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1-23)

 

 

※ 오늘은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 여자를 만드셨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세기 본문을 통해, 과연 이 본문의 속뜻, 겉 글자의 뜻이 아닌, 거기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무엇인지, 특히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거의 모든 결혼식이나 결혼 관련 글마다 언급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과연 무슨 뜻인지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본문은 사람 안의 두 자아(自我, self, own, proprium 라틴, 본성)에 대한 내용인데요, 처음 주신 자아가 본래의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자아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 이 자아는 ‘본성’(本性)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초창기 영역에서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어 역본인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 교회의 교리는 자아는 악 그 자체라고 하고,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아는 정말 그렇게 악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인데, 거듭나기 전의 자아가 있고,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악하다 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죽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 ‘’(惡, evil)이란 주님에 대한 안 좋은 태도로서, 사람이 자기 본성을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안 좋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 아래는 본문 중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만드시고’에 관한 글입니다.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AC.153, 변일국 역)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전자를 지옥적 자아라고 부르고, 후자를 천국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지옥적 자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주님이 도와주시려 해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옥적 자아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자아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자발성(voluntary)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당신에게 종속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 말고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1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것이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갈비뼈는 인간의 첫 자아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자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갈비뼈에 비유했습니다. 갈비뼈의 단단하면서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위 말씀에 대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148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런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입니다. (AC.148, 변일국 역)

 

주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들어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셨습니다. 살은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자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 있는 자아인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뼈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표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아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아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높이면서 다른 사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 화합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빗대 일부가 살로 채워졌다는 것은 생명 없는 죽은 자아가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바뀌게 되면 사람도 따라 바뀝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만 좇던 사람이 점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빗대’는 거듭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가 지옥적 자아에서 천국적 자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처음부터 천국적인 자아를 주시지 않고, 지옥적 자아를 주시고 나서 천국적 자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에게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이웃 사랑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애정에 맞는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허락하시고, 거듭나려고 애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적인 자아를 주십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456번 글 3번 항 인용입니다. 역시 같은 질문, 즉 ‘왜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아있으며,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의 모든 촉감이 살아있는 똑같은 사람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놀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산 모든 사람이 저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람의 이러한 사후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그들은 교회의 신앙에 있어 이토록 핵심적인 사실을 왜 사람들에게 환상으로라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되는 거짓을 확고히 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 안에 있을 때, 환상으로 무엇을 확신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믿겠지만, 나중에 부인하게 되고, 그것은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믿다가 나중에 부인하는 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독한 사람들은 모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낮은 무서운 지옥에 가게 된다. (HH.456:3, 김은경 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가셨을 때 아담이 한 말입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여자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겉 사람 안으로 새로운 자아를 보내 주실 때의 자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 사람 안에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뼈 중의 뼈는 겉 사람 안에 본래부터 있던 지옥적 자아를 말하고, 살 중의 살은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아도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지옥적 자아가 천국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서고, 어느 때는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섭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완전히 누를 때, 인간은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천국적 자아를 통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것’은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뜻하고, ‘남자’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이고, ‘아내’(wife)가 맞습니다. 그리고 본문 원전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한 것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처럼 속 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자아를 아내라고 부를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하게 결합한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거듭나는 데 있어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6번 글 2번 항은, ‘자아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인애에 관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76:2, 이순철 역) As good and truth so appear, so do all things of the church and of heaven, and all things of love and wisdom, and all things of charity and faith; yet none of them is man’s. No one can receive them from the Lord unless it seems to him that he perceives them for himself. (DP.76:2)

 

※ 위 문장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5장, ‘사람이 이성으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법칙 중 하나다’(It Is a Law of Divine Providence That Man Shall Act from Freedom According to Reas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기 전의 자아로 지옥적 자아이고, 또 하나는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시는 천국적 자아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아는 천국적 자아이며, 그 전의 자아는 자아의 외관(appearance of proprium)일 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적 자아가 생기기 전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자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적 자아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인간의 자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매 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지옥적 자아를 딛고, 천국적 자아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부단히 천국적 자아를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일이며,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37:5)

 

아멘

 

 

