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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7:32:00 3. 눅1:39-45,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2. 2025.02.07 2. 눅1:26-38, ‘수태고지(受胎告知)’
  3. 2025.02.04 1. 눅1:18-25, '사가랴가 말을 못 하다' 2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39-45)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1절)

 

하였고, 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36절)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반대로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들이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7절)

 

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37절)

 

답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떠나가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엘리사벳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가서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으로 표상(表象)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어떤 사람들을 나타낼까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모두 천적인 선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영적이다, 그리고 자연적이다 라는 말, 표현, 용어들은 새 교회에서는 정말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인데요, 다른 곳에서는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굉장히 생소하기까지 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들은 사랑의 단계, 정도(degree)를 나타내는 표현들인데요, 그러니까 천적이라는 표현은 주님, 즉 선(善, good)을 사랑하는 단계이구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 이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한다’는 게 좀 낯설 수 있어 보충 설명드립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5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김은경 역) In heaven loving the Lord does not mean loving him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it means loving the good that is from him; and to love good is to will and do good from love; and to love the neighbor does not mean loving a companion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loving the truth that is from the Word; and to love truth is to will and do it.

 

또 자연적이라는 말은 세상 법도나 학문 같은 것, 그 밖의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천적 선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선을 행하되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이렇게 천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을 친척(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실제로도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그들을 특별히 친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선의 특성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마치 친척 간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구요, 마리아 역시 속뜻으로는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마리아로 표현되는 이방인은 단순히 교회 밖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구요, 기존 교회,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리아와 같은 이방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 그러니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거나, 말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세 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타협하지 않는, 그런 믿음, 그런 신앙과 교리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의 속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왜 이방인들을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왜 새 교회를 이방인들과 함께 세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이에 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천국과 지옥’을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새 교회 교리에 관한 일종의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천국에 관한 사실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 것은 잘못된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기존의 낡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말씀을 가지고는 왜 안 될까요? 기존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왜곡, 뭔가를 보태서 섞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교회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소위 장로의 전통이라는 계율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일단 이 모든 오류의 출발은 현 기독교회가 그 주된 교리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도들의 편지에서 뽑아냈기 때문입니다. 교리, 즉 신앙은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만 나와야 합니다. 현 66권 성경 중 주님의 말씀과 말씀 아닌 것에 관한 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https://bygrace.kr/1027)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선하게 살아라.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가르칩니다. 이것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에 아무리 투철해도 정작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즉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잠깐 허락을 받아 들어간들 금방 못 견디고 스스로 뛰쳐나오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신교의 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거짓이요, 오류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긴 일기를 보면, 스베덴보리가 영계에 들어가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마틴 루터도 있었답니다. 그가 루터와 이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하여 대화하던 중 그의 대답,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순전히 내가 고안한 것인데, 당시 카톨릭과 교리적 어떤 선명성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런 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고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엘리사벳과 사가랴 같은 사람, 즉 기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말씀이란 유대교회 말기에는 신약,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말씀이구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는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에게 주시는 아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인류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그 대신 세워질 새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누구일까요? 마리아의 아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이 없는 곳에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례(세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지상에 세우시는 새 교회 가운데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受胎告知, Annunciation)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는 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렸을까요?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새로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말씀, 새로운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죠. 어떤 분은 책을 통해서, 어떤 분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새 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인도를 통해 마리아는 이제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출발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은 선한 이방인이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먼저 산골로 갔습니다. 산골은 영어로는 hill country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작은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작은 산은 무슨 뜻일까요? 큰 산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면, 작은 산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산골로 가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기존 교회 안에 이웃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그들에게 갔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줘도 잘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다녔다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회의를 느껴 교회에서 멀어진 분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제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마리아가 마침내 유대의 어느 동네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유대는 천적인 것을 뜻하고,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동네란 천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천적 교리는 그 교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다시 그것을 통해 가장 깊고 순수한 교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유대의 동네에 당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면서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인사를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웃의 집을 방문할 때는 인사하라, 평화를 빌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인사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2-13)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인사는 마리아에게 있는 주님의 평화가 엘리사벳과 그 아기에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았을 때 복중(腹中)에서 아이가 뛰었습니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중의 아이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뛰었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인 마리아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정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주님께서 당신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을 주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내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에 오시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존의 교회에는 주님이 계실 곳이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 오실 때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주님은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42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엘리사벳이 축복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리아를 축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것과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 뛰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성이구요,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한 것은 주님의 열성이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엘리사벳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 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저주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여자란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진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교회는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임신하는 고통과 자식을 낳는 수고는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진정한 진리를 얻기까지 견디고 이겨야 할 내적 싸움과 온갖 걱정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아기를 낳는 수고와 임신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진정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가 진행될 동안 사실은 출애굽기 속뜻 강해 역시 병행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진리를 ‘만나’로 표현합니다. 만나는 책에서 배우거나 설교를 통해 듣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 바로 진정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리는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자아를 부단히 깎아 내고, 깎아 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그런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부단한 내적 싸움과 인고(忍苦)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징계처럼 내리신 이 말씀은 교회의 험난한 역사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 주님에 대한 호칭 변화에 주목해 보세요. 창세기 1장은 ‘하나님’만 나오지만, 창세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다 다시 ‘여호와’만 나오고, 또 ‘하나님’만 나옵니다. 다음은 주님의 여러 호칭에 관해 짧게 요약해 본 글입니다.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아래 제 블로그 글을 참고하세요.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https://bygrace.kr/2637)

