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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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아멘

 

 

원본

2021-05-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1-07(D1)-신년주일연합예배(2524, 마5,3-12, 공주농아교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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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속뜻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3-12)

 

 

※ 오늘 설교에는 말씀 본문 인용이 참 많습니다만 평소 다 잘 아는 본문이라고 지루해하시거나 그냥 대충 후루룩 넘어가거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와있으면서 우리의 눈을 통해 말씀을 읽는 천사들은 본인들이 내적 존재라 역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고도 하는, 말씀의 영을 보는데요, 그때 그 펼쳐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님 신성의 이 수백, 수천 천상 오케스트라의 향연과도 같은 감동과 감격에 그들은 어쩔줄을 몰라하거든요. 우리는 외적 존재, 즉 탁하고 흐릿한 물질계에 있으면서 역시 의미 전달에 있어 매우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된 겉뜻으로만 주님의 이 신성 가득한 말씀을 접하기 때문에 잘 못 느끼지만 말입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을 위해, 그리고 그 즉시 숨는 우리 안의 악령들을 위해(?),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영의 소생을 위해 모든 성경을 읽을 때는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춰 읽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성탄절 예배에 이어 오늘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 여러분과 함께 드리게 되어 참 좋습니다. 저는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아마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과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 덕분이 아닌가 하는데요, 우리가 어떤 집을 방문할 때, 마음이 편한 집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불편한 집이 있지요. 집주인이 우리를 좋아하면 마음이 편하지만, 우리를 싫어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오래 못 있고, 용건만 간단히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게 되지요. 주님이 이곳 공주농아교회를 편안해하시는 건,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싫어하면 주님도 이곳에 오래 계시기가 눈치가 좀 보이실 거에요. 우리, 주님이 우리 곁에 늘 편안히 계시도록 힘써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올 한 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벌써 2024년 1월 7일입니다. 이렇게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사가 바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인데요, 물론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다 잘 알지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가정과 회사에 어떤 불행한 일 없이, 손대시는 일마다 크게 성공하여 평안한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뭐 대충 이런 뜻으로 하는 무난한 인사입니다. 이런 인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겠지요.

 

저는 오늘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이 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뜻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새해 권면도 좀 함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고 해서 ‘’에 대해 뭐 유별나게 다르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 내용처럼 우리도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 및 자손의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면 좋죠.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 애굽의 국무총리를 지낸 요셉, 큰 부와 명예, 영광을 누린 다윗과 솔로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오히려 큰 재상의 삶을 살았던 다니엘 등 ‘’에 대한 세상 관점에서도 이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을 누리다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누가 천국에 가 보니 의외로 세상 살 때, 부유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많이 와 있더라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부자로 사는 것이 좀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가 주님이 허락하신 재물을 그저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도구요, 쓰임새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런 부자는 주님이 허락하신 부유함으로 적당히 좋은 집과 좋은 음식, 좋은 옷과 기타 여러 가지를 누려도 되는데요, 이런 부자는 절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며,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러면 성경에서는 ‘’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여 좀 찾아봤는데요, 참 많은 본문, 아니 성경 전체가 사실은 ‘’에 관한 책이라 할 정도로 많은 본문이 있어 좀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마태복음 산상수훈 첫 시작을 주님은 ‘’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걸 보고, 신년 첫 말씀이기도 하니 우리도 이 팔복 본문으로 해야겠다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팔복 강해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단지 오늘 본문 통해 주님은 어떤 걸 ‘’으로 여기시며, 이 산상수훈은 천국 생활을 요약하신 건데, 그러면 혹시 천국 입국 자격을 주님은 이 팔복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 이 본당을 환히 비추셔서 오늘 말씀이 충분히 잘 전달되며, 다들 깊이 깨닫는 시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선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게 악한 것도, 죄짓는 것도, 잘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법을 지키며,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0, 21)

 

하신 본문처럼 말입니다. 또 이런 본문들도 있는데요,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1, 22)

 

그리고 이 말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물론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실제로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다 처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삶을 살거나 그 밖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제법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열두 제자가 그랬고요, 수도원 공부를 하면 처음 배우게 되는 모든 수도사의 아버지 성 안토니우스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상을 말씀드리면, 아무리 남들이 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런 과감한 선행을 하였어도 그걸 자기 공로로 여기는 사람, 곧 속으로 ‘나는 실제로 이렇게 했으니 당연히 천국 갈 자격이 있어’ 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괜히 재산만 날린 채, 천국도 못 갈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그 동기, 숨은 의도가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소유하는 것에 관해 천국의 천사들은 이런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의식주를 온전히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는데, 그것도 그 천사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리고 최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천사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닌데요. 그렇다고 뭐 세상에서처럼 내가 크니 네가 크니 하는 그런 건 아니고, 오직 얼마나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더 주님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가 하는 걸 말합니다. 방금 최대로 받는다 했는데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최대로 받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이니까요. 천사들은 그러나 그렇게 거저 받는 걸 절대 ‘소유’, 즉 ‘내 꺼’라는 생각으로 받지 않고, 대신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 하는 생각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즉, 주님이 뭘 주시면, 그걸 받으면서 ‘주님이 이걸 왜 주실까? 나는 이걸로 무엇을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까? 나한테 저 천사보다 더 주신 걸 보니 주님 보시기에 내가 이걸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더 많은가 보다’ 한다는 것이죠. 천사들은 주님께 모든 좋은 것을 거저 받으면서 늘 이런 태도로 받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 더욱더 주고 싶지 않으시겠어요?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천사들의 이런 마인드로 살면 우리 역시 반드시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수준을 말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 각 사람의 분수에 지나는 복, 즉 감당할 수 없는 복을 허락하시지 않는데요, 그렇게 되면 그건 복이 아니라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더욱 큰 복을 받고 싶으시면, 자신의 영적 역량, 곧 속 사람의 크기를 더욱 키우시기 바라며, 반대로 만일 지금 내 처지가 실망스럽다면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시고, ‘아, 지금의 내 영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 주님이 나를 복 주실 수 없는 거구나...’ 하시고, 회개하고 돌이켜 부지런히 영적 성장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하시면, 분명 얼마 안 가,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2-24)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은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그래서 얼핏 이 여덟 가지가 제각각 다 다른 복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천국 입국 조건, 즉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우리가 아까 성찬 때도 말씀드렸듯,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아, 그렇다면 내가 그런 나라에 입국하려면 내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져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려면 그 나라에서 요구하는 최소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팔복은 바로 그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조건이란 바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부지런히 갖추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살면서 무엇을 겉으로 ‘해야’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속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이지요.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일상생활 가운데 주님의 선과 주님의 진리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은 여덟 가지, 곧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등으로 말씀하신 건데요, 이는 곧 우리 속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내 안에, 곧 내 속 사람 가운데 주님의 선과 진리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상태를 ‘심령의 가난함’이라 하신 것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픈데 의지가 약해 그렇게 못 사는 걸 슬퍼하는 상태를 ‘애통함’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나한테 돈이 없고, 이것저것이 없을 때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이런 거룩한 걸 가지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다른 것들도 그 의미가 비슷비슷한데요, 우리가 ‘아... 내 안에는 이런 천국 입국 조건, 그 자격과 됨됨이가 너무나 많이 부족하구나...’ 하며, 심히 애통해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바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이지요. 이 약속들은 모두 그 속뜻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여러 영원한 행복을 뜻합니다.

