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303. 사람은 그가 설득을 받은, 즉, 인정하고 믿는 모든 것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A man acquires a life by all the things he is persuaded of, that is, which he acknowledges and believes.

 

설득되지 않거나, 인정하고 믿지 않는 것으로는 사람은 마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That of which he is not persuaded, or does not acknowledge and believe, does not affect his mind.

 

그리고 그래서 사람은 설득을 받아 인정하고 있는 한, 그리고 아직 부인하지는 않고 있는 한, 아무도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And therefore no one can profane holy things unless he has been so persuaded of them that he acknowledges them, and yet denies them.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알면서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아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may know, but are as if they did not know, and are like those who know things that have no existence.

 

주님의 강림 시기에 유대인들의 모습이 저랬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저들을 가리켜 ‘황폐해졌다’, 혹은 ‘파괴되어 초토화되었다’, 즉, 더 이상 무슨 신앙이라는 게 없다 하는 것입니다. Such were the Jews abou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therefore they are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or “laid waste,” that is, to have no longer any faith.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말씀의 속 뜻들이 그들에게 오픈된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해를 받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보고 있으나 아직 못 보며, 듣고 있으나 아직 못 듣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꽉 막혀 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셨습니다.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does men no injury to have the interior contents of the Word opened to them, for they are as persons seeing, and yet not seeing; hearing, and yet not hearing; whose hearts are stopped up; of whom the Lord says in Isaiah: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사6:9-10)

 

사람들이 그런 상태, 즉, 너무나 황폐해져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믿는 상태(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모독할 수 없는)가 될 때까지 신앙의 신비들은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같은 이사야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아주 분명히 선포하고 계십니다. That the mysteries of faith are not revealed until men are in such a state, that is, are so vastated that they no longer believe (in order, as before said, that they may not be able to profane them),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the subsequent verses of the same prophet: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사6:12)

 

그를 일컬어 지혜로운, 혹은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He is called a “man” who is wise, or who acknowledges and believes.

 

유대인들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오셨을 때 그 정도로 황폐한 상태였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탐욕들, 특히 그들의 욕망, 허욕 때문에 그런 황폐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에 관해 수천번을 듣고, 또 그들의 교회의 여러 상징들이 그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다 주님을 가리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The Jews were thus vastated, as already said,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for the same reason they are still kept in such vastation by their cupidities, and especially by their avarice, that although they hear of the Lord a thousand times, and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re significative of him in every particular, yet they acknowledge and believe nothing.

 

이것이 노아 이전 사람들이 에덴 동산에서 내쫓기고,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진리도 인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지경까지 황폐해진 사유입니다. This then was the reason why the antediluvians wer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and vastated even until they were no longer capable of acknowledging any truth.

 

 

304. 이 모든 사실로부터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지는데요,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the words,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는 사랑과 신앙에 대해서 알되 얼마든지 시인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아는 걸 말합니다. ‘생명’이 이렇게 복수로 사용되면 사랑과 신앙을 뜻하며, 여기 ‘먹다’는 전에도 말씀드렸듯 ‘알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To “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is to know even so as to acknowledge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for “lives” in the plural denote love and faith, and to “eat” signifies here as before, to know.

 

영생하다’는 몸, 육체를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는 사후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To “live to eternity” is not to live in the body to eternity, but to live after death in eternal damnation.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몸의 생명, 육체의 생명이 다 한 후에는 죽기 때문이며, 그러나 그는 사후에도 계속해서 죽음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지옥같은 삶이며, 곧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A man who is “dead” is not so called because he is to die after the life of the body, but because he will live a life of death, for “death” is damnation and hell.

 

살다’라는 표현 역시 에스겔을 보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The expression to “live,” is used with a similar signification by Ezekiel: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겔13:18-19)

 

