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적(natural) 인간, 영적(spiritual) 인간, 그리고 천적(celestial) 인간이지요. 이런 차이는 사람과 천사의 내면이 세 단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거듭남의 결과, 첫 번째 단계까지만 열렸으면 일층천, 두 번째 단계까지 열렸으면 이층천, 세 번째 단계까지 다 열렸으면 삼층천으로 갑니다.
창세기 1장은 앞의 두 종류, 곧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다루며, 천적 인간은 2장에서 다룹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좀 선행될 필요가 있는데요, 아래 AC.81번 글을 읽어보세요. 참고로, 여기서는 ‘자연적 인간’ 대신 거듭남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지만, 자연적 인간은 천국에 들어는 갔으나 그 내면이 첫째 단계까지만 열린 사람을 말합니다.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을 영적 인간, 주님을 추구하다가 덤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을 천적 인간이라 한다면, 자연적 인간은 영생, 주님 등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내면이 천국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된 사람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신앙의 말을 하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거듭남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그는 하는 말, 현재 그의 상태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다음은 지상의 동식물 및 광물 등 모든 것이 천국과 어떻게 연결, 상응하는가 하는, ‘천국과 지옥’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의 일부 내용입니다. 미리 읽어두시면 좋으실 듯하며, 혹시 이 글의 위, 아래 글들이 필요하시면 아래 블로그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110. 그러나 현대인들은 상응 지식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천국의 영적인 것이 이 세상의 자연적인 것과 상응한다는 것을 천국으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몇 가지 보기를 들어 영적 사물과 자연적 사물의 상응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겠다. 땅 위의 동물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애정에 상응한다. 순하고 유익한 동물은 선한 애정에, 사납고 무익한 것은 악한 애정에 상응한다. 세부적으로 소와 송아지는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의 애정, 양과 어린양은 영적인 마음의 애정에 상응한다. 한편 새는 그 종류에 따라 자연적, 영적 지성에 상응한다. 그래서 표상 종교였던 이스라엘 교회는 소와 송아지, 수양과 양, 암수 염소, 암수 어린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성례용으로 취하여 희생과 번제의 제물로 삼았다. 그 역할로서 제물들은 영적인 것과 상응하였고, 천국에서는 그것을 상응에 따라 이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동물이 각 종류별로 모두 애정인 것은 그들이 생동하기 때문이며, 또 각 동물의 생명은 오직 애정에서 오고, 애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동물은 그 생명의 애정에 따른 타고난 지식이 있다. 사람도 그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는 동물과 유사하다. 그래서 흔히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온순한 사람은 양, 난폭하면 늑대, 교활하면 여우나 뱀 같다고 하는 것이다.
111. 식물에도 그러한 상응이 있다. 일반적으로 뜰은 천국의 지성과 지혜에 상응한다. 그래서 천국을 신의 뜨락, 또는 낙원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천국을 하늘 낙원이라고 부른다. 나무는 그 종류별로 지성과 지혜의 근원인 선과 진리의 감지 능력과 인식 능력에 상응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상응 지식이 있었으므로 산림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했다. 같은 이유로, 성경에 포도나무, 올리브, 백향목과 그 밖의 나무가 자주 언급되고, 천국과 교회와 사람이 나무에 비유되며, 선행이 열매에 비유되는 것이다. 또 나무에서 나는 먹을 것, 특히 들에서 거두는 곡식은 선과 진리에 대한 여러 애정에 상응한다. 지상의 양식이 자연적 생명에 영양을 주듯,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은 영적 생명에 영양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지탱하는 주요 식량이며, 음식 전체를 상징하는 떡(빵)은 일반적으로 모든 선에 대한 애정에 상응한다. 이 상응에 따라 주님도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유대교는 덩어리 빵을 성물로 삼아 성막 상 위에 두고 ‘진설병’(陳設餠, the bread of faces)이라 불렀다. 희생과 번제로 드린 모든 거룩한 제사도 역시 ‘떡’(bread)이라 불렸다. 더욱이 이 상응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행하는 성찬식이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례인 것이다. 이 몇 가지 보기들로 상응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10번 글에, ‘그가 수고한 시험과 괴로움으로’(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라는 표현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시험’(temptation) 관련, 59번 글입니다.
