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41-47)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주의 모든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 안에 질서를 만드셨다. 주님은 질서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에 내려오셔서 실제로 사람이 되려고 하셨을 때 수태하고 출생하며 교육을 받고 점진적으로 지식을 획득하며 그렇게 해서 지성과 지혜 가운데로 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주님은 당신의 인성에 있어 사람이셨기 때문에 여느 아기들과 같은 아기이셨고, 여느 소년들과 같은 소년이셨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주님에게는 이러한 성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속하고 충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의 성장이 질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TCR.89, 이순철 역) ...at the time of their creation, and therefore his omnipotence in the universe and in each and all things of it, proceeds and operates in accordance with the laws of his order. (This has already been treated of consecutively, n. 49–74. ) Since, then, it was God who descended, and since (as is there shown) he is order itself, it was necessary, if he was to become man actually, that he should be conceived, carried in the womb, born, educated, acquire knowledges gradually, and thereby be introduced into intelligence and wisdom. In respect to his human he was, for this reason, an infant like other infants, a boy like other boys, and so on; with the sole difference that this development was accomplished in him more quickly, more fully, and more perfectly than in others. That this development was in accordance with order is evident from these words in Luke: And the child Jesus grew and waxed strong in spirit. And Jesus advanced in wisdom, and in the stages of life, and in favor with God and man (Luke 2:40, 52). (TCR.89, Ager)

 

 

오늘 말씀은 예수님 열두 살 되던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가 일어난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로는 주님이 오시는 것과 구원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류는 죄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지옥에 억눌려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사적, 그러니까 예수님 성육신 이후로 볼 때, 첫 번째 유월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이고, 신앙인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를 처음 받아들여 거듭남의 길로 들어섰을 때가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장 24절에 보면 애굽을 막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출12:24)

 

주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정하신 이유는, 모세 때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은 인류가 지옥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뿐 그것으로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수없이 많은 유월절을 거쳐야만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 41절과 4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말 그대로,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으로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구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영적으로 성장하신 모습이고, 또 하나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가 각자의 내면에서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입장에서 열두(12) 살이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십사만 사천과 같이 열둘과 관련된 수가 많습니다. 열둘이라는 수가 그렇게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 의미로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시기에 이미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셨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기독교’ 89번 글은,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장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시다는 것 등을 전혀 모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느 인간과 똑같이 부모님을 통해, 또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배움의 과정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과정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당신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열두 살이 되었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 시기에 이미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또한 능력을 이미 갖추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고 적어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한 모든 준비가 열두 살 때에 이미 거의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신 것은 언제일까요?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자 거룩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인성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인성입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의 인성에 대해, 창조되지 않은(uncreate) 인성이요, 주님 안에 영원 전부터 잠재해 있었던 인성이라고 말합니다. (DLW.233).

 

※ 이 DLW(Divine Love and Wisdom,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2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윗글은 아래 내용 중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in the Lord from eternity, who is Jehovah, before his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the two prior degrees existed actually, and the third degree potentially, as they do also with angels; but that after the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he put on over these the third degree, called the natural, thereby becoming man, like a man in the world; but with the difference, that in the Lord this degree, like the prior degrees, is infinite and uncreate, while in angel and in man they are all finite and created...

 

