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에 관한 때와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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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눅21:5-9)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인정하되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자신에게 나온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의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주님은 그에게 있는 진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 (천국의 비밀 8868, 이순철 역)

 

 

유럽 여행을 다녀온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가는 곳마다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 건축물이 많았는데 정작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는 않았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드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교인들의 수가 그렇게 작으면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아마 유럽 교회가 점점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이 온통 세상의 쾌락을 쫓아다니고,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교회는 비어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모두 교회의 마지막 때 징조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때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징조는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5절과 6절입니다.

 

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이때의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헤롯(BC.37-AD.4)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은 46년 동안 증축한 당대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말씀에서 ‘성전’은 보통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유대교회와 같은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인 교회란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돌과 헌물’은 무슨 뜻일까요? 돌은 외적인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헌물은 그 교리를 바탕으로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인 사랑의 삶보다는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의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더 끌리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보시고,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은 참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진리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질서는 단호한 것이며,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말씀은 말세에는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돌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진리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주님 당시 유대교회나 오늘날의 교회나 교회들은 모두 나름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에는 모세의 십계명을 포함한 각종 규례와 장로의 전통이라는 교리가 있었고,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는 삼위일체의 신앙과 믿음만의 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 교리들이 모두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임의로 해석해 만든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서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8절) 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진리가 아닌 교회의 교리에 대해 ‘천국의 비밀’ 8868항은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인정하더라도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을 때 주님은 그의 진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또 8868:2항은 ‘진리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 없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만일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 없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유대교회는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말로는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을 구별, 한 분 주님의 존재를 사실상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 안에는 생명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묻습니다. 7절입니다.

 

7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교회의 마지막 때 나타날 징조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거나 천재지변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때 주님이 나타내 보여 주시는 계시를 뜻합니다. 주님의 사도 요한은 계시록 12장 1절 이하에 그 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6)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시의 내적 의미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 ‘하늘에 큰 이적’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계시를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존 교회를 대신할 새 교회에 대한 계시를 뜻합니다. ‘해를 옷 입고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는’ 여자는 그때 나타날 하늘의 새 천국과 그것과 통하는 땅의 새 교회를 뜻합니다. 여자가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여자는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며, 또한 교회는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는 새 교회의 교리가 비로소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여자가 낳는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는 새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용으로 표현된 기존 교회들의 극렬한 저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한 큰 붉은 용이 있어’에서 붉은 용은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믿음만의 신앙으로 변질시킨 교회들을 뜻합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는 새 교회가 처음 생길 때, 교회들이 새 교회의 교리를 말살하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이 말씀은 새 교회의 합리적인 교리가 체어리티가 없는, 죽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장은 새 교회의 합리적인 교리를 뜻하고, 만국은 체어리티가 없는, 그래서 죽은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새 교회의 교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는 처음 새 교회가 생길 때는 교인의 수가 별로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폐한 곳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새 교회의 처음 상태를 뜻합니다.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는 주님의 보호 아래 새 교회가 지속적으로 커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완전하게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정도로 성장하는 게 완전하게 성장하는 걸까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계획하셨던 일들이 완벽하게 실현될 때, 그때가 새 교회가 완전하게 성장한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밝히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8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종말론 같은 거짓 진리를 퍼뜨리거나, 마치 자신이 재림 예수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자들이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의 말에 속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난리와 소요는 새 교회와 기존 교회들 간의 교리적 다툼 같은 외부의 시험을 뜻하기도 하고, 또는 새 교회인들이 겪는 내면의 시험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험의 조짐이 있을 때, 새 교회인들은 어쩔 수 없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시험에서 넘어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혹 시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시험에서 이기든 지든 그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새 교회의 신앙은 그냥 자라는 게 아닙니다.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든 외부에서 오는 것이든 시험과 연단을 통해 자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난리와 소요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하시고, 그래야 끝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것에 끌립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건물이 크고 아름다워야 교인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교회당이 아무리 아름답고 예배 의식이 경건해 보이더라도 그 속에 내적인 것이 없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것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8868:3항은, ‘살아있는 진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바탕으로 한 신앙의 진리이다. 살아있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닌데, 그 이유는 그 진리 안에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외적인 것에 미혹되는 대신 사랑과 체어리티라는 내적인 것에 끌려 새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의 체어리티의 삶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새 교회는 우리만의 구원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통해 이웃과 사회와 지구 전체를 살리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이 우리의 입술에 머물지 않고 입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손과 발끝까지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의 진리를 배운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4-5)

 

아멘

 

2022-08-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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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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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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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0iBCab2Z-U

 

