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 본문의 속뜻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 which are meant by the Holy Spirit, are, in general, reformation and regene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latter, 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and finally salvation. (TCR.142)
오늘은 저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 곧 그 속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 마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속뜻은 보통은 교회 밖의 이방인을 뜻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뜻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교리인 장로의 전통이나 오늘날 믿음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건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참된 진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무슨 뜻인지는 성문서(聖문서,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가리키는데요, 스베덴보리에게 이 모든 기술(記述)을 허락하시고, 또 친히 계시, 딕테이션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셔서 사람들의 일반적 저작들과는 구분하려고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음은 위 비유의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이 본문의 세리를 보면, 그는 그 역시 비록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겸손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진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속뜻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요, 이러한 의미들을 통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요, 정리하자면, 그는 태생적으로, 즉 태어나길 당시의 잘못된 교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또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여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니 그런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인파 속에서는 도무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이 돌무화과나무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그런 모습을 3절과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키가 작다는 것의 속뜻은 자연적 합리성만 있고, 영적 합리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영적 합리성은 주님이 주시는 합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합리성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 ※ 주님으로 말미암는 통찰력인데요, 태고교회 때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퍼셉션으로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바로 직관하는 능력입니다.)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합리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합니다. 가령, 히브리어, 헬라어 같은 원어를 가지고 말씀을 풀고자 하는, 그리고 각종 주석이나 세상의 온갖 사례들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결국 자기를 높이게 되는데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며, 삭개오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많아서 삭개오가 주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원문에는 삭개오가 인파에 떠밀렸다(press)고 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떠밀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성이 훼손되는 걸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군중이나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고, 떠미는 건 폭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이 훼손된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인애(charity)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걸 거짓이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 키가 작은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 나무는 바로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나무하고는 다른 나무이지만, 그 열매가 얼핏 무화과나무의 열매 같아 이렇게 부르는 나무입니다. 이 무수히 열리는 열매들은 그대로 두면 너무나 떫어 나중에 익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익기 전 바늘 같은 걸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나중엔 달달해져서 먹을 만하게 되는 그런 신기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모스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7:14)라 했던 말씀에 나오는 나무인데요, 당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우기에는 그럭저럭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지만, 건기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성읍 근방 논으로 들어와 거기 남아 있는, 추수하고 남은 곡식 밑동들을 양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이때 땅 주인들과 협상, 그 대신 목자들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이 무수히 달린 열매들을 일일이 올리브기름으로 침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걸 ‘뽕나무를 재배한다’한 것인데요,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무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리고 위 두 번째 이미지처럼 실제 무화과나무 열매하고도 비슷하게 생겨 당시 사람들은 이 돌무화과나무도 일종의 무화과나무로 쳐주었으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로 보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에는 무화과나무(fig tree)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의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하고,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천적 선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은 무엇이고, 영적 선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하는 모든 선이 자연적 선입니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키고,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 같은, 이런 선한 행실이 모두 자연적 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자연적 선이라도 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988번 글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선의 기원은 두 가지이다. 즉 유전적인 것이 있고, 믿음과 인애의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 있다. 유전적인 선은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리에 따른 선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선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의 선이 바로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하는 선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선이 자연적이지만 아직 영적이지는 않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에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에 대한 삭개오의 갈증인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러한 갈증으로 지난 2022년 12월, 그동안 속했던 지방회를 나왔던 것이며, 또 수도원 역시 거리를 두게 된 것인데요, 지방회에서는 모이면 그저 어디 다니자는 이야기, 무슨 집회에 가자는 이야기, 어느 교회 누가 어떻다더라 등 무슨 친목회, 동호회 수준 같은, 도무지 주님과 천국 이야기는 없는, 그리고 그런 지식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에 제가 많이 지쳤으며, 물론 참 선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원 역시 그 심성들이 다르지 않았고, 역시 주님보다는, 그리고 천국보다는 무슨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남들 모르는 무슨 신기한 이야기들에만,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그리고 자꾸 처음 원칙과 규칙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깨면서 변칙, 반칙을 허용하는, 이름은 ‘봉쇄’이면서,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혼자 주님을 독대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덜 심심하고, 늘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뭔가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모습 때문에 처음 몇 년을 마음을 다해 다녔으나 결국은 지쳤기 때문입니다. 네, 하여튼 그런 갈증이 저 역시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쩌면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이제 마침내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착한 마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옵니다. 교리의 오류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스스로 높이 앉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높은 곳에서 주님을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분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진리 앞에 황급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이신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된 삭개오가 감격해 말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모르긴 해도 부당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한 일이 그동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통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니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만나자 그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 주님 앞에 선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건 이웃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해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진리와 선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절반은 모든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절반 안에는 전체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절반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을 보이며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넷이란 수는 둘의 배수로 둘과 같은 뜻을 가지며, 그래서 둘이나 넷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믿고, 또한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갑절로 갚겠다는 건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전하는 걸 뜻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굴까요? 아담으로 상징되는 천적인 교회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 교회가 무너졌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상징되는 영적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마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자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적 교회의 재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천적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에서 삭개오는 거짓 교리에 빠진 모든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리는 신앙인들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삭개오가 무리 속에서 떠밀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동료들로부터 이단의 진리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무리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죄인의 진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모든 방해를 딛고, 영적 여리고에서 탈출, 주님의 손을 잡고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삭개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진리를 혼자만 알면 안 되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앞의 ‘참된 기독교’ 142번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사람에게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듯, 주님 역시 신성(The Divine)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그리고 ‘신적 에너지와 활동’(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이라는 게 있으시며, 이때 이 세 번째가 바로 성령이시구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을 느끼며, 그 인격을 감지하는 건,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그 얼굴을 늘 주님을 향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늘 주님을 대면하여 뵙는 듯한 느낌 가운데 지낸다고 하는데요, 지상에 사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면, 똑같이 늘 주님을 뵙는 것 같은,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독대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아멘
2022-03-30(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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