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結婚愛 414, 이순철 역) The reason why good is good insofar as innocence is within it is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innocence is to be led by the Lord. (CL.414)
주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전의 아이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고, 어린아이의 속뜻이 순진함, 이노센스(innocence)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15절입니다.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아기는 순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람들이 주님께 진리를 배우러 나올 때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아기를 만져주시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아기를 만지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순진한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으로 오셔서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기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말씀에서 주님의 제자는 보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거짓 교리를 만들거나, 또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할까요? 순진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따라 박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순진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새 교회에서는 이런 걸 무지의 순진함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순진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진함이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시하고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순진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 가령, 이런 아르카나, 말씀의 속뜻에 기반한 새로운 내용들을 전한다 하여 기존 기독교회, 개신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여러 방법을 통해 괴롭히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진함의 단계 내지는 유형은 다양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아이를 젖먹이라 하기도 하고,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젖먹이가 가장 순진한 것이고, 아기나 어린아이로 갈수록 그보다는 덜 순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에 비유되는 순진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스베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414번 글에서는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즉 순진함이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인데,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비록 겉보기엔 선처럼 보일지라도 그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의 사람이든 교회 밖의 사람이든 그들의 순진하고 선한 마음 안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059번 글에 의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더 많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서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 이하에서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3-30)
여기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주님께 여쭙는 것은 ‘교회 안에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데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중 된 자는 교회 밖의 타 종교 사람들을 뜻하고, 먼저 된 자는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말씀을 왜곡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덮고 있는 지적 어둠은 주님에 의해 쉽게 걷히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더럽힌 자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어둠이 걷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지요. 17절입니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을 떠받치는 두 키워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라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81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순진성(innocence)에 대해 천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순진성이 모든 선함의 본질이라는 것과, 선은 그 안에 순진성이 있을 때만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혜(wisdom)도 순진성이 있어야 지혜이며, 사랑(love), 이타심(charity), 신앙(faith)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순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어야 선이다. 모든 선은 주께로부터 오며,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오직 순진성에 의해서만 진리는 선에, 선은 진리에 결합될 수 있으므로 천사는 순진성이 있어야 천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으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천국적 결혼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또 천사에게 들은 것은, 참된 결혼애는 순진성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참된 결혼애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합이 낮은 단계로 내려와 결혼애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각자의 마음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애에는 애들 같은 천진난만한 장난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 281, 김은경 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 진리를 택했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지금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 종교나 타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종교나 교파 사람들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적 순진함을 잃어버리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 아래 이야기는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 중 한 분인 탄허 스님에 대한 강연이 있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자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이해하는데 자신은 3년이 걸렸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3개월이면 될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와 동양의 유, 불, 선이 서로 회통(會通)해야 한다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강연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탄허 스님은 석가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을 생각이 끊어진 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성인들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도 모두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는 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생각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이고, 생각이 끊어진 자, 즉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는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주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고 할 뿐 모호하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모두 이해했다는 탄허 스님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석가와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존재를 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의문들을 주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통해 이제 누구나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일은 순진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항상 순진함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주신 순진함으로 늘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0-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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