과부의 두 렙돈 헌금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1-4)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참된기독교 459:9)

 

※ 오늘부터 누가복음 21장입니다. 총 다섯 편의 설교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존 설교 원고들도 계속 가까이하시며, 함께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성서 시대 이스라엘 화폐 단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하)’(2010)에 나오는 ‘화폐 단위’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화폐 단위가 복잡한 것은, 1세기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 가지 화폐 단위가 모두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공식 화폐인 로마 화폐가 사용되었다. 둘째, 로마 제국 이전부터 사용되던 헬라 화폐도 통용되었다. 셋째, 이방인들의 화폐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자체의 화폐도 통용되었다.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보다 작은 단위의 동전은 구리 동전이었다. 로마의 구리 동전은 앗사리온(assarion)과 콰드란스(quadrans)가 있었다. 4과드란스는 1앗사리온으로, 당시 하루치 품삯인 1데나리온(denarius)은 16앗사리온이었다. 이를 기초로 대략적인 가치를 환산해 보면,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2010년 기준, 대략 5만 원이라고 할 때, 1앗사리온은 3,125원, 1콰드란스는 781원에 해당한다. 헬라의 구리 동전은 렙돈(lepton)으로 2렙돈은 1콰드란스였다. 이것을 기초로 과부가 성전의 연보궤에 넣은 두 렙돈, 즉 1고드란트(콰드란스)는 1,000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로마의 은 동전인 데나리온과 헬라의 은 동전인 드라크마는 거의 같은 화폐 가치를 가졌다. 시장에서 값을 지불할 때는 두 개의 은 동전이 같았지만,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납부할 때는 1드라크마가 4분의 3데나리온에 해당했다. 납세를 위해서는 제국 내의 공식 화폐인 데나리온에 비해 헬라 화폐인 드라크마가 25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거래된 것이다.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로마와 헬라의 동전과는 별도로 이스라엘은 ‘셰켈’(Shekel, 성경에는 ‘세겔’로 나옴)로 불리는 자체적인 동전이 있었다. 세겔은 일반 세겔과 성전세 납부에 사용하는 특수 세겔이 있었다. 특수 세겔은 두로(Tyre, 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도시)에서 주조했기 때문에, ‘두로 세겔’로도 불렸다. 일반 세겔은 2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고, 두로 세겔은 4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 다음은 ‘연보궤’ 관련, 배경지식입니다. ‘열린다 성경, 성전’ 인용입니다.

 

성전 안 여인의 뜰 주변을 따라 3면의 벽에는 13개의 연보궤(헌금함)가 있었다. 각각의 연보궤는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 때 부는 양각(숫양의 뿔) 나팔처럼 돈을 넣는 입구는 좁고, 밑바닥은 넓었다. 이는 연보궤에 손을 넣어 헌금을 훔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예수님은 헌금과 구제를 하고 나서 ‘나팔을 불지 말라’는 독특한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여인의 뜰에 있는 연보궤의 모양에서 나온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2)

 

13개의 연보궤는 각각 용도가 달랐고, 그 용도는 연보궤에 새겨져 있었다. 이 중 1, 2번 연보궤에는 성전에 바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넣었다. 3, 4번의 연보궤에는 번제와 속죄제로 비둘기를 바치는 여인들이 그에 상당하는 돈을 넣었다. 첫 아들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도 성전을 찾아 초태생을 위한 속죄제로 비둘기값을 이곳에 넣었을 것이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2:22-24)

 

연보궤 5번에는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6번에는 분향단의 향, 7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는 금잔, 8번에는 남자의 속죄제, 9번에는 속건제, 10번에는 비둘기, 11번에는 나실인 서원, 12번에는 나병환자의 치유, 13번에는 기타 자원 헌금과 관련된 헌금을 넣었다.

 

