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주님이 말씀하심인가 (2024/11/28)

 

제가 가끔(?) 보내드리는 글에 대하여 굳이 이단 대하듯 마음 문을 철컹 닫아걸고 경계하시며, 불편해들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혹시 주님이 말씀하심인가 하시며, 마음을 넓히시길 권합니다. 우리 인생에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이런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틀어막는 행위는 본의 아니게 주님을 제한하실 수 있어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 제가 보내드리는 글은,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의 영 얘기를 한다고 무슨 경계하고 피하고 하지 않는 것처럼, 네, 딱 그렇게만 생각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도저히 와닿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걸 잘 아는 우리이기 때문인데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 또한 영과 육으로, 그러니까 겉뜻과 속뜻,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음을 저는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주님이 주시는 부담 때문이기도 하고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어온 우리는 내적 존재인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신체, 몸에 대해서는 나름 지식이 있지만, 영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무지한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도 그 내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속 사람의 상태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이럴 때, 우리 안에 천국이, 그러니까 주님이 임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냥 제 글은, 말씀을 영으로도 읽을 수 있구나, 즉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도 읽는구나 정도로만 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힘드시면 말입니다. 괜히 제 글로 시험에 드실 필요는 절대로들 없으십니다. 여기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도 읽는구나’에 대해서는 아래글을 참고하세요.

 

 

말씀을 천사들처럼 읽을 수 있으려면 (2024/11/19)

말씀을 천사들처럼 읽을 수 있으려면 (2024/11/19)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속, 영) 존재들이어서 우리가 읽는 이 말씀(The Word, 성경 66권 중 그 안에 속뜻, 즉 아르카나가 담긴 성경들)도 우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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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감사한 것은, 점점 더 많은 분의 마음이 오픈, 그러니까 좌우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말씀에 겉뜻이 있는 것처럼 속뜻도 있었구나!’ 하신다는 것이지요. 참 감사하지요.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입니다.

 

네, 아멘, 주님을 사랑하오며,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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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창6:1-2) (2024/11/27)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1-2)

 

이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조금은(?) 알쏭달쏭한 표현입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말씀을 먼저 좀 드리고, 이어 ‘백이십 년’(a hundred and twenty years) 및 ‘네피림’(the Nephilim)에 관하여도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창세기 6장, 특히 1절로 8절은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요약, 정리되고 있는 아담 교회, 곧 아담(man)으로부터 시작,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그리고 라멕(Lamech)을 끝으로 하는, 인류 첫 번째 교회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홍수로 표현된 큰 시프트(shift)를 통해 마감되고, 이후 노아(Noah) 교회, 곧 인류 두 번째 교회인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가 일어납니다.

 

아, 참고로 늘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아브람 등장 전까지는 등장하는 이름들이 어느 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 그 시절 존재했던, 그리고 주도적이었던 교회, 즉 교리를,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고대에는 이런 식의 스토리 텔링, 즉 의인화를 통한 드라마 기법 스피칭을 아주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선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이야기 #4, ‘말씀(the Word) 서술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2021/11/22)