2021-05-08(D7)-창세기(창3,22, AC.303-304),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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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301. 다른 아케이나는,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밝히 알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것이 본문,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이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그동안 생명의 질서들하고는 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는 살아가는 것도, 지혜로워지는 것도 자기 자신들로만, 그리고 자신들의 고유 본성으로만 하려고 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에 대해 듣는 모든 것을 그게 과연 그런지 아닌지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들로 구성된 자신들의 고유 본성의 일들로부터 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부인하게 되고, 그 결과, 신성모독(神性冒瀆)과 불경(不敬)에 이르게 되며,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세속(世俗)에다가 거룩을 섞는 일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사람이 이 지경이 되면, 그는 저 세상에서 유죄 선고를 받아 구원을 받을 아무 희망도 남지 않게 됩니다.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그 이유는, 신성모독으로 섞인 것들은 그렇게 섞인 상태로 있게 되고, 그래서 어떤 거룩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 되어 있는 불경한 생각 또한 따라 나오게 되어, 그 결과, 그 사람은 지옥 말고는 그 어떤 데에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이렇게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을 섞는 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어떤 한 조각 생각을 하더라도, 저 세상에서는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되는데요, 바로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서,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에 의해서는 더욱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캐릭터 전체가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입니다.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이렇게 서로 묶여 있는 세속과 거룩 간 분리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데요, 사람이 이런 것을 깨닫고, 정말 지옥 자체를 피하듯 조심조심 신성모독을 피하려고 할 때만 이 둘의 분리는 일어납니다.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302. 이것이 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계시되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그들은 사람의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과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그들은 아주 대단할 정도로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고집스러웠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속 사람과, 혹은 내적인 일들의 존재에 관해 몰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부터 그걸 알았었거나 지금 알게 되어 그걸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기어코 그걸 신성모독하고, 그래서 기어코 저 세상에서 자기들 몫의 어떤 구원도 남겨 놓지 않을 그런 캐릭터들이기 때문입니다.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요12:40)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풀이 없이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안 그러면 그들이 보며, 들으며,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마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가 그들에게는 숨겨졌고, 그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들 속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또한 말씀도 예언적 스타일로 주신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그렇지만,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알고는 있는데 인정하지는 않는 사람은 마치 그걸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을 하고, 나중에 신성모독을 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의 의미입니다.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2021-05-07(D6)-창세기(창3,22, AC.301-302), '생명 나무를 가져다 먹고 영생하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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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298.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엔 단수로, 그리고 나중엔 복수로(in the plural number)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그 사람의 ‘선악을 아는 일’이 상징하는 것은, 그가 天人이 되었고, 그래서 지혜와 지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가 의미하는 것은, 그는 절대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밝아서는 안 되며, 만일 그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영원히 산다는 것’의 뜻입니다.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299. 여기엔 두 가지 아케이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과,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상징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밝히 알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Here are two arcana: first, that “Jehovah God” signifies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 secondly,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300. 첫 번째 아케이나인,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과,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의미한다는 것과 관련, 말씀에서는 늘 어떤 비밀스런 이유로, 주님을 어떨 때는 단지 ‘여호와’로만, 어떨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어떨 때는 ‘여호와’와 그리고 ‘하나님’으로, 어떨 때는 ‘주 여호와’로, 어떨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어떨 때는 ‘하나님’으로만 부릅니다. As regards the first arcanum—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it is to be observed that in the Word, always for a secret reason, the Lord is sometimes called merely “Jehovah,” sometimes “Jehovah God,” sometimes “Jehovah” and then “God,” sometimes the “Lord Jehovih,” sometimes the “God of Israel,” and sometimes “God” only.

 

그래서 창세기 첫 장, 거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는 데서 ‘하나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은, 天人을 다루는 다음 장부터입니다. Thu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where it is also said, in the plural,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he is called “God” only, and he is not called “Jehovah God” until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그는 ‘여호와’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그는 홀로 계시며, 혹은 사시고, 그래서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전능하시며, 그래서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런 구분들이 있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He is called “Jehovah” because he alone is or lives, thus from essence; and “God,” because he can do all things, thus from power; as is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is distinction is made. (사49:4, 5; 55:7; 시18:2, 28, 29, 31; 31:14)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사49:4-5)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18: 2, 28-29, 31)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14)

 

이런 이유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리고 어떤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천사나 영을 일컬어,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On this account every angel or spirit who spoke with man, and who was supposed to possess any power, was called “God,” as appears from David: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시82:1)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시89:6)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시136:2–3)

 

사람들도 능력을 소유했을 때는 그들을 일컬어 ‘신들’이라 합니다. Men also as being possessed of power are called “gods,” as in Ps. 82:6; John 10:34, 35.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10:34-35)

 

모세 또한 ‘바로에게 신’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Moses also is said to be “a god to Pharaoh.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이런 이유로,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엘로힘’이라는 복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word “God” in the Hebrew is in the plural number—“Elohim.