13개의 연보궤 외에 ‘은밀한 방’(Silence Chamber)으로 불리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내는 곳이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비밀리에 헌금을 하곤 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아마 이곳에서 은밀하게 드려졌을 것이고, 부자들은 바깥에 있는 나팔 모양의 연보궤에 위풍당당하게 헌금을 넣으며, 힘차게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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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설명으로, 오늘 본문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이라는 돈은 2010년 기준, 1,000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2024년도 시급 9,860원으로 계산하니 1,230원 정도 나오는군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가리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부자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당장 끼니를 걸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켜보신 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과부처럼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의미로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논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관계는 열차의 목적지와 궤도와 같아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과부의 정확한 의미는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아직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있기 전의 선은 선이라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과부가 진리에 대한 애정만 있고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말씀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부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이용해 재물과 명예를 얻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조작, 거짓 교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세뇌, 조금 남아있는 진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19장, 주님을 찾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며 영생에 대해 여쭙는 청년과 같은 부자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나 다른 사람처럼 문자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고, 내적 진리에 가까이 가길 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것은 그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주님께 되묻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여기서 ‘네 소유’는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청년은 자신이 노력해 얻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니 내적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는 소유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할 때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화란 어떤 것입니까?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깨달음을 뜻합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그동안 삶 가운데 허용했던 자아의 악을 멀리하고, 이제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오는 여러 종류의 악들이 있는데요, 그걸 계속 허용하면 언제까지나 자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 중에는 말씀의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아의 악들 가운데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죄가 아닌 것 같은데 내적으로는 죄악인 것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들을 멀리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주님의 말씀에 순진하게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 하셨듯 주님이 과부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와 관련해 열왕기상 17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17:5-16)

 

이 본문은 아합왕 때 여러 해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기근이 들었던, 그래서 참 절박하고 비참한 그런 상황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과부의 대답을 보면 말이지요. 이 말을 듣고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야의 말을 들은 과부는 어떻게 하나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엘리야를 떠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은 과부의 순종과 그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서 거기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이방인의 과부, 즉 진리를 갈구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는 진정한 진리를 원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부가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바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아의 생각보다 말씀의 진리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인애, 체어리티의 선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459번 글 9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과부를 왜 더 칭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아합왕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든 이후부터 교회에 더 이상 진리의 비가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 새 교회 분들은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를 언급할 때 좀 극단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질 때, 주님으로부터 참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는 교회의 높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운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부자들일까요? 진리이신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시지 않습니다.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가루와 기름으로 말씀을 따라 떡을 만들어 먼저 선지자에게 드리는 과부와 같은 사람,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오셔서 그들의 단단한 마음을 여시고, 그 속으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을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둠에서 일어나 빛을 볼 수 있고, 빛이 이끄는 대로 이전의 악을 끊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떨쳐버리려 해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자아의 악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지를 때, 사르밧 과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사랑을 동원해 그것을 제지하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항상 나는 침묵, 오직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 안에 신앙의 빛과 열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4)

 

아멘

 

 

2022-08-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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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눅20:41-47)

 

주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일반적으로는 천국과 교회를 만들고, 개별적으로는 각각의 천사와 사람을 만드는 신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천사 하나하나 안에는 천국이 있고, 사람 하나하나 안에는 교회가 있다. (계시록의 속뜻 256: 2, 이순철 역) Since the Lord is the Word, and the Word is the Divine truth, which in general makes heaven and the church, and in particular each angel, that heaven may be in him, and man that the church may be in him; (AR.256:2)

 

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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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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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고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사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세 개의 파가 있었고,

 

※ 이 외에도 ‘열심당’이라 하는 무장 독립단체도 포함, 보통은 네 개로 나눕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는 것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루쉼’(פָּרָש, 분리하다)에서 비롯한 말로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BC.215-164)의 헬레니즘 동화 운동에 가장 먼저 저항한 유대교 순수주의 세력인 ‘하시딤’(חסידים, 경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이 기간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고, 그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삶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고자 노력, 그들이 분리된 자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대중들은 그들을 경건주의자라 부르며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그토록 철저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과 사사건건 부딪쳤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만 율법을 잘 지킬 뿐, 속으로는 사실은 율법에 반대하는 자들, 율법을 우습게 여기고, 단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만 여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과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어느 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만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 속에 담긴 내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사실 말씀에 ‘속뜻’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은 이들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서 거의 그 누구도, 심지어 소위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들 역시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겉과 속이 같아지고자 애쓴 사람들은 그 삶과 인격 가운데 ‘실천’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대해 물으셨을까요?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려 하셨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나 일반 백성처럼 조금 밖에 모르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진리를 가르쳐주려고 애쓰십니다. 그리고 그때 겸손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우침을 얻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2절에서 44절까지 말씀입니다.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는 신성 자체이신 주님을 뜻하고, ‘내 주’는 신성으로부터 잉태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한 시험과 승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발판’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연적인 것들을 뜻하고, ‘원수’는 그 자연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을 공격하는 지옥의 영들을 뜻하며,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는 것’은 시험에서의 승리와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불완전 몸이 신성한 몸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기기 전의 발판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불완전한 몸이라면, 시험에서 승리하신 후의 발판은 거룩한 몸, 즉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시편 말씀을 인용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입증하신 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부터 이끌어 내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바리새인들도 할 말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에서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23:5, 6)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라고 해서 그 문자적인 의미가 모두 진리는 아니고, 오직 내적 의미와 일치할 때만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다윗은 인간 다윗이 아니라 신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치려 하셨던 진실은, 첫째는 그리스도는 신적 선이신 여호와로부터 태어난 신적 진리시라는 사실, 둘째는 말씀의 진리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내적 의미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왜 주님은 그러면 처음부터 말씀을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말씀을 그 기록된 신성, 곧 속뜻으로 읽는 천사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기에 말씀도 내적 의미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있어 말씀을 내적 의미로만 기록하면, 아무도 읽을 수도, 그리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을 입고 사는 우리가 영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의 상태로 있는 사람한테는 육의 상태인 겉 글자로 기록된 말씀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말씀 앞에 겸손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 곧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소위 난해한 말씀을 만나면, 무슨 잔머리를 굴리며 억지로 푸는 대신, 정직하고 겸손하게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으신가 보다’며, 주께서 때가 되면 내게 빛을 비춰 주실 줄 믿고, 한발 물러나 기다리는 태도가 가장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45절에는 모든 백성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복종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 겸손한 사람들은 즉시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합니다. 반면에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지성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자들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긴 옷’은 본래 하나님의 신성한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진리, 즉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시장’은 말씀의 진리와 선이 유통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잔치’는 예배를 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왜곡해 거짓 진리를 만들거나, 교회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긴 옷’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린 ‘’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3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15:37-40)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불리는 ‘’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 ‘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마23:5)

