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47-5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에 따라 주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그 장면을 본문 47,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특별히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걸출한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고,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 즉 그 속뜻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인 유다 지파로부터 왕들이 나온 것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즉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는 건 자아 사랑에 빠진 교회들이 진리를 파괴하는 걸 의미합니다. 자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파괴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진리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라고 하고, 그러므로 멀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 조작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십니다. 주님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자아 사랑에 빠진 유대교회가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49절과 5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청주에 살 때 일입니다. 어느 교파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는 걸 한참 듣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이 좀 있었고,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제사장은 유대교회로 상징되는 타락한 교회의 성직자를 뜻하고, 그가 보낸 종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오른쪽 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오른쪽은 선을 뜻하고, 귀는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검을 빼 종의 오른쪽 귀를 자르는 건, 진리를 가지고 거짓 진리에 맞서 싸울 때,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논쟁에서 진리의 편이 완승했다고 해서 비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승복하는 건 아닙니다. 승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인 줄 알면서 기존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뜻일까요? 대개는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린다면 잘된 일이라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으로 구원받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강압적으로 상대의 신앙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바라는 순수한 뜻이 있으면 그것을 꺾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 의지가 있어야 언젠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상대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85, 라틴) 413번 글에 따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된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을 뿐이고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치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 악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신 것은 전자의 사람, 즉 거짓 교리를 진리로 믿고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손으로 만지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79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힘이 통하고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AE.79, 이순철 역) but spiritual power is to will the good of another, and to will to convey to another as far as possible what is with oneself. This power is what “hand” in the spiritual sense signifies, and its communication and transference are signified by “touching with the hand.” (AE.79, 계1:17 속뜻 주석)

 

주님께서 손으로 만지실 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와 그 능력이 상대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영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주님을 심하게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성직자의 말만 듣고 참된 진리를 적대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비대장에 비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대적해 싸우는 악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누굴까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지적인 사람들, 즉 교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성직자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합세해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에서 강도와 도둑은 신앙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주입하는 나쁜 성직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인들에게 있는 진리와 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도둑들이 오히려 주님을 강도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몽둥이는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하십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 주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악한 권세이며, 진리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악과 거짓의 권세에 맞서 최후의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다.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성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공격해 올 때,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으로 그것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인성을 벗고, 여호와가 주시는 신적 인성을 입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를 핍박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이단이요, 불법자라 규정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제자들처럼 진리의 검을 빼 들고 그들의 귀를 잘라야 할까요?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는 자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담담히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새 교회인들은 교파가 다르다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말씀을 전할 때 논쟁하듯 몰아붙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고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이 지옥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눈부시게 떠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아멘

 

 

2023-01-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36MB
축도.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AE.79),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22:39-46)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시험을 앞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신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다보고 계셨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으셨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평소와 같이 날이 어두워지자 감람(橄欖, 올리브나무의 中譯인 橄欖을 우리말로 읽은 것. 실제로는 중국의 감람나무와 이스라엘의 올리브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 산으로 가십니다. 그것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 시험에 대해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3)

 

사람들은 이 시험을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잠시 겪으신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모든 시험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40일은 주님의 모든 시험을 뜻하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스스로 끌어들인 지옥의 공격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 말고 주님이 당신의 시험에 대해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모든 시험을 혼자 묵묵히 싸워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다고 합니다. 모든 시험을 홀로 견디신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는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이 시험을 통해 두 가지를 보여 주시려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류의 보편적 구원과 개별적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보편적 구원이란 시험을 통해 주님 자신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 즉 완전한 진리가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별적 구원은 시험을 통해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선 없는 불완전 진리가 선을 동반한 완전 진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에서 이기는 길은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셔서 주님이 도착하신 곳은 어딜까요? 본문에는 지명을 말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곳을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모습을 40절과 4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주님이 겟세마네를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택하신 까닭은, 겟세마네(가트 슈마님)는 올리브기름(슈마님)을 짜는 틀(가트)을 말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올리브기름은 사랑과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마지막 시험을 감당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주님이 계신 것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부를 때 언제라도 오셔서 진리를 가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돌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있을 때 주님은 진리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싸우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무조건 우리들의 시험에 개입하시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을 청하는 걸까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거나, 또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사람이 사랑과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천국과 영적인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는 희망과 위로, 또는 어떤 내적 기쁨의 계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순철 역) If the man prays from love and faith, and for only heavenly and spiritual things, there then comes forth in the prayer something like a revelation (which is manifested in the affection of him that prays) as to hope, consolation, or a certain inward joy. (AC.2535)

 

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그 결과로 오는 응답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진리를 따르는 대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시험에 잘 넘어지거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과 진리에 따라 이루어질 때 기도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풀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말씀에서 잔과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하고, 또한 시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결국 거짓이 진리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신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피하고 싶은 주님의 인간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게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반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은 지옥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 안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완전히 꺾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말씀에는 주님이 힘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은 주님이 지독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싸우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절망과 고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위로와 희망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을 것 같은 시험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 위 창세기 말씀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表象)합니다.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45절에는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험이 깊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옥이 너무 두렵고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기도할 의지도 사라집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이 든 상태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한심해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가만히 다가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시험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영혼은 신성(神性, Divine)이셨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간, 인성(人性, human)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아버지이신 신성 앞에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지극히 겸손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10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 비움(Exinanition)의 상태라면 신성과 인성의 합일(union) 그 자체는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이 두 상태, 즉 비움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로 계셨다. (이순철 역)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CR.104)

 

그러므로 주님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은 주님의 겸손과 비움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주님도 비움과 겸손을 통해 지독한 시험들을 이겨내시고 아버지와 분리된 인간을 벗고 아버지와 하나 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은 기도할 때는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각자 직업에 관한 일과 일상의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아닌 것을 멀리하는 것은 사랑 중에서도 첫 번째 사랑입니다. 한 손으로 악을 행하면서 다른 손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얼굴에 난 종기를 그대로 두고 분을 바르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랑과 믿음과 겸손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아멘

 

2022-12-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06(D1)-주일예배(2564,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pdf
0.39MB
성찬.pdf
0.14MB
축도.2024-10-06(D1)-주일예배(2564,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눅22:35-38)