 

그러나 천사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그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자기들은 실제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고, 대신 힘이라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 하면 주님 홀로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But as the angels do not possess the least power of themselves, as indeed they acknowledge, but solely from the Lord, and as there is but one God, therefore by “Jehovah God” in the Word is meant the Lord alone.

 

그러나 천사들의 사역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가령 창세기 첫 장에서처럼, 그분은 복수로 표현되십니다. But where anything is effected by the ministry of angels, a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he is spoken of in the plural number.

 

여기서는 또한 天人이, 이 역시 사람인데요, 주님하고는 감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천사하고만 비교 가능한 존재, 즉,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즉, 지혜와 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Here also because the celestial man, as man, could not be put in comparison with the Lord, but with the angels only, it is sai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that is, is wise and intelligent.

 

2021-05-06(D5)-창세기(창3,22, AC.298-300), '‘여호와 하나님’이 상징하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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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296. 염소의 새끼들, 양, 염소들, 해달들과 숫양들이 영적, 자연적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야곱을 다룬 곳과, 또 궤를 다룬 곳의 속뜻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the skins of kids, sheep, goats, badgers, and ram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is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ere Jacob is treated of, and also where the ark is treated of.

 

야곱의 경우, ‘에서의 의복으로 옷 입혀졌고’, 그의 손과 목 매근매끈한 곳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입혔으며, 그리고 이삭이 그 향취를 맡았을 때, ‘내 아들의 향취는 밭의 향취로다’ 말하였다 하고 있습니다. Of Jacob it is said that he was “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and on his hands and on his neck, where he was naked, “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 and when Isaac smelled them, he said, “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해당 부분을 다룰 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3577번 글 참조)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een in that place.

 

궤의 경우는, 성막의 덮개는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Of the ark it is said that the covering of the tent was “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출36:19)

 

그리고 그들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증거궤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같은 식으로 상과 대접들, 등잔대와 그릇들, 금제단, 그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그릇들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and that when they set forward Aaron and his sons covered the ark with a covering “of badgers’ skins,” and likewise the table and its vessels, the candlestick and its vessels, the altar of gold, and the vessels of ministry and of the altar.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민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해당 부분에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증거궤, 성막, 혹은 장막 안에 있던 모든 것, 네, 아론이 거룩한 옷을 입었을 때, 그 옷 위에 있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천적, 영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 나름의 고유한 표현을 갖지 않은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will in that place also be seen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 for whatever was in the ark, the tabernacle, or the tent, yea, whatever was upon Aaron when clothed with the garments of holines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spiritual, so that there was not the least thing that had not its own representation.

 

 

297. 천적 선은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가장 내적이며, 천진(天眞)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영적 선은 옷을 입는 첫 번째 선이며, 다음은 자연적 선입니다. 이들은 더 외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이것으로 비유되며, 이런 선을 가리켜 ‘’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에서 고대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말이지요. Celestial good is not clothed, because it is inmost, and is innoce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is that which is first clothed, and then natural good, for these are more external, and on that account are compared to and are called “garments”; as in Ezekiel,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 and shod thee with badger, 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 and I covered thee with silk. (겔16:10)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Put on thy beautiful garments, 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 (사52:1)

 

계시록에서는 In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계3:4–5)

 

4장 4절에서도, ‘흰옷을 입은’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where it is likewise said of the four and twenty elders that they were “clothed in white raiment.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그래서 천적 영적인 더 외적인 선들은 ‘옷들’입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들이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서는 광채 나는 옷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이기 때문에, ‘가죽옷’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Thus the more external goods, which are celestial spiritual, and natural, are “garments”; wherefore also those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s of charity appear in heaven clothed in shining garments; but here, because still in the body, with a “coat of skin.

