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증거

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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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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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눅21:20-28)

 

 

사람이 가장 신앙하는 진리는 (내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 다음에,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천국의 비밀 9164, 이순철 역) ...When a man is in truth from good, then that truth in which he has the greatest faith is in the middle; next follow the truths in which he has less faith; and finally those which are of doubtful faith. In the borders round about are falsities, which, however, are not in a series with the truths, and do not stand upright toward heaven as do the truths of good; but are bent downward, and look toward hell insofar as they come forth from evil... (AC.9164)

 

 

지난 2주 동안 계속해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전해 드렸습니다. 첫 주에는 마지막 때 교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런 것처럼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불경하다는 것과, 그래서 말세에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계시록에서는 여자가 힘들게 아이를 낳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또 둘째 주에는 말세에는 기존 교회들에 의해 새 교회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과, 그때 새 교회 사람들은 인내함으로 오히려 영적 생명인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를 얻는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세에는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무리 잘못해도 결코 성내거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씀에서는 징벌의 날이라고 할까요? 교회가 그릇된 신앙으로 인해 영적으로 피폐해질 때, 지옥으로부터 공포와 불안감이 몰려오고, 더구나 자연적으로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데, 그때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 ‘그릇된 신앙’이란, 주님의 속성, 성품, 실제 모습에 위배 되는, 안 어울리는 신앙을 말합니다. 즉 주님은 실제로는 이런 분인데, 사람들은 저런 분, 곧 무엇을 더하거나 빼서 살짝(?) 위, 변조, 결국 자기들을 닮은 그런 이상한 신을 만들어 내고는 그 신이 곧 주님이시라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게 바로 ‘오직 믿음’의 신앙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같이 가는데, 역사적으로 인류는 여기서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 굳이 삶이 안 받쳐줘도 굳센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배우고 믿어왔는데, 각 교회 시대마다 그 시대 종말에 이르면 이런 신앙이 아주 극에 달하곤 했습니다. 위에서 ‘역사적’이라 한 것은, 이런 비극이 창세기 가인이라는 신앙과 아벨이라는 신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의 그런 상태를 본문 20절과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군대는 진리를 공격하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였다는 것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가득한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거짓 진리 때문에 교회 안에 진리가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칼은 거짓 진리를,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거짓 진리에 의해 참된 진리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악이 가득한 것, 즉 자아의 악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나라는 보통 선을 뜻하지만, 이방 나라, 또는 이방인이라 할 때는 반대로 자아의 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 ‘자아의 악’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악을 말합니다. ‘’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면 그가 의도하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악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본문 25절과 2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하늘의 징조와 땅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마지막 때 교회의 심판은 영계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지상의 교회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일월성신의 징조는 영계에서 심판이 있을 때, 그곳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상응(相應)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영계의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것은 지상 교회 안에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별이 떨어지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달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땅에서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심판을, 구체적으로는 교회 간 교리의 다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탕으로 추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맞다 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간 교리 다툼이 교회의 심판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다툼을 통해 교회의 잘못된 신앙과 타락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심판은 이렇게 영계와 자연계에서 차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새 교회가 나타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능력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까닭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 안에서 빛나는 영광이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처음 오실 때처럼 그렇게 다시 오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고, 말씀의 내적 의미로 오십니다.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이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가르칠 때도 교인들 가운데는 신앙에 따라 인애, 곧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2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본문에서 유대 및 성과 촌에 있는 자들, 그리고 아이 밴 자들, 젖을 먹이는 자들은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참된 신앙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이 밴 자, 또는 젖 먹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삶의 선을 뜻하고, 젖을 먹인다 할 때 이 젖은 삶의 선과 함께 있어야 할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누구보다 선량한 참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타락한 교회 안에서는 체어리티의 신앙, 또는 선이 있는 진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릇된 교리가 주님으로부터 교회로 유입되는 참된 선과 진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 ‘선이 있는 진리’란 그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진리를 말합니다. 얼핏, 혹은 누가 보아도 진리 같아도 실제로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진리가 있으며, 그런 진리로는 능력이 비롯되지 않습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으며, 능력은 오직 이런 선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조용기 목사 저, ‘4차원 영성’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사람, 혹은 그 장소에 주님이 임하실 수 있었던 그런 상태였음을, 천국의 능력, 입류가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상태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지 못하면, 기왕에 가지고 있던 체어리티의 선과 진리가 점점 메말라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 및 성과 촌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와 성과 촌은 교회들을, 산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선한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말세의 징조가 보일 때, 주님은 일어나 머리를 들라 하십니다. 머리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것인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고,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들라는 것은 말세에는 무엇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라는 것이고, 인간의 지혜,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9164번 글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 안에 있을 때, 그가 가장 신앙하는 그 진리가 (내면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그것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다음에, 그리고 끝에는 확신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며,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함께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진리가 참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라면, 그것이 마음의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 진리가 선이 없는 진리, 즉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마음 한복판에 자리 잡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이해하기만 할 뿐 그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라고 하는 애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욕망이나 자아에 속한 것들이 마음 한복판에 있다면, 그것을 밀어내고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가 있는 신앙을 그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 아주 사소한 습관부터 고쳐나가야 합니다. 사소한 습관들이 주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질 때, 그것과 연결된 많은 것들이 거룩하게 변하며, 그렇게 해서 거듭남의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상응을 통해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영광과 능력으로 오신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이 말씀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라고요. 그냥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좀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통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신앙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마치 유대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정결 의식의 의미가 내적인 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적인 것으로 바꿔 그것으로 교인들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잘못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능히 거듭남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아주 작은 악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큰 악도 끊게 하십니다. 아주 작은 선부터 행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눅21:28)

 

아멘

 

 

 

2022-09-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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