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지막 가르침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24:44-53)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었을 때, 즉 신성하게 되었을 때, 주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당신의 몸 전체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여느 인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으로는 다시 살 수 없고 오로지 영으로만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35:9, 이순철 역) As the Lord’s human was glorified, that is, made Divine, he rose again after death on the third day with his whole body, which does not take place with any man; for a man rises again solely as to the spirit, and not as to the body. (L.35:9)

 

 

※ 드디어 오늘, 누가복음 마지막 본문인 24장 44절로 53절을 끝으로, 지난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부터 시작한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 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만 2년 2개월이 넘었는데요, 지금도이지만, 그때는 더더욱 말씀의 속뜻에 대해 쌩(生)초보였던지라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제힘으로만 주일 설교를 준비하려면 한 주 내내 주일설교에만 전념해도 모자라기에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다른, 이 길을 먼저 걸으신 분들의 설교를 참고하라시는 주님의 퍼셉션을 얻어 시작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주일 설교 준비였습니다. 특별히 자존심 센 저로서는 더욱 말이지요. 그러나 개인의 자존심은 주님의 퍼셉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제 짐이 ‘쉽고 가벼워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원본 그대로 인용, 그저 대신 읽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아, 이대로는 좀... 나는 몰라도 이런 속뜻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무척 생소하며, 때로는 반발심이 들 수도 있겠다’ 싶어 중간중간 최대한 양쪽, 그러니까 개신교와 이 스베덴보리 양쪽을 경험하고 있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설명을 곁들이느라 솔직히 의식적으로는 갈수록 거의 일주일 내내 이 주일 설교에만 매달리기도 했지요... 뭐,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큰 개인적 성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설교를 얼마든지 인용, 원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께도 거듭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한 가지, 특이하게도 저는 매번 원고를 인쇄, 설교 때 나누어주어 그 원고를 함께 보며 설교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글 인용 시, 가급적 그 영어 원문을 병기(倂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 역시, 주님의 퍼셉션을 따른 것입니다. 이 관련 영어 원문 찾는 시간이 제법 걸리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라신 주님의 어떤 뜻이 있으시겠지’ 믿고, 우직하게 순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디 나누어드린 이 모든 원고를 다들 몇 번씩 다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주님의 빛 비추심을 간절히 구하시면서 말이지요. 말씀의 속뜻을 맛보실수록 참 자유를 경험하시기 때문인데요, 다음 주님 말씀처럼 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네, 아멘, 아멘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시편 88편 4절로 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시험에 들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시험 중에는 종종 손과 발이 묶인 사람처럼 아무 힘을 쓸 수 없거나 죽임을 당해 웅덩이에 버려진 것 같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겪으셨던 시험을 묘사한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시험에 대해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시험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지만, 주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시험이 깊었으면 죽임을 당해 무덤에 던져진 것 같다고 하고, 아버지마저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주님은 그 모진 시험을 이김으로써 지옥을 정복하시고, 천국과 지옥의 무너진 질서를 본래대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 ‘주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다’ 하는 이유는, 주님의 성육신이 인류 전체 및 피조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무슨 비유를 들자면, 자식, 즉 책임져야 하는 자녀가 없거나 한둘인 사람과 일곱이나 열둘인 사람이 부모로서 겪게 될 그 마음고생의 무게는 차원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피조세계 전체이기 때문에 지옥 또한 주님을 향해 총력전을 펼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예 없거나 내 몸, 내 새끼 정도의 사람이면, 지옥은 그런 사람은 쳐다도 안 봅니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지옥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이 하늘에 오르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주님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교회 안의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44절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구약의 역사서를 뜻하고,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구약에 기록된 비밀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한글 성경에는 마음이라 했지만, 영어 원문에는 understanding, 즉 이해력,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이해력을 열어 말씀에 감춰진 내적인 것을 깨닫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들은 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을 통해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에는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통해 말씀의 깊은 것들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새로운 이해력을 통해 깨달은 비밀, 즉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성경의 비밀들은 뭘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46절에서 4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 전체가 기록하고 있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비밀은, 첫째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김으로써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모두 주님을 표상한다는 사실과, 예언서의 모든 내용 또한 주님의 싸움과 심판을 나타내며, 시편 말씀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표상하며, 이방인들과의 싸움은 지옥을 상대로 한 주님의 싸움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와 부활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806번 글 3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또는 거룩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옥을 영원히 굴복시키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첫 번째 원리로부터 마지막의 것을 수단으로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활동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사람에게까지 미친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의 첫 번째 사람들에게만 미쳤을 것이고,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천국의 첫 번째 사람들이 무너진다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은 끝났을 것이고, 그리하여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을 통한 주님의 신적 활동을 가리켜 가장 낮은 사람에게까지 흘러 들어오는 주님의 직접적인 입류(influx)라고 부른다. (이순철 역) The other reason was that He might glorify His Human, that is, make it Divine, since by this and by no other means is He able to keep the hells subjugated to eternity, for He thus acts to eternity from first principles by means of things ultimate, and in fullness. In this way His Divine operation reaches down even to those who are lowest in the world, while otherwise it would reach only to those who are first in heaven, and mediately through these and those that follow to the lowest, who are men; consequently if these should give way, as happened just before the Lord’s coming, the Divine operation among men would cease, and consequently they would have no means of salvation. The Divine operation of the Lord through the Human assumed in the world is called His immediate influx even to those who are lowest. (AE.806:3)