 

2021-05-05(D4)-창세기(창3,21, AC.296-297), '가죽, 옷'.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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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292. 이 말씀이 상징하는 것은 주님이 그들을 영적, 자연적 선으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가르치심이 ‘지어’, ‘입히시니라’로, 그리고 영적, 자연적 선이 ‘가죽옷’으로 표현되었습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293. 이런 상징들은 겉뜻으로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여기엔 어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294. ‘가죽옷’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사실 또한, 속뜻의 어떤 계시가 없으면, 그리고 말씀 내 유사한 표현들이 나오는 여러 이어지는 구절들을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분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가죽’이라는 일반적인 말이 여기 사용되었지만, 새끼염소, 양, 또는 숫양의 가죽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들 동물은 말씀에서는 선, 체어리티(charity, 慈善) 관련 어펙션(affection, 愛情)들을,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가령 희생 제사들에 사용되는 양이 상징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체어리티의 선, 즉, 영적, 자연적 선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다들 아시듯, 주님을 가리켜 ‘양들의 목자’시라 하고,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들을 그분의 ‘’이라 합니다.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으로 옷 입혀졌다’ 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innocence, 天眞爛漫)로, ‘벗은 채로 있는’(naked)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 이노센스를 잃어버린 후에는, 자기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발가벗음’(nakedness)이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태고인들의 스피킹 방식에 맞춰) 모든 일들이 상호 긴밀히 순서대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그들을 일컬어 ‘벗은 채로 있게 될까 봐 옷 입혀졌다’라고 합니다. 벗은 채로 있는 것은 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그들이 영적, 자연적 선 가운데 있음이 분명한 것은, 그들에 관하여 언급된 위 이 장 1절로 13절까지 내용을 보면,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는 내용이 연결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후손들을,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은 더 특별히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런 선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2021-05-04(D3)-창세기(창3,21, AC.292-295),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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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287. 여기 ‘아담’(사람, man, 라, homo)은 태고(太古)교회人, 혹은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의미하며, ‘아내’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the “man” [homo] is here meant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celestial man, and by the “wif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is meant the church.

 

그녀를 가리켜 ‘어머니’라 하는 이유는, 첫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She is called “mother,” as being the first church;

 

’(living)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and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288. ‘아담’이 태고교회인, 혹은 天人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드린 내용입니다. That by “man” is meant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celestial man, was previously shown;

 

그리고 동시에 주님 홀로 사람이시며, 모든 天人은 주님을 닮았기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 또한 보여드렸습니다. and at the same time it was also shown that the Lord alone is man, and that from him every celestial man is man, because in his likeness.

 

이런 이유로, 예외나 차별 없이 교회 내 모든 멤버를 가리켜 ‘사람’이라 하였고, 결국은 그 외모가 사람처럼 보이는 모든 사람한테까지 이 이름이 적용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짐승과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Hence every member of the church, without exception or distinction, was called a “man,” and at length this name was applied to anyone who in body appeared as a man, to distinguish him from beasts.

 

 

289. 또 위에서 이미 보여드린 것은, ‘아내’가 교회를 의미하며, 가장 광의(廣義)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It has also been shown above that by “wife” is meant the church, and in the universal sense the kingdom of the Lord in the heavens and on earth;

 

그리고 이런 사실로부터 ‘어머니’ 역시 같은 의미라는 사실 또한 따라 나옵니다. and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same is meant by “mother.

 

말씀에 보면, 교회를 가리켜 ‘어머니’라 하는 데가 무척 빈번하게 나옵니다.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In the Word the church is very frequently called “mother,” as in Isaiah: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 (사50: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 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 (렘50:12)

 

에스겔에서는: In Ezekiel: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 your mother was a Hittite, and your father an Amorite, (겔16:45)

 

여기 ‘남편’[vir]은 주님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where “man” [vir] denotes the Lord and all that is celestial;

 

자녀’는 신앙의 진리들을; sons,” the truths of faith;

 

’은 거짓된 것을: ‘아모리’는 악한 것을 가리킵니다. a “Hittite,” what is false: and an “Amorite,” what is evil.

 

같은 책에서: In the same:

 

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 planted near the waters; 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 (겔19:10)

 

여기 ‘어머니’는 고대교회를 가리킵니다. Here “mother” denotes the ancient church.

 

어머니’라는 말은 태고교회에 더 특별하게 쓰이는데요, 첫 교회였고, 천적이었던 유일한 교회였으며, 그래서 주님이 그 어떤 다른 교회보다도 더 사랑했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e term “mother” is more especially applicable to the most ancient church, because it was the first church, and the only one that was celestial, and therefore beloved by the Lord more than any other.