 

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손을 댔다는 예수님의 겉옷은 바로 이 겉옷, 즉 예수님이 쓰신 숄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참고로, 계속 나오는 이 ‘겉옷’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자기 머리를 덮는 마름모 형태의 큰 ‘’(히, 탈릿)을 말한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상)’ 여기저기서 인용)

 

 

※ 다음은 위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에 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약 왕정 때부터 존재했고 특별히 바벨론 포로를 거치면서 율법 필사와 율법 연구 및 전승을 담당했으며, 또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문서 등을 작성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더욱이 율법을 전수하는 일에 남다른 역할을 했기에 율법사 또는 랍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나 헤롯 정부 내 각종 기관에 속해 일종의 행정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특정한 종교 분파에 속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약시대 유대교의 분파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이르시길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과부’는 선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 배우기를 원하지만,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과부인 것입니다. 또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경건한 척 자신을 꾸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된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주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즉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을 극복하고 여호와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인간이 되셨는지, 또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 다가가 거듭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며,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매달려 내적인 것을 볼 수 없었고, 그리하여 주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마땅히 주님과 이웃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의 내적 의미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마음속에서 바리새인을 몰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2022-07-3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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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D1)-주일예배(2552, 눅20,27-40), '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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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20:27-40)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혼의 사랑 41:3, 이순철 역) That to be married is to be conjoined with the Lord, and that to enter into marriage is to be received in heaven by the Lord is cl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unto a man, a king, who made a marriage for his son, and sent forth servants and invited to the wedding (Matt. 22:1–14).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성직자들이 많았고, 주로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리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경향이 강했고,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또 그들의 구전 율법인 장로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입니다.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대를 잇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명기 25장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25:5, 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해주신 결혼의 원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신명기의 규례는 일부일처의 원칙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엄격히 말하면 레위기 18장에 형제의 아내와 관계하지 말라는 율법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러한 법을 만들어 지키게 하셨을까요? 영적으로 남편의 형제는 이른바 친족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나 취미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진리와 선도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리와 선은 끊임없이 자기와 맞는 선 또는 진리를 찾아 그것과 결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친족의 선(kindred good)이란, 어떤 진리가 좋아하여 자신을 그것과 결합시키려 하는 비슷한 성격의 선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남편의 형제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은 어떤 진리가 죽은 남편으로 상징되는 선과 친족의 관계에 있는 선과 결합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진리가 그렇게 결합해 열매를 맺을 때 각자의 내면에 교회가 굳건하게 서고, 점점 부흥하게 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교회가 침체하겠지요. 그렇다면 여인과 첫 번째 남편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까닭은 뭘까요? 예를 들면 하나의 진리가 하나의 선을 좋아하여 만났는데 만나보니 생각이 다르고 열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둘 사이에는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번에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 참석해서 보니 목사님들의 성향이 모두 달랐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살림을 맡아 건전하게 꾸리는 데 관심이 있고, 어떤 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선교를 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과 교리를 연구하여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동료 목사님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예를 들면 진리가 미숙하거나 아니면 애정이 부족하거나 하면 둘 사이에 충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에 따라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지만 생각이나 애정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분들은 서로 잘 맞아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어떤 분들은 마음이 잘 맞지 않아 함께 일해도 시너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영적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계속해서 주님께 묻습니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에서 간교함이 느껴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말씀을 이용해 부활의 신앙을 공격하고,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이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의 결혼도 세상의 결혼처럼 육신의 결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34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에 살 때 많이 거듭나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세상 사람들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의 천사들의 결혼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결혼의 사랑’ 41:3항은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금의 아들은 주님을 뜻하고, 혼인 잔치에 초대될 사람은 주님과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 즉 세상에서 충분히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 366항 이하에서는