 

그런데 오늘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교회가 겪었던 모든 싸움과 수고의 결실을 이제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교회의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을 예고하는 그런 말씀이라면, 이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교회의 그 모든 흥망성쇠의 결실을 너를 통해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교회이구요,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입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이는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43절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또 말했습니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역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은, 참된 말씀을 아는 엘리사벳 같은 사람들이 이제 낡고 병든 교회를 떠나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내적 진리가 있는 새 교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본 마리아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의미를 우리들의 얕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글자로 된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것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기, 즉 새로운 말씀이 마리아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물론 그들에게도 진리를 주십니다. 어떤 식으로 주실까요?. 다양한 종교의 교리나 세상의 상식들을 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들은 진정한 진리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도 선하게 살면 자기 자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교회로서의 사명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인류를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뜻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선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보면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엘리사벳에게로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엘리사벳과의 만남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참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여전히 기존의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기존 교회에 머무는 것은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진리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진리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진리와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진리를 함께 섞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들이 어떻게 될까요? 진리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이, 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에 아직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마리아를 만나는 것은, 낡은 교회를 떠나 순수한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권고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가 나에게 나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새 교회가 나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새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진리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들이 주변에는 많습니다.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새 진리를 위해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오로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새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 교회는 에덴동산 이래 인류가 감당했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로 인도된 모든 성도님들께 주님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아멘

 

원본

2016-05-2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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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受胎告知)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1:26-38)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침례(세례) 요한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속뜻으로 침례 요한은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글자로 표현된 말씀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직접 주신 신약 복음서의 말씀이나,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 같은 것이 바로 침례 요한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침례 요한의 의미를 설명했더니, 언젠가 어떤 성도님께서, 말씀의 속뜻이면 당연히 내적 진리인데, 왜 그것을 자연적 진리라고 하나요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 inner meaning), 즉 영적 의미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곧 내적 진리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그런 만큼 그것은 내적 진리를 받기 위한 자연적인 그릇일 뿐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아주 깊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비록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이 내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아시려면,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약어 AC,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8443번 글의 ‘진리의 여섯 단계’를 참고하세요.

 

※ 다음은 AC.8443 일부 인용입니다.