 

 

290. 그녀를 가리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였던 것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 신앙을 가진 결과라는 사실 또한 이미 지금까지 보여드린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That she was called the “mother of all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hown.

 

생명은 하나 이상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생명은 이 한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 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슨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과적으로 주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는 한, 생명 있는 신앙이라는 것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life, from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there can be no life, which is life, except through faith in the Lord, who is the life, nor can there be faith in which is life, except from him, consequently unless he is in it.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오직 주님 홀로 ‘살아 계신’으로 일컬음을 받으시고, 그리고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십니다. On this account, in the Word, the Lord alone is called “living,” and is named the “living Jehovah; (렘5:2; 12:16; 16:14, 15; 23:7; 겔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And though they say, Jehovah lives; still they promise falsely. (렘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And it shall be, 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 to promise by My name, Living Jehovah, 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 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 (렘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it shall no more be said,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but,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 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 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 (렘16:14-15)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렘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겔5:11)

 

영생하시는 이’로도; he that liveth to eternity; (단4:34; 계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단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계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계5:1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계10:6)

 

생명의 원천’으로도; the “fountain of life”; (시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시36:9)

 

생수의 근원’으로도 불리십니다.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렘17:13)

 

천국(주님에 의해 또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곳)을 가리켜 ‘산 자의 땅’이라 합니다. Heaven (which lives by or from him) is called the “land of the living. (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사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사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겔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겔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겔32:32)

 

그리고 주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And those are called “living”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시편에서처럼: as in David: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시66:9)

 

그리고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을 일컬어 ‘생명들의 책 안에’ 있다, ‘생명의 책 안에’ 있다 합니다. And those who possess faith are said to be “in the book of lives (시69:28), and “in the book of life. (계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시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계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계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계20:15)

 

그래서 또한 그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살리시며’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Wherefore also those who receive faith in him are said to be “made alive. (호6:2; 시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호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시85:6)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켜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On the other hand it follows that those who are not in faith are called “dead”;

 

이사야에 보면: as in Isaiah: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사26:14)

 

자아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말입니다; meaning those who are puffed up with the love of self;

 

다시 사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감을 상징합니다. to “rise again” signifies to enter into life.

 

그들은 또한 ‘칼에 죽임을 당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They are also said to be “pierced. (겔32:23–26, 28–31)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겔32:28-31)

 

그들은 또한 주님으로부터도 ‘죽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They are also called “dead” by the Lord. (마4:16; 요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마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요5:25)

 

21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요8:21, 24, 51, 52)

 

지옥도 ‘사망’이라 합니다. Hell also is called “death. (사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사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사28:15)

 

 

291. 이 절에서는 첫 시대를 설명하면서, 교회를 천국 결혼을 대표하는 젊음의 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일종의 결혼으로 묘사되며, 이름하여 ‘하와’(이브, Eve)라 하는데, 이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2021-05-03(D2)-창세기(창3,20, AC.287-291), '아담, 하와, 산 자의 어머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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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3:20-24

Genesis 3, verses 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0-24)

 

 

내용

THE CONTENTS

 

 

280. 태고(太古) 교회와, 사라진 사람들이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어집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 그 교회가 끝났을 때, 결국 홍수로 이어진 그 후손들을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281. 20절은, 천적(天的, celestial)이었던 태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 신앙의 생명으로 시작한 교회이며, 이 교회를 가리켜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하였습니다. (20절)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282. 21절은,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습니다; Of its first posterity, in which there was celestial spiritual good;

이어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 관해서는, 그들에게는 자연적 선이 있었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지으신 가죽옷’으로 상징하였습니다. (21절) and of its second and third, in which there was natural good, signified by 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verse 21)

 

 

 

283. 22절은, 네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자연적 선이 소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그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거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더라면, 그들은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을 텐데요,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의 의미가 이런 내용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284. 23절은, 다섯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후손에 이르러는 드디어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되었고, 그리고 거듭남 이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이런 내용입니다. (23절)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285. 24절은,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후손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했고, 그들의 본성에는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만 남았습니다;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in that they were deprived of all memory-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ere left to 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들로 말미암아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이 모독을 당할 것이기 때문인데요,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가 상징하는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24절) this being provid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which is signified by 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verse 24)

 

 

속뜻

THE INTERNAL SENSE

 

 

286. 이 장과 앞의 장들, 지금 보고 있는 이 절들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s, down to the verses now under consideration, tre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d of their regeneration;

먼저, 들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지요; first, of those who lived like wild animals, but at length became spiritual men;

그다음은, 천적 인간이 된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고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then of those who became celestial men, and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그 뒤에,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차례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과 홍수 때까지 이른 그들의 계승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afterwards of those who fell away, and their descendants, in regular order through the first, second, and third posterities and their successors, down to the flood.