 

2주 전 성탄절 예배 때 드린 말씀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다음은 그때 말씀인데요,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34-40)

 

여기서도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는 모두 우리 속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 곳곳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속 사람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 사람이 사후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엔 주님의 모든것이 충만하기 때문인데요, 탈북자들이 그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정말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천국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 또한 그 초점이 우리의 속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속 사람의 성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겉 사람의 복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이 순서, 곧 ‘’이라는 것은 주님한테서 나와서 천국을 통해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이라는 이 순서를 망각하고, 엉뚱한 순서, 그러니까 정반대의 순서이지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감히 천국의 ‘’을 추구하셨다가는 오히려 큰일 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을 다들 기억하시지요?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즉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이미 천국이 있는 사람이라야 사후에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반대로는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지옥이 있는 사람은 사후 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씀도 되지요.

 

여러분, ‘인생은 끝이 좋아야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뭘 야단스럽게 누리고 살았어도 그 끝이 지옥이면 꽝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네, 고민할 것도 없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럴려면, 평소 속 사람의 상태를 천국 상태로 유지하는 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에 가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와 같은 권면을 오해하여 누구나 일단 예수 믿고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이 권면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중간중간 생략된 권면입니다. 즉, ‘주 예수를 믿어 변화된 삶을 살아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이 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집은 사후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 말이지요. 해당 사도행전 본문도 보면 나중에 이 간수와 그 온 집이 정말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의 변화 없이 교회 다녔다고, 예수 믿었다고 저절로 무조건 천국 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오늘 ‘’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드리고픈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은 사실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햇볕을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햇볕이 무슨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던가요? 똑같은 햇볕이 숲을 비추면 생명이 태동하지만, 거름더미를 비추면 부패가 시작되듯, ‘’도 ‘’ 그 자체이신 주님을 사람이 어떤 태도, 곧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게 되고요, 반대로 주님을 미워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 나는 특별히 주님을 미워한 적이 없는데,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들고 불행한 거야?’ 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 텐데요, 주님을 미워하는 것은 마치 우리끼리 하듯 ‘나는 주님이 미워요.’라고 주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 말씀보다 내 생각, 내가 하고픈 대로,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려 할 때 먼저 주님께 여쭤보지 않아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걸 해도 될까요?’ 하고 말이지요.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기 전, 먼저 주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은 정말 범사에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이 오셔서 함께하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 말씀처럼 말이지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올해가 2024년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천국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거기는 이 세상 자연계처럼 태양이 있어 무슨 공전과 자전 같은 걸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거기엔 주님을 향한 우리 속 사람의 상태와 그 변화가 있는데요, 그래서 이 2024년이라는 숫자 역시 천국에서는 어떤 상태를 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그 속뜻으로는 ‘올 한해 당신의 속 사람이 더욱더 주님으로 채워져 영적으로 더욱더 놀라운 상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의미로 사용했으면 좋겠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한테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좀 어려우실 수 있으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셔서 이 내용이 다들 자기 심령에 잘 들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2024년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마침 두 교회 연합으로 주님 공생애 내내, 아니 성경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너무나 귀한 말씀인 ‘속 사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라는 걸 오늘 말씀 통해 깊이 명심하고, 당장 오늘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하루하루, 우리의 모든 언행 통해 주님이 우리 각자 속 사람 안에 오셔서 편히 지내실 수 있는 그런 2024년 올 한 해 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24-01-07(D1), 신년

공주농아교회

설교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수화 통역

공주농아교회 서미례 담임전도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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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1(D2)-신년신정가정예배(2523, 마25,31-46),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pdf
0.42MB

 

https://youtu.be/oxlRHSsTi6Q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31-46)

 

새해에 부모님께 세배 올리듯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는 또한 하늘의 아버지께 첫 예배 올림이 합당하지요. 주께서 오늘 예배에 함께하시고, 올 한 해 필요한 사랑과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정 예배를 마음에 둘 때 주신 올 한 해 마음의 본문으로서, 사실 너무나 완전한 본문이어서 그냥 마음을 다하여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될 뿐 딱히 무슨 인간의 설명이 필요 없지 싶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은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the consummation of the age and His coming, and the consequent successive vastation of the church and the final judgment)을 예언하신 마태복음 24장, 25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 중차대한 말씀의 하이라이트로서 주님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라고 하는, 삶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는 말씀을 꼭 좀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 중 35절, 36절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주석입니다.