 

 

오늘 본문 첫 구절입니다.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 아래 에피소드는 오늘 이 설교의 원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2011년 1월 2일, 정초(正初)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목회에 대한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뭐랄까 이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생계에 대한 대책도 없었고, 신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전대(纏帶,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게 된 자루,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곳으로 돈이나 물건을 넣게 되었음)도 없고, 변변한 신발도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말씀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시는 주님 말씀이 마치 제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사실 전대와 배낭, 신발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진리를 찾아 처음 새 교회로 왔을 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영적 의미로 전대와 배낭이 없다는 것은 진리, 또는 진리의 지식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동안 새 교회로 오신 분들을 보면, 대개 ‘천국과 지옥’이나 ‘참된 기독교’ 같은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진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아직 확신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게 전대와 배낭이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발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발은 인체에서 가장 낮은 데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신발은 발보다 아래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것인 감각적인 것을 뜻합니다. 감각적인 것은 어떤 걸까요? 눈과 귀, 촉감과 같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본다거나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것,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같은 말초적인 즐거움이 모두 감각적인 것입니다.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몰두하게 되면 영적인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감각적 기쁨이 영적인 것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교회를 지으면서 바닥에 온돌을 깔았는데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신을 벗음으로써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신발이 없다는 건 영적으로 나쁜 의미가 아닌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발이 없다는 건 외적인 면에서 제자들에게 부족한 게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자들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거지 같은 외적인 것들이 그다지 경건하거나 썩 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베드로는 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저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검을 꺼내어 그중 한 사람의 귀를 자르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만난 사람이 그를 고발하려고 했을 때는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어땠을까요? 적어도 겉으로는 경건했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했고, 말투는 온유하고 행동거지는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게 겉모습일 뿐이고,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처음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더냐는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시험을 통해 진리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듣고, 말씀을 통해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험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물질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직장에서의 시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6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험은 신앙의 진리를 확인하고 고취시켜 의지 안에 심으며, 그렇게 해서 인애(仁愛, charity 체어리티)의 선이 되게끔 도와준다.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AC.8966, 이순철 역) Temptations conduce to the confirmation of the truths of faith, also to the implantation of them, and the insinuation of them into the will, that they may become goods of charity. For, as before said, man fights from the truths of faith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C.8966)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는 시험을 통해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그 자체로는 선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시험에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진리의 능력은 진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의 선(goods of charity)이라고 하는 체어리티의 선은 선을 품고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라 하신 말씀은 선 없는 진리, 즉 진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 있는 진리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전대, 배낭’은 최초의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뒤의 ‘가지라’는 것은 신앙의 선, 또는 인애,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성 안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의 지식을 주님과 협력하여 의지 안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선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성 안에는 선이 없지만 의지 안에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의지 안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검이나 칼은 자아와의 싸움, 즉 시험을 뜻합니다. 그리고 겉옷은 자아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이기심이나 좋지 않은 욕망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때 그것과 싸워 몰아내야 합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에 나와 처음 배운 진리의 지식은 아무 힘이 없다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이성 안에는 진리의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양심이라는 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양심이라는 선을 가지고 처음에는 가벼운 시험부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더 큰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6663번 글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진리가 늘어난다(truths grew according to the infestations)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그리하여 완전한 말씀이 되셨습니다. 말씀 안에는 말씀의 목적인 사랑이 있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진리가 있으며, 그것의 결과인 쓸모, 쓰임새(use)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임새란 말씀 안의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통해 나오는 말씀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완전한 말씀이 되셨다는 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주님 자신이 사랑 자체, 진리 자체, 쓸모 자체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은 이사야서 53장 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비롯한 것인데, 주님은 이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 결과 자기들의 앞날도 훤하게 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속된,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인류 전체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즉 인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주된 목적인데, 주님은 자신이 먼저 영화롭게 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영화란 당신의 불완전한 인성, 즉 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유전하신 인성이 시험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통해 당신 안에 계신 신성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시험이 거듭남을 위한 시험이라면 주님의 시험은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마지막 시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대답하시길 ‘족하다’ 하십니다. 앞의 36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마치 범법자처럼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검을 들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검 두 자루를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것이면 족하다 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검은 시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뜻하고, 둘이라는 수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내놓은 검 두 자루는 곧, 시험을 통해 얻은, 선이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이면 족하다 하신 것입니다. 선과 결합한 진리만 있으면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다 보면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수록 그런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것들과 싸우려 합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외부 부조리에만 집중하고 맞서다 보면 내부의 부조리를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실제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길 바라십니다. 즉 외부 부조리와 싸울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내부 부조리를 생각하며 싸우는 것이지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외부의 부조리를 견디며 의로운 방법으로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지극히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을 마치 범법자처럼 끌어가 모욕, 폭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한 번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자기 안의 게으름과 탐욕, 이기심부터 먼저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진리는 지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차원으로,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그렇고, 외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겸손, 온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선 있는 진리로 매일 같이 승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아멘

 

2022-12-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0.39MB
축도.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0.23MB

 

 

Posted by bygracetistory
,

 

(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22:24-34)

 

 

다음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막10:35-41)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 전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의 도중에 제너럴 처치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뽑았는데, 투표 결과 아시아에서는 일본 목사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한국 목회자들도 여럿 있는데 왜 일본 목회자인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그런 생각도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심리 같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을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늘 함께 다니며 주님에게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누가 더 크냐 하며 동료들과 다툽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3417번 글 3번 항은

 