이 장을 포함, 이어지는 절들을 통해, 태고 교회의 사람이 형성된 때부터 홍수 때까지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개요를 만나게 됩니다; In the verses following, which conclude the chapter, we have a recapitulation of what occurred from the period when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formed, until the flood;

즉, 이것이 앞서 다룬 모든 내용, 곧 창세기 맨 앞 첫 세 장의 결론입니다. thus it is a conclusion to all that goes before.

 

2021-05-02(D1)-창세기(창3,20-, AC.280-286), '창3 세 번째 단락 개요 및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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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창3:19)

 

 

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싫어하게 되었음을,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is signified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취함을 입은 그 흙으로 돌아감’은 거듭남 이전 상태였던 겉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각각 상징합니다. 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 is to relapse into the external man,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그가 정죄를 받고,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됨을 상징합니다. and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signifies that he is condemned and infernal.

 

 

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가 천적인 것을 싫어함에 관한 상징임은, ‘먹을 것’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ignifies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ead.

 

먹을 것’은 천사들의 양식인 영적, 천적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것이 없으면 천사들은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도 양식이 떨어지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By “bread” is meant everything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is the food of the angels, on the deprivation of which they would cease to live as certainly as men deprived of bread or food.

 

천국의 천적, 영적인 것은 또한 지상의 ‘먹을 것’과 상응하며, 이것으로 천국의 많은 것들이 표현되고 있는 것을 말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which is celestial and spiritual in heaven also corresponds to bread on earth, by which moreover they are represented, as is shown by many passages in the Word.

 

주님으로부터 모든 천적, 영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이 ‘’이심을 요한복음에서 직접 가르치십니다. That the Lord is “bread,” because from him proceeds whatever is celestial and spiritual, he himself teaches in John: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 (요6:58)

 

그래서 성찬 심볼들도 빵과 포도주로 정한 것이고, Wherefore also bread and wine are the symbols employed in the holy supper.

 

만나도 이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This celestial is also represented by the manna.

 

천사들의 양식은 천적, 영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님의 말씀, That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constitutes the food of angels is manifest from the Lord’s words: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마4:4)

 

곧, 모든 천적, 영적인 것이 주님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is, from the life of the Lord, from which comes everything celestial and spiritual.

 

[2]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고, 그리고 지금 다루고 있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감각적, 육체적인 일에 너무도 철저하게 잠긴 나머지 그만 사라져 버릴 정도로 그들은 신앙의 진리, 주님에 관해 일체 귀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거나, 그들이 그 정도여서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The la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flood, and is here treated of, had become so thoroughly lost and immersed in sensuous and bodily things, that they were no longer willing to hear what was the truth of faith, what the Lord was, or that he would come and save them:

 

그리고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and when such subjects were mentioned they turned away.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바로 이런 혐오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This aversion is described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그래서 유대인들도, 하늘에 속한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린 나머지, 만나를 보고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한, 주님의 표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불뱀이 그들 가운데 왔습니다. (민21:5-6) So also the Jews, in consequence of their being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did not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heavenly things, and desired only a worldly messiah, could not help feeling an aversion for the manna, because it was a representation of the Lord, calling it “vile bread,” on which account fiery serpents were sent among them (Num.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5And the people spoke against God, and against Moses, Why have you brought us up out of Egypt to die in the wilderness? For there is no bread, and no water; and our soul loathes this vile bread. 6And Jehovah sent among the people the serpents, the seraphim, and they bit the people; and many people from Israel died. (민21:5-6)

 

게다가 그들에게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전달된 하늘에 속한 것들을 가리켜, 그들은 울면서 말하기를, ‘역경의 빵’, ‘비참의 빵’ 및 ‘눈물의 빵’이라 하였습니다. Moreover the heavenly things imparted to them in states of adversity and misery, when they were in tears, were called by them the “bread of adversity,” the “bread of misery,” and the “bread of tears.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 흘린 빵’이라 하였습니다. In the passage before us, that which was received with aversion is called 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

 

 

277. 이것은 속뜻입니다. This is the internal sense.