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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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의인화 관련, 재미있는(?) 예로, 창3:26,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에 나오는 그룹들’(cherubim)을 들 수 있는데요, 겉 글자의 뜻에 익숙한 우리는 그룹들을 다른 좀 특별한 천사들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룹은 사실은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 곧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그래서 다시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상태로 돌아간, 그런 인간이 더 이상 거룩한 주님 신앙과 관련된 것들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걸 일체 금하시는, 그래서 비록 안타까운 상태로 돌아갔지만, 더 악화되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하며, 그것을 이렇게 아주 멋지게 의인화하여 표현하신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그저 관련 글을 읽고, 여러 해 고민, 그리고 살짝 ‘아, 이런 건가?’ 체험한 걸 가지고 말씀드리는데요, 이마저도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을 향한 내면의 창을 활짝 여는 사람들한테는 즉시 이 퍼셉션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시라는, 참으로 감사한 글에 힘입어 주님의 붙드심 가운데 어린아이같이 구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오늘 글은 퍼셉션 관련 글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살짝만(?) 말씀드리면,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퍼셉션을 많이 받는 천사일수록 그는 주님의 신성을 더욱 내적으로 이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주님의 신적 선에 특화된, 그러니까 주님의 신성을 이루는 두 가지인 선과 진리 중 선에 더 끌리는 천사들을 삼층천, 곧 천적(celestial) 천사, 진리에 더 끌리는 천사를 이층천, 곧 영적(spiritual) 천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뭐가 궁금해서 주님께 구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여러 번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용서를 구해야 할 분이 계시는데요, 지금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과거 어느 세미나, 아마 그 주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강사는 일상의 모든 것, 심지어 아침에 오늘은 어떤 넥타이를 맬까요? 하는 것까지도 주님께 물어 맨다고 하더군요. 한 이십 년 된 기억인데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런 그의 강의가 매우 거슬렸고, 맘에 안 들어 끝내 끝에 가서 무슨 말 한 마디를 하는 바람에 전체적인 강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아마도 이런 퍼셉션이 이미 가능하셨던, 내면이 천국을 향해 활짝 열렸던 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말 그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고 생각나신다면,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길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렐루야! 지금까지 인류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를 지나가고 있으며, 그 각각, 또 그 안에 수많은 교회가 부침(浮沈)을 거듭했는데요, 그 가운데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교회가 바로 태고교회의 첫 출발인 아담(man)이라는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도 천국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인데요, 그때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으며, 주님도 자주 지상에 오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마치 천국에서처럼 말입니다!

 

아, 참고로 주님은 사람 따로, 천사 따로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천사는 천사가 되기 이전에 지상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주님 자신, 먼저 참 사람(The Man)이신 주님은 심지어 천국 전체도 사람 모습(The Grand Man)으로 지으셨고, 천국 내 수많은 공동체들 역시 멀리서 보면 사람 모습인데요, 이런 주님이 굳이 사람 아닌 제 삼의 무엇을 지으실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다. 지옥의 악령들 역시 모두 생전에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아래 책, 천국과 지옥에 자세히,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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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63장으로 구성된 제목들 중 이와 관련된 앞부분 제목들만 조금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2장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3장 천국 안의 주님의 신성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In Heaven the Divine of the Lord Is Love to Him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5장 세 천국이 있다 There Are Three Heavens


6장 천국은 무수한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The Heavens Consist of Innumerable Societies


7장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 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HH.59,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HH.59-67)

※ 천국의 총합이 한 사람의 모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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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HH.68,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HH.68-72)

※ 나는 천국의 각 공동체가 한 사람인 것을 자주 보았다. 9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68나는 천국의 각 공동체가 한 사람인 것을 자주 보았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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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 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HH.73,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HH.73-77)

※ 앞의 두 가름에서,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각 공동체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각 천사도 이와 똑같다는 것은 거기 설명한 원리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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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HH.78,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HH.78-86)

※ 천국이 전체와 부분에 있어 사람의 모습인 것이 주님의 신적 인성(the Lord’s Divine human)에 기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에 따르는 결론이다. 11천국이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사람 모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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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주제와 관련되는 장들만 위와 같이 링크를 연결했습니다. 혹시 종이책이 없지만 당장 좀 읽어보고픈 분들은 이렇게라도 내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어쨌든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듯 태고교회 역시 뒤로 갈수록 그들의 선조와는 달리 각 교회의, 이 퍼셉션 수용 능력이 약화되다가 거의 소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이 창세기 6장 1절로 8절 상태인 것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거의 늘 항상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charity toward the neighbor)보다는 자아 사랑(love of self),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에 더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 즉 신앙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갈수록 지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가인처럼 말입니다. 아벨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교회였지만, 가인은 분리를 추구하는 교회였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건 그때 교회의 상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홍수 전 상태 또한 이랬는데요, 이때는 창세기 3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그래도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이 남아 있었지만, 이 6장 홍수 전 교회에는,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들 하나 하나에게는 이것이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인데요, 이 리메인스에 관해서는 요 다음 글인 ‘백이십 년’에서 충분히(?) 다룰 예정입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교회,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은밀히 보관해 오고 계시는, 주님의 신성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우리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도 이 리메인스의 유무입니다. 사람이, 그리고 교회가 아무리 악하여 황폐해져도 이것만 남아 있으면 주님이 좀 어떻게 해보실 수가 있는데, 이마저도 없어지면 그때가 바로 개인으로서도 끝이요, 교회적으로도 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후 지옥 가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 리메인스가 소멸된 상태였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지요. 앞에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 네 번째 교회 시대인 기독교회 시대라는 것은, 앞서 세 번의 종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인류가 늘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고, 매번 각 교회 시대의 종말 때마다 소위 이 리메인스의 역할을 하는 교회들을 준비하셔서 다음번 새 교회 시대를 일으키곤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 ‘남은 그루터기’, ‘십일조’, ‘소돔과 고모라 의인 열 명’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된 것들이며, 6장 후반 노아 역시 그 시대의 리메인스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제목인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배경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만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과 관련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그리고 ‘사람의 딸들’은 거의 욕망이 되어버린 갈망(yearnings)을 말합니다.