 

신적 진리(神的, Truth Divine)라고 하는 신성한 진리는 한 단계(one degree)만이 아닌, 여러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immediately) 나오는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조차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부터는 피조물인 천사가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진리는 가장 안쪽 천국, 곧 삼층천에 있는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러나 인간은 조금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중간 천국, 즉 이층천 진리와 같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지각할 수 없는(neither... intelligible) 진리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가장 바깥 천국, 곧 일층천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 내면이 열린 사람이면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대부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혹시 이게 아이디어가 되면, ‘아, 그래서 그 경우가 그런 거구나!’ 하는 지각과 함께 믿는 역량이 생깁니다. Truth Divine is not of one degree, but of many. Truth Divine in the first degree, and also in the second, is that which 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this is 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 But truth Divine in the third degree is such as is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this is such that it 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man. Truth Divine in the four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 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man. But truth Divine in the fif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 this 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but still it is such that a great part of it cannot be expressed by human words; and when it falls into the ideas, it produces the faculty of perceiving and also of believing that the case is so.

 

※ 그러니까 이 맨 마지막 문장은 그동안 인류를 이롭게 한 수많은 천재적 발견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의 한 줄기 번쩍이는 생각들은 바로 이 다섯 번째 단계의 신적 진리인 일층천 진리가 인간의 아이디어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계속) 그러나 신적 진리의 여섯 번째 단계는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의 지각을 수용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로, 곧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표현된 진리입니다. 이 뜻, 즉 이 진리는 구름으로, 그리고 그 내적 진리(the interior truths)는 구름 속 영광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곧 왜 여호와, 즉 주님이 그렇게 자주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름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가령 출24:15-16, 40:34-35, 왕상8:10-11, 마24:30 및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But truth Divine in the sixth degree is such as is 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thus it is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This sense, or this truth, is represented by the cloud, and the interior truths are represented by the glory in the cloud. This is the reason why Jehovah (that is, the Lord) so often appeared to Moses and to the sons of Israel in a cloud (see Exod. 24:15, 16; 40:34, 35; 1 Kings 8:10, 11; Matt. 24:30; and other places).

 

15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40:34-35)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왕상8:10-1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계속) 주님의 현현(顯現, The appearing of the Lord)은 신적 진리를 통해서이며, 더더욱 신적 진리이십니다. ‘구름’(a cloud)은 진리를 가리키며, 이 진리는 퍼셉션을 위해 제공되는 거라는 이 사실은 저세상에 있는 다음과 같은 표상들로 말미암는데요, 거기서는 더 높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아래 천국 천사들한테는 빛으로 나타나며, 밝기 또한 빛으로 말미암는 반면, 더 낮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위 천국 천사들이 볼 때는 밝은 구름으로, 그 진리의 퀄러티에 따라 다양하게, 그리고 짙거나 옅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다음 말씀, 곧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하는 말씀은, 지각에 맞춰 제공된 진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The appearing of the Lord is by means of Divine truth, and moreover is Divine truth. That a “cloud” denotes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is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other life, where angelic speech of the higher heavens appears to those who are beneath as light, and also as the brightness from light; whereas the speech of the angels of a lower heaven appears as a bright cloud, in form various, and in density or rarity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truths. From all this it can be seen that by “the glory of Jehovah seen in the cloud” is signified the presence of the Lord in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AC.8443, 변일국 역)

 

※ 그러니까 주님의 진리는 하나요 동일하지만, 그 진리를 받는 인간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조절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 초등 어린이에게 고등학교, 대학교 수학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계속) 위 인용 글은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라는, 출16:10 말씀을 속뜻으로 푼, 주석한 글입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실까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 현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열에 서넛(너무 적게 잡았나요? ㅎㅎ)은 되지 싶습니다.