...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59. 여기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
즉, 위 ‘그가 수고한 시험과 괴로움’이란, 사람은 타고난 유전악으로 마치 악취 나는 오물에 똥파리들 꼬이듯 태생적으로 악령들의 시험을 피할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서 억지로 경건한 말을 하고, 선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부끄럽지만, 전에 제가 수도권 대형교회에서 교회 직원으로 있었을 때와, 지방에서는 나름 대형교회라는 데서 장년부 부사역자로 있었을 때가 어찌 보면 딱 이런 상태였는데요, 그때 저는 부사역자로서 겉으로는 경건한 설교와 목회 윤리가 요구하는 그런 겉모습을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까지는 아니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험 관련,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악령들은 우리의 약한 곳, 즉 우리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공격한다고 하는데요, 그러니 주님 아닌 다른 세속적,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 뺏기는 걸 조심해야겠습니다.주님을 사랑하면서, 즉 주님 사랑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걸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걸 배워야 합니다.
오늘 9번 글은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난데없이 ‘회개 상태’라니요?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글,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Secrets of Heaven) 8387-8394번을 번역한 건데요, 여기에 바로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인용합니다.
...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 관련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인데요,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12:43-45)
...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명확하게 설명하시는 ‘회개’의 개념을 숙지, 단순히 자백 관련, 성경 구절 몇 개를 암송했다고 죄 사함 받았다 여기는 그런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형(無形), 즉 보다 가치로운 삶, 윤리, 도덕, 사람다움, 더 나아가 영적인 삶이라는 게 있구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 첫 계기가 고3 때 모친 교통사고 사망이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그전까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대학교수가 되어 캠퍼스 내 교수 사택에서 살며,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걸 목표로 하였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그동안 추구하던 삶에 대해 ‘아, 내게 있는 이 모든 것, 내가 꽉 쥐고 있는 이것들은 언제든 갑자기 나를 떠날 수 있는 것들이구나!’ 깨닫게 되었고, 이후 그전까진 한 사람의 흔한 모태(母胎) 신앙인, 그러니까 교회를 그냥 일종의 문화생활, 써클활동 정도로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곧 관점의 변화, 전엔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신앙은 그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이었다면, 이후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옵션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들이 살짝 좀 이상하지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그러니까 신앙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이고, 말씀가까이하는 것도 내가 병 낫고, 복 받고, 내 삶의 형통과 핏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내 두드러진 활동,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하는 신앙생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게 다 조금씩은 필요한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요? ㅎㅎㅎ
네, 아직 이런 상태가 바로 한 사람의 거듭남 초기 상태이며, 기특하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머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가슴 신앙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죠.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순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잘난 체와 실수를 허락하십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보살피시면서 말이죠...
고3, 대1 때 시작된 이런 상태변화가 6학년 3반이 된 지금 돌아보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그때 혹시 필요하면 더 나누겠습니다.
오늘 내용대로라면,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앞부분,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11-19)
에서, ‘스스로 돌이켜’ 부분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는 부분들 등이 바로 이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두신 리메인스를 주님이 이때 꺼내쓰신 예가 아닐까 싶고,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아담으로 시작, 나중에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이 교회의 변질과 타락, 황폐화로 인한, 자기 사랑, 세상 사람의 광풍 한 가운데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노아’ 말인데요, 이 ‘노아’가 바로 첫 교회시대인 태고교회의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한 개인에 있어 리메인스가 하는 저런 역할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모든 인물명은 사실은 신앙명, 교리명, 교회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아담’하면 ‘아담’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셋’하면 ‘셋’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등등 말이죠. ‘노아’ 역시 그 당시 정말 희귀했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끝까지 붙든 사람들과그 교회, 그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노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지요.