 

태고인들은 그들이 지각하는, 즉 퍼셉션으로 아는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을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이라 하였습니다.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그러니까 지상에 교회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태고교회, 그중에서도 주님이 안식하실 수 있으셨던 ‘일곱째 날’이었으며,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이었던 이 아담 교회 이후, 셋, 에노스를 거쳐 후대로 갈수록 점점 주님 사랑보다는 자아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는 세상 사랑으로 더 기울더니 급기야 마지막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안에 주님의 것인 이 리메인스가 있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이것이 없게 되면, 겉은 사람 모습이어도 결코 사람이라 할 수 없는데, 이때, 즉 이 홍수 전 시대가 바로 이런 상태였으며, 또 그 시절엔 인류가 주님과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어 주님의 신성을 호흡하던 시대였는데, 그 호흡에 필요한 퍼셉션이 흐릿, 희미, 거의 희박해지는 바람에, 홍수 전 인류, 곧 교회가 주님의 신성에 대해, 그러니까 무엇이 주님의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 없는, 거의 질식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또한 사람입니다.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은 사람의 의지 안으로는 직접 들어가시고, 사람의 이해 안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온전한 상태인 게 정말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고교회의 끝에 가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소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도 더 이상 의지가 아니요, 사람의 이해 역시 더 이상 이해가 아닌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홍수 전 사람들은 ‘이건 내 의지야’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 욕망에 가까운 갈망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더럽다’(filthy)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출발이 주님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곧 자기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매 교회 시대마다 갈수록 사람들의 상태, 곧 교회의 상태가 이렇게 되며, 이렇게 그 의지가 고장 나 버린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니까 창6:1, 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의 속뜻, 그 아르카나(arcana)는, 그 시절 존재하던 세상 모든 교회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멀어져 주님의 선과 진리 대신 더러운 것들을 갈망하는 욕망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주님 신앙에 관련된 모든 교리적인 것들, 곧 주님의 거룩한 것들을 자신들의 더러운 갈망과 결합(conjoin)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뭘 의도하든 모두 악했다는 말씀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5)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상태, 완전 맛이 간 상태를 ‘네피림’이라 하는데, ‘백이십 년’과 함께 곧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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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아멘

 

2023-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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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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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천사들처럼 읽을 수 있으려면 (2024/11/19)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속, 영) 존재들이어서 우리가 읽는 이 말씀(The Word, 성경 66권 중 그 안에 속뜻, 즉 아르카나가 담긴 성경들)도 우리처럼 외적(外的, external, 겉, 육)으로 읽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읽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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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신의 외모는 평생 보아오고 있어 잘 알지만, 자신의 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잘 모르듯,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겉 글자만 평생 읽어 왔지, 말씀의 영, 곧 말씀의 겉 글자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秘義)는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 거의 모르지요.

 

그러면 왜 천사들처럼 말씀을 읽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사후(死後), 이어질 삶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민을 앞둔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요, 다른 나라로 살러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일에 계속 목숨 걸기보다는 앞으로 가서 살게 될 나라를 더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떠나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계속 병행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겁니다.

