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오시는 날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
아멘
2023-12-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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