앞서 창세기 1장은 거듭남에 수반되는 수많은 상태변화를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라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창세기 본문으로는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에 해당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뒤 17, 18, 19번 글에 나오지만, 혹시 미리 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들을 찾아가시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라와 주변의 돌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천국을 사람으로 채우시는 것이며, 이를 위해 그로 하여금 먼저 지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태어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그의 평생,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돌보시는 전 과정이 한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라 할 수 있는데요, 그 결과 누구는 천국으로, 누구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고, 그래서 천국도 그가 원해서, 지옥도 그가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평생에 천국과 지옥 간, 선과 악 간 좌우 균형을 잡아주시는데요, 즉 지옥이 잡아당기는 만큼 천국 또한 같은 힘으로, 악이 잡아당기는 만큼 선 또한, 그래서 마치 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 사이 딱 균형 잡힌 위치에서 서로 공전과 자전을 하도록, 누가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시는 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주님은 신으로서, 사랑의 신으로서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지창조의 역사로 읽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 글을 읽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실 수 있는데요, 아래 글은 이 창세기 1장 주석의 마지막 글이지만, 어쩌면 시작 시점인 지금 읽을 필요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링크 달아놓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시작과 역사는 우리, 특히 인류학자, 지질학자 등에게는 정말 꼭 알고픈 것일 수 있겠으나, 그러나 주님은 그런 거엔 거의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런 건 사람들의 천국 입국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고교회, 즉 태고시대 언어생활의 특징을 담아 인류의 시작, 지구의 시작을 창세기 1장처럼 마치 무슨 스토리텔링식으로 표현, 사람들의 천국 입국 영순위 조건인 ‘거듭남’에 대하여 그렇게 첫째 날, 둘째 날... 식의 상응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일생에 처음 주님이 찾아오신, 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천재 과학자의 감동적인 천국 체험기)에 나오는 생생한 간증입니다.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에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여행 중이었다. 그동안 영국 여행이 잦아 단골 여관과 단골식당이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여느 때처럼 단골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 불가사의한 일이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스베덴보리가 식사를 하던 식당 쪽으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비치더니 곧이어 태양 빛의 열 배쯤 되는 강렬한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는 눈이 부셔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기절할 정도로 놀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잠시 후, 그 빛 가운데서 금빛 찬란한 흰색 로브(길고 헐거운 예복으로 예복, 관복, 법복으로 쓰임)를 입은 한 인물이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베덴보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한 느낌의 인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여!”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사라진 뒤로도 식당 안엔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고, 스베덴보리는 그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스베덴보리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식당에 혼자 서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 식당에서 있었던 기이한 경험을 떠올렸다. ‘내가 헛것을 볼 정도로 몸이 안 좋은가?’ 하고 생각해 봤으나 분명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곧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저녁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다음 날 밤, 스베덴보리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막 누우려고 할 때였다. 방 안으로 전날 식당에서처럼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어제 봤던 그 신비한 인물이 또다시 나타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놀란 스베덴보리는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인물은 준엄한 어조로 스베덴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놀라지 마시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사명을 부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후세계인 영의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곳에 가서 거기 있는 영인들과 교류하고, 그 세계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이 지상 사람들에게 낱낱이 전하시오. 그대는 이 소명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오!”
이 말을 남기고 신비의 인물은 다시 사라졌다.
