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의 예언 (2)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76-80)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누가복음 1장 76절에서 8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사가랴의 예언 나머지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는 글자의 뜻으로 보면 침례(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의 아버지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선택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 같은 사람이고요,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택하신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 본래 ‘침례(浸禮) 요한’이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 요한’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전엔 ‘밥티조’, 곧 ‘침례’가 맞습니다.

 

말씀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1)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계시를 받는 사람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속뜻으로 보면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나타냅니다.

 

※ 각 이름마다 그에 상응하는 속뜻이 있는데요, 가령, ‘베드로’(Peter)는 신앙(faith)을, ‘야고보’(James)는 체어리티(charity)를, 그리고 ‘요한’(John)은 체어리티의 선이나 사랑의 선을 상응, 표상하는 식입니다.

 

※ 아래 글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 관련, 매우 참신한 내용이라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새로운 말씀을 계시받는 사가랴 역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가랴가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1:5-8)

 

위 본문에서 그를 의인 또는 제사장이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의인이나 제사장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가랴가 오늘 예언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선택되어 말씀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이웃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가랴가 예언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구하시고, 그러므로 그들이 성결과 의로 주님을 섬기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계속되는 예언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할 한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가랴가 낳은 아이 요한, 즉 새로운 말씀입니다. 본문 76절입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이 아이는 물론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요한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했고, 그가 먼저 세상에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상적인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것에 대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로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1-27)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주님이시며, 자신은 그저 주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을 가장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이신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표상하는 것은 그가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는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말씀에서 털이나 메뚜기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의 뜻으로서,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털이나 피부는 사람의 가장 바깥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요한은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로 표현된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면 꿀은 무엇일까요? 꿀은 말씀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과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외적인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기쁨이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내적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적인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주님으로부터 평화가 오고, 안정감이 오고, 그리고 자유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은 ‘천국의 비밀’ 8028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오려고 할 때, 먼저 한 영을 보내 길을 준비하는 것은 천국의 질서이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질서이다.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권고하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천사들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순철 역) From this it could be seen how the case is with the order in heaven, and from this in the world; namely that when angels are about to come, a spirit is sent before to prepare the way, and that he excites fear, and gives admonition to receive the angels courteously; (AC.8028)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아니면 천사들을 통해 오실 때, 그때 어떤 영을 보내 주님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그런 질서를 만드셨을까요?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면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전하는 진리의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크나큰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 요한, 즉 말씀을 세상에 먼저 보내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함부로 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4장 5,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주님은 인간이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시는, 그런 악한 신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주님에 대해 악을 행함으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셔서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 한 것은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요한과 엘리야는 모두 말씀으로서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77절입니다.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보통 말씀에서는 ‘백성’과 ‘나라’라는 말을 함께 사용합니다. ‘백성’은 진리를, ‘나라’는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의 역할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주님을 믿도록, 주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원본의 ‘믿음’을 가급적 ‘신앙’으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저작들을 보아도 대부분 ‘faith’를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음’ 하면 왠지 ‘오직 믿음’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는 ‘믿음’을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원본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1)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거듭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안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가 흘러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은 사랑이나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나라라 하지 않고,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라’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 진리이지만, ‘성령과 불’은 거기에 담기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 않고,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지식을 알게 한다’라고 했는데요, 이 ‘구원의 지식’(the knowledge of salvation)이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 위 77절 영어 번역은, to give the knowledge of salvation to His people for the forgiveness of their sins, 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의 핵심인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생활 속에서도 늘 부정한 것을 물로 씻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죄라는 게 물로 씻어지듯 순식간에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저 유대교회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만으로도 죄가 씻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임종 시,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 그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저 유대인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은 신앙의 고백만으로는 절대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말씀에서 진리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은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천국의 비밀’ 5398번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까닭은, 그들이 죄 사함과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죄는 순간적으로 씻어진다고 믿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물로 몸의 더러운 것이 씻어지듯 그들도 그렇게 씻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사람은 신앙만으로, 그리고 순간의 확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죄는 어떤 방법으로도 씻기지 않으며,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 가운데 있을 때 떨어져 나가거나 거절되어 한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기승을 부리지 못할 뿐이다. 계속해서 악을 내쳐야 한다.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they who are of the church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that it is scarcely anything. They do not even know that regeneration goes on through the whole course of life of one who is being regenerated, and that it is continued in the other life; or that the arcana of regeneration are so innumerable that scarcely a ten thousandth part of them can be known by the angels, and that those they do know are what effect their intelligence and wisdom. The reason why they who are of the church at this day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is that they talk so much about remission of sins and about justification, and believe that sins are remitted in a moment, and some that they are wiped away like filth from the body by water, and that man is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the confidence of a single moment. The reason why the men of the church so believe is that they do not know what sin or evil is. If they knew this, they would know that sins can by no means be wiped away from anyone, but that when the man is kept in good by the Lord they are separated or rejected to the sides so as not to rise up, and that this cannot be effected unless evil is continually cast out, and this by means which are unlimited in number, and for the most part unutterable. (AC.5398)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만으로 순간적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악의 유혹을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중심에 있던 악들이 옆으로 밀려나 다시는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죄 사함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78, 79절에서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말합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먼저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는데요, 바로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해는 주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곧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일으키시고 그들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앉아 있다’는 표현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지의 상태, 즉 그의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각 사람의 신앙 가운데로 오시기 전에는 그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을 말씀에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세요. 여기서 발은 사람의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자연적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화는 주님과 하나가 될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삶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고요,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쁨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을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자연적인 삶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천국의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80절입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사람들, 또는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는 그냥 요한이 장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말씀이 각자의 내면에서 신실한 신앙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신앙이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기 전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삶으로 옮기기 전에는 아직 이스라엘, 즉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교회가 아니라 빈 들, 그러니까 광야와 같다는 것이지요. 신앙의 지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진리는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과 오늘, 두 번에 걸쳐 사가랴의 예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은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고, 오리라 한 엘리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주님을 표상했으며, 또한 요한 이후에는 다시는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오셔서 구원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요한이 만들어 놓은 길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아직 요한의 가르침 아래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 아직도 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듭남의 상태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아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요한의 때가 물러가고 주님의 때가 열립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32:15-16)

 

아멘

 

원본

2016-07-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3(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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