 

그래서 천국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읽나 알아보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도 부지런히 그들처럼 말씀 읽는 법을 익혀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천국에 대해, 먼저 어떻게 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미리 준비할 수 있으면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무래도 아직 못 가 본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 주님의 허락으로 미리 가 본 사람이 전하는 그곳 현지 생생한 소식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 곧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마지막 때에 이 모든 걸 삼백 년 전에 미리 준비하셨다는 사실!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사람이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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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님의 섭리로 스베덴보리를 한 지 어느덧 7년 된 지금, 제가 깊이 느끼는 한 가지는, 이 길을 수십 년 전부터 앞서가신 분들이 전하시는 말씀처럼 이 계시, 이 가르침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정말 어렵습니다. 육체 안에서 평생 겉의 삶, 외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내적 존재인 천사들의 말이 선뜻 와닿을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내적’이라는 게 어떤 건지 가늠이 되시나요? 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심지어 저는 이 길을 걷기 전, 주님의 섭리로 몇 번의 영적 체험 및 수도원 공부를 먼저 여러 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위 ‘입문’(入門)을 위한 순서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 순서는 사실은 주님이 저를 이끄신 순서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먼저는, 저는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래 책인데요,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평들이 분분합니다만, 저는 단지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알기 위해서 읽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글 내용이 너무 이상, 도저히 더 진도를 나가기가 꺼려져 그냥 멈추고 쓰레기통에 던질까 했던 적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주님의 이끄심이면...’ 하면서, 그러니까 주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면서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물 | 스베덴보리 - 교보문고

위대한 선물 | 스웨덴 태생의 신비적 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47세에 심력적 체험을 겪은 후 하늘의 소명을 받고 신비적 신학자로 전향하여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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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이 책 관련 댓글들에 대해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작성한 글인데, 혹시 시간 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2024/3/16) 다음은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검색한 책, ‘위대한 선물’(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에 달린 후기들에 대한 통계인데요, 총 48개의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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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러 번!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 주께서 마지막 날(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에 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 HH : Heaven and Hell ※ 본 번역은 김은경 역입니다. 단, 주석들은 원 John C. Ager 주석들이며, 저의 번역입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혹시 종이책이 필요하시면, 아래로 가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김은경 역을 추천하는 이유는 제가 이 번역으로 읽었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여러 번역 중 저한테는 이게 제일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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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꼭 좀 당부드리고픈 것은, 이 책을 읽으실 때마다 문장 문장, 쉬지 말고 주님의 빛 비추심을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천국에 관한 기록들, 소식과 사실들은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의 빛, 곧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리딩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와 너무나 달라 당혹스러우실 꺼라는 말씀부터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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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위 두 번째 책은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기를 한글과 영어로 대략 열 번 이상은 한 것 같고, 세 번째 책은 창3까지는 번역을 끝냈고, 창4부터는 일단 리딩부터 쭉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가지, 7년이나 되었음에도 겨우 요만큼 밖에 진도를 못 나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물론 다른 많은 저작 역시 병행하여 읽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Writings)은 아래 글에 가시면 접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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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번째, 세 번째는 둘 다 위 제 블로그에 올렸으니 우선은 그걸로 읽으시고, 나중에 책 제본 나오면 그때 종이책으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위 세 번째 책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번역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영어가 좀 되시면 그냥 영어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번역본의 경우, 분명 우리말임에도 정말 읽기가 어려운, 아주 초창기 수준 번역기를 돌렸나 싶을 정도여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하신 취지가 선하고 의로우시니 너무 저거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영역본은 요즘 나오는 여러 AI 번역기로 번역을 하셔도 이게 다분히 영서(靈書)라 좀 손이 많이 가실 겁니다. NCE(New Century Edition)라고 비교적 최신판도 있어 이 경우, 요즘 영어라 읽기는 쉬운데요, 거의 의역 수준이라 권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혹시 그래도... 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직접 연락하시면 받으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오랜 세월, 수십년간 이 길을 걸으시는 두 분 부부 장로님, 권사님의 정말 너무나도 귀한 걸작들, 더 나아가 귀한 번역 유산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BaysideChurch.org - 도서 구입 안내

도서 구입 안내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

baysidechurch.org

 

다음은 리딩 및 번역을 제가 어떻게 중도포기 안 하고 계속 할 수 있었을까를 몇 줄로 요약한 것입니다.

 

첫째, 처음엔 수도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 제가 이 사람의 글 읽는 것이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요? 제가 무슨 이단의 글을 읽는 건 아니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저를 말려주시고, 이 길로부터 저를 지켜 보호하여 주세요...’ 하는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만큼 충격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말씀을 겉 글자가 아닌, 거기 담긴 영으로 읽는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둘째, 계시(啓示)는 내면이 열리는 만큼만 보입니다. 계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데, 그럴려면 내면이 열려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한번은 주님이 맹인을 고치실 때, 그가 단번에 낫지 않아 다시 안수하신 후라야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창세기 처음 세 장을 한 일곱 번 정도 번역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머리 신앙의 사람, 내면의 열림이 매우 더딘 사람이었답니다.