기억의 지식 안에만 있고, 인애(charity)의 삶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함에서 오는 기쁨만 알고, 겸손과 섬김의 애정에서 비롯한 천국의 기쁨은 전혀 모른다. (이순철 역) Thus they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not in the life of charity, cannot know that there is any other delight than that which results from preeminence; and because this is the only delight that is seated in their minds, and makes all their life, therefore they are utterly ignorant of the heavenly delight that results from humiliation and the affection of serving others—that is, the delight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consequently of the blessedness and happiness thence derived. (AC.3417.3)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남보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새 교회 진리가 너무 좋고, 참으로 구원의 진리라는 걸 확신하지만, 정작 실천하지는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입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 이르시길,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이방인은 교회 밖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임금과 집권자는 본래는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의 임금과 집권자라고 했기 때문에 선 없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면 은인은 누굴까요? 은인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인데, 이때 진리 실천의 힘이 진리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은인은 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말씀은, 교회 밖 사람들은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마치 구원의 진리이며 신앙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행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은 그렇더라도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너희라고 부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 있는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신 것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십니다. 큰 자와 다스리는 자는 선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고, 젊은 자와 같다, 섬기는 자와 같다는 것은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교회 밖 사람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선 있는 진리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선 있는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매우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 자기들을 모든 나라 사람 위에 높이 세우시고, 그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대다수가 메시아에 대해 그런 환상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비록 속되지만, 그러나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9절입니다.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시험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제자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지옥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당하는데, 그때 혼자서는 싸울 수 없고, 항상 주님과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험에서 싸워 이길 때, 각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그 교회의 모습과 똑같은 천국의 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긴 사람들에게 맡겨질 하나님의 나라는 지위나 권세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와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으며, 그러므로 언젠가 제자들이 이를 통해 내적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시험을 받게 될 제자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 2절 말씀입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몬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는데, 속뜻으로는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한다는 것은 시험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은 마치 농부가 키로 곡식을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거짓이 제거되고 진리가 남으며, 악이 제거되고 사랑과 체어리티가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시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너무 깊으면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새 교회에 나와 세례까지 받았던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중 일부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만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혹독한 시험에서 이긴 제자들은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체어리티 있는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새 교회 교리에서는 이것을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상태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는 상태이고, 신앙의 선 상태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선을 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돌이킨 후에’는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단 신앙의 선 상태가 되면 다시는 신앙의 진리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형제’는 거듭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사랑이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 각오는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신앙인들의 처음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어가고 나중에는 신앙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의 신앙을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울기 전은 새벽을 뜻합니다. 영적 의미로 새벽은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이며,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는 때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 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주님에 대한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을 뜻하고,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 안에 사랑이 없으면, 삶이 없으면 신앙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앙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은 가깝게는 유대교회의 몰락을, 멀게는 유대교회 이후에 세워질 교회의 몰락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새 교회의 에피소드입니다. 비록 새 교회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용이 유익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마지막 시험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 완전한 진리가 되셨다고 했는데, 그럼 왜 1,70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새 교회가 세워지고, 완전한 진리인 새 교회의 교리가 선포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질 것 같아 답변을 드립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른바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 완전한 진리를 보내주시기 전, 영계에서 먼저 이루실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심판을 통해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천국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지옥을 이기신 완전한 진리로 마지막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천국과 지옥을 그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의 질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영계의 질서를 회복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천국이 지옥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진리 또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라고 증언합니다.

 

※ 아래는 위 내용에 대한 원문입니다. 참고하세요.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TCR.791)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완전한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마리아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주님과 마리아가 접촉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왜 완전한 진리가 필요한가를 알았고, 또 완전한 진리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 있는 진리, 선을 수반, 동반한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는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셨고, 그러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완전한 능력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한 능력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당면한 문제들과 싸워 나간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아멘

 

이순철 목사

2022-11-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0.40MB
축도.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22:14-23)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은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십니다. 여기 너희, 곧 주님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는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상 것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 자유와 평화의 나라 가나안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유월절 떡과 잔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떡과 잔으로 상징되는,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선과 거짓 없는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면,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고대(苦待, 몹시 기다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제자들이 생각과 의지를 활짝 열고, 유월절 음식을 기꺼이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때가 이르렀다 했고, 주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하였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고난을 앞두고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며, 또한 말씀에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유월절 만찬을 통해 성찬 예배의 전례를 세우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신 후, 비로소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말씀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 안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인성의 끝에까지 흘러들어와 신성과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상응의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진리가 문자적 의미 안에 충만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속 사람이신 신성이 말씀의 내적 진리라면 주님의 겉 사람이신 인성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보면 고난이 있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때 구약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의 상태가 아직 내적 진리로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의 내적 의미를 완전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것은 시대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어떤 사람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또 어떤 사람은 내적 진리를 통해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그 근저(根底, 밑바탕)에 있는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는 유월절 음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17절과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17절,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주님이 주시는 잔, 즉 포도주와 주님의 피는 영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의 포도주로 표상되는 주님의 피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를 뜻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웃에게 전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를 억지로 전하라는 것은 아니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는 만큼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잔을 서로 나누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다음은 19절,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여기서 떡과 주님의 몸은 모두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The Divine Love)을 뜻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주시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 상호적 사랑을 뜻합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영원히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찬식에 담긴 이런 의미는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29절에서는 같은 말씀을,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땅에 마지막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때 포도나무에서 난 새것은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마신다는 것은 그 신성한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376번 글 26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신성했으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동시에 주님이 오시는 때는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시는 때이다. (계시록 해설 376.26, 이순철 역) And as everything Divine, since the Lord has risen, proceeds from Him, He says that He will drink it with them when the kingdom of God shall come, and it came when He reduced all things to order in the heavens and in the hells. (AE.376.26)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흠 없는 신성한 진리가 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에 오르신 후, 마지막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주님의 신성한 진리 아래 굴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마지막 새 교회에 주신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드러나는 내적 진리로 주님과 인류가 영원히 결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당신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언약의 피(blood of covenant)라 하셨습니다.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전 천국은 지옥의 팽창으로 인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악해서 사후,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악의 정도 또한 극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옥의 세력이 천국의 낮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것은 천국이 더 이상 완전하고 순수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의 흐름 또한 완전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신성하거나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직접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옥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천국과 지옥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실 수 있었던 것은 지옥을 이기신 그 신성하고 완전하신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주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를 통해서만 온전히 개혁되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는 원하기만 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21절과 22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상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곳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반하는 자는 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사로운 목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기를 잘합니다. 그동안 교회를 타락시킨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중에는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위해 그를 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타락시키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불순한 욕망이 그로 하여 주님을 배반하게 했고, 주님은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작정한 길을 가려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물으며, 우리 중에 그런 일을 행할 자가 누굴까 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진리를 팔아넘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나쁜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진리를 가까이하되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주님과 예배를 표상하던 많은 것들이 폐지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서 정하고 있는 각종 법도와 제사의 규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시고, 주님이 직접 남겨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세례(洗禮, 원어로는 βαπτίζω, βἀπτισμα, 곧 浸禮)식과 성찬식이 그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식이 왜 필요한지, 성찬식에 나누는 음식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주님이 주신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다시 오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 바탕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과 선이 없는 진리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고, 주님과 결합할 수도 없습니다. 새 교회인이라고 해서 모두 선이 있는 진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면에 새 교회가 세워진 사람이라야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찬의 떡과 잔으로 매일 같이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물질로는 살 수 없는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아멘