 

4955. 이들 본문에 들어있는 속뜻은 이제 이어질 내용을 보시면 되는데요,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여기 순서대로 주욱 나열된 행위들은 바로 체어리티의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건데요, 즉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신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게 뭔지를 말입니다. 이런 행위들을 그저 겉 글자의 뜻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 행위들은 겉보기에 그냥 평범한 선행일뿐 거기 무슨 다른 비밀이 있을 수 있나 합니다만, 그러나 이 하나하나의 행위에는 어떤 비의(秘義, secret), 곧 신성(神性, Divine)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비의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 여기 ‘오늘날’(at this day)은 이 주석이 기록되던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체어리티의 교리가 없기 때문인데요, 사람들이 신앙(faith, 믿음)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 온 이래 이들 교리는 사라졌고, 이 교리들이 있던 자리를 신앙(믿음)의 교리가 대신 고안되어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교리는 체어리티가 무엇이며, 이웃이 무엇인지를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리들은 체어리티의 모든 종(種, species)과 속(屬, genera)을 가르쳤고, 체어리티가 베풀어져야 할 이웃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면에서 어떻게 이웃인지를, 그리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실천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이 주석을 기록할 때, 주님의 직접 계시, 곧 그 어떤 천사나 영들을 통하지 않고, 주님이 친히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풀어 주실 때, 세상 그 어떤 서적도 참고하지 않고, 성경과 종이, 그리고 펜만 가지고 딕테이션, 곧 받아적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런 태고, 고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리들은 또한 이웃을 여러 클래스로 그룹지어 이름들을 주었는데요, 부르기를 가난한 사람들(the poor), 궁핍한 사람들(needy), 불행한 사람들(miserable),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afflicted)로, 또 어떤 그룹들은 앞 못 보는 사람들(the blind), 다리 저는 사람들(lame), 장애를 가진 사람들(halt), 고아들(fatherless), 과부들(widows)로, 또 어떤 그룹은 굶주린 사람들(the hungry), 목마른 사람들(thirsty), 나그네들(strangers), 헐벗은 사람들(naked), 병든 사람들(sick), 옥에 갇힌 사람들(bound)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향해 자신들이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지를 알았는데요,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 이들 교리들이 이젠 사라졌고, 그와 함께 말씀에 대한 이해도 사라져서, 즉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사라져서, 오늘날은 말씀에 나오는 이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이라는 표현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 즉 비의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입니다. 오늘 본문,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 및 ‘옥에 갇힌 자들’ 역시 그 비의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체어리티는 그 본질 그대로 설명되어야 하며, 그 실천 역시 실천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4956.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본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the affection of good and truth)이며, 자아를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는 것(the acknowledgment of self as being evil and false)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며,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곧 체어리티를 갖는 것입니다.

 

※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라는 말은 아마도 천국은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웃’이기 때문이지요.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천국에서의 태도를 지상에서는 체어리티라고 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이웃의 반대는 악과 거짓이며, 이 악과 거짓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은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요, 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며, 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은 자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것을 하면, 곧 체어리티의 사람이 되어 자아로 말미암는 악과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in humiliation from self-acknowledgment) 있게 되는데, 바로 그때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가 됩니다.

 

※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 있게 된다’는 건, 원래 사람은 그 본성상 자아를 부인하는 걸 좋아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제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어요. 저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거짓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인하는 건 어찌 보면 참 굴욕적이라는, 그런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주님 앞에 이렇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는 주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지요.

 

이런 것이 다음 주님의 말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에 들어있는 체어리티의, 속뜻으로 본 특징들입니다. 이 말씀들이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속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의 교리들을 갖고 있었던 고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이런 사실은 너무도 엉뚱해 보여 그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게다가 천사들,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은 이 말씀들을 다른 방식으로는 지각조차 못 하는데요,

 

※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the angels who are with man), 모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말미암는 건데요, 먼저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이며, 둘째, 천국은 두 나라, 곧 천적(天的, celestial, 의지, 선, 사랑 등) 나라와 영적(靈的, spiritual, 이해, 진리, 신앙 등) 나라로 되어 있고, 지옥 역시 그에 대응하는 두 지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영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이렇게 둘씩 와있는 것이며, 천사들은 와서 그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령들은 와서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은 천사들을 통해서는 주님 및 천국과, 악령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악령들은 그 사람의 기억과 생각을 자기 걸로 압니다. 모든 피조물은 누구나 자기 걸 소중히 여기므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 또한 저들에게 보호받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합니다.

 

천사들은 ‘주린 사람들’(the hungr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선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고, ‘목마른 사람들’(the thirst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나그네’(a stranger) 하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the naked) 하면 자신들 안에 아무런 선과 진리가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람들’(the sick) 하면, 자신들 안에 악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결박, 즉 옥에 갇힌 사람들’(the bound or those who are in prison) 하면, 자신들 안에 거짓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바로 위에 주욱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것은 우리의 선행이 진정성 있게 하시기 위해서인데요, 왕이나 대통령 등 높은 사람에게 선대하며 예의를 갖추는 걸로는 그 진심이 명료하지 않아서입니다. 비슷한 걸로는 우리가 예배 중 경배와 찬양 같은 시간에 짐짓 거룩한 표정과 마음가짐으로 나름 정성을 다해 진정성 있게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일종의 겉모습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과 관련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그만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고는 읽기 시작하였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겠다는 하나님은 오지 않고, 마침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청소부를 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네요.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옷을 한 벌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이번엔 또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는 겁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요,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그리고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이 톨스토이 단편은 뒤늦게 구원의 감격을 깨닫게 된 마르틴이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입니다.