 

셋째, 이 길을 걸은 지 7년, 제게 가장 큰 보람과 상급, 영광과 감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거의 마치 천사들처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퍼셉션(perception,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지금도 천국 주님과 천사들 사이 사용하는 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 주님의 신성을 지각할 수 있는 역량)을 나름 아직은 좀 일반적이지만, 아니 매우 여전히 투박하지만,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영적 역량의 회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The Divine)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정말 확실히, 투명하게, 천사들처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습으로 얻는 게 아닌, 주님이 거저 주시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 외에도 많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저는 7년을 한결같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매일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길을 걸으며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그럼에도 여러분, 천사들처럼 말씀을 영으로, 즉 속뜻으로 읽는 법을 익혀 다시 오실, 사실은 말씀의 속뜻으로 이미 오신, 주님의 새 교회, 계시록 주님의 새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말씀을 겉 글자로 읽는 것이 무슨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아직 내면이 열리지 않아 지상의 언어로밖에는, 기록된 겉 글자로밖에는 읽을 수 없는 99.99%의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말씀을 가까이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시니까요! 겉 글자는 그릇이요, 속뜻은 거기 담기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신령한 것을 아무 그릇에나 담는 분이 아니심을 생각할 때, 그만큼 그릇 역할을 하는 이 겉 글자 또한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주님을 향한 애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겉 글자로도 충분히 일상에서 선을 행하며, 그로 말미암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 즉 그러면서 서서히 내면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 되면, 덩달아 속뜻을 보는 눈, 곧 영안이 열리며, 주님의 말씀을 천사들처럼 읽고픈 소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이지요!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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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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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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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언어 생활에서 하기 (2024/11/15)

 

언제인진 정확히 잘 모르겠는데... 어느 날 이 생각, 곧 언어 생활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하며, 깊이 고민 중에 불쑥 다음과 같은 내적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어라. 물론 사랑 안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드리는 게 참 사랑이요, 참 신앙고백임을 알겠고, 가족을 포함한 이웃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그들의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라면 하실 법한 말을 해주는 게 이웃 사랑임을 알겠더군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모를 때에도 잠깐 주님께 마음을 모으면 과연 해야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심을, 그리고 그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통해 상황이 놀랍게 달라지고 정돈되는 걸 여러 번, 지금도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흡사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하고도 연결이 되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 사랑, 이웃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것은 이웃 사랑, 자기가 하고픈 말을 하는 건 자기 사랑, 세상이 듣고픈 말을 하는 건 세상 사랑...

 

아무리 내 생각에 지금 이 말은 저 사람에게 꼭 필요해 싶더라도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오히려 주님의 진리인 말씀이 모독을 당할 수 있으니 주의,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주님은 입을 열지 말 것을, 대신 그 상태에서 상대방이 듣기 원하는 말, 곧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말할 것을 명하셨고, 지나고 보면 과연 그러길 잘했다 싶었던 때가 많습니다. 주님도 아시지요. 그러나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맞는 말이고, 귀한 권면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면 오히려 그에게 상처가 되며, 더 나아가 폭언, 폭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천국도 우리는 일층천 갈 바엔 이층천을, 이층천 갈 바엔 삼층천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러나 고작(?) 일층천까지만 그 내면이 열린 사람한테 덜컥 이층천 입장을 허락, 그로 하여금 좋다고 이층천에 들어서게 하면, 그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보이고 숨이 막히며 머리가 깨질 듯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얼른 뛰쳐나와 다시 자신의 천국인 일층천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이층천엔 일층천보다 더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그의 내면이 일층천까지만 열려 있기 때문에, 이층천을 볼 수도, 이층천 지혜를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삼층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당 천국은 그에 해당하는 단계의 내면이 열려야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맞추시며, 우리를 안 아프게 주님께로 구부리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의 속뜻처럼 말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의 속뜻 (2024/2/4)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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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어떤 면에서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 섭리와도 연결이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 (2024/10/30)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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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없음)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눅23:13-25)