그 잠재해 있던 인성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면, 지옥으로부터 오는 극심한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한한 인성을 벗으시고,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무한하고, 창조되지 않은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간성을 완전히 벗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살이 되셨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구원의 능력을 가지셨다는 의미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주님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주님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과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의 진리의 성품과 선의 성품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시기에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선을 동반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가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를 나타낸다고 할 때,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경우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계속 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단계까지 진리가 성장했느냐 하면, 개인을 구원하는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진리, 즉 구원의 모든 능력을 가진 진리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교리의 지식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렇게 배웁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진리가 될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리의 지식을 행동으로 하나씩 옮길 때 진리가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교리의 지식 안으로 선을 넣어 주시구요, 그렇게 해서 지식은 진리가 됩니다. 진리 안에는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에서 올라오는 유혹을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또한 좋지 않은 습관들을 거절할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모두 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문서에서는 선이 없는 진리를 겨울의 햇빛과 같다고 말합니다. 겨울의 빛은 열기가 없고 냉냉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연계의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진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열두 살이 됐다는 의미는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지식의 차원을 넘어 선이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 부부가 열두 살 된 예수와 동행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의식(意識)을 나타낸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두 가지 의식이란,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love to the neighbor; charity)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속 사람 안에 있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는 다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실체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처음에는 속 사람 안에 생기지만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겉 사람은 보통 주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명예,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쾌락,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겉 사람입니다. 교회가 속 사람 안에만 있고, 겉 사람 안에는 없다는 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요셉, 마리아 부부는 어떤 교회를 나타낼까요? 겉 사람 안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셉, 마리아 부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의식이 속 사람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 신앙인들의 의식은 겉 사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 빠져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욕과 소망, 실질적인 행위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것은 겉 사람의 의식을 떠나 속 사람의 의식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인 것을 떠나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沈潛), 잠기는 상태, 그런 상태가 지금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속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주님에 의해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지옥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유월절입니다. 주님께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라 하신 것은 그런 뜻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계속 유월절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 마리아 부부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다 끝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들의 집이 나사렛이니까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는 말이겠지요. 여기서 돌아갔다는 말은 속 사람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자기의 내면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의 상태에 있다가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 머무는 것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상태라면,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속 사람의 상태에서 깨우친 것들을 활용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예수님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신앙인들은 겉 사람 속에 머물 때라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모든 행위 가운데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예루살렘에 두고 왔습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선을 동반한 진리는 없고 그냥 지식만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셉, 마리아 부부는 진리를 잃어버린 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직 진리인 줄 압니다. 그것을 본문 44절에서는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진리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까요? 오늘 말씀에서는 ‘하룻길을 간 후’라고 합니다. 사람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주 삐걱거립니다. 그때 ‘나는 옳게 한다고 하는데 왜 자꾸 실패를 하는 거지?’라고 자문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진실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이웃과 교회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구나 깨닫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교만이고 자기 사랑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의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는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합니다. 45절에서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가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룻길을 걸어오는 것이 나름에는 진리를 따라 산다 생각하면서 살았던 기간이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다시 갖는 것이지요. 46절에는 그렇게 해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여기서 사흘은 내 속에 진리가 없음을 느끼면서 진리를 찾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는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자책과 애통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노력하는 것이 사흘입니다. 왜냐하면 숫자 3은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 그때 진리이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씀에는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생이 무슨 뜻일까요? 선생은 유대 사회의 랍비들을 말하지만, 내적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교리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 중에 앉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여기서 지혜란 교리의 가르침을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또한 주님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실하고 순수한 것들입니다. 이전에는 분노와 질투와 증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연민과 화해 같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그것이 주님이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여기서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똑같은 상태에서는 아무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태로 올라갈 때, 그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에 놀라고, 또 이전의 상태에 비해 새로운 상태가 얼마나 다른지 놀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원래는 52절까지 있는 내용인데 내용이 길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모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해마다 왕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거주하시는 곳은 나사렛이지만,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찾아오면 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은 속뜻으로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면 나사렛은 무슨 뜻일까요? 성 문서에는 나사렛의 속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나사렛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땅에 있다는 것과 그곳에서 주님이 배척당하셨다는 것 등을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돌아간 곳, 즉 나사렛은 겉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겉 사람은 주님을 가장 배척하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그곳에 세워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부부가 주님과 함께 나사렛과 예루살렘을 오고 가는 것은 우리들의 영적 의식이 수시로 겉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고, 속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겉 사람 속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고, 그때는 보통 주님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때가 있지요. 마음속에 온기 대신 냉기가 흐르거나 진실성이 없다 느껴질 때입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부부처럼 진리를 되찾기 위해 속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해서 진실로 나를 살리는 것, 나를 영원히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때 교리 가운데서 빛나는 주님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7:31)

 

아멘

 

 

원본

2017-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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