 

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가 이런 걸 모르겠습니까? 다 아는 내용이지요. 그럼에도 신년에 이런 체어리티의 메시지를 준비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도 말씀드렸듯 마24, 25,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 등 대하드라마 같은 앞날을 예언하시는 가운데 하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지혜와 복, 생명은 평소엔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다가 우리가 여기 마르틴처럼 용기를 내어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흘러들어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부디 올 한 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 진입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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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D1)-주일예배(2522, 눅15,11-21),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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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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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RzbRgxz9Yc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1)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11-21)

 

 

진리를 진리 자체의 빛으로 보는 것은 영적 마음이라 하는, 인간의 내적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것이다. 이 마음은 체어리티에 의해 열린다. 이 마음이 열릴 때, 빛과 진리를 이해하는 애정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데 그것이 깨달음이다. (AR.85) to see truths from their own light is to see them from man’s interior mind, which is called the spiritual mind, and this mind is opened by charity; and when it is opened, light and the affection of understanding truths flow in out of heaven from the Lord. Thence is enlightenment. (AR.85)

 

 

오늘은 2023년 올 한 해 마지막 날이며, 그래서 마지막 주일 설교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보통은 한 해를 마감하는 설교를 준비하지만, 지난주를 성탄 주일예배로 드려 2주 연속, 아니 다음 주인 1월 7일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에서 드리게 되어 3주 연속 누가복음 강해를 쉬게 되어 고민, 마침 오늘 본문이 어쩌면 그 깊이와 메시지에 있어 한 해를 마감하는 귀한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대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에 있어 거의 비슷한 패턴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는, 그래서 거듭남의 일반적 이야기이기도 하여 오늘 같은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도 아주 적절하다 생각되오니 부디 깊이 경청하셔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꼭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아버지께 받은 상속 재산을 집을 나가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 모두 탕진한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 탕자이고, 탕자가 겪게 될 운명은 어떤 것이며,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의미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기서 아들이 둘이라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두 가지 마음을 뜻합니다. 즉 큰아들은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고, 작은아들은 겉 사람이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재산은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로 보내주시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 곧 둘째가 재산을 나눠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넣어주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걸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누구나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주님이 주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주님은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하되 스스로 거듭나는 것처럼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자기 몫의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의 방탕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이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는 것은, 겉 사람이 진리를 행하지는 않고, 머리에 쌓아 두기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뜻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게 되며, 그러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세상 욕심에 빠져 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끊어져 더 이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을 향해, 주님을 향해 항상 열려있어야 할 내면의 창문이 닫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늘 세상일에 몰두, 몰입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저지른 악과 거짓들로 인해 선과 진리들이 파괴됩니다. 그것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허랑방탕 탕진하는 것이고,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흉년 상태, 즉 선과 진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15절과 16절에서는,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044:4항을 보면, ‘돼지는 간통자들의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불결한 사랑을 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잃게 되면 점점 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입니다. 물욕에 빠질 수도 있고, 명예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음의 악은 부부의 순결한 사랑이라는 가장 고결한 선과 대척점에 있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의미로 부부의 순결한 사랑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간음은 선과 악, 또는 진리와 거짓이 섞이는 것이고,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은 가장 가증스러운 악입니다. 실제로 천국에 3층천이 있다면,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지옥 역시 있는데 그 지옥이 바로 이 간음자들의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돼지를 키우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나중에는 가장 나쁜 상태, 즉 선과 진리를 모독하는 상태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에는 또 그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에는 그가 곡식의 껍질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곡식의 속살은 본래 선을 뜻하고, 그것을 덮고 있는 껍질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돼지가 먹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간음의 욕망과 결탁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면 배를 채운다고 할 때, 배(belly)는 무슨 뜻일까요? 배는 사람의 내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는 것은 내면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하려 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럼에도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으로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 참고로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식물 이야기’ 14장, ‘탕자는 왜 하필이면 쥐엄 열매를 먹었을까? 가난한 자의 식량, 쥐엄 열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더 있으니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떠난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 마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요단 동편의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린 유대인 지역이었다. 그 북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둘째 아들이 떠난 먼 나라는 아마도 데가볼리에 속한 열 개의 이방인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돼지의 사료로 가장 값싸고 영양소가 풍부한 쥐엄 열매를 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졌다.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놓고 돼지와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돼지와 쥐엄 열매가 오버랩되면서 둘째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쥐엄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 마지막에 먹는 식량이었다. 보통 끓는 물에 쥐엄 열매를 넣어서 죽을 만들어 먹었다. 그 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분들이 고루 들어 있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지식을 안 다음부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지식이 없으면 그나마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 요즘 특히 어느 야당 대표의 여러 가지 사법 리스크와 그런 그를 향후 대통령 삼기 위해 끝까지 몰염치한 짓을 서슴치 않는 그 야당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누구에게나 그 옳고 그름이 불 보듯 뻔한 일을, 그러나 그들은 두 눈 꾹 감고 애써 외면하면서 버젓이 국회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데요, 이 역시 진리를 모두 잃어버려 분별력과 수치심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속내를 감출 만큼의 분별력이나 수치심도 없는 것이지요.