 

 

헤롯에게 보냈던 예수를 그러나 헤롯이 다시 자기에게 돌려보내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그리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4절로 16절 말씀입니다.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대제사장과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모두 일종의 왕이고, 왕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총독 빌라도, 그리고 헤롯 왕은 당시 유대인들을 자연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 등급)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은 교회에 속한 진리를 나타내고, 빌라도는 세상의 법을, 헤롯 왕은 이방 종교의 진리나 도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진리가 여러 등차로 존재하는 것과 관련, ‘계시록 해설’ 351번 글의 2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흘러나온다. 즉 말씀으로부터 중심이 되는 빛이 나와 주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간다. (AE.351:2,이순철 역) The light of heaven, or the light in which are the angels of heaven who are from this earth, is from the Lord by means of the Word; from this as from a center light is diffused into the circumferences in every direction, thus to those who are there, who, as was said, are the Gentiles that are outside of our church. (AE.351:2)

 

그러니까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말씀이 있는 교회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종교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세상의 법과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식으로 각 사람에게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갖고 있는 교회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말씀을 마음대로 조작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교회의 말씀 가운데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 곳곳으로 연결된 진리의 통로 또한 막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교회로부터 배척당하시고, 그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핍박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진리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장 높은 진리인 교회의 진리가 가장 낮고 비천한 진리가 되고,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의 법이 가장 높은 진리가 되어 진리의 질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로 오신 주님을 지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하고, 세상의 법과 도덕을 표상하는 빌라도와 헤롯이 오히려 주님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때리는 것’은 교회, 곧 유대인의 생각대로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때려서 놓아주겠다’라는 건 진리를 아주 없애버리지는 않고, 그들 입맛에 맞게 고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간혹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객관적으로는 분명한 진리임에도 불구, 그건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니 애초에 씨를 말려야 한다 주장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습니다. 그때 공정해야 할 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지요. 그리고 진리를 아주 없애지는 않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고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진리일지 모르나 세태에는 맞지 않으니 대중의 취향에 맞게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때려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과 19절에서 무리가 소리칩니다.

 

※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0명에 대제사장 포함,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무리를 유월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 전체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주님 당시 유대 유월절 관례 중 하나는 사형수 하나를 풀어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빌라도는 이를 이용, 주님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 잣대로 심판한다는 게 내심 찜찜하기도 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며, 그의 아내가 이른 아침, 급히 사람을 보내 이 예수라는 사람은 의인이니 그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그로 인해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가장 낮은 세상 법으로 가장 높은 신성한 법을 심판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직감적으로 안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때려 놓아주면 어떻겠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며, 무리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주님 당시 아람어 ‘바르아빠’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아들’이란 영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선,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바는 그 반대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악의적인 거짓이 바로 바라바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건 참된 교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속뜻으로 성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민란이나 살인은 교리를 왜곡하는 짓, 이를테면 참된 교리로부터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빼고, 믿음만 남겨 놓는 것입니다. 믿음, 즉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며, 중요한 건 거기 담기는 내용, 즉 체어리티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민란이며, 바라바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을 없애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 하는 것은 말세에 부패한 교회들이 체어리티의 교리를 없애고,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구원의 진리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지성이 마비될 때, 대중은 정의를 거짓으로 몰아 핍박하고, 반대로 거짓을 정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추앙합니다.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것이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는 일입니다.

 

※ 2024년 11월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이재명을 가장 선호하는 것과, 그리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좌파 성향을 보이는 걸 보면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와 그 실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빌라도는 계속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것을 21절과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세상의 법으로 교회의 진리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치는 않으나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4세기 초인 325년에 니케아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의 별궁인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파를 교회에서 축출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후, 로마 황제가 교회의 일에 관여했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교회의 비진리를 단죄한 사건이었고, 비교적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11세기 초인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로마의 황제와 가톨릭교회가 야합한 반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와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는 것 역시 지극히 반 지성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로 상징되는 참된 진리를 말살하는 게 옳지 않다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라며 무리를 끝까지 설득했습니다. 본문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세 번 말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는 계속해서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23절에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말합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함으로써 참된 진리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죽여 없애길 원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풀어주고, 주님을 그들에게 넘겨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리는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는 모든 교회가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만의 신앙, ‘오직 믿음’ 신앙을 고집합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대교회가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 살리는 걸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949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만 있고 인애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성질이 까다롭고, 어떤 일도 참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고, 벌하려고 하며, 동정심이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굽힐 궁리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을 선으로부터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AC.1949:2, 창16:12, 이순철 역) The man whose rationa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s solely in truth—even though it be the truth of faith—and who is not at the same time in the good of charity, is altogether of such a character. He is a morose man, will bear nothing, is against all, regards everybody as being in falsity, is ready to rebuke, to chastise, and to punish; has no pity, and does not apply or adapt himself to others and study to bend their minds; for he looks at everything from truth, and at nothing from good. (AC.1949:2)