 

그것은 사가랴에 대해 유대 나라 헤롯왕 때 제사장이라고 말한, 아래 본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1:5)

 

말씀에서 유대 나라는 주님 당시의 유대교회처럼 종말에 가까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헤롯왕은 거짓 진리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 또는 반대의 의미로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왜 진정한 진리는 없고, 거짓 진리만 있을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지금 거짓 진리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가랴는 또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가 비록 잘못된 교회 안에 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속뜻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가랴와 같은 사람, 즉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을 열어 주십니다. 그것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침례 요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많은 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저의 어떤 면을 보셨는지 이렇게 귀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제게 열어 주셨는데요,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에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26, 27절입니다.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가 찾아간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녀는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다윗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를 뜻하고, 남자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의 안에 이미 주님의 교회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간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왜 천사는 갈릴리로 갔을까요? 큰 성 예루살렘도 있고, 다른 많은 곳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간 이유는, 주님이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타락,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을 때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 교회 시대의 역사인데요,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라고 하는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이마저 사실은 그 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교회들은 순서대로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입니다. 각 교회 시대마다 종말이 있었고, 그로 인한 새 교회의 일어남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태고교회의 종말이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었고, 이후 노아교회라고도 하는 고대교회가 일어났고, 이 고대교회는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마감, 이후 율법을 가진 유대교회가 있어나고... 하는 식이지요. 교회의 종말은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곧 황폐한 상태가 되는 것이며, 이때 하나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 시대를 여시는 것인데요, 비유하자면, 촛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유대교회가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란 말은 상황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의미입니다. 그런 반면, 주님 당시의 이방인들은 좋은 의미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오히려 교회가 주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로 표상되는 이방인들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런 이방인들을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타게 갈망했는지는 그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다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음식은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리아는 그러한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보면 마리아는 분명 확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만 속뜻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를 통해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고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신 것입니다.

 

28, 29절입니다.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이 장면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임재하시는 순간인데요,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깜짝 놀라며,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합니다. 크게 놀란 것이지요. 마리아가 놀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실 때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전율 같은 것인데요,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만 느끼는 거룩한 공포입니다. 성경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저 역시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영적 체험을 몇 번 했는데요, 나중에 기회 되면 자세히 나누겠습니다. 이런 체험은 한 개인의 영적 성장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유익이 됩니다. 많은 유익 중 한두 가지는, 첫째, 영계가 분명히 있다는 걸 확실히 지각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게 무슨 개인의 욕심과 소원을 살짝 영성의 옷을 입혀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저 겉 사람의 일일 뿐이지요. 그러나 천국은 오직 속 사람으로만 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걸 무슨 누구의 설명 없이도 그냥 알게 되며, 그래서 그냥 무조건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자아 부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주님을 이렇게 만난 사람이라야 참된 회심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네, 뭐, 이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30절, 31절입니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에는 누구나 그렇게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에 보면, 다니엘이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주님을 뵈었을 때, ‘마치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서 그들의 몸을 만지시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지실 때, 그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히 자아를 내려놓을 때, 그러니까 죽은 자같이 될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그 죽은 영혼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무서워 말라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의 속뜻은, 주님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진리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미리 알려주시는데, 바로 ‘예수’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善, good)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평범한 진리가 아닌,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그런 진리입니다.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그리고 예수는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각각 나타냅니다. 그래서 천사는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의 전언은 계속됩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태어날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누구십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녀를 통해 당신의 아들을 낳으신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데요, 하나님의 아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인성(Divine Human)입니다. 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냐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보통 인간들처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거룩한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해서 입으신 이 몸이라는 옷이 곧 주님의 인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는 신성과 함께 거룩한 인성이 있습니다. 주님에게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나 사람 모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신적 진리(Divine Truth)입니다. 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냐면, 신적 진리는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진짜 인간의 아들처럼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이 아니구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기 때문에, 인간적 수사(修辭)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신적 진리는 상응적으로는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바로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신적 진리나 신적 인성이나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의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적 인성이나 신적 진리는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걸치고 계신 옷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인성은 곧 신적 진리인 것입니다.