 

주님이 첫 번째 원리로부터 마지막의 것을 가지고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활동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첫 번째 원리인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사랑과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마지막의 것인 자연계의 인간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인간 안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가장 바깥쪽의 감각에까지 흘러 들어오는 데, 그때 신성의 활동은 가장 힘이 있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성의 힘이 천국의 천사들에게만 미치고 자연계에는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면, 또는 인간의 속 사람 안에만 있고, 겉 사람의 감각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까지나 지옥일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것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시고, 그리고 승리하심으로써 당신의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는 힘이 있고 완전한 진리입니다. 주님의 영화와 부활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 그러니까 육체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 즉 자기들처럼 육체로 와서 자기들처럼 말하고, 먹고 마시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수준, 자기들의 눈높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말입니다.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그러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어? 육체로 있어도 천국에 합당한 거룩함, 신성함이 가능하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살면 얼마든지 천국을 갈 수 있는 거네?’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것으로 꼭 이루어져야 할 두 번째 비밀은, 주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신적 인성, 즉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는 새 교회로부터 실질적인 회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직접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대해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질적인 회개는 스스로를 검토하여 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 주님께 기도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이순철 역) Actual repentance is examining oneself, recognizing and acknowledging one’s sins, praying to the Lord, and beginning a new life. (TCR.528)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게 아니고 죄의 고백과 함께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와 죄의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옥을 이기고 신성한 몸으로 살아나신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이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하신 것입니다. 오로지 그들만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았으며,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50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말씀을 마치시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적 의미로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말씀을 갈망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의 진리를 사랑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이라도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완전한 능력이 그 신실한 사람들을 덮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진정한 회개가 주님의 교회로부터 시작해 교회 밖의 모든 순수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온 땅을 천국으로 바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은 성경 전체가 담고 있는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것과 그렇게 해서 육신으로 부활하신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 교회를 시작으로 진정한 회개의 불길이 교회 밖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정한 회개와 죄의 용서는 입술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해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완전하고 직접적인 진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축복을 받아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과 시몬과 같은 사람, 슬퍼하며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과 말씀을 갈망하는 베다니의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진리를 향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무기력하고 열심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소해 보이는 선한 일을 매일 하나씩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워만 있던 사람은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습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도 좋겠지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10분이라도 말씀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적과 같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와 축복이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아멘

 

 

※ 이상으로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매주 그 본문이 다를 수 있는, 속뜻 주제 설교로 준비하겠습니다.

 

2023-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02(D1)-주일예배(2582, 눅24,44-53),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pdf
0.46MB
성찬.pdf
0.14MB
축도.2025-02-02(D1)-주일예배(2582, 눅24,44-53),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pdf
0.2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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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24:36-43)

 

 