 

천국에도 남녀의 결혼이 있으나 세상의 결혼과는 다르다. 즉 천국에서 남녀의 결혼은 이성과 의지의 결합이고,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천국의 결혼은 육신의 결합이 아니라 영의 결합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의 결합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천국의 남녀는 더 이상 육신으로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천국에서 결혼의 기쁨은 육신의 결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결혼에서 오는 기쁨, 즉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주님이 주시는 지극한 평화와 순진함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37절의 말씀입니다.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부활을 꿈꾸는 이들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셔서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후의 부활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던 사람은 사후에 지옥에 있고, 거지였던 나사로는 천국에 있다는 누가복음 16장 22절의 비유의 말씀이 그렇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던 겸손한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누가복음 23장 43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적인 눈, 시야가 닫힌 상태에서 외적인 눈, 시야로만 보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외적인 눈만 발달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며, 할 수만 있으면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을 바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 지킬 때, 부활에 합당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자의 의미로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일치하는 것만 지키고, 그 밖의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오시기 전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내려주셨던 법도들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오셨을 때, 그 표상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해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요한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보혜사, 즉 말씀의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게 보면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문자적 가르침을 모두 버리면 안 되는 이유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더욱 분명하고 힘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문자적 의미 안으로 내적 의미라는 말씀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로서 구약의 말씀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비춰봐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내적인 것과 일치하는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대부분의 내용과 순결한 부부 사랑에 관한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들은 얼굴이나 손이 그렇듯 벌거벗은 진리로 명확히 드러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내적 진리를 통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로 알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외적이면서 동시에 내적인 말씀의 의미를 통해 부활에 합당한 결혼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19:7, 9)

 

아멘

 

2022-07-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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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D1)-주일예배(2551, 눅20,19-26),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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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의 속뜻

 

 

19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눅20:19-26)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받는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을 받는 그릇이다, 천적인 것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오며, 그것을 유입이라고 한다. 천적인 것은 모든 신앙에 속한 선이며, 영적인 것은 진리이다. 진리가 신앙의 진리가 되려면 그 속에 신앙의 선이라고 하는 인애의 선이 있어야 한다. 인애의 선 안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그 자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880:2, 이순철 역) ...the natural, the spiritual, and the celestial. His natural never receives any life except from the spiritual, and the spiritual never except from the celestial, and the celestial from the Lord alone, who is life itself. But in order that a still fuller idea may be gained: the natural is the receptacle that receives the spiritual, or is the vessel into which the spiritual is poured; and the spiritual is the receptacle which receives, or is the vessel into which is poured, the celestial. Thus, through things celestial, life comes from the Lord. Such is the influx. The celestial is all the good of faith; in the spiritual man it is the good of charity. The spiritual is truth, which never becomes the truth of faith unless there is in it the good of faith, that is, the good of charity, in which there is life itself from the Lord... (AC.880:2)

 

 

※ 아래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는 꼭 기억 되어져야 할 유익한 내용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 예배는 이한구 장로님 추모예배를 겸해서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지 꼭 2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장로님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하시지도 않았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유머가 많아서 장로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웃음이 있었습니다. 이한구 장로님은 새 교회 설교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교해야 교회가 부흥되지 않겠느냐 하시는 말씀이었지요. 공감은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마음대로 잘 안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장로님께 미안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보통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진리를 만나면 바로 자신의 신앙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열심히 배울 뿐 아니라 삶으로도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이 보통 이런 분들이십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 호기심은 있지만 미온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리를 반대하고, 심지어 파괴하려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진리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이고, 하나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문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체포하려고 합니다.

