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5'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5.03.05 16. 눅3:1-6,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3:1-6)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제거하는 것은 오직 신적 섭리에 따라 하신다. 그러므로 죄가 사해질 때 제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회개를 통해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죄가 사해진다고 믿거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교황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인 자비와 즉각적인 구원을 믿는다. 그러나 진리는 그 반대이다. 즉 죄는 제거될 때 사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에 앞서 회개가 있어야 하며,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가르치도록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7-48) (DP.280, 이순철 역)

 

※ 이 DP(Divine Providence) 280번 글에 대한 Wunsch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t is also an error of the age to suppose that when sins are remitted they are taken away. This is the error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ir sins are pardoned by the sacrament of the Holy Supper although they have not removed them from themselves by repentance. Those also commit this error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faith alone; those also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papal dispensations. All these believe in unmediated mercy and instant salvation. But when the statement is reversed it becomes truth, that is, when sins are removed they are also remitted. For repentance precedes pardon, and aside from repentance there is no pardon. Therefore the Lord bade his disciples: That they should preach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Luke 24:47-48),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픕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3월 12일 주일 설교입니다. 참고로, 그 이틀 전인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자신만 옳고, 상대는 잘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합니다. 사회가 둘로 갈라져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한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악은 자연적인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심어져 있으며, 이때 의지는 이성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이 TCR(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 evils into which man is born are generated in the will of the natural man, and that the will causes the understanding to favor it by thinking in agreement with it...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은 이성과 의지로 되어 있는데, 의지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성이 올바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성이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악에 의해 철저히 조종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판단하도록 이성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 2025년 3월 4일 현재, 이 원고를 다듬는 지금도 예를 들어, 헌재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더불어민주당과 그밖에 조중동, JTBC, 기타 레거시 방송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밝고 명료한 사실, 진실 앞에서도 어쩜 저렇게나 정반대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만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러 명의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가장 높은 지배자가 누구입니까? 디베료라는 로마 황제이고요, 그리고 그에게 위임을 받은 네 명의 지도자들, 즉 총독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 동생 빌립과 루사니아가 유대 땅을 넷으로 분할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 디베랴는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주전31–주후14)를 이은 2대 티베리우스(주후14–37) 황제를 말합니다.

 

※ 대왕 헤롯(주전37–4)의 사후, 그의 유언장에 따라 수도 예루살렘을 포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역을 할당받은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주전4–주후6)는, 그러나 그 폭정으로 폐위되고, 그의 지역은 훗날 대왕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주후37–44) 때까지 로마 제국에 편입, 로마 황제가 파견하는 총독들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는 다섯 번째 총독입니다.

 

※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는 누가복음 여기 외에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제사장은 그 유명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입니다. 말씀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겉으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이름들 속에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聖) 문서에는 그 이름들이 각각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모두 유대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실로부터 그 이름들이 타락한 교회의 여러 가지 거짓 진리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짐작은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지배자나 ‘’은 으뜸이 되는 진리를 나타내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으뜸 되는 진리라는 것은,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교파들과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안나스와 가야바’란 인물들은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 포로기 이후 유대 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신정 국가의 우두머리이니까요. 이 대제사장의 역사만으로도 유대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온갖 부정부패의 썩은 냄새가 진동했는데요, 2025년 지금,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처럼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왕 헤롯의 등장부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때(주전37-주후70)까지 107년 동안 28명의 대제사장이 난립하는, 가장 중증 기간에 주님이 오신 것이며, 그 기간의 하이라이트 암세포들이 바로 이들 안나스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본래 선을 의미하지만, 반대로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교회의 선을 나타내지 않고, 악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고, 심문하고, 또한 십자가에 매달았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에 나오는 유대의 지배자들과 성직자들은 모두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해서 만든 거짓도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섞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유대의 지배자들을 보면 유대 사람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디베료’나 ‘본디오 빌라도’는 완전한 이방인인 반면, ‘헤롯’, ‘빌립’ 같은 사람들은 이두매 출신 아버지 대왕 헤롯으로 인해 순수한 유대인 혈통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는, 말하자면 다른 종교의 교리에서 차용해 섞은 거짓 진리이고, 나머지 ‘안나스와 가야바’는, 비록 혈통은 순수한 유대인이어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 부패함이 너무 심한 나머지, 말씀을 왜곡해 만든 거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진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악과 거짓은 일반적인 게 있고, 세부적인 게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이해를 돕는 글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중 창3:15, ‘’에 관한 내용입니다.

 

‘뱀’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사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마23:33) 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AC.251)

 

선과 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다음은 창4:4, ‘기름’에 관한 내용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속(屬, genera)과, 그리고 더더욱 종(種, species)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세가 백성 앞에서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32:14)

 

그 속뜻을 모르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들 표현의 상응이 무엇인지를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속뜻을 모르면, 이런 표현들, 즉 ‘소의 엉긴 젖’(the butter of kine), ‘양의 젖’(the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the fat of lambs),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지극히 아름다운 밀’(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즙의 붉은 술’(the blood of the grape)은 그저 단어의 나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라도 이 표현들은 전체로도 개별로도 천적인 것들의 속과 종을 의미합니다. (AC.353) //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고 합니다. ‘열다섯 해’가 되었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숫자 14는 완전함을 뜻하는 7이 두 개가 모인 수이기 때문에 하나의 영적 상태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는 14 다음에 처음 시작하는 수로서, 그러니까 ‘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는 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은 디베료라고 하는 거짓 진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상태였다면, ‘열다섯 해’라는 때는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숫자 관련,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9장, ‘천국의 글’ 263번 글입니다.

