideas, which are reasons; for the ground which there receives is an enlightened rational.

 

그래서 주님은 기적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들이 밤새 주님을 욕보이는 동안 날이 밝았습니다. 66절입니다.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말씀에서 날이 밝았다는 건 교회가 주님과 연결된 상태, 즉 가르침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교회가 주님에게 등을 돌린 상태입니다. 주님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지옥의 악과 거짓에 깊이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지옥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며, 그리하여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은 말씀 안에 있는 선을 자아의 악과 섞는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말씀 안에 있는 진리를 자아의 거짓과 섞는 사람들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은 그런 방법으로 말씀을 더럽히고, 더럽혀진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가는 건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진리를 심판하려고 하는 걸 의미합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은 새 교회의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불법자요 이단이라고 마음대로 심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67절, 68절입니다.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말씀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왕은 속뜻으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하는 것은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진리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선의의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은 언젠가는 진리를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아직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 즉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악과 진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9절입니다.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여기서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인자로 표현되는 진리는 지옥과 싸우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진리라면 지옥이 감히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리라고 한 인자는 누굴까요?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전능한 힘을 갖게 된 진리, 바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지옥의 어떤 어둠도 훼손할 수 없는 완전한 말씀이며 진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지옥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완전한 진리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타락한 교회를 대신, 새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그 완전하고 전능한 진리이시며 주님이신 이가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인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는 천국을 통해 인간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그 신성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리하여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은 신성한 진리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통해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욥기 15장 15절은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말한다.

 

욥기에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그동안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진리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완전한 진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807:6번 글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을 가진다.

 

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의 말씀이 인간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말씀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말씀은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 7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을 이기고 영화롭게 되신 주님의 신적 인성을 뜻하고, 또한 그때 선으로 충만하게 된 능력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누군가 더럽히려고 할 때, 그들의 추악함이 드러날 뿐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말씀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더럽히려 할수록 오히려 그들 스스로 진리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바로 그런 전능하신 진리입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이 진리의 힘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진리의 전능하신 힘에 의지해 매일 같이 새로워지시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아멘

 

2023-02-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27(D1)-주일예배(2567, 눅22,63-71),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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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27(D1)-주일예배(2567, 눅22,63-71),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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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54-62)

 

 

(오직 믿음의) 신앙이 주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에 주님을 부인한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교회 안에 인애가 없는 때를 뜻한다. (천국의 비밀 6073:3, 이순철 역) And that faith would rejec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by Peter when he denied Him thrice; that he did this at night, signifies the last time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charity (see n. 6000);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할까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주님의 제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과 분리된 신앙, 말로는 사랑, 사랑하는데 실제로는 삶이 받쳐주지 않거나 사랑의 삶, 즉 체어리티(charity, 인애)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랑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을 뜻합니다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 즉 신앙과 교리만 있고, 정작 있어야 할 사랑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믿기는 하는 데 그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요한계시록 번역 준비 작업을 하면서 그 속뜻 브리핑을 읽고 있는데, 거기 보면 계시록에 나오는 용, 짐승이 다 그 속뜻으로는 이런 신앙, 이런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년에 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생전엔 출판을 못 한, 사후 첫 라틴 출판은 1785-1789)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웃에게 많이 베풀고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하는 걸 사랑이며 체어리티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국회의원이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좋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나쁜 법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 나중에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삶을 소홀히 합니다. 그런 신앙, 그런 신앙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입니다.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그래서 본문 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이 주님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대제사장의 집에 붙잡혀 있는 것은 진리가 그렇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비롯,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원본은 ‘믿음’(belief)과 ‘신앙’(faith)을 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목사님이 개신교 배경이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belief’보다 ‘faith’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가급적 ‘믿음’을 ‘신앙’으로 수정, 표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본문 55절과 5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한글 성경에는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웠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넓은 방 한가운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방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제사장 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방 한가운데 타고 있는 불은 애정을 뜻하는데,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그들의 자아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탐욕과 미움, 질투 같은 악한 애정을 뜻하며,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불을 쬐는 것은 사랑 없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악한 애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합니다. 여종은 악한 애정을 가진 지옥의 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도발하는 건, 지옥의 영들이 베드로로 표상되는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진리를 따라 살려는 순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의 영들은 그의 일거일동을 주의 깊게 살피다 그가 자기들과 한 편이 아니다 싶을 때, 마치 이리가 달려들 듯 그를 공격합니다.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도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침내 지옥의 영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종의 말,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에서 ‘’는 바로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진리가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지옥이 싸움을 걸어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데요, 그들은 신앙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주님을 부인했고, 그 순간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험에서 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부정한 욕망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지옥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그때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싸움에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 주님은 손발이 묶여 대제사장의 집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하지는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그렇게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때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하나씩 지옥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방 왕들과의 싸움에서 졌을 때, 성전의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한동안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신앙인들은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데, 그러나 다시 지옥의 공격이 시작되고,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을 58절과 5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지옥은 신앙인들을 항상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붙잡고 일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계속 달려듭니다.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 지옥 영들이 말하는 갈릴리 사람은 온전히 지옥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 즉 그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 예수의 편에 설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그런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만 이상하면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맹렬히 공격해 넘어뜨립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 번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닭 우는 새벽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새로운 진리로 오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닭이 울고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위 말씀은 기존의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걸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죄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 때도 노아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그 무너지는 교회로부터 구해내십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보신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의 눈이 열리고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도 신앙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통곡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베드로가 제사장의 집을 빠져나와 슬피 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떻게 교회들이 무너지는가를 봤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할 뿐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이기도 하고, 그들의 신앙인 사랑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공격해 올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홍수에 떠내려가듯 한없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새 교회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는 힘이 있는 진리이지만 그렇더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시험에서 지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한없이 미끄러져 지옥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그를 들어 올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에서 구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구원의 소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은 각자에게 숙제를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마치지만, 한없이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라고 왜 숙제를 빨리 마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없이 미적거리고 있을 때, 호된 시련이 닥칩니다. 시련은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던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는 순간 눈이 밝아져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편으로는 수치의 눈물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개의 눈물이 터집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주님께 왜 우리는 주님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런 종류의 문제는 기도로 밖에는 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오랜 숙제를 풀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말로만 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사랑을 실천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기적을 만드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13:35)

 

아멘

 

2023-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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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0.20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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