 

※ 원래 ‘대제사장’은 복수가 아닌 단수여야 합니다. 즉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은 지난 6월 16일 주일 설교, ‘성전에서 장사들을 내쫓으신 주님’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속뜻은 자아에서 비롯한 악을 뜻하고, 서기관은 자아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아는 이기적이지만 진리는 이타적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원하는 것이 정반대인 것이지요. 자아를 사랑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진리이신 주님을 해치려 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누굴까요? 백성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이 진리를 공격하더라도 능히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중 26장, ‘천국 천사들의 능력’(228-336)에 나오는 글들 일부 인용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빌론의 멸망을 다룬 책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천사들 스스로는 아무 능력이 없고, 그들의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또 그들이 이것을 인식할 때만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누군가 자기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면 그 순간, 단 한 악령에게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은 어떤 공로도 자기들에게 돌리지 않으며,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어떤 찬사와 영광도 싫어하고, 모든 찬사와 영광을 주께 돌린다...

 

...천국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에 모든 능력이 있다.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선에 결합된 신적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능력이 있다...

 

//

 

백성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주님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체포할 수 없게 되자 계책을 세웁니다. 20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정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 역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진리보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가와 진리의 허점을 캐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무력화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새 교회의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허점을 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정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영어 성경 원문에는 face, 즉 얼굴로 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얼굴은 사람의 내면을 뜻합니다. 얼굴을 통해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는 사이비 진리가 많은데, 주님의 진리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아우르는 합리적 진리라는 칭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는 천국의 삶과 세상의 삶 모두를 아우르는 조화로운 진리라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한동안 교회 공동체의 어떤 마을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무엇보다 결혼의 순결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동창생 여자아이를 만나도 쳐다보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자제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종교의 교리는 그렇게 외골수적인 편향이 있습니다. 정탐들은 그런 점을 의심했지만, 일단 주님을 칭찬합니다. ‘내가 들어보니 당신의 진리는 천국의 삶만 중시하고 세상의 삶은 소홀히 하는 그런 사이비는 아닙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바로 다음에 또 이렇게 말합니다. 22, 23절 말씀입니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입니다. 온 세상의 황제, 그러므로 속뜻으로 가이사는 세상의 진리를 뜻합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좇지 않고, 세상 진리를 좇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신앙인이 병이 들었을 때, 분명 신앙인이면서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대신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병원 의사를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라고 묻는 것은, 신앙인들이 신앙인이면서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대신 거의 무의식적, 반사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진리를 좇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약 옳다고 하면, 그들은 주님을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반대로 옳지 않다고 하면, 세상의 삶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진리를 가르친다 비난하겠지요. 그들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그들의 간계를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장으로는 어떻게 대답해도 책잡힐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가이사의 것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것도 필요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세상 물질이나 학문 같은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880번 글 2번 항에서는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소유하는 세상의 것 안에 하나님의 것을 담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하나님의 것을 담는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일을 할 때는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나보다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일입니다.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정탐꾼들은 더는 주님을 책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이 하나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을 분리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유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여기 주님의 말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관련, 흥미로운 글이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 풍습 이야기 (하)’ 인용입니다.

 

...이들이 가져온 올무는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세금 납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22:17)

 

사실 이 질문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올무였다.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는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주후 6년, 열심당의 주도 아래 로마 화폐 사용에 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로마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샀으므로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까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었다. 예스든 노든 어떤 대답으로도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신다.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22:18, 19)

 

예수님은 이미 질문 속에 숨겨진 악한 의도를 간파하시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셋돈을 달라고 하셨다. ‘셋돈’은 로마 제국에 세금으로 바치는 데나리온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로마 황제이며, 신으로 추앙받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 제국에 내는 납세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쳐 놓은 올무에 그들이 걸리고 말았다.

 

당시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와 관련된 영적인 문제와 압제자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적대감 때문에 데나리온을 소유하지 않았다. 심지어 데나리온에서 황제의 얼굴이 있는 쪽을 망치로 때리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인 데나리온은 그들이 이미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해 준 셈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놓을 예스나 노의 대답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예수님이 ‘셋돈을 달라’시며 쳐 놓은 그물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걸려들어, 갖고 있던 데나리온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 순간 아차 싶었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

 

누가복음 16장에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빚을 탕감해 주는 청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으로 이웃의 환심을 사는 청지기가 결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을 합니다. 청지기의 주인은 왜 그를 칭찬했을까요?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인의 것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청지기는 가이사의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신앙인들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이한구 장로님은 평생 노력해 큰 재산을 모았지만, 당신 자신에게 쓰는 데는 정작 엄격했다고 들었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마지막에는 한국 새 교회를 위해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바로 앞의 녹번초등학교 학부형들이 아무 이유 없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해 건축허가를 얻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야 그들이 주변에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 ‘아무 이유 없이’라고 하셨지만, 틀립없이 우리 동네에 이단이 들어오면 안 된다 하여 ‘결사반대’ 차원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나름 개신교 십자가 복음 교리를 수호하느라 그러셨겠지만, 지금의 개신교, 기독교는 좀 더 넓으신 주님의 마음, 개신교와 기독교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는데 장로님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장로님과 우리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는 모습은 주님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싸우는 사도들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님은 누구보다 훌륭한 주님의 청지기였습니다. 장로님이 천국의 천사들로부터 말씀의 진리를 어렵지 않게 배우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천국에 계신 이한구 장로님과 그분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진실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는 서울 새 교회, 그리고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1)