 

탕자가 그렇게까지 추락할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회개가 올라옵니다.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내면의 추악한 것들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그로 인해 자기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갈 때, 비로소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됐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생각하며 회개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 아마도 그 야당 대표도, 그리고 그 야당 소속 많은 국회의원들도 나중에 사법처리 되어 감방에 갇혀 그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탕자의 회개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17절에는 탕자의 첫 번째 회개의 고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서 품꾼의 영어 성경 표현은 품삯을 받는 종(hired servant)입니다. 말씀에서 종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할 때는 선과 진리를 풍족하게 소유하지만, 속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선과 진리의 유입이 끊어져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탕자가 주님 앞에 드리는 첫 번째 회개의 고백입니다.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속 사람을 뜻하고,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제가 속 사람의 말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탕자의 세 번째 고백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품꾼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겉 사람입니다. 품꾼으로 상징되는 겉 사람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나를 품꾼으로 보소서’라는 말은, 속 사람과 단절되었던 겉 사람이 회개하여 속 사람에게 복종할 때, 처음에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속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회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신에 대한 연민, 주님을 향한 죄스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들이 일어나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일어난다는 것은 세상만 바라보며 살던 탕자가 주님을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오십니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회개의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 시간에 주님은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것은 탕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회개가 얼마나 진정한 회개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그의 절박한 마음을 보시고, 멀리서 달려오십니다. 멀리서 달려오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시고, 부족한 회개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의 목을 안으셨습니다. 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목을 안는 것은 그동안 막혀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통로를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곳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속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그리고 바닥까지 떨어진 다음에 어떻게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지를 배웠습니다. 계시록 2장 5절에도 회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가끔 자신을 돌아보면서 처음 진리를 알았을 때의 순수한 열정으로부터 멀리 떠내려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은 아주 복잡해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어느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부분은 더 단단해졌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해이해진 부분도 있겠지요. 또 어떤 부분은 문제가 많아서 거듭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 고백하여 그 걸림돌을 필히 제거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 먼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회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찾아내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홍수가 났을 때 급류에 휩쓸리게 되면 처음 출발한 지점보다 한참 아래쪽으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것처럼 아주 작은 잘못된 실수 하나로 인해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집니다. 미국 새 교회도 처음에는 하나의 교파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교리에 대한 작은 이견 때문에 둘로 갈라졌고, 그로 인해 많은 차이가 생겼습니다. 결과적으로 한쪽은 크게 부흥하고, 다른 쪽은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가를 찾아내어 주님 앞에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 회개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달려와 우리의 목을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 가장 큰 의미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배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모릅니다. 탕자처럼 교회를 떠나 있을 때 절실히 느낍니다. 주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

 

아멘

 

원본

2021-04-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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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D2)-성탄예배(2521, 눅2,8-11, 성탄절, 공주농아교회),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pdf
0.41MB
성찬.pdf
0.14MB
2023-12-25(D2)-성탄예배.축도.성탄절.공주농아교회.pdf
0.15MB

 

https://youtu.be/JZXdWxYWd3U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8-11)

 

 

주님의 성탄(聖誕)을 공주농아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난 2019년 성탄절을 여러분과 함께하였으니 만 4년 만에, 그것도 너무나도 귀한 성탄절을 이렇게 다시 공주농아교회와 함께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날에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안, 천국의 평화를 전합니다. 이 아침, 이 시간, 이 본당에 주님의 임재, 천국의 빛이 환히 비추시기를, 그래서 모두의 영과 육이 활짝 열려 오늘 저를 이 자리 세워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시기를, 그래서 천사들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주님과 결합하여 이 예배가 참으로 주님께 열납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곧 주님의 너무나도 귀한 이 성탄 소식을 왜 하필이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천민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목자들에게 알리셨을까 하는 걸 나누고자 하며, 이를 통해 목자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반대로, 사람이 산소통 없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둘 다 숨을 쉴 수 없어 죽습니다. 물고기는 아가미 호흡을, 사람은 폐 호흡을 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은 얼굴에 있는 이 육의 눈으로 영적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육의 귀로 들을 수도 없고요. 영적 존재인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눈엔 우리가 사는 이 자연계가 보이지 않고, 자연계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두 세계가 전혀 달라 서로를 직접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주가 정하신 질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주의 사자, 곧 천사를 볼 수도,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었는데요, 이 어찌된 일일까요?

 

성경에 보면, 천사들 같은 영적 존재들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있는데요, 우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있습니다. 그가 제사장 직무를 행하러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향단 우편에 나타난 주의 사자, 곧 천사를 통해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 하는 예고를 받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이번엔 주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일어나지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하는 놀라운 소식을 고지받습니다. 이외에도 주님이 변화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하신 모습을 본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도 있고요,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가에서 처음 뵌 막달라 마리아도 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 곧 영안이 열려 영으로 본 것이며,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목자들 또한 그들의 영으로 천사를 본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자, 그렇다면, 더욱 놀랍습니다. 당시 저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계 리더십들이 수두룩했음에도 그들은 한 사람도 천사의 방문을 받지 못한 반면, 엉뚱하게도 한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는 이 놀라운 방문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천사를 목자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목자들의 마음속 중심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고요, 추운 밤 밖에서 양 떼를 돌보던, 정말 역한 양 똥 냄새 밴 거적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목자들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오히려 정말 마음 편하신 그런 사람들이었음을, 그래서 주님이 그들의 영안을 열어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목자’는 보통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은 속뜻으로는 사람의 마음속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사랑)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는 말씀은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여전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신 것이고, 그래서 천사는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목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아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다행히 우리 곁에 바로 이런 목자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요, 바로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과 그 가정입니다. 농아의 삶을 사는 성도들을 오랜 세월, 이렇게 한곳에서 묵묵히 섬기신다는 것은 정말 말이 쉽지 저 유명하다는 목사, 목회자라 할지라도 아무나 못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도 ‘고맙다. 너희 아니면 딱히 누구에게 이 교회를 맡겨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처럼 천사들을 만날 수도,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남 탓 안 하고, 그냥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모든 걸 사랑으로,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표현이 좀 미안한데요, 무식하면, 무지하면 사랑도 못해요. 사랑과 지혜는 같이 가는 겁니다. 사랑은 지혜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사랑이 되고, 지혜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모르면,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크게 사고 친 게 되고 마는,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 곧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시고, 힘써 읽어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셔야 하는데요, 그중의 하나를 말씀드리면,

 