 

2022-11-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0.36MB
축도.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0.22MB

 

 

- YouTube

 

www.youtube.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7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8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눅22:7-13)

 

 

※ 다음은 유월절 관련 본문인 출애굽기 12장 본문 전반부입니다.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15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17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18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9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20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출12:1-20)

 

 

오늘 말씀은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유월절 만찬을 나눌 장소를 알아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 정확히는 유월절 다음날, 그러니까 유월절 해 질 무렵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이 무교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해 질 무렵을 기준으로 24시간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무교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기 전날 밤, 여호와께서는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교병(無酵餠),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빵(unleavened bread, 이스트, 곧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마짜)은 영적으로는 거짓 없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누룩은 거짓을 뜻하고, 빵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그러할 때 비로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7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영적 의미로 유월절은 신앙인에게는 거듭남의 단초(端初, 일이나 사건을 풀어나갈 수 있는 첫머리)가 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전후로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이전의 삶이 애굽이라 하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매여있는 삶이라면, 유월절 이후의 삶은 진리가 이끄는 대로 자유를 찾아가는 삶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벗어나려면 각자에게 다가오는 영적인 유월절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유월절은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을 위해 준비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을 믿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주님이 주시는, 어린 양과 무교병으로 상징되는 순진함의 선과 거짓 없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님을 따라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유월절을 준비하라는 건 단순히 만찬 장소를 준비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타성(惰性,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애굽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나서는 데 무슨 준비가 필요한가 할 수 있지만, 신앙인들 가운데는 말로만 주님을 따를 뿐, 주님이 아무리 끌어당겨도 전혀 꿈쩍도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안락한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이끄실 때, 의심하지 않고 바로 늘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유월절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베드로와 요한에게 준비를 맡기셨을까요? 그 두 사람이 신앙인의 영적 특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베드로는 진리를 뜻하고, 요한은 사랑과 인애, 그러니까 체어리티(charity)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인은 진리로 사는 사람이고, 요한으로 표상되는 신앙인은 사랑과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입니다. 진리, 또는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체어리티, 그러니까 관용, 너그러움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진리보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더 내적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교회가 서려면 그 두 성향 사람들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둘과 함께 유월절을 준비하십니다.

 

9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유월절 준비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먼저 성내(城內)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성(城)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 성과 촌락의 구분은, 울타리, 그러니까 성벽의 유무입니다.

 

그러므로 성내로 들어가라는 건, 유월절을 위한 첫 번째 준비는 교리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건 교리 관련 지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익히는 건 그것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배운 교리가 몸에 붙기 때문에, 곧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할 때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누굴까요? 각자의 내면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물을 담은 물동이는 진리의 그릇으로서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을 의미하고, 속에 담긴 물은 그 문자적 지식 안에 있는 내적 진리를 의미하며, 그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곧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집은 신앙인의 의지를 뜻합니다. 어떤 신앙인의 의지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이 물동이, 곧 그 안에 속뜻이 담긴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계신 모습이 상상이 되시지요?

 

주님께서 그 집주인에게 유월절을 먹을 방이 어디냐고 물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이 신앙인의 의지라면, 당연히 집주인은 신앙인인 우리 자신이지요. 그 사람이 보인 행동은 무엇이었나요? 12절입니다.

 

12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한글 성경에는 다락방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어퍼 룸(upper room), 즉 윗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윗방은 어떤 곳일까요? 집을 의지라 했을 때, 의지 안에 윗방, 아랫방이 있네요? 사람의 의지는 이른바 합리적 인간(rational man)이라고 하는, 영적 마음에 속한 내적 의지가 있고, 또 하나 겉 사람이라고 하는 자연적 인간(natural man)에 속한 외적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 윗방은 바로 이 내적 의지를 뜻합니다. 겉 사람에 속한 외적 의지 안에는 눈과 귀 같은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불결한 욕망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만약 주님께서 진리를 가지고 그곳으로 가셔서 가르치신다면 그들이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이지 않겠죠. 그래서 주님은 윗방, 즉 영적인 걸 추구하는 내적 의지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생명인 순진함의 선과 거짓 없는 진리를 심어주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심어진 후에 우리의 의지가 변화되는 모습을 ‘천국의 비밀’ 488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의지는 그의 생명이다. 사람이 진리를 즐거워할 때, 진리는 그의 생명의 문턱에 있으며, 진리를 자발적으로 행할 때, 온전히 그 사람 안에 있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를 자주 행동으로 옮길 때, 습관과 애정으로부터 진리가 반복해 소환되고, 그리하여 자유로부터 반복해 소환된다. (이순철 역) man’s will is his life. But when man wills the truth, it is then on the threshold of his life; and when from willing he does it, then the truth is in the whole man; and when he does it frequently, it not only recurs from habit, but also from affection, thus from freedom. (창38:19,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주석 중)

 