※ 이제 다음 주면 누가복음 마지막 본문인 24장 44절로 53절을 끝으로, 지난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부터 시작한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만 2년 2개월이 넘었는데요, 원래대로라면, 즉 매 주일에만 했더라면 만 5, 6년도 더 걸렸을 겁니다. 처음엔 매일 예배 본문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훨씬 짧아진 것이지요. 주님의 사 복음서 중 한 권을 그 속뜻으로, 비록 다른 분의 설교를 원본으로 해서이지만, 여러 해 살피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큰 성장, 곧 말씀의 속뜻에 관한 깊은 이해에 나름 도달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금 하고 있는 이 창세기 번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개인적으로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속뜻 강해 설교 또한 병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도 살짝 가져봅니다. 아울러 지금의 저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약하지만, 주님의 허락하심과 도우심으로 제 남은 노년을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강해하면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엠마오 본문 관련, 지난 두 주간 다룬 내용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러면서 거기 있었던 사람 중 둘이 슬퍼하며 엠마오라는 마을로 돌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어디선가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다가 해 저물어 유할 곳에 들러 식사 중 그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죽은 믿음을 살리는 사랑의 떡이었습니다. 그 떡을 먹고 그들의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신앙이 살아났다는 것은 사랑 없는 믿음이 사랑 있는 신앙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그 신앙으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떡을 떼시기 전까지는 이들은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여기까지가 지난 두 주에 걸쳐 전해 드렸던 내용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얕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진리를 따라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가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진리에 복종하려면 실패와 좌절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문득 진리이신 주님이 함께하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어도 못 알아본 채 동행하다가 주님이 떡을 떼시는 순간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처럼 말이죠.

 

※ 이는 마치 아래 기술과도 같은 상황이지 싶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번 글 일부 인용인데요,

 

...가장 바깥쪽 천국에, 천국이 천사의 내면 상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 높은 천국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 무리 가운데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수많은 무리가 거기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들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의 내면이 그곳에 있는 천사들의 단계만큼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각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그 후 어떻게 변했을까요? 말씀에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리를 이미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난 주님이 바로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정한 진리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엠마오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난 후, 내면에 있는 각자의 교회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붙잡고, 이방인처럼 교회 밖에서 서성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로는 예루살렘, 즉 내면의 교회 안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주시는 살아있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교회 안에서 진리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 3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내면의 교회 안에 거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십니다. 평강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인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갈 때 꼭 평강을 기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1-13)

 

주님은 왜 그렇게 평강을 주시려고 하실까요? 평강은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내적인 평화이며, 안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 안에 있을 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거나 험담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거나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진리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영적인 평화를 주십니다.

 

※ 저 역시도 최근 이것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반복되는 무례함 앞에 속으로 당혹해 하면서 순간순간 몹시 언짢았으나 그때마다 얼른 주님의 시선으로 그 상황들을 보고자 힘썼더니 그 즉시 어두움이 물러가고, 주님이시라면 이렇게 대답하셨겠구나 싶은 그런 말로 평안한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칫 지옥문이 열릴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철저히 봉쇄, 오히려 주님 주시는 평안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며, 그에 따른 깊은 지혜 역시 얻을 수 있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날 때, 사람들은 그분을 영으로 생각할 뿐 육신을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7절과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영으로서의 주님과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영으로서의 주님은 인간의 합리성을 통해, 그러니까 이성적 이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겉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그에 비해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와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진리의 깊은 부분을 깨달았음에도 행동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으로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깨달음과 함께 행동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간의 겉 사람과 그 바깥에 있는 감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는 육신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 개신교 표현 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해’ 하는 표현들이 있는데요, 아마 이런 표현들이 방금 말한 ‘육신을 입으신 주님’에 대한 개신교식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과 지옥’ 316번 글은,

 

주께서는 영뿐 아니라 몸도 부활하셨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롭게, 즉 신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당신의 영혼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신성 자체이셨고, 당신의 몸조차도 그 영혼, 즉 아버지의 영혼과 같이 되어 신성이 되셨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16, 김은경 역) The Lord rose again not as to his spirit alone but also as to his body, because when he was in the world he glorified his whole human, that is, made it Divine; for his soul which he had from the Father was of itself the very Divine, while his body became a likeness of the soul, that is, of the Father, thus also Divine. (HH.316)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의 몸을 아버지의 신성과 하나로 만드시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인간들과 직접 만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과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주님께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뼈, 손과 발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자연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신성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10044번 글 10번 항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의 마지막까지 영화롭게 만드셨다는 것은 무덤에 당신의 인간에 속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분명하다. (이순철 역) that the Lord glorified even the ultimates of his human is plain from his words above, and also from the fact that he left nothing of his human in the sepulchre.

 

주님의 손과 발을 보고 제자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절로 43절까지 말씀입니다.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진리를 믿는 사람들조차 진리의 능력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진리는 그냥 진리일 뿐, 삶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어’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를테면 그런 태도가 주님을 영으로만 알 뿐,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아시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생선은 말씀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웠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주님께 드리는 건 지식적으로만 알뿐,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나 잘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중독들이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것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이 뭘까요? 이를테면 식탐이나 알콜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넷플릭스나 유튜브, 또는 게임이나 웹툰, 도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동안은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신 주님께 문제가 되는 진리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말입니다. 그것이 불에 구운 생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걸 맛있게 드셨습니다. 말씀에서 먹는 것은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드시는 건 사실은 주님이 드시는 게 아니라, 제자들인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의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든다는 것은 진리와 선을 각자의 사랑과 의지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거짓과 악을 혐오하게 되고, 갖가지 중독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육신으로 부활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독교’ 109번 글은,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가 저녁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교회는 아침과 같다. (이순철 역) in the Word the state of the church before the Lord’s coming is called evening, and the state after his coming is called morning.