 

34절입니다.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조금 전에 남자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께서 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은 그가 그만큼 주님 앞에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속뜻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방인입니다. 그 말은 그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를 모른다는 것일 뿐, 그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내면에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정혼한 사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성령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령, 성령, 성령이란 말을 많이들 하시는데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그 안에 계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살아있는 능력의 진리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시구요, 잘못된 생각이나 신념들을 교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 인격을 바꿔주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에게 오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36절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친족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에서 친족은 그냥 친척이라는 뜻이 아니구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이나 진리의 종류가 서로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즉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족이란 말은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종류의 선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룩한 아들들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는 선은 어떤 선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그냥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구요, 주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에서 나온 선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말은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엘리사벳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그가 알고 있는 진리가 거짓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거짓 진리가 사가랴-엘리사벳으로 표상되는 신앙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후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신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36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늙어서 아기를 배었고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고, 26절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은 여섯째 달에 마리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섯’이란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여섯’이란 수는 주님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는 침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말씀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내적 싸움을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거짓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내적 싸움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은 건 여섯째 달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신앙이 이렇게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주시고, 마리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내적 진리를 주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내적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37절, 38절입니다.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스스로 주님의 여종이라 말하고, 주님의 뜻이 그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로 오신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서로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주님은 각자의 신앙 상태에 따라 오신다는 것 또한 아셨을 것입니다.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로 표상되는 사람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진리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을 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앙의 열매를 맺기도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 진리가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는 뜻이구요, 그러므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또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는데요, 그 새로운 말씀이 바로 침례 요한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있는 거짓 진리를 몰아내고, 진정한 신앙을 가지길 참으로 원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통해 거짓 진리를 몰아내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속뜻으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거짓 진리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갈 때가 여섯째 달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미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적 싸움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죠. 주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 하십니다.

 

그러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시는 아들과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신 아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입니다. 그것은 신앙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거짓 진리에 빠진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주님 자신이세요. 신적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그 안에 살아계신,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세상에서 오는 어떤 유혹이나 난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신앙에 따라 다릅니다. 부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죽은 자처럼 자기를 낮추시기를,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리고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자기를 낮춘 것처럼 낮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1:68-69)

 

아멘

 

원본

2016-04-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5(D7)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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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인 2월 2일 주일 설교를 끝으로 지난 2년간 달려온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쳤습니다. 세어 보니 총 144편의 설교였습니다. 총 144편이면 한 3년치 설교인데 2년 걸린 건, 처음엔 매일예배 본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 인용을 허락하신 원 저자, 전 청주 새 교회, 그리고 이후 서울 새 교회 담임이셨던 이순철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이 전체 설교를 한 편의 pdf로 만들 필요가 생겨 고민 중, 이 전체를 다시 한번 깊이 살피라는 주님의 퍼셉션(perception) 또한 있어 순종하고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강해이면서도 맨 처음 본문인 눅1:1-17이 없는 이유는 설교 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 저자께도 문의드렸으나 분실하셨는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죽 가시다 보면, 한 구절이 빠졌거나 몇 구절이 통째로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원 저자의 단순 실수이신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혹시 중간중간 설명 부호인 ''가 나오는 부분은 특별히 무슨 배경이 되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어 제가 더한 것입니다. 전반적인 어투나 뉘앙스, 에피소드 등은 저희 교회에 맞게 다듬었다는 점, 참고하세요. 아, 그리고 원본의 '믿음'은 전부 '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특별한 데서는, 그러니까 'believe'의 뜻을 살려야 하는 데서는 원본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사가랴가 말을 못 하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기도 했고, 그 밖에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 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기술(記述)이 사실 굉장히 예민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진리이기에 용기를 내어 말씀하심인 줄 압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김은경 역)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공동체를 말한다. (HH.52, 김은경 역)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했습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 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의 비밀 1786번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그것에 대해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3-02-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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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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