사람의 의지가 곧 그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의지가 가만히 있으면, 사람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의지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사람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는 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들을 좋아하던 의지가 이제는 진리를 즐거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리는 의지의 문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가 자발적으로 진리를 행동으로 옮길 때, 문턱에 있던 진리가 그의 의지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진리가 온전히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다음에는 진리를 자주 행동으로 옮깁니다.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자주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때 진리가 사람의 이성과 의지, 그리고 삶 가운데로 반복해서 소환되는데, 습관과 애정으로부터 소환된다고 합니다. 습관으로부터 소환된다는 건 진리가 몸에 배어가는 것을 말하고, 애정으로부터 소환된다는 건 진리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유로부터 소환되는 건 어떤 억압도 없는 자발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는 그렇게 점진적으로 신앙인의 생명인 의지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눠 먹은 다음 우리 내면에서 생기는 변화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려고 하실까요? 그 이유를 ‘천국의 비밀’ 5114번 글 4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깊은 내면은 신성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신성을 인정하고 사랑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성질이 있다. 그런 상호성으로 인해 사람은 신성 안에 심어진다. (이순철 역) as with man there is a connection with the Divine, and his inmost is of such a nature that he can receive the Divine, and not only receive it, but also make it his own by acknowledgment and affection, thus by reciprocation, he therefore can never die, because he has thus been implanted in the Divine, (창40: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주석 중)

 

한 마디로, 주님이 사람 안에 계시고, 사람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성(相互性, reciprocality)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상호성은 자연계의 모든 것 가운데 사람에게만 있는 특성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특성입니다. 어떻게 돌려드릴까요? 주님의 생명을 받아 그 힘으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것을 다시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상호성 때문에 주님은 유월절 음식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개중(個中)에는 상호성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 하지 않거나, 받은 다음에는 돌려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는 유월절 음식을 함께 드실 수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다음 몇 가지를 권하십니다. 첫째는 새 교회의 교리인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성내로 들어가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우리의 내적 의지 안으로 들어오실 때, 주님 앞에 서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행여 주님을 가로막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물동이를 든 사람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주님과 함께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의 생명인 의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주님을 따라 애굽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상호성으로 이웃과도 잘 지내야 합니다.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기만 하고 받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이웃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합니다. 주고받을 때는 거짓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을 나누어 먹는 것처럼 신앙인들끼리 순진하고 담백한 마음을 서로 나눠야 합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주님의 은혜가 성도들과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출12:15)

 

아멘

 

2022-10-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08(D1)-주일예배(2560, 눅22,7-13),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하니라'.pdf
0.43MB
축도.2024-09-08(D1)-주일예배(2560, 눅22,7-13),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하니라'.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으려면

 

1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5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눅22:1-6)

 

 

※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유월절’ 장인 출애굽기 12장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15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17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18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9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20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34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37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출12)

 

여기서 ‘유월(逾越)은 ‘넘어가다’(passover)라는 뜻으로, 위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기원합니다.

 

무교절의 ‘무교’(無酵)는 ‘발효되지 않은’(unleavened, 이스트, 곧 누룩을 넣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위 34절,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는 말씀에 기원합니다. 그만큼 그날 밤 상황이 긴박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이 출애굽기 12장의 속뜻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맛보게 될 해방,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맛보게 될 저주입니다. 이것을 유월절로 표상하고 있으며, 유월절 기간에 지켜야 할 것들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의 체어리티와 신앙에 관한 상태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주님의 생애에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절기가 지나면 주님은 유대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당하실 것이고, 종래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주님의 제자들은 마치 명절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에 따라 애굽을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영적 의미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매여있던 인류가 주님에 의해 영적으로 거듭나 구원받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출애굽기 12장 2절과 8절에는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달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하셨는데, 그것은 유월절로 표상되는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인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심과 온갖 정욕에 빠져 사는 삶은 덧없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는 모세는 바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표상, 곧 주님 역할을 대신하는 주님의 표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양은 선을 뜻하고, 불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라는 것은 선을 행하되 이기적인 동기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무교병과 함께 먹으라는 것 역시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뜻인데요, 무교병(無酵餠, unleavened bread),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거짓 없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쓴 나물을 먹으라 하실까요? 쓴 나물은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인간은 절대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설령 선을 행하더라도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없으면 자아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반복해서 질 때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그리고 자기 안에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있는지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주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월절 그 밤에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반드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월절의 어린 양은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순수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은 가장 큰 의미로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 시작하면서 함께 봉독한 출애굽기 12장, 유월절 장에 의하면 말이지요. 그만큼 정말 중요한 절기임에도...

 

그런데 유월절이 가까운 이때에 바로 유월절의 주인이신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굴까요? 바로 유대교회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 ‘대제사장’ 하면 그 뜻 자체로 이미 단수이어야 하지만, 본문은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적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상을 드러내고자 함인데요, 당시 안나스 가문의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이 둘이 대제사장 권력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제사장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서기관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즉 제사장은 자아 사랑에서 비롯한 악을 뜻하고, 서기관은 악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를 통해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만 아는 자들이며,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왜곡하는, 악하고 거짓된 자들입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백성은 영어로는 people이고, 속뜻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해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 안에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주님을 지지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유대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하든 그들의 눈을 피해 주님을 해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을 때, 바로 3절과 같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3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지만,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과 그것에서 비롯한 악을 뜻합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의 제자 유다는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자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유다의 경우는 그런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속으로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은 유다에게 어떤 생각을 불어넣었을까요?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지키는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을 팔아 버리려 합니다. 진리를 따라 자아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거나 뒷걸음질 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지옥의 영들이 소리 없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를 버리고, 이전의 잘못된 신앙이나 삶의 습관으로 돌아가라고 유혹합니다. 얼마든지 쉽게 구원받는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경비대장들에게 주님을 넘겨주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대제사장들은 지옥의 영들이 불어넣는 자아 사랑의 악을 뜻하고, 경비대장들은 지옥이 불어넣는 교리의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경비대장들이 거짓 교리를 뜻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군인은 거짓과 싸우는 진리를 뜻하거나, 또는 진리와 싸우는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팔아넘기려는 주님은 누굴까요? 그동안 그가 믿고 따랐던 참된 진리를 뜻합니다.

