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의 찬송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28-33)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며, 주님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세속적 선과 또한 물질적인 선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것들은 각각 이러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선이 되며 그 안에 행복이 있다. (AC.1422:2)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총 10,837개의 글로 구성, 라틴어로 기록) 창세기 12장 3절 말씀에 대한 주석 내용입니다. Clowes 역입니다.

 

Here it is evident that “to bless the Lord” is to sing to him, to proclaim the good tidings of his salvation, to preach his wisdom and power, and thus to confess and acknowledge the Lord from the heart. They who do this cannot but be blessed by the Lord, that is, be gifted with those things which belong to blessing, namely, with celestial, spiritual, natural, worldly, and corporeal good; these, when they follow each other in this order, are the goods in which there is happiness.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 주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두 번째 본문입니다. 주님 탄생의 의미는 여러 번 설명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만, 워낙 중요한 사항이라 한 번 더 정리,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오신 것은 성경 기록을 통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탄생의 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5804번 글과 580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선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데, 그 진리는 말씀에서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진리로 인해 겉 사람이 거듭난다. (AC.5804, 5806 요약, 이순철 역) When a man has come to good by means of truth, he is “Israel”; and the truth which he then receives from good, that is, through good from the Lord, is new truth,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ile he was with his father. By means of this truth good becomes fruitful in the natural, and brings forth numberless truths wherein is good. In this way the natural is regenerated, and through fruitfulness first becomes like a tree with good fruits, and successively like a garden.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new truth from spiritual good. (AC.5804)

 

This truth is that truth which is from spiritual good (which is “Israel”), and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en with his father; but it is a still more interior truth when with Joseph. The truth which Benjamin represents when with his father, and which is called new truth, is that which alone makes man to be the church; for in this truth, or in these truths, there is life from good. That is to say,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from good, he is the church; but not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and not in the good of charity. For the truths with this man are dead, even though they are the same truths. From this it may be seen what is meant by this being the only truth of the church. (AC.580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과 베냐민은 모두 선에서 비롯한 진리 즉 새로운 진리를 표상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분은 모두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 역시 선에서 비롯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입니다.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 없는 진리, 그러니까 지식적 진리였다면 주님께서 노력하는 사람,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는 사랑이 있는 진리, 즉 선 있는 진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이전의 잘못된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됩니다. 선으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듭나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에서 베냐민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낸다는 것, 둘째는,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빛이라는 것, 셋째는, 그러므로 그 진리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넷째는, 이 진리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다섯째는,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탄생과 관련된 내적 의미입니다.

 

※ ‘선 없는 진리’, ‘선 있는 진리’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저는 ‘머리 신앙’, ‘가슴 신앙’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신앙인의 내면으로 오실 때, 즉 각 사람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이 변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저 말로만,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주님을 믿었다면, 이제는 마음으로, 의지로 주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의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속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마음으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신 다음에는 속 사람의 생각과 겉 사람의 행위가 일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드디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다음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변화를 오늘 말씀에서는 시므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속뜻으로 시므온은 ‘의지에 속한 신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신앙이 그냥 진리를 이해하는 데 그치는 신앙이었다면, 이 의지에 속한 신앙은 자기가 믿는 바를 의도하고,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므온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한글 성경은 ‘아기를 안고’로 번역하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아기를 팔로 들어 올렸다’고 합니다. 팔이 무슨 뜻인지는 새 교회 분들이라면 다 아시지요? 바로 능력입니다. 그리고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주님을 온 힘을 다해 높이구요, 자신은 한껏 낮추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아 들어 올리는 모습은 마가복음 12장 30절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30)

 

하신 주님 말씀과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시므온의 찬송인데요, 그러면 시므온은 어떻게 주님을 찬송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29절입니다.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는 종종 사람의 겉, 즉 겉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종이구요, 속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런데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합니다. 이 ‘놓아주다’라는 말은 한글 번역이고요. 영어 표현은 ‘depart’입니다. depart라는 말은 ‘떠나다’라는 뜻이지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 떠난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겉 사람의 상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즉 진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겉 사람이 선 안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못해 진리를 실천하던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진리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종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러한 변화들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해서 ‘천국의 비밀’ 8455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 속에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즉 주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또한 선한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그에게 평화가 있다. (AC.8455, 이순철 역, 출16:13,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This truth, which is called “the truth of peace,” is the very Divine truth in heaven from the Lord, which universally affects all who are there, and makes heaven to be heaven; for peace has in it confidence in the Lord, that He directs all things, and provides all things, and that He leads to a good end. When a man is in this faith, he is in peace, for he then fears nothing, and no solicitude about things to come disquiets him. A man comes into this state in proportion as he comes into love to the Lord. (AC.8455)

 

그러니까 우리가 시므온의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겉 사람의 거처가 진리에서 선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리를 강제하던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30절입니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눈이 보았사오니’는 이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알았을까요? 모든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이성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와 의지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주의 구원을 보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1절과 32절에서는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주님의 구원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만민’은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러므로 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과 관련해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21:42)

 