 

이 구절을 읽으며 이건 나의 모습인데...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태에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두 가지 합리성(rational)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위 내용은 첫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때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고, 오직 진리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두 번째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은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합리성입니다. 말씀에서는 전자의 합리성을 들나귀(창16:12), 또는 이스마엘로 표현하고, 후자의 진정한 합리성을 이삭으로 표현합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삭으로 표현되는, 지혜로우면서도 따뜻한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 신앙을 버리면 햇볕이 들지 않는 방처럼, 또는 주님을 죽인 유대인들처럼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질 것입니다.

 

※ 오늘날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오직 믿음’(Faith Alone)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저렇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려서는 개신교 장로교회 통합측, 커서는 개신교 침례교회에 속해서 나름 개신교를 경험했지만, 대부분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 몇 %, 신앙, 그러니까 교리 몇 % 식으로 구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저 정도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 당시 여전히 문제가 많은 교황파 사람들 중 리더십들 내지는 개혁교회 내 소수의 극단적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확실한 건,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도 사실 얼음장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런 게 무슨 신념이나 신조라고 한번 어긋난 사람은 다시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와 같은 입장이어야만 사랑하는 그런 상황이지요. 타 종교는 물론, 심지어 같은 개신교, 같은 교파와 교단,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오직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참으로 숨 막히는 그런 곳이 바로 오늘 대한민국 개신교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한 걸 풀고,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용서와 화해, 양보와 물러남 등을 기꺼이 하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쉽지 않은,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내 ‘오직 믿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들의 현주소요, 진면목인 것입니다. 참 부끄럽지만, 오히려 타종교인들 중에 정감넘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록 그들에겐 참 진리, 곧 말씀이 없어 그 빛이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나 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알면서 범하기 때문에 더러워지지만,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더러워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양상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진리의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 질서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대안은 계시록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예언된 마지막 교회의 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진리로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얼음장 같은 이 사회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새 교회로부터 불길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렘14:22)

 

아멘

 

2023-02-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0.43MB
축도.2024-11-10(D1)-주일예배(2569, 눅23,13-25), '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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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에녹(Enoch)은 아담(사람, man)부터 시작, 일곱 번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입니다. 태고교회 첫 번째 교회인 아담부터 셋, 에노스까지, 이 세 교회는 비유하자면, 태고교회라는 방 전체를 한 가운데서 환히 비추는 등과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핵은 첫 번째 교회인 아담이지요.

 

비록 등이 한 가운데서 방을 비추지만 둘레로, 주변으로 갈수록 흐릿, 어두워지는 것처럼 태고교회도 후대로 갈수록 그렇게 어두워지다가 끝에 가서는 홍수로 종말을 고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와 홍수, 그리고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잇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지만, 그러나 태고교회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퍼셉션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첫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던 중 끝에서 두 번째인 이 에녹에 대하여, 평소 우리가 알던 그 경건해(?) 보이는 겉뜻과는 많이 다른, 그 속뜻을 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읽는 에녹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지금은 거의 이해 불가한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던 때였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연결되게 하셨으므로, 태고교회가 어두워져 간다는 건, 점점 그 퍼셉션이 희미해져 간다는, 그러므로 서서히 무언가로 그걸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두 가지, 그러니까 주님 음성을 직접 듣는 방법과, 잘 정돈된 교리를 학습하여 듣는 간접 방법이 있는데, 얼핏 느껴지시는 대로, 이 둘은 그 근본이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퍼셉션, 내적 음성으로 아는 것이고, 후자는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하여 삼층천을 이루고, 후자는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이층천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 일곱 번째 후손인 에녹 정도 되자, 아직 주님 음성 듣는 퍼셉션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너무 희미해져서, 두루뭉술 일반적으로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알쏭달쏭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고, 이쯤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 그동안 퍼셉션으로 알던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를 글로 정돈, 교리화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짓(?)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에녹이라는 교회입니다. 위 본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To walk with God)라는 표현들의 속뜻이 바로 이겁니다.