여러분, 천사들은 보는 것과 듣는 것, 즉 시력과 청력 중 어느 걸 더 중요하게 여길까요? 힌트를 드리면, 시력, 시각은 이성, 지식, 머리에 해당하고, 청력, 청각은 의지, 지혜, 가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네, 맞습니다. 바로 듣는 것, 곧 순종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즉, 일상생활 가운데 잘 모르는 게 있으시면 여러분의 목자이신 서미례 전도사님과 상의하신 후, 전도사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의 모습으로 여러분 곁에 와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인데요, 서미례 전도사님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지 몰라도 주님은 그렇게 여기신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진리는 사실 더욱 확장할 수 있는데요, 바로 부부는 서로를 주께 하듯, 자녀는 부모를, 부모는 또한 자녀를 각각 주께 하듯, 직장에서, 사회에서 누구를 대하든 다 주께 하듯 대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걸 가르쳤습니다.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2, 25)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6:1)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네, 여러분, 살면서 우리 주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생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연습, 훈련을 항상 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이런 훈련을 열심히 하면,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과 같이 되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걸 무척 편안해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비록 육으로는 지상에 있지만, 영으로는 늘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늘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목회자든 성도든, 부모든 자녀든, 그리고 직장 상사든 평직원이든 저마다 다 나름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각자 주님 앞에서 해결할 문제고, 우리는 저마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너는, 누구는 이렇다 저렇다 비난과 지적질로 세월을 허송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한두 가지 비밀을 더 말씀드리면, 여러분,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영입니다. 사람의 사후, 이 몸은 지상에 남기고 가 썩어 없어지지만, 영은 영원히 영계, 즉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영이 육이라는 옷을 입고 지상에서 왔다 갔다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눈으로 오직 자연계의 것만 볼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영, 심지어는 자신의 영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는 악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자신의 영의 그 괴물 같은 모습을 보고서는 그만 기절할 정도로 놀란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몸의 여러 감각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그리고 만지는, 이 신체의 오감은 사실은 영의 감각인데요, 사람의 사후 영이 되면, 이 감각들은 고스란히, 아니 몇 배로 확장된다고 합니다. 그때는 더 잘 보고,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같은 농아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네, 비록 육으로는 이런 장애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은 멀쩡, 너무나도 멀쩡하여 전혀 아무 이상 없는 상태입니다. 참 다행이지요. 그러나 한편, 참 안타깝습니다. 영은 멀쩡한데 육이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육의 감각은 사실은 영의 감각이 연결되어 움직이는 건데 지금 그 연결이 끊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영과 육이 서로 연결되게 할 수 있을까요?

 

32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2-35)

 

우리가 잘 아는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운 좋게 나았다 생각할 게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이 사람 안에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이 안수하셔도 이 사람의 속 사람 상태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애당초 이 사람의 속 사람 상태가 그랬다면 주님은 이 사람을 안수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육은 영의 옷이라 했습니다. 즉 정말 중요한 건 육이 아니라 영, 곧 당사자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인 것이며, 이 상태는 우리가 오늘 본문 목자의 삶을 살 때, 열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고, 하나하나 생활 속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다 주님 뜻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악과 거짓을 힘써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서서히 우리 영이 깨어나며, 그리고 천국을 향한 창문이 열리는데요, 그러다가 혹시 주님이 기뻐하시면, 즉 때가 되면 지금은 끊어져 있는 이 듣는 능력이, 지금은 굳어져 있는 이 말하는 능력이 다시 연결되고 회복되어 위 마가복음 말씀처럼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리는’ 놀라운 일이 내 방에서, 혹은 이 본당에서 나 혼자 기도하는 중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리고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도 역시, 아니 우리 모두 정말 이런 일이 이 교회에서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기를 정말 진심으로 원하고 또 원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목자는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여전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 진정한 거듭남을 결심한 모든 성도에게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게 하시기를, 이를 위해 오래전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저 목자들처럼 기뻐하고 감사, 찬송,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 되게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주님 오신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이 종을 보내사 이 교회에게 하시고픈 말씀을 힘써 다 전했습니다. 부디 이 말씀이 마음의 귀, 영의 귀 기울여 말씀을 들은 모든 성도의 안에서 불씨가 되어 불붙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 약속하신 영과 육의 연결이 일어나, 참으로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리는’ 놀라운 일이 이 교회 본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게 하시기를, 주님은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온 교회가 목격하게 하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니다.

 

아멘

 

설교

2023-12-25(D2), 성탄절

공주농아교회에서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수화 통역

공주농아교회 서미례 담임전도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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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D1)-주일예배(2520, 눅2,8-20, 성탄주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pdf
0.45MB

 

2023-12-24(D1)-주일예배.축도.성탄주일.pdf
0.21MB

 

https://youtu.be/vxUaQXqyqoc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사람의 영혼과 몸이 하나인 것처럼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후, (기독교계의 교리에 따르면) 이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은 신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점에서 여호와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이 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구속주와 구세주라 하는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왜 구속주와 구세주를 여호와라 하는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34:4) As, therefore, after the unition of the human with the Divine in him, which was like that of the soul and body in man, they were no longer two but one person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world), it follows that the Lord is Jehovah and God as to both the Divine and the human. And this therefore is why it is said on the one hand that Jehovah and the holy one of Israel are the redeemer and savior, and on the other that the redeemer and savior are Jehovah, (Doctrine of the Lord, .34:4)

 

 

주님의 탄생을 교우님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주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본래 12월 25일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지키던 동짓날로서,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을 기념하던 절기인데 당시 로마 교주가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정황상, 주님이 오신 가장 성경적인 날은 10월 1일 나팔절이라고 하며, 그 근거의 시작점이 바로 오늘 본문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에 나오는 ‘밖에서’라고 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 나팔절과 크리스마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당시, 인류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자아와 세상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과 ‘주님에 관한 교리’ 61번 글에서는

 