 

아멘

 

 

2022-06-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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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D1)-주일예배(255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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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30(D1)-주일예배(255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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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잇돌’의 속뜻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20:9-18)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적 인성으로서 주님을 뜻한다. (계시록 해설 417:12, 이순철 역) and because “the stone of the corner” signifies all Divine truth upon which the church is founded, it also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His Divine Human; (AE.417: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세 차례, 그리고 마지막엔 아들을 보내었지만 다 소용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말씀에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하고, 포도원 주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교회는 꼭 외적으로만, 즉 겉으로 건물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면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는 누굴까요?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시고, 그것을 잘 가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각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멀리 계시거나 아예 안 계신 것처럼 여깁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멀리 타국에 나가 있는 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소출 얼마를 바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은 누굴까요?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살핍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는지, 잘못이 있으면 바로바로 회개하는지, 맡은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신앙이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영광을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 소출 얼마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때리는 것은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드는 걸 의미하고, 거저, 즉 빈손으로 보내는 건 교회 안에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걸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농부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임의로 푼답시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것들을 섞어, 결국 장로의 전통이라는 걸 만들었고, 그걸로 교인들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말씀보다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더 우선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두 번째,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유대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들, 그러니까 현 기독교회를 비롯, 과거 고대교회나 태고교회도 교회가 타락할 때는 먼저 말씀부터 왜곡했습니다. 말씀이 왜곡되면, 교인들의 삶이 피폐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여럿 욕보이고 죽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 말씀에 대한 폭행을 뜻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고 하셨는데요, 말씀의 진리를 더럽히고 죽이는 자가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말씀을 뜻하고,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종을 세 번까지 보냈다고 했습니다. ‘세 번’에 나오는 이 ‘’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세 번씩이나 종을 보내고, 농부들이 그때마다 때리고 쫓아내는 건 교회가 마지막까지, 끝까지 말씀을 더럽혔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말씀을 왜곡했다는, 즉 말씀에다가 인간적인 것들을 섞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십니다. 13절로 15절입니다.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서 주인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런데도 아들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에게 오실 때는 진리로 오십니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는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여호와는 인간이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에서 주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사랑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이라 부를 때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진리, 또는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을 때, 교회는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본문에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내쫓고 죽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쩌면 자기들 눈앞에 있는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농부들처럼 어리석게도 그들 역시 선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상속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농부들을 진멸한다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배척한 교회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 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진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살아나는데 진리를 왜곡하고 죽였으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일종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어 지옥의 기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결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면 보호받지만, 주님을 등지면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계시록 해설 417:12항에서는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성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타락한 교회들이 배척한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 진리가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주께서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 위에 떨어지는 자는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스스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교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서 쫓아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만 주님을 죽이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는 것은 모두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거역하는 것도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 있습니다. 일할 때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에 합당한 일인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진리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 배우기를 힘쓰고, 배우는 대로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이유 없이 박해나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견뎌야 합니다. 그때 합리에 속한 능력이 열리고,

 

※ 이 ‘합리’에 관한 능력이 우리 안에 열리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바로 점프를 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 둘을 중간에서 연결시켜 주는 거, 그게 바로 ‘합리’, 즉 납득하는 능력, 고개를 끄덕이는 능력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능력을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바로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진리의 말씀 앞에 확 열립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옵니다. 이 새로운 천국적 자아를 통해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121:4-6)

 

아멘

 

 

2022-06-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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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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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AC.7456.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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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의 속뜻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20:1-8)

 

 

말씀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한 까닭은 그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7456:8)

 

 