 

나름 필요에 의해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퍼셉션으로만 사람들은 주님과 연결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들이 만든 교리를 주님은 이때는 사용을 금하시고, 나중을 위해 따로 보관하셔야 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의 속뜻입니다. 

 

인류는 곧 지금 태고교회처럼 하나님과 천사들 간 다이렉트로 하는 퍼셉션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홍수 후 주님은 대신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인 ‘양심’으로 주님과 연결되게 하셨고, 이후 인류는 퍼셉션이 아닌, 학습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를 위해 이 에녹이라는 교회가 수고하여 만든 교리를 따로 보관하신 것이지요.

 

어떠신가요? 말씀의 겉뜻과 그 속뜻이 참 다르지요?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번역을 하다가 좀 충격을 받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말씀이어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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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23:7-9)

 

이런 상황이 앞서도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였는데요, 다음은 그 본문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즉, 헤롯이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란 거’나 여기, 지키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한 거나 같은 건데요, 그러니까 창조주요, 모든 내적인 것(內的,  internal, 속)의 주되신 분을 육안으로 뵙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저 내적인 걸 담는, 속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외적인 거(外的,  external, 겉), 여기서는 무슨 마술이나 신통력같이 좀 극단적으로 표현된, 이런 걸 추구하다가 그만 날려버린다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신앙생활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적의 유익은 분명합니다. 비록 내적 신앙에 대해 잘 모르셔도 그 본 바탕이 선하고 진실하신 분들은 그 구하는 외적인 것들의 기저에 이미 내적인 것들이 깔려있어 이런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고, 그것이 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이 정도가 무난한 신앙생활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내면이 열린 분들, 참으로 주님의 내적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분들은 보통은 기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우리처럼 무슨 금식기도나 철야기도, 산기도, 대적기도, 방언기도, 안수기도, 예언기도 및 치유기도 같은 걸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적 존재들이어서 주님 앞에 늘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터라 존재 자체가 늘 기도이며, 그래서 늘 능력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로 하여금 늘 주님을 향하게, 늘 자기 앞에 있어 주님의 현존을 경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런 내적 신앙이 뭔지 모르시면서, 그리고 나는 신앙인이다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깊게 가라앉아 저런 겉의 것들을 추구하시는 분들한테는 저런 기적과 이적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내적이신 주님, 가장 인모스트(inmost)하신 주님 대신 제법 그럴듯하신 주님을 찾게 만들기 때문인데요. 마치 그럴듯한 메시아를 구했던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기적과 관련된 우리 기도 중에 그 응답이 무응답이어서 어리둥절하신 분들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속 사람의 주이신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로,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나라, 곧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야 임하는 나라입니다. 주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2)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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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눅23:1-2)

 

일단 저들의 고발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 제목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는 하셨지 금하신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놓은 덫 때문에 할 수 없이 하신 말씀이시고요.

 

저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위 가짜 뉴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지금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죽이고는 싶은데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인 지금은 자기들한테는 사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성전 뜰 안으로 무단침입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마침 이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가 나왔으니 이 말씀의 속뜻, 그 내적 의미를 잠깐 살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이지요. 말씀에서 왕이나 황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세상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자연적 삶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는 하늘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영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늘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치 우리 육체가 영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또는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하신 이 말씀은 세상에서 세상 법도를 따라 자연적 삶을 살되 그 안에 하늘의 법, 곧 영적인 삶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둘의 조화를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법도를 따라 살되 반드시 그 안에 하늘의 법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택, 무슨 행위를 했으면, 그 이유와 동기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에서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중 진리 관련 호칭이고, ‘여호와는 선 관련 호칭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 관련, 1과 창2를 유심히 비교해 보세요. 거기 보면 창1에는 하나님만 나오는 반면, 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오는데요, 여기엔 정말 깊은 아르카나(라틴, Arcana, 秘義)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누지요.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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