여기서 건축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돌은 진리이신 주님이세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진리를 더럽히고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열매 맺는 백성들이란 바로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 ‘이방을 비추는 빛’과 그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영광’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당신의 교회를 비추는 내적 진리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33절에서는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모’는 우리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나타냅니다. 부(父), 즉 아버지로 나타내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이구요, 모(母), 즉 어머니는 개별적인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삶의 행위들과 연결된 개별적 선과 진리라 하는 이유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만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부모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이구요, 구체적으로는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과 진리들입니다. 그들이 시므온의 말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적 진리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신앙으로부터 나와, 부모로 표상되는 내면의 교회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부모가 ‘시므온의 말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놀라는 것은 그냥 놀라는 것이 아니고요, 예상치도 못한 변화를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씀은 우리 속으로 오신 내적 진리이신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기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중재자로서의 진리는 내적 특성과 외적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모두 필요한 까닭은 외적 특성이 없는 내적 진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면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에게 합리적인 면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주님의 지혜를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여기이고, 주님은 저 높은 데 계십니다. 사람은 육체이고, 주님은 영이십니다. 직접, 바로, 다이렉트로 이해할 수, 인식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중간 역할을 하는 무엇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어떤 특별한 준비를 시켜주시면, 사람은 다이렉트로 천사들의 지혜, 주님의 천국 그 찬란한 빛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이며, 보통은 육에서 합리, 이성, 지성을 거쳐 영으로 나아갑니다.

 

반대로 하늘의 것, 모든 영적인 것이 지상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무슨 외형을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과 천국 간 상응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상의 무엇을 보면서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천국의 그 무엇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두 이런 상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상 만물은 저마다 천국의 그 무엇을 담는 그릇이요, 용기(用器, recipient)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육체가 영혼을 담는 그릇이듯 말이지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상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 가운데 주님의 빛을 구하며, 부지런히 이 상응 훈련을 하면, 점진적으로 내면이 열려 천국과 연결되어 모든 놀라운 삶, 곧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시는 삶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

 

따라서 내적 진리는 외적인 옷을 입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겉 사람의 가장 마지막의 안에까지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겉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재자로서 세상에 오셨고요, 또 중재하는 진리로 우리 마음속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내적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이성적이던 신앙이 의지적인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구원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지키고 행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은혜가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5:9)

 

원본

2016-10-2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21절은 누가복음 전체 강해 원본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도 사실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이런 불순한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여기 ‘주의 율법’이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 하셨을까요? ‘장자’(長子), 즉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처음 난 아들’은 사랑이 있는 신앙, 또는 체어리티(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는 사랑 또는 체어리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체어리티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태어난 진리와 신앙,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신앙,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앙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신앙, 즉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는 진리나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끔찍이도 준수하는 율법에 사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의미 없는 외적 행위만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 가령 이런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세리의 기도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구원은 체어리티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믿게 된 것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루터를 만나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796번 글입니다.

 

루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 교리(dogmas)의 극렬한 창조자였고, 변론자였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오는 수에 따라 그 열정이 더해갔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아이슬레벤(Eisleben)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집 한 채가 주어졌고, 거기서 추종자들이 와서 그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리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했으나, 간혹 그는 자기의 설교자로서의 인기에 의해서 청중들에게 마법을 거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술법은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아주 강력해서 영계에서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애(the love of self)로부터 발생하고, 발언자로 하여금 그의 반대자의 의견뿐 아니라, 그 인격까지 공격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므로 이 술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청중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그의 예전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행해진 최후 심판의 때까지, 루터가 살아온 생활 상태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처음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동시에 그의 심정 상태도 변해졌다. 그리고 내가 자연계에 있으면서 영계 안에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추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몇몇의 질문들을 하고 내 대답들을 듣고는, 그가 지금 옛 교회의 종말과 다니엘서와 복음서들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또한 이 새 교회가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표상되었음과, 또 천국 한 가운데를 나는 천사가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전파한 영원한 복음으로 표상되었음도 지각했다(계14:6). 처음에는 그는 격분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곧 새 하늘이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마28:18)에 의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자들로써 형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그는 욕설을 중지하고 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나와 전보다 친숙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독단교리(his chief dogma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을 때, 주님, 인애, 참 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말씀에 의하여 교육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새 교회가 기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성하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때에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며, 그가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말씀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독단교리들, 즉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등을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관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들이 이 독단교리들 안에 내포된 명확한 성경 말씀과의 모순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서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검문하는 천사들(the examining angels)에게 루터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로 자신들의 믿음을 굳힌 많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로나 설교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내적, 영적 속 사람(영혼) 속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믿음만에 의한 이신득의에 찬동하는 교리로 체어리티의 영적 특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그 교리에 굳어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Saxony)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가 특히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난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켰고,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합해서 구원의 방편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은 체어리티를 믿음 위에 놓고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고 부언했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

 

※ 그러니까 위 성전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던, 이런 율법 준수의 동기가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 자기 자랑이었던,

 

그런 영혼 없는 율법 행위를 부정했을 뿐, 체어리티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 즉 이 할례를 명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오직 믿음’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되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신앙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신앙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므온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창세기 29장 33절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은 신앙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새로운 신앙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신앙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신앙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머리 신앙이 가슴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신앙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신앙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신앙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신앙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내가 여호와다!’ 하시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당신 안의 신적 진리와, 여호와이신 신적 선이 하나가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본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지,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시하시는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반드시 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신앙이 이성에 속한 신앙에서 의지에 속한 신앙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신앙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신앙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신앙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어리티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원본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0(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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