주님이 오실 당시 영계에서는 지옥의 세력이 천국을 압도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천국은 전처럼 순수하거나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지옥으로 기울어 있었고, 그로 인해 천국으로부터 지상의 교회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에 속한 것들이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순수하거나 강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더 타락했고,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됩니다. 영적으로 지옥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시키셨고 말입니다. 이것이 왜 이천 년 전 그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나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오심, 주님 성탄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리스도 탄생 소식은 밤새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졌습니다. 말씀에서 ‘목자’는 보통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사람의 마음속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는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오시며,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아 주님 탄생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천사는 놀라서 불안해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환상을 보거나 천사를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요한 사도는 주님께서 계시를 보여 주실 때,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역시 주님의 환상을 보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잠든 것처럼 되었습니다.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이 임재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목자나 요한 사도 또는 다니엘이 느꼈던 두려움은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겸손을 나타냅니다. 주님 앞에 겸비함이 없으면 결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겸손할 때, 주님은 우리들의 내면으로 오시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는 겸손한 자의 영혼을 그 순간 주께서 소생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다니엘에게 허락된 환상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확인하겠습니다.

 

1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니라 2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3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1-12)

 

천사가 목자들에게

 

10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이란 구주가 나신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인 사랑과 진리 가운데 진리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사랑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사랑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는 왜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만일 주님이 당신 스스로를 여호와라고 하셨다면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랬더라면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셨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천사들이 떠나자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인 채 말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말은 총명한 짐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력을 나타냅니다. ‘구유’는 말의 양식이 담긴 곳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교리는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먹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가 가장 순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로 표현할 때, 그만큼 순수함이 줄어듭니다. 진리 자체는 무한한 것이지만 문자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주님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 오시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순수한 진리, 즉 내적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천사들에게 들은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말씀에서 ‘보는 것’(seeing)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뜻이고, ‘듣는 것’(hearing)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고, 그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단계 더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지금부터 2000년 전 초라한 마구간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이기시고, 인간의 잃어버렸던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찾아주신 자유를 통해 이제는 누구나 지옥을 멀리하고 천국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지옥의 유혹을 끊기가 어려우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들은 어둡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인애의 삶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십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로부터 낮고 낮은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재물이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고고한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주눅이 들고 자꾸 초라해지며 마음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각 사람의 처지에 맞게 대화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낮아져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지 말고 이웃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목자들처럼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고대하는 모든 성도들과 가정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1-1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12-17(D1)-주일예배(2519, 눅15,1-1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pdf
0.40MB
2023-12-17(D1)-주일예배.축도.pdf
0.21MB

 

https://youtu.be/JJ27_O64dh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10)

 

천사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불러내 악령들이 선동하는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한다. 그때 사람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고 또한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매 순간, 그리고 순간의 순간마다 이루어진다. (AC.5992:3) Especially do the angels call forth the goods and truths that are with a man, and set them in opposition to the evils and falsities which the evil spirits excite. Thus the man is in the midst, and does not perceive either the evil or the good; and being in the midst, he is in freedom to turn himself either to the one or to the other. By such means do angels from the Lord lead and protect a man, and this every moment, and every moment of a moment; (AC.5992:3)

 

 

누가복음 1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주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였고, 세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립니다. 앞에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며 기도했던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셨던 그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양 아흔아홉 마리’는 스스로 거룩한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누굴까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세리이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주 거역, 때로는 부정한 재물을 탐내며, 그러다가도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을 닮았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양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양은 후미진 도랑에 빠졌을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슬피 웁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왜 순진하게 따르지 않았는가 하고 후회를 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당연히 당신의 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을 찾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양을 찾지를 못하실까요? 찾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를 바로 구해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다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일 때, 당신의 양을 도랑에서, 또는 가시덤불에서 건져내십니다. 본문 5절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주님은 그를 어깨에 메고 기뻐하십니다. ‘양을 어깨에 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때부터는 주님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나 힘을 나타낼 때 주로 손이나 팔, 어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어깨가 가장 큰 힘을 나타냅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어깨에 메신다는 말씀에서 다시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주님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과 7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안의 병든 진리와 선이 주님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십니다. 벗과 이웃은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한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긴다는 것은 그때 주님이 다른 건강한 선과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뻐할까요? 신앙인들의 마음은 수많은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은 각기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체의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진리, 또는 선이 병이 들면 그것과 연결된 다른 진리와 선이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마음 전체가 병이 들거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하나의 진리가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진리와 선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색깔이 다른 수많은 교인이 그들의 애정에 따라 서로 연결이 되고, 그런 연결들이 모여 교회 전체를 이룹니다. 그때 하나의 교인이 영적으로 길을 잃게 되면 그와 연결된 다른 교인들이 길을 잃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주변의 이웃들과 천국의 천사들을 기쁘게 합니다. 다음 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앞에서 말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영적인 병자, 또는 병든 진리를 뜻합니다. 드라크마는 주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데,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드라크마’라는 화폐 단위 말씀을 좀 드리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는 좀 복잡했는데요, 로마 화폐와 로마 이전부터 쓰던 헬라 화폐, 그리고 이 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자체 화폐가 뒤엉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또 화폐, 즉 동전의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먼저 구리 재료로는 로마의 ‘앗사리온’과 ‘고드란트’로 음역된 콰드란스, 헬라 구리 동전은 ‘렙돈’, 그리고 ‘호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로마 동전인 콰드란스인지, 헬라 동전인 렙돈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의 경우, 로마는 ‘데나리온’, 헬라는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드라크마는 당시 여인의 결혼지참금, 그러니까 혹시 이혼당할 때 보험용, 비상용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열 드라크마밖에 갖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이 여인은 형편이 넉넉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러나 숫자 ‘’(10)의 속뜻은 ‘전부’(all)인 걸 보면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을 경우, 상당히 엉뚱한 곁길로 나갈 수도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그밖에 이스라엘 화폐, 즉 동전은 ‘세겔’이 있습니다.