글자의 뜻에만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은, ‘얼굴의 땀’, 즉,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땅을 갈아 힘들게 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He who keeps close to the letter, understands no other than that man must procure bread for himself out of the ground by labor, or by the sweat of his face.

 

하지만, ‘사람’은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태고 교회를 의미합니다. Man” however does not here mean any one man, but the most ancient church:

 

’도 땅을, ‘’도 빵을, ‘동산’도 동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천적 영적인 것들, 지금까지 충분히 말씀드린 대로 말입니다. nor does “ground” mean ground, nor “bread” bread, nor “garden” garden, but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s has been sufficiently shown.

 

 

278. ‘그가 취함을 입은 흙으로 돌아감’이, 교회가 거듭나기 전 상태였던 겉 사람으로 돌아감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한 것은, ‘’이, 앞서 설명한 대로, 겉 사람을 상징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That by “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 is signified that the church would return to the external man such as it was before regeneratio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as previously stated.


그리고 ‘’이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이 되는 상징이라는 것 또한 뱀에 관해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이 뱀은 저주를 받은 결과,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And that “dust” signifies what is condemned and infernal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serpent, which in consequence of being cursed is said to “eat dust.

 

’의 상징에 대해 거기서 볼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우리는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더할 수 있습니다. In addition to what was there shown as to the signification of “dust,” we may add the following passages from David: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All those who go down to the dust shall bow before Jehovah, and those whose soul he hath not made alive. (시22: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시104:29)

 

이 의미는,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외면할 때, 그들은 끝나거나 죽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즉, 정죄를 받고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which means that when men turn away from the face of the Lord, they expire or die, and thus “return to the dust,” that is, are condemned and become infernal.

 

 

279. 일련의 시리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모든 절들에 들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 파트가 천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피하게 하였다는 것(14절): All these verses then, taken in a series, involve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e celestial (verse 14):

주께서 그들과 재회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고자 하시는 것(15절):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for the purpose of reuniting them (verse 15):

겉 사람이 자신을 피하게 한 결과,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16절): that combat arose in consequence of the external man averting itself (verse 16):

그래서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17절): whence resulted misery (verse 17):

정죄(18절): condemnation (verse 18):

그리고 결국은 지옥(19절): and at length hell (verse 19).

이 일들이 그 교회 안에서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These things followed in succession in that church, from the fourth posterity down to the flood.

 

2021-05-01(D7)-창세기(창3,19, AC.275-279), '땀, 먹을 것, 흙, 창3 두 번째 단락 정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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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thorn and the thistle” are meant curse and vastation;

 

그리고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and by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is signified that he should live as a wild animal.

 

사람은 그의 속 사람이 그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장 기본으로만 겉 사람에게 작동될 때는 들짐승처럼 살니다. Man lives like a wild animal when his internal man is so separated from his external as to operate upon it only in a most general manner,

 

사람은 주님한테서 그의 속 사람을 통해 받는 것으로는 사람이지만,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그리고 또 유사 신체적 형태 면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for man is man from what he receives through his internal man from the Lord, and is a wild animal from what he derives from the external man, which,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s in itself no other than a wild animal, having a similar nature, desires, appetites, fantasies, and sensations, and also similar organic forms.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엔, 꽤나 그런 줄 알지요. 그는 이런 걸 영적 물질로부터 얻습니다. 이걸 통해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플럭스를 받는데요, 그러나 저런 인간 안에서는 이 인플럭스가 거꾸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That nevertheless he is able to reason, and, as it seems to himself, acutely, he has from the spiritual substance by which he receives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 which is however perverted in such a man, and becomes the life of evil, which is death.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지요. Hence he is called a dead man.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저주와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것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추수와 과실 나무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thorn and the thistle” signify curse and vastation, is evident from harvest and fruit tree denoting the opposites, which are blessings and multiplications.