 

유다가 자기 스승을 팔아넘기려 하자 그들이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유다가 마침내 지옥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유다가 원했던 것은 뭘까요? 돈입니다. 돈은 속뜻으로는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 진리로부터 생기는 비뚤어진 지성을 뜻합니다. 유다와 같이 도중에 진리를 포기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지옥은 그들에게 자아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믿고 참된 진리를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유다가 돈을 받기로 약속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따라 사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지옥이 수시로 악하고 거짓된 생각을 불어넣어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증오심과 세상 달콤한 것들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들은 그런 모든 것을 이기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으면 마치 악어가 먹이를 무는 것처럼 지옥이 다가와 그를 덮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다라는 이름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지만, 반대의 의미는 자아 사랑의 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 중 유다는 자아 사랑이 특히 강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타락하면 아주 심하게 타락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750번 글 3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의 선은 천적 사랑의 선, 즉 주님 사랑에서 비롯한 선과 영적 사랑의 선, 즉 이웃 사랑에서 비롯한 선 두 가지로 되어 있다. 천적 사랑의 선의 정반대는 자아 사랑의 악이며, 영적 사랑의 선의 정반대는 세상 사랑의 악이다. 자아 사랑의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이나 다 반대하지만, 세상 사랑의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서술을 통해 가장 고결한 선은 주님 사랑에 속한 선이며, 가장 나쁜 악은 자아 사랑에 속한 악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유다가 왜 주님을 팔아넘길 정도로 심하게 타락했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의 성향은 자기 마음대로 타고 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자아 사랑이 많다고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의지해 자아를 극복하기만 하면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된 것은 하루 중에도 어두운 저녁이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저녁의 상태는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다고 스스로 느낄 때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심각하게 느낄 때, 내면으로부터 영적인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자각이 있을 때, 주님께서 어린 양과 같은 순수한 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극심한 시험 가운데서도 그런 소망을 잃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고 사모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애굽의 어두운 그늘에서 건져내 홍해 저편의 가나안 땅으로 옮겨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15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출12:2. 15)

 

아멘

 

2022-10-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01(D1)-주일예배(2559, 눅22,1-6),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으려면'.pdf
0.47MB
성찬.pdf
0.14MB
축도.2024-09-01(D1)-주일예배(2559, 눅22,1-6),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으려면'.pdf
0.24MB

 

Posted by bygracetistory
,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신 속뜻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눅21:29-38)

 

 

마태복음 21장 18,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8, 19)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위에 세워진 자연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이고요,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럼에도 말씀에 따른 삶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말세에 사랑, 즉 삶이 없는 교회는 결국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걸 뜻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저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자신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렇게 무너졌고, 그 후에 세워질 교회들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는 걸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예언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들이 무너지고,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오늘 본문 29절로 3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여기 무화과나무는 낡은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내적 의미 위에 세워진 내적인 교회, 즉 영적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교회인 새 교회를 왜 자연적 교회를 표상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을까요?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회는 본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그 진리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의 새 교회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삶에 있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각박할 때가 많습니다. 따지기를 좋아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자주 다툽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 이스마엘처럼 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스마엘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처음 생기는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에서 비롯한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합리성이며, 들나귀처럼 다투기를 좋아하는 합리성입니다. 그것이 새 교회의 처음 상태입니다.

 

※ 실제로 한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8, 90년?)도 그렇고, 미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200년?)도 그렇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런 내부 다툼과 그로 인한 혼란의 시간들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따로 무슨 여러 분파를 만들어 갈라져 나가지는 않은 걸 보면 개신교와는 좀 다르구나 싶습니다. 새 교회 신앙은, 구원론 하나만 가지고 비교해 볼 때,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는 같이 간다는 것, 즉 신앙 고백이 그럴듯해도 삶이 안 받쳐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신앙인 반면, 개신교 신앙은, 물론 신앙 고백과 삶이 같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 고백만 분명하면 일단 구원은 받는다는,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관한 바른 지식이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상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화과나무에 싹이 난다는 것은 처음 새 교회에 주어지는 내적 진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애(charity), 곧 체어리티의 신앙을 뜻합니다. 이전 교회의 신앙이 믿음만의 신앙이었다면, 새 교회의 신앙은 체어리티의 신앙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통해 새 교회인들은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체어리티라는 선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여름은 선한 삶이라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말세에 낡은 교회의 심판과 새 교회의 출현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교회에 대한 심판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새 교회가 나타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심장이 병들었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바로 심장부터 떼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수습할 겨를도 없이 사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편으로 새 교회라는 새로운 심장을 준비하시고, 한편으로는 병든 심장에 손을 대십니다.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 이와 관련, 제가 고민한 아래 제 블로그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2024/8/22)

 

제가 위와 같은 글을 준비한 이유는 제 오랜 개신교 경험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개신교 교회를 다니시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분명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다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금 하신 위 말씀 중,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라는 위 말씀은 개신교회를 다니신다고 무조건 저렇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가운데 아주 악한 사람들, 즉 삶은 나 몰라라 하시면서 ‘오직 믿음’만 주장, 그걸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시는 분들과, 교리도 대충, 체어리티도 대충, 그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이라는 걸 하는 이유가 그래도 복은 받고 싶고, 어두운 기운들은 또 피하고 싶은, 거의 기복 신앙과 다름없는, 이렇게 두 경우 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분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무자비하게 지옥으로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를 밝히 열어 보여 주시고, 그 진리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심판에 대해 ‘계시록 해설’ 41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악한 사람에게는 사망이 있고, 선한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AE.414)

 

그러니까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에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심판의 날에 대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34절, 35절입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심판의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며, 그날에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덫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존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새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모두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말씀에서 방탕하고 술에 취하는 것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을 좇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는 세상의 악과 거짓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본래 말씀에서 마시거나 먹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는 의지라는 생명을 만들고, 진리를 가지고는 이성이라는 생명을 만듭니다. 말세에는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 세상 것에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고, 진실을 거짓으로 몰아 공격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악으로부터 오로지 거짓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방탕하고 술취한 것이며, 지옥이 놓은 덫에 걸려든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자아의 욕망과 세상 욕망이라는 덫에 걸리면 악의 유혹을 거절할 힘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악과 거짓을 즐기게 됩니다. 계시록 6장 16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심판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계6:16)

 

