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2:48-51)

 

 

말씀의 모든 구절에서 언급하는 아버지는 잉태로부터 주님 안에 있던 신성을 뜻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사람의 몸 안에 혼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신성에서 비롯한 인성 그 자체이다. 이 인성이 신성이 되었으므로, 사람이 오직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각과 신앙과 예배 안에서 아버지와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신 주님을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 누구든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또한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L.32:7, 이순철 역)

 

※ 이 L(Doctrine of the Lord) 32번 글 7번 항에 대한 Pott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n these and all other passages where “the Father” is mentioned, there is meant the Divine which was in the Lord from conception, and which,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of the Christian world, was circumstanced as is the soul in the body with man. The human itself from this Divine is the son of God. Now as this human was made Divine, therefore, in order to prevent man from approaching the Father only, and thereby in thought, faith, and thence in worship, separating the Father from the Lord in whom the Father is, after the Lord had taught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that the Father is in him, and he in the Father; that all should abide in him; and that no one cometh to the Father but by him, he taught also that we must believe in him, and that man is saved by a faith directed to him.

 

 

지난 시간에는 요셉, 마리아 부부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헤어진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2장 4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이 말씀에서 ‘친족’은 속뜻으로는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선과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선과 진리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선입니다. 그 교회의 선을 말씀에서는 친척이라고 부릅니다. 친척이 교회의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을 뜻하는 것은 누가복음 2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교회 마지막 때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21:16)

 

라고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은 선과 진리와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에서는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는 말씀은, 교회가 타락해서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 교회의 악과 거짓 진리가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죽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친족 가운데서 예수를 찾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행동이 다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 가운데 있는 선이나 악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친족은 결국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말과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지금 요셉, 마리아 부부가 친족 중에서 예수가 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결국 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와 요셉은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룻길이나 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를 발견합니다. 48절에서는 소년 예수와 그 부모가 만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가 하는 말을 통해 주님을 잃어버렸을 때, 신앙인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일들이 순조로울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들이 모두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시련이 있을 때, 삶을 돌아보고 주님이 그곳에 계신지를 살핍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진리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여태까지 한 일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셉, 마리아 부부가 일행 중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를 되찾기 위해 다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진리가 있어야 진리의 능력으로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접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의 욕망들을 쫓아다녔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면 주님으로부터 진실하고 선한 것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말이나 행동들이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자존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그래야 요셉, 마리아 부부처럼 주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마리아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서는 ‘아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son, 즉 ‘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야’라는 말에서, 마리아가 다시 진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우리가 아는 진리의 지식이 아니고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는 진리이지요.

 

계속해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마리아의 원망 섞인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게 원망 비슷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꼭 잡아주셨더라면 제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강한 팔로 저를 단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시고 경고도 하시지만, 일단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 억지로 막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지요. 계속해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합니다. 한번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을 되찾을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일이 잘 안되고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그동안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합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께서 4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교회와 함께 계심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늘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곳에 주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면 주님이 떠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대신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아버지의 집이 없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50절입니다.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주님을 만났다고는 하나 아직 그들에게 온전한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사람은 온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가운데 있을 때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영의 눈이 열리고,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와 관련,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1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두’(12)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두 시간’은 우리가 완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은 깨달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라는 말씀은,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그러면 ‘’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며, 자기 안에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깨달음의 상태 가운데 있을 때는 진리를 옳게 이해하고, 거짓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을 때만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51절입니다.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이 말씀은 주께서 일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나타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예루살렘 성전은 속 사람 안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이고요, 그리고 주님께서 나사렛에 내려오신 것은, 겉 사람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라는 이 말씀은 속 사람 깊은 곳에 계시던 주님이 이제 겉 사람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동안은 주님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온전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때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순종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에게 순종하실까요? 주님은 오직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만 순종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하여 늘 겸비(謙卑)의 자세를 지키셨습니다. 그러한 겸비와 비움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에 대한 겸비가 없으면 신성과 연결이 되지 않으며, 지옥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주님께서 순종하셨다는 말씀은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 순종하셨다는 뜻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는 오직 선만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이 진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요, 진리가 선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불덩이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양의 빛이 열기를 자연계에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진리는 오직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순종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순종하시는 것이며,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오직 선한 삶을 위해 쓰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말’이란 주님한테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두니라’는 깨우친 진리를 의지 안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진리가 선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진리는 의지 안에 새겨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이성적으로 믿는 단계에서 그것을 의도하고 기쁨으로 행하는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바로 갔겠습니까? 여기도 들르고 저기도 들르면서 아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신앙인들도 진리에서 멀어졌다고 느낄 때,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어떤 악과 거짓들이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내면 깊은 곳에서 가까스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진리이신 주님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행위 가운데 있는 악과 거짓을 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상태를 낮이요, 열두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시간은 진리 안에 있는 상태이며, 낮은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분별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삶과 행위 가운데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에서 일단 멀어지면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아이의 모습을 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아이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한 것은 신앙인들의 애통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우리는 진리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진리는 오직 선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적인 호기심이나, 또는 다른 이유로 진리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선을 위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때 진리는 각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새겨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

 

아멘

 

 

원본

2017-0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5-06(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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