 

가시덤불’, ‘엉겅퀴’, ‘들장미’, ‘가시덩굴’ 및 ‘찔레’ 등이 그런 상징을 갖는 것은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That the “thorn,” the “thistle,” the “brier,” the “bramble,” and the “nettl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호9:6)

 

여기 ‘애굽’과 ‘’은 주님의 일들을 자신들과 자기들이 소유한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런 걸 가리킵니다. Here “Egypt” and “Memphis” denote such as seek to understand Divine things from themselves and their own memory-knowledges.

같은 예언서에서 In the same prophet: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호10:8)

 

여기 ‘아웬의 산당’은 자아 사랑을 상징하며, where the “lofty places of Aven” signify the love of self;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는 신성모독을 상징합니다. and 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 profanation.

이사야에 In Isaiah: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사32:12–13)

 

그리고 에스겔에 And in Ezekiel: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겔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즉, 거친 음식)이 가리키는 것이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 느부갓네살에 관한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eat the herb of the field” (that is, wild food) denotes to live like a wild animal,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Nebuchadnezzar in Daniel: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They shall drive thee from man, and thy dwelling shall be with the beast of the field; they shall make thee to eat grass as oxen,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thee. (단4:25)

 

그리고 이사야에 And in Isaiah: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 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 now have I brought it to pass, 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 fenced cities, in heaps; and their inhabitants, short of hand, 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 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 and the green [olus] of the herb, the grass of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before [coram] the standing corn. (사37:26–27)

 

여기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그리고 ‘곡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Here it is explained what is signified by the “grass of the field,” the “green of the herb,” the “grass on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와 ‘상고’로 표현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ime before the flood, which is meant by “long ago,” and the “days of old.

 

2021-04-30(D6)-창세기(창3,18, AC.272-274), '가시덤불과 엉겅퀴, 밭의 채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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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창3:17)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는 아담, 혹은 래셔널(rational, 合理)의 동의를 상징하며, 이렇게 되면, 처음엔 래셔널 자신을, 결과적으로는 겉 사람 전체를 외면하거나 저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By the “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man, or rational, by which it also averted or cursed itself, and consequently the whole external man, denoted by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그의 미래의 삶은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 때까지, 혹은 ‘네 평생에’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To “eat thereof in sorrow” means that the future state of his life would be miserable, and this even to the end of that church, or “all the days of his life.

 

 

268. ‘’이 겉 사람을 상징함은 앞서 ‘’(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field, 창2:5, AC.90) 관련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사람이 거듭날 때, 그를 가리켜 더 이상 ‘’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그는 또한 ‘지면’으로 비유되며, 말씀 여러 곳에서 ‘지면’으로 불립니다.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속 사람 안이 아닌,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과 기억 안에 심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고유 본성과 관련된 아무것도 없고, 대신 겉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속 사람 안에는 선들과 진리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더 이상 안 보이면, 그 사람은 겉, 혹은 몸이 됩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지식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는 상황, 가령, 시험들, 불행들, 질병들, 그리고 임종의 때와 같은, 그런 상황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래셔널은 또한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역할을 합니다.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속 사람은 래셔널을 통해 몸과 겉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를 하면, 겉 사람은 속과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은 알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속에 속한 것들인 지성과 지혜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269. 여호와 하나님(즉, 주님)은 ‘’, 혹은 겉 사람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외면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에 대한 저주이지요. 이것은 앞서 본 내용(AC.245)으로 분명합니다.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가 삶이 비참해짐을 상징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 그 속뜻으로는 사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선 내용들과 이어지는 내용들로 분명합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은 싸움을 시작하고, 수행 천사들은 고생할 때 따라옵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이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그때 그들은 겉 사람을 다스리고, 천사들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리는데,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그 사람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것을 거기서 거의 못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그래서 비참과 염려가 일어납니다.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죽은 사람들은 이런 비참과 염려에 거의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더욱 사람으로 정말로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으며, 짐승들처럼 땅에 속한 것들을 향해서는 아래를,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서는 밖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에만 호의를 보이며,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 하에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만 탐닉합니다.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이들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 전투나 시험 없이 살아가며, 다 드러난 사람들이 되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고, 그래서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하고, 재촉해서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 때문에 죽음에 이를 위험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로 상징한 것입니다.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271. ‘네 평생에’가 그 시대 교회의 종말에 대한 상징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2021-04-29(D5)-창세기(창3,17, AC.267-271), '듣고, 땅, 저주, 수고, 평생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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