여기서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악을 뜻하고, 바위는 그런 악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자아의 악과 거짓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말씀에서는 주님을 인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인자라고 할 때는 거룩한 인간이신 주님 안에 있는 진리의 속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주님 안에 있는 선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선으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없지만, 진리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는 것은, 심판 때에 진리와 함께 있음에 기뻐하고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늘 기도하고 깨어 있었던 사람들만이 느끼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기도하는 것은 외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경건한 말과 행동, 기도와 예배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에 비해 깨어 있는 것은 내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주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것이 신앙인의 정신적 활동이라면 기도는 육신의 활동이며 둘은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혼탁하고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에 관한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만 바라보다 보면 금방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때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의 삶은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다고 합니다. 낮은 진리의 지각이 밝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외적인 삶은 그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에 밤은 진리의 지각이 흐릿할 때입니다. 그때는 말씀을 읽더라도 깨달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말을 많이 하거나 왕성한 활동을 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면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낮이 되었을 때 더욱 밝은 진리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이 외적인 경건의 상태이며 기도하시는 상태라면, 감람산에서 쉬시는 것은 내적인 경건의 상태요 깨어 있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당신의 그런 삶을 따르기를 원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 많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삶으로 보여 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혼란한 일들도 정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2)

 

아멘

2022-10-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8-25(D1)-주일예배(2558, 눅21,29-38),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신 속뜻.pdf
0.39MB
축도.2024-08-25(D1)-주일예배(2558, 눅21,29-38),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신 속뜻.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말세의 증거

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0.38MB
축도.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0.22MB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눅21:20-28)

 

 

사람이 가장 신앙하는 진리는 (내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 다음에,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천국의 비밀 9164, 이순철 역) ...When a man is in truth from good, then that truth in which he has the greatest faith is in the middle; next follow the truths in which he has less faith; and finally those which are of doubtful faith. In the borders round about are falsities, which, however, are not in a series with the truths, and do not stand upright toward heaven as do the truths of good; but are bent downward, and look toward hell insofar as they come forth from evil... (AC.9164)

 

 

지난 2주 동안 계속해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전해 드렸습니다. 첫 주에는 마지막 때 교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런 것처럼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불경하다는 것과, 그래서 말세에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계시록에서는 여자가 힘들게 아이를 낳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또 둘째 주에는 말세에는 기존 교회들에 의해 새 교회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과, 그때 새 교회 사람들은 인내함으로 오히려 영적 생명인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를 얻는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세에는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무리 잘못해도 결코 성내거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씀에서는 징벌의 날이라고 할까요? 교회가 그릇된 신앙으로 인해 영적으로 피폐해질 때, 지옥으로부터 공포와 불안감이 몰려오고, 더구나 자연적으로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데, 그때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 ‘그릇된 신앙’이란, 주님의 속성, 성품, 실제 모습에 위배 되는, 안 어울리는 신앙을 말합니다. 즉 주님은 실제로는 이런 분인데, 사람들은 저런 분, 곧 무엇을 더하거나 빼서 살짝(?) 위, 변조, 결국 자기들을 닮은 그런 이상한 신을 만들어 내고는 그 신이 곧 주님이시라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게 바로 ‘오직 믿음’의 신앙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같이 가는데, 역사적으로 인류는 여기서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 굳이 삶이 안 받쳐줘도 굳센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배우고 믿어왔는데, 각 교회 시대마다 그 시대 종말에 이르면 이런 신앙이 아주 극에 달하곤 했습니다. 위에서 ‘역사적’이라 한 것은, 이런 비극이 창세기 가인이라는 신앙과 아벨이라는 신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의 그런 상태를 본문 20절과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군대는 진리를 공격하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였다는 것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가득한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거짓 진리 때문에 교회 안에 진리가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칼은 거짓 진리를,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거짓 진리에 의해 참된 진리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악이 가득한 것, 즉 자아의 악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나라는 보통 선을 뜻하지만, 이방 나라, 또는 이방인이라 할 때는 반대로 자아의 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 ‘자아의 악’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악을 말합니다. ‘’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면 그가 의도하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악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본문 25절과 2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하늘의 징조와 땅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마지막 때 교회의 심판은 영계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지상의 교회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일월성신의 징조는 영계에서 심판이 있을 때, 그곳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상응(相應)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영계의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것은 지상 교회 안에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별이 떨어지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달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땅에서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심판을, 구체적으로는 교회 간 교리의 다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탕으로 추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맞다 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간 교리 다툼이 교회의 심판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다툼을 통해 교회의 잘못된 신앙과 타락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심판은 이렇게 영계와 자연계에서 차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새 교회가 나타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능력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까닭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 안에서 빛나는 영광이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처음 오실 때처럼 그렇게 다시 오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고, 말씀의 내적 의미로 오십니다.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이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가르칠 때도 교인들 가운데는 신앙에 따라 인애, 곧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2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본문에서 유대 및 성과 촌에 있는 자들, 그리고 아이 밴 자들, 젖을 먹이는 자들은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참된 신앙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이 밴 자, 또는 젖 먹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삶의 선을 뜻하고, 젖을 먹인다 할 때 이 젖은 삶의 선과 함께 있어야 할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누구보다 선량한 참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타락한 교회 안에서는 체어리티의 신앙, 또는 선이 있는 진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릇된 교리가 주님으로부터 교회로 유입되는 참된 선과 진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 ‘선이 있는 진리’란 그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진리를 말합니다. 얼핏, 혹은 누가 보아도 진리 같아도 실제로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진리가 있으며, 그런 진리로는 능력이 비롯되지 않습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으며, 능력은 오직 이런 선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조용기 목사 저, ‘4차원 영성’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사람, 혹은 그 장소에 주님이 임하실 수 있었던 그런 상태였음을, 천국의 능력, 입류가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상태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지 못하면, 기왕에 가지고 있던 체어리티의 선과 진리가 점점 메말라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 및 성과 촌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와 성과 촌은 교회들을, 산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선한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말세의 징조가 보일 때, 주님은 일어나 머리를 들라 하십니다. 머리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것인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고,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들라는 것은 말세에는 무엇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라는 것이고, 인간의 지혜,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9164번 글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 안에 있을 때, 그가 가장 신앙하는 그 진리가 (내면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그것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다음에, 그리고 끝에는 확신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며,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함께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진리가 참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라면, 그것이 마음의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 진리가 선이 없는 진리, 즉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마음 한복판에 자리 잡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이해하기만 할 뿐 그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라고 하는 애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욕망이나 자아에 속한 것들이 마음 한복판에 있다면, 그것을 밀어내고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가 있는 신앙을 그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 아주 사소한 습관부터 고쳐나가야 합니다. 사소한 습관들이 주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질 때, 그것과 연결된 많은 것들이 거룩하게 변하며, 그렇게 해서 거듭남의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상응을 통해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영광과 능력으로 오신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이 말씀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라고요. 그냥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좀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통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신앙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마치 유대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정결 의식의 의미가 내적인 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적인 것으로 바꿔 그것으로 교인들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잘못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능히 거듭남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아주 작은 악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큰 악도 끊게 하십니다. 아주 작은 선부터 행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눅21:28)