스베덴보리는 그날 이후 그를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지상에서는 물론이고, 그렇게 많이 드나들던 영계에서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스베덴보리의 생활과 환경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불가사의한 인물을 만난 이후로 그에게 영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영안을 뜨게 된 것이다. 또 영계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능력으로 그는 영계를 마치 자기 집과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불가사의한 인물로부터 소명을 받은 대로 영계에서 보고 들은 모든 체험을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영계 저술’의 출발이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힘, 즉 창조주의 소명을 받았음을 추호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수시로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또는 ‘허락하심’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일점일획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았는데요, 저 역시 그의 이 점 또한 온전히 본받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 heavenly secrets)’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다음은 말씀의 속뜻인 이런 아르카나가 왜 이제서야, 그러니까 지난 18세기 중반인 175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계시되었나 하는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206번 글 인용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의 마지막 저서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지난 30여 년간 밝히신 모든 계시를 정리, 정돈한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끝으로 그다음 해인 1772년에 영원한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첫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단순, 그들에게는 이것이 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설령, 그럼에도 그랬다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쓰임새도, 즉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for the reason that the Christians of the primitive church were too simple to have it disclosed to them, and if it had been it would neither have been of any use to them nor would have been understood.
둘째는, 이 초대교회 후 기독교 세계 전반에 어두움이 찾아왔는데, 먼저 많은 이단의 확산과 그 뒤를 이은 니케아 공의회의 심의와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영원부터 계시다는 세 신적 인격과,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respecting three Divine persons from eternity, and respecting the person of Christ as being the son of Mary and not the son of Jehovah God.
※ 다음은 위키백과에 있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요약 설명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영어: First Council of Nicaea, 라틴어: 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aea,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 The Catholic Church)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기독교 최초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는 하나지만, 신학적으로 갈라진 로마 제국의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단결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이 대립을 끝내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서 주교들을 소집하였다.
계속해서, 여기서, 그러니까 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현대적 믿음이 생겨났는데요, 이 믿음은 세 신이 돌아가며 자기 차례가 되면, 그때 사람들이 다가가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그러니까 이거 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을, 저거 할 때는 아들 하나님을, 그리고 요거 할 때는 성령 하나님을 찾는, 즉 용도에 따라 따로따로 하나님들을 찾는 그런 믿음인데, 이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 속한 온갖 것이 의존하는, 마치 몸에 속한 것들이 머리에 의존하듯 그렇게 의존하는 믿음입니다.From this springs the modern belief in justification, which teaches that three gods are to be approached in their order, on which faith each and all things of the present church depend as the members of the body depend on the head.
그리고 어두움이 임한 두 번째 이유는, 이로 인해 말씀의 모든 것이 이 잘못된 믿음을 확실히 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And because all things of the Word have been applied to confirm that erroneous belief,
말씀의 영적인 뜻은 열릴 수가 없었는데요,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뜻을 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말씀의 거룩함 그 자체를 (본의 아니게) 모독, 즉 더럽히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the spiritual sense could not be disclosed, for if it had been they would have applied that sense also to the same purpose, and thereby have profaned the very holiness of the Word,
그리고 역시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천국을 철저히 닫아버리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교회로부터 떼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and thus have completely closed up heaven against themselves, and have separated the Lord from the church.
네, 이런 이유로, 주님 초림 후, 지난 1750년대까지 이 아르카나가 봉인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고 계시네요.
우리는 보통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를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세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고, 뭐 잘은 모르지만, 그리고 이해는 안 되지만, 이렇게 고백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뭔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계, 특히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른가 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즉 소리 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베덴보리가 알려주는, 그리고 천국 천사들이 고백하는 삼위일체는, ‘사람이 영과 육, 그리고 활동으로 이루어지듯 주님도 영이신, 즉 신성(The 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이신, 즉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 그러니까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모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과 육, 즉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말씀 또한 동일하게, 즉 우리가 지금 우리말로 읽고 있는 이 겉 글자는 말씀의 육이요, 그 안에는 비록 우리 눈에는 안 보이나 천사들 눈에는 보이는 말씀의 영으로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 주님의 말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8)
하신 말씀은 그 안에 들어있는 말씀의 영, 곧 주님의 신성을 가리키신 것이며, 이것이 곧 오늘 AC.3번 글의 내용인, 말씀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곧 주님의 말씀을 늘 마치 양식 구하듯 찾아야 하며, 또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개역한글)
해야 할 것이며, 그러다 보면, 우리 내면이 점점 열려 어느덧 천국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천국은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상태)이며, 자기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와 같아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