오늘부터 누가복음 20장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산하는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모로 우울할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 한 분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갈수록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새 교회인이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 ‘천국의 비밀’ 5044번 글에는 ‘사람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진리가 그들의 생각을 다스리며, 의심하거나 절망할 때 그들을 끌어올린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자존감이 크게 낮아집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잘 안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자아가 성(盛)하게 되면, 진리를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생의 시련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교회에 다니는 분이 우리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있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얘기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딸이 있어 교회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낫지는 않고, 오히려 좋지 않은 사고가 간혹가다 일어난다는 겁니다.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 그가 소경인 건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며,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분의 자녀에게 생긴 불행한 일도 필경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나 부모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중의 장애, 즉 시각, 청각 및 언어 장애 속에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1880-1968)는 새 교회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만이라도 아름다운 하늘과 땅,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27년에 ‘내 어둠 속의 빛’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나의 빛이었고, 내 손의 지팡이였으며, 그의 밝은 시력이 나의 길에 함께했다...’ 그녀가 한 말을 되뇌면서, 그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들은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지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장 눈앞의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주님을 원망하고 의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며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 주님은 가난한 시골의 보잘것없는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temple)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인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라는 참된 진리가 새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나 주님께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사장(priest)은 본래 선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그런 자아에서 나오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질 때, 자아의 악과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된 겉뜻과 그 속에 감춰진 속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뜻만 있고 속뜻이 없다면, 말씀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영혼과 분리된 육신이 곧 시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속뜻만 있고 겉뜻이 없으면, 속뜻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용물만 있고,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신성한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겉뜻만 말씀이고, 속뜻은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자들이며, 자아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3절과 4절,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이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면 요한은 속뜻을 담는 그릇인 말씀의 겉뜻을 표상합니다. 요한을 가리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말씀의 겉뜻은 속뜻을 담기 위해 예비한 그릇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는 주님의 교회에 입문하는 것, 즉 회개와 거듭남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추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선, 또는 인애, 즉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씀의 겉뜻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진리, 또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한의 세례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새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삶은 없더라도 신앙, 즉 믿음만으로 능히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과는 반대되는 신앙이지요.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이 하나님으로 온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 교회나 오늘날의 주류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체어리티의 삶은 빼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가르칩니다.

 

※ 지금까지 개신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제가 볼 때는 위 문장처럼 노골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새 교회 목회자들은 개신교 경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잠깐 다니신 것만 있어 그 안에 깊숙이 있어 본 적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 관련, 스베덴보리의 표현들을 보면, 살짝 무슨 중간이라는 게 없어 보이거든요... 다만 에베소서 다음 본문을 근거로 행위, 즉 체어리티의 삶을 덜 강조하거나 막연히 ‘뒤따라오는 것’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지요.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다만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양자택일식 접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어 옮깁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창안한 마틴 루터(1483-1546)를 영계에서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 만에 의한 '이신득의'(위 이신칭의의 다른 말)라는 독단교리가 성언(聖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 체어리티, 참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속량에 관해 성언에 의한 새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교회가 주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동하며, 점차적으로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운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하는 데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성언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고 자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독단교리들, 곧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따위를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한 광인(狂人, 미치광이, 루터 자신을 말함)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광인이 된 것, 곧 이 독단교리 안에 내포된 사상들이 명확히 성서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그들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이어 나는 천사들에게 루터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 교리로 자신들을 굳힌 다른 많은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루터의 회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글로나 설교들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속 사람 안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와는 달리 젊어서부터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찬동하는 논조로 체어리티의 영적 성질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그 교리에 다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루터는 겉으로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켜, 구원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로마 카톨릭 종도들 때문에 그리하였고, 그 실제에 있어서는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하였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즉 루터가 현 개신교가 그토록 붙들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를 만든 것은 로마 카톨릭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사후 영계에서 스베덴보리를 만나 이 사실을 자백하고, 돌이켰다는 얘기입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 //

 

그러면서, 즉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 아래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물으시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위선을 주님께서 꼬집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음과 같이 의논합니다. 5절로 7절,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이 말씀의 외적 부분인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면, 세례는 말씀의 내적 부분인 선과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인정한다는 건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믿음 만의 신앙을 가르친 자들은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분리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사로이 만든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돌로 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는 건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양심을 따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주님과 말씀의 권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에 따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합리성, 즉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연결하는 중간이 열리고, 이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와 그 속에 계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의 가르침,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의 겉뜻만으로도 구원에 관해 꼭 필요한 진리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손과 발만은 그대로 노출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성전에서 말씀의 속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속뜻이야말로 다시 오신 주님이시고, 마지막 때 보내주시기로 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성령이 왜 한 분 주님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왜 믿기만 하면 안 되고, 그 믿음에 기반한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받아들이더라도 일부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영적 합리성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이고, 이는 곧 자아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아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악하고 거짓된 것이 없는지 늘 살피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강처럼 흘러들어와 광야와 같은 마음을 적셔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8)

 

아멘

 

 

 

2022-05-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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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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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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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본문 47절에는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의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아멘

 

 

 

 

2022-05-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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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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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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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2022-05-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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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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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의 속뜻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아멘

 

2022-04-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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