 

고 합니다. 또

 

세상에 오시기 전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회와 함께 계셨으나, 세상에 오신 후에는 직접 교회와 함께 계신다. (이순철 역)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he wa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but only mediately, through angels who represented him; but since his coming he i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immediately;

 

고 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의 신성한 몸에서 나오는 진리는 이전의 진리와는 비할 수 없이 밝고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30장 26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때를 뜻합니다. 그리고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진리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밝고 힘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216번 글과 9828번 글은,

 

내적인 것은 마지막의 것 안에서 흐름이 멈추고 마지막의 것들과 결합하여 그곳에 머문다.

 

고 하고, 9836번 글은,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은 질서의 마지막의 것 안에 있을 때 힘이 있고 거룩하다.

 

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의 마지막의 것은 자연계와 그곳에 사는 인간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은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이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로 질서의 마지막까지 오신 것이며, 그곳에서 인간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영의 문제들을 모두, 그리고 온전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3-4)

 

아멘

 

2023-06-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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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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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25-35)

 

 

※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한 아침입니다. 간밤, 그러니까 새벽 4시쯤 서부지법 차은경 부장판사가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이에 따라 구치소에서 대기 중이던 대통령은 수형복, 그러니까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독방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재명 같은 저 파렴치범은 버젓이 저러고 다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권리인 계엄을, 그것도 두 시간짜리, 국민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은 계엄을 시행했다 하여 국회를 통해 대통령 탄핵 소추되어 현재 헌재에서 심리 중, 그것도 아주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고, 그와는 별도로 권한도 없는 공수처에 의해,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한 경찰에 의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 결국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집회 현장에 나가 저들과 함께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좋을까요? 멀쩡한 나라가 한순간에 송두리째 저 반국가 국가 전복 세력에 의해 두 눈 뜨고 넘어갈 것만 같습니다. 이토록 치밀하게 오랜 세월 저들은 한 나라 전 분야에 걸쳐 비밀하고 의뭉스럽게 몰래 준비해 왔군요! 내일은 미 트럼프가 두 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인데요, 주님이 트럼프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을 돕게 하실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대에 또다시 이런 과거 3.1 운동 같은 날이 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정말 이 나라가 그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저는 미련 없이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던질 생각입니다. 살아서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죽어서 새로운 조국인 천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리고 또 하나, 어제는 지난날 우리 교회를 크게 도우시던 귀한 권사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촌교회 고 안정희 권사님이신데, 그 인연은 과거 서울침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우리가 개척 후 7년 차 되던, 재정적으로 크게 어렵던 지난 2020년부터 여러 차례 그때마다 크게 우리를 재정적으로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주님께 쓰임 받으신 분입니다. 권사님은 우리 외에도 여러 개척 교회를 물질로 돕던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의 모친 나이 사십에 태어났으나 재가하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배다른 형제들과 보내셨고, 남편과 결혼, 자녀 넷을 두었으나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 두 여자 데리고 살다 죽을병 걸려 연락오더니, 중환자실 4개월 만에 별세, 남편을 용서하고 한 달을 우셨다는 권사님, 향년 82세를 일기로 그토록 소망하시던 천국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가셨습니다. 권사님,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권사님이 보이신 그 사랑과 돌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도우신 그 마음과 취지를 기억,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맡기신 소명 감당 후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시며, 영원한 행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지난주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님은 벌써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이르기를, ‘우리가 선지자로 믿고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째입니다.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며 슬퍼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엠마오는 영적으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주님 또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나,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들의 모습이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그들을 다스리길 원하지만,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서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상태가 나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 뜨기 직전 깊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고, 진리가 살아난 자리에 남은 빈 무덤 같은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여기서 잠깐,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말씀드리면, 이 표현과 동일한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진리인데 선 없는 진리, 선을 동반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잠깐 설명드리자면, 하늘의 해, 태양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햇볕은 선, 햇빛은 진리로 말이지요. 햇볕, 즉 열은 없고, 햇빛, 즉 빛만 있으면, 아무리 그 빛이 강렬해도 마치 겨울철 햇빛과 같아 만물이 절대 생장하지 못합니다. 만물의 생장엔 햇볕, 곧 열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볕 없는 빛, 곧 선 없는 진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선 있는 진리’라야만 한다는 것이고, 여기서 ‘’은 곧 주님이십니다. ‘선 없는 진리’, 즉 볕 없는 빛으로는 거듭남이 불가능한데,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아도 주님하고는, 즉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 대제사장들과 당시 종교 리더십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깊은 설명은 제 블로그 오늘 주일설교 게시글 하단에 pdf로 첨부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조언하는 장면인데, 이에 대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풀어 주신 내용을 지난날 청주 새 교회 시절, 이순철 목사님이 설교하신 설교 원고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3863번 글 14번 항은,