 

나는 또 오직 일련의 숫자만 정렬해 놓은 천국의 글도 보았다. 그 적힌 방식은 마치 글자와 낱말로 된 글과 같았다. 이 글은 가장 내적 천국에서 온 것이며, 그 천국의 글은, 거기 담긴 생각이 흘러 내려오면, 더 낮은 천국들에서는 천사들에게 숫자로 나타난다는 것도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숫자로 된 글은 따라서 비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중 어떤 것은 사고로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숫자는 상응을 하며, 낱말과 마찬가지로 그 상응에 따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숫자는 일반적인 것을, 낱말은 세부적인 것을 다룬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것 하나가 수없이 많은 세부 사항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숫자로 된 글은 문자로 된 글보다 더 많은 비의를 담고 있다. 이로써 나는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이 낱말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3, 4, 5, 6, 7, 8, 9, 10, 12 같은 간단한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20, 30, 50, 70, 100, 144, 1000, 10,000, 12,000 등의 복합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밝힌 바 있다. 천국에서는 이런 글을 쓸 때, 언제나 맨 앞에 주제를 정하듯 하나의 숫자가 오고, 그 다음에 연계성에 따라 일련의 숫자들이 따른다. 그 한 숫자는 다루어진 문제의 목차와 같고, 그에 따르는 숫자들은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HH.263) //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여실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으로 표상되는 태고교회가 몰락하고, 고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상응의 지식을 주셨으며, 고대교회가 몰락하고 유대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구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교회 후에 기독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신약의 말씀을 주셨고요, 기독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 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불러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는데, 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외적인 것, 그러니까 글자의 뜻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그렇게 말씀의 외적인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 그는 메뚜기를 먹고, 석청(꿀)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1:6)

 

메뚜기’는 외적인 것을 의미하고, ‘석청’은 말씀의 외적인 지식을 취할 때 느끼는 달콤함, 즉 기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외적 의미의 표상인 침례(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빈 들, 즉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몰락하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영적인 상태가 광야처럼 황폐하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빈 들이고, 광야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상태일 때, 주님께서 인류에게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단강은 어떤 강입니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교회, 또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에 입문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 곧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가 있고요, 또한 잘못을 고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입문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단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주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는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지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새 교회를 위해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많은 신앙인들이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서도 자기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라는 상태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강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아직도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각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 때, 의식이 바뀝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것을 개혁이라고 하는데요, 개혁은 의지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이성(이해력 또는 이해성이라고도 함, understanding),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선과 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으며, 거짓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태가 바로 개혁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으로부터 좋지 않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제지하고, 그리고 선이나 진실을 선택하도록 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개혁의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거듭남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개혁에서 거듭남으로 옮겨가는 연결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 개혁이라면, 본격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은 거듭남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세례) 요한은 지금 회개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거듭남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계속 배반하고 악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통해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음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라고 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설명할 필요 없이 침례(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침례(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 가운데서도 외적인 글자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어떤 의미입니까?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의 상태가 될 때,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본격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은 없고, 그냥 진리만 있다면 거듭남이 가능하겠습니까? 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만 가지고는 안 되며,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수반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선이 있는 진리가 누굽니까? 요한이 준비한 길을 따라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 있고, 또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이성이 의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5절에서는 개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골짜기가 메워지고’라고 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골짜기’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안쪽에 주님이 계신 극내면(極內面, inmost)이 있고요, 그리고 그 바깥쪽에 속 사람이라는 의식이,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일상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부분, 즉 겉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주님과 천국을 향하며, 겉 사람으로 내려올수록 세상을 향하고, 지옥을 향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골짜기가 메워지고’는 무슨 뜻입니까? 개혁의 상태에서는 겉 사람의 이성 가운데 진리와 선의 지식이 채워지는데, 그것이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낡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서는 진정한 진리와 선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라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데 필요한 논리가 진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선이요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가 ‘골짜기가 메워지고’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했습니다. 산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교만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산’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교만할 수밖에 없을까요?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허물을 자꾸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비교, 이웃을 업신여기기를 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하는 것은,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면 그 교만한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아무리 선과 진리에 대해 말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말씀의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사랑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 많이 낮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굽은 것은 비뚤어지고 꼬인 것이기 때문에 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 악입니다.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 나타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악을 행하기는 하는데, 알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의 상태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또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입니다. 길이라고 하니 이제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길이 아니라 ‘험한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짓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거짓 역시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의 거짓, 즉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을 나타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말씀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소신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떠도는 소문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적당히 자기의 진리로 삼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그럴 경우, 잘못된 종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생기면서 더 이상 오류에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성이 밝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자아를 나타내고, 또한 자아에 매여 있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자아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 자신과 세상만 바라보는 것이 자아입니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은 자아에 매였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에 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개혁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구원을 ‘보았다’ 하지 않고, ‘보리라’, 즉 미래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사랑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광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배하는 악과 거짓 진리를 유대의 지도자와 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유대교회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속뜻으로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교회의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며,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을 가르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신 요한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 교회를 위하여 열어주신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바로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우리에게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천국의 비밀’ 8389번 글에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런 다음에 죄짓기를 그만두고, 믿음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 이 AC(Arcana Coelestia) 8389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주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와 그의 나라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할 줄 압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아멘

 

원본

2017-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6(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