 

따라서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가 병이 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병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아와 세상의 욕망으로 인해 진리가 오염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병이 들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쓴다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들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빗자루로 집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비로 방바닥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동안 시험에서 왜 자주 넘어졌는지, 왜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안됐는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다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했을까요?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웃들 앞에서 또는 주님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의롭고 경건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때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신랄하게 나무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렇게 완곡하게 타이르셨습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양인 줄 아는 자, 의로운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매일 기도하는데도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으로는 죄인이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아도 다시 죄의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항상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집중해서 주님 앞에 충분히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에 속한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주님을 대할 때 진실하게 나아가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회개의 진정성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깨 위에 안전하게 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자기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0)

 

아멘

 

 

 

원본

2021-04-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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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0(D1)-주일예배(2518, 눅14,31-35),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0.32MB
2023-12-10(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8dz5vK-viOo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14:31-35)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오는 악과 거짓을 따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 10490:7)

 

 

주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그러한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왜 악이며 거짓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이나 육신에 속한 것에 집착하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 같은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와 보복, 잔인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임금,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는데, 군사 일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저쪽의 군사 이만을 상대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여기서 ‘왕들의 전쟁’은 신앙인들의 시험을 뜻합니다. 즉 진리와 거짓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또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쪽 왕의 군사가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가 이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의 진리가 지옥의 거짓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를 가지고는 지옥의 거짓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힘의 원천인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길 힘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 또는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이 깊은 사람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 옳다 생각되는 일을 하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험이 오면 항상 집니다. 이것이 이쪽 왕의 군사는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는 이만 명인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주님을 의지, 미리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이 올 때는 갑자기 오지 않고, 그 전에 어떤 징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지, 주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의도나 버릇이 있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끊어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미리 대비를 하면, 시험이 오더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청해 시험에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험이 오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고, 자아의 의도나 습관들을 미리미리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아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 이하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0-21)

 

주님을 찾아온 어떤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부자’는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소유는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다 처분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부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요 세상의 지식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지 않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소금을 쳐야 음식의 맛이 살아나는 것처럼 진리 안에는 진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소금이 뭘까요? 선 또는 선한 애정입니다. 모든 진리 안에는 선이라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선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살아납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옥 전체를 이길 힘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 들어있는 소금이 선이라면, 선 안에 들어있는 소금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선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악인에게 쫓기는 어떤 선한 사람이 자기 집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와서 그 사람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때 그가 다락방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진실일까요? 당연히 숨기는 것이 진실입니다. 모든 진실은 선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선일까요, 아니면 거절하는 것이 선일까요? 거절하는 것이 선입니다. 모든 선은 그 바탕에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진리가 무엇입니까? 돈을 빌려주면 그 사람을 망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진리라고 하더라도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진리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진리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선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를 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시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신 까닭은,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끝으로, 주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귀는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왜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고 하시는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별 생각 없이 했던 많은 일들이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곳곳에 그런 잘못들이 퍼져 있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생각만 하고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진리, 또는 삶에 적용하지 않는 진리는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아서 쓸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영적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차지도 덮지도 않은 미지근한 자, 롯의 아내처럼 늘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항상 진실하기를 원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온유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21-03-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12-03(D1)-주일예배(2517, 눅14,25-30),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0.35MB
2023-12-03(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SHW97au7zXo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25-30)

 

 

주님 신앙 안에서 그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한테는 영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때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그들의 욕망과 마치 한 몸처럼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음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는 바로 이 시험을 뜻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8) (계시록 속뜻 639:2) By “temptations” are here meant spiritual temptations, which exist with those who have faith in the Lord and live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when they drive away the evil spirits that are with them, who act as one with their lusts. These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e cross” in the following passages: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Matt. 10:38).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가령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였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단순히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리 중 마지막까지 남아 주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불과 몇 명이 안 되었는데요, 주님 골고다 십자가 마지막 현장까지 함께했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씀에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 6절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는 그 속뜻으로는, 실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가 아니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아 사랑을 뜻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랑을, ‘처자와 형제, 자매’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두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도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진실한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숭고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부처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합해야 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말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내면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주님이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을 미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왜냐하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험과 내적 싸움이 필요한데요,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십자가’는 내적 싸움과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주거 문제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 곧 그 쓰임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때, 능히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내적인 시험이 있고, 외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내적인 시험은 자신의 자아, 또는 자아의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 시험은 뭘까요? 외적인 시험은 질병이나 불운 같은 것이며, 또는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교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성격과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르다고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있는 그들 고유의 악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2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시험이 올 때, 악과 거짓을 미리 감지하고 맞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악령들이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주님의 천사들은 신앙의 진리를 불러내 그것으로 악령들을 막아낸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리가 바로 영적인 망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의 악들과 맞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에서 한 번 두 번 이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진리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면에 세워지는 진리의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는 사실은 신앙이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신앙을 형성하는 교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교리의 지식만 있고, 신앙의 진리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 시험에서 이길 때,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더 많은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가 신앙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항상 집니다. 기억 속에만, 즉 알고만 있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즉 실천하지 않는 교리의 지식 안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앉은뱅이 신앙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는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는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모든 악에 대한 애정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악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없어집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배웁니다. 그래야 무엇이 자아이고, 자아의 악인지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는 교리의 지식을 그때그때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겉 사람의 저항 때문이지요. 그 싸움이 바로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고 죄를 지으면 더 큰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그들이 모르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 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았음에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인데요, 우리 모두 얼마나 어렵게 이 진리를 만났습니까? 항상 자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망대를 높이 세우려다 기초만 쌓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악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정 복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망대를 높이 세우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아멘

 

원본

2021-03-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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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0.40MB
2023-11-26(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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