 

진리를 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인데, 이때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순철 역) seeing,”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faith from the Lord, for there is no other faith which is faith than that which comes from the Lord. This also enables man to “see,” that is, to believe; but faith from self, or from what is man’s own, is not faith, for it causes him to see falsities as truths, and truths as falsities; and if he sees truths as truths, still he does not see, because he does not believe, for he sees himself in them, and not the Lord.

 

라고 합니다. 밑에 영어 원문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라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과 주님이 주시는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 즉 인간의 자아 및 고유 본성 안에는 이기심과 세상, 세속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신앙,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안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주님을 믿되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것이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왜 진리이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의 믿음 가운데 아직 인간적인 것이 있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설교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은 ‘faith’와 ‘to believe’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둘 다 ‘믿음’으로 푸시는데요, 저는 ‘오직 믿음’의 뉘앙스가 느껴져 가급적 스베덴보리 원문을 따라 귀찮지만 좀 엄격하게 구분, ‘faith’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앙’, ‘to believe’에 해당하는 부분은 ‘믿음’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저한테는 뭐랄까... 전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더 분명히 하는 것 같고, 후자는 인간의 어떤 자의적 접근 같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나무라십니다. 선지자는 보통 말씀을 뜻하거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머리로만 믿고,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에서 오는 욕망과 그로 인한 거짓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는 별로 없고, 그냥 배우는 걸로 만족합니다.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기도 하지요. 이때가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배움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조금씩 선한 마음이 흘러들어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시험이 찾아오는데요, 시험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주도하던 옛 주인인 자아와 새로운 주인인 진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진리에 붙어 있던 거짓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그 빈 자리로 선이 있는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가진 진리는 점점 순수하고 힘 있는 진리로 변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즉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진리도 고난을 통해 더 굳건하고 거룩한 진리로 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우리에게 있는 죽은 진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시험을 딛고 살아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일행이 엠마오에 가까이 갔을 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날이 저물어 주님이 그들과 함께 유(留, 머무르다)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날이 밝을 때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입니다. 반대로 날이 저물 때는 인간의 자아가 삶을 주도할 때이며, 그러므로 시험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는 감히 지옥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은 수시로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한동안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아가 고개를 쳐듭니다. 그때 시험에 들고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떡을 주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말씀에서 떡은 사랑과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성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빵(우리말 번역으로는 떡)은 선과, 포도주는 진리와 상응하며, 그래서 함께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을 상응, 표상, 상징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우리 안에 이 신성이 있어야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 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때 그들에게 있는 자아에 속한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신앙으로 바뀌고, 그 신앙으로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그들과 함께 시험을 이기신 후,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자 32절에서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서로 이야기합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이신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매 순간 그걸 느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말처럼 말씀을 읽을 때 특별한 깨달음으로 오시거나,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오십니다. 또 시험을 이겼을 때는 큰 위로와 평화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습니다.

 

끝으로 33절로 35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때,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세상에 대한 잡다한 관심과 욕망 속에 거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예루살렘, 즉 주님의 교회 안에 거하게 됩니다. 말씀에는 그곳에 주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행동하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은 선에 대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 둘, 즉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살아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 즉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내면의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 말에 화답하듯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으로 그들의 믿음이 순종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만난 살아계신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삶의 전반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서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밝아진 눈, 곧 그렇게 눈이 밝아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이웃과 사귀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세상에서 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에 모든 걸 맡길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 5)

 

아멘

 

 

2023-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45MB
2016-10-30(D1)-주일예배(이순철 목사, 출18,19-22), '이드로가 모세에게 방침을 주다'.pdf
0.39MB
축도.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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