 

아멘

 

 

 

2022-09-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

2024-08-11(D1)-주일예배(2556, 눅21,10-19),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pdf
0.41MB
축도.2024-08-11(D1)-주일예배(2556, 눅21,10-19),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pdf
0.23MB

 

 

 

10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10-19)

 

 

(運, fortune)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질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으로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섭리는 모든 개별적인 일 속에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6494, 이순철 역) and that what is called fortune is from the influx of providence in the ultimates of order, where it so comes forth; thus that providence is in the veriest singulars of all things,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that not even a hair falls from the head without the will of God. (AC.6494)

 

 

※ 다음은 지난주 설교 부분 인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연장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세에 일어날 징조에 대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는데요, 우리는 그 대답을 계시록 12장 1절로 6절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6)

 

이 말씀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용은 뭘까요? 새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려 하는 기존 교회들을 뜻합니다. 새 교회가 처음 나타날 때는 이처럼 기존 교회들의 저항이 아주 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교회는 주님의 보호 아래 천천히, 그러나 견실하게 성장합니다.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우리 한국 새 교회가 지난 60년 동안 더러는 시험도 있었지만, 아주 조금씩, 그러나 견실하게 성장해 온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 새 교회의 경우는, 제가 알기로 1800년대 초인 1817년에 세워졌고, 그 후 70년쯤 지난 후인 1890년에 컨벤션 처치와 교리적인 견해 차이로 갈라졌으니까, 그렇게 보면 대략 1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갈 때마다 느끼는 건, 그래서인지 미국 새 교회는 교리적으로 아주 안정되어 있고, 교리에 대한 이해가 바르고 깊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새 교회는 천천히 그러나 견실하게 발전합니다. 말씀에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여자가 주님에 의해 양육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말세라고 하면, 보통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세는 성경에서 비롯한 개념으로 교회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홍수로 인해 땅이 모두 물에 잠겼던 노아 홍수 시대나,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이교도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때가 모두 영적으로는 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 11절입니다.

 

10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영어로 nation을 번역한 것으로, 속뜻으로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민족은 people을 번역한 것이고, 진리를 뜻하며, 반대로는 거짓을 말합니다. 따라서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한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끼리, 또는 거짓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말세에는 교회가 타락해 세상에 선과 진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것은 몸의 심장과 폐가 장기와 손발에 깨끗한 혈액을 공급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세에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기근은 교회 안에서 사랑이나 선이 사라지는 것을 나타내고, 전염병이 발발하는 것은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만연하여 교회가 병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무너질 때, 주님께서는 기존 교회를 대신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데, 그 교회가 계시록 12장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로 표현된 새 교회입니다.

 

새 교회가 나타날 때, 기존의 교회들은 어떻게 할까요? 교리가 이단적이라거나 하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새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여기서 내 이름은 주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속뜻으로는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charity)를 뜻합니다. 말세에 교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새 교회에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그러므로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들이 새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주님은 한 번도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나,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의 이야기는 모두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 신앙은 구원의 신앙이 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고 회당과 옥에 갇히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새 교회인들이 핍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이 새 교회를 박해할 때 새 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사전에 이런저런 궁리를 합니다. 자칫 상대가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리 궁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리 궁리하는 것은 주님의 지혜에 기대지 않고, 인간의 지혜에 기대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 안수받고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댁에 식사 초대를 받아 대접을 잘 받았는데, 식사를 마치고 어떤 장로님이 저희 새내기 목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성경책과 성문서 중 어떤 것을 더 많이 읽으십니까?”

 

※ 성(聖)문서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서 남기신 모든 기록을 말합니다.

 

그때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몸에 해당한다면,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성문서 중 어느 하나를 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의 인성과 신성 중 어느 하나를 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경히 여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아마 이런 것이 주님이 주시는 구변과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 이런 것이 바로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국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인데요, 지상에서는 태고교회 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앙이 있다면 미리 염려하거나 궁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7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이름은 인애(仁愛), 곧 체어리티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그 속에 체어리티라는 본질이 들어있는 신앙,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주님을 부를 때는 체어리티의 신앙으로부터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체어리티 신앙으로 사는 걸까요? 일을 할 때, 자신의 이익보다는 주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 세상 것보다 영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 이런 것이 모두 체어리티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으로 살고자 할 때,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으며, 또한 각자의 내면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모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이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시험을 당하여 싸울 때는 자신에게는 엄격히 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억울하거나 항변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침묵하신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내하고, 또 인내할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살아난다는 건 우리에게 있는 진리 안에 이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생기는 걸 의미합니다. 신앙인의 영혼은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어느 때는 진리만 가지고 행동하고, 어느 때는 진리와 체어리티를 함께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언제나 체어리티가 있는 진리로부터 행동합니다. 그것이 인내로부터 얻는 결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에는 교회 안에 진리와 선이 점점 사라져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도 악을 선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시련과 고난이 많습니다. 새 교회 사람들도 처음에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을 뿐,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시험이 많은 건 그래서입니다. 각자 견뎌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공격할 때에도 인내하며, 주님께 엎드리면 주님께서 머리털 하나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항상 외면하는 것만 같던 행운이 마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새털구름과 같이 몰려옵니다.

 

이 운(運, fortune)이라는 것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6494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질서의 가장 마지막의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운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개별적인 일들 속에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셨다.

 

머리털은 인체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하나님의 질서의 가장 끝단에 있는 자연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행운이나 불운 같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주님의 섭리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과,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운처럼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고, 자연적 삶의 끝에까지 흘러들어와 행운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17, 19)

 

아멘

 

2022-09-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