2021-1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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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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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 (1)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1:67-75)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리면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어지는 본문 67절로 75절입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아시는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다음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는데요, 천사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아이의 할례 때,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은 후에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영적 의미로 어떤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나눴는데요,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 속뜻으로는 사가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인 것인데요, 이를테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며,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신앙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는 것은 신앙의 결실을 보는 것, 다시 말하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의 내면에 선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가랴라 하지 않고, ‘그 부친 사가랴’라 하는데요, 이는 새삼스럽게 사가랴가 요한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선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선을 뜻하는 까닭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양의 열기로부터 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보다 앞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서는 선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표현은, 사가랴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선 가운데로 진리가 흘러들어와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가랴는 예언을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다음에는 진리를 바탕으로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따르고요, 그러고 나면, 다시 그 선을 통해 이번에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실입니다.

 

※ 이순철 목사님은 2016년 당시 청주 새 교회 담임을 하시면서 격주로,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출애굽기를 격주로 강해하셨는데요, 위 말씀은 이런 배경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음에는 진리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자 곧 선의 시험이 왔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진리의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시험과 선의 시험이 반복되면서, 주님으로부터 한번은 진리를 획득하고, 한번은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그런 식으로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 즉 사가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요, 그에게 예언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사가랴의 예언은 한마디로, 성령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인데요, 이제 그 증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8절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지 않고,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실 주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한 번도 여호와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다면, 주님은 아마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인들로부터 큰 화를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 하시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우회적으로만 밝히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2장 29절인데요,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29-30)

 

여기서 ‘’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에 대해 ‘’라고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 5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앞에서 마가복음 12장 29절의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만 구약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주님이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진리이기 때문에, 오늘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9, 70절에서 사가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말씀은 모두 세상에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은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인데요, ‘다윗의 집’은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뿔’은 진리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하신 것이지요. 사가랴는 계속해서,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서에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일관되게 밝히신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주님께서 줄곧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은 어떤 것입니까?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주님은 유대교회가 타락해 종말로 치달을 때,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내는 악과 거짓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질식시킬 때, 그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72절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순간도 인간을 미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거나 할 때,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때가 많은데요,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요, 인간들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을 내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가엾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함이 가엾고요,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넘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기억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9849번 글에서는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가엽게 여기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신의 자비로 보호하시고 구해내시는 것을 뜻한다. (이순철 역) remembering,” when said of the Lord, denotes to have compassion, and thus from mercy to preserve or deliver

 

주님은 긍휼과 자비로 그렇게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거룩한 언약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인간을 모두 빠짐없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여기서 ‘우리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서 주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은 천적인 것,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태고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일은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태고교회 이래로 줄곧 주님께서 맹세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하는 맹세는 거짓이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맹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리입니다. 맹세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진리를 맹세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7,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주님에 관한 모든 예언은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잠재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 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이렇게 자연적인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삶의 구체적 행위 가운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셨는데요, 여기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고요, 선지자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는 바로 주님의 말씀 전체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의 진리를 실현키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원수의 손’이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악과 거짓의 위세를 뜻합니다. ‘원수의 손’이라고 할 때, 손은 능력을 뜻합니다. 악과 거짓에게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적 싸움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만으로 대처하고자 할 때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앞에서는 마치 바람 앞에 티끌처럼, 먼지처럼, 그리고 빛 앞에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것이 악과 거짓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악과 거짓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위력적이며,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운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애굽의 기병과 전차가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시험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기의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압도하는 악과 거짓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 282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순철 역) to “fear” is to distrust, or not to have faith and love.

 

저는 가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다만 저 자신을 믿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직 주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하고, 주님보다는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며 절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네가 종신토록 내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든든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성결과 의로 섬긴다’는 것은 ‘신앙과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성결하다’는 것은 진리, 또는 신앙에 대해 하는 말이고요, ‘의롭다’는 말은 사랑, 또는 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 두려움 없이 섬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시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 마음속 애정을 늘 살피면서 자아가 하려는 일을 끊임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가 겪은 일들은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진리를 믿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사가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시고,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주신 진리를 그대로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하는 것이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성령이 저절로 역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아마 그것이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예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 그러므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전하려고 하다 실패했던 지난날 여러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지 않고, 내가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의 입을 통해 성령이 가르치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오신 주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며, 아버지는 주님 안에 신적 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주 오래전,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가랴의 세 번째 예언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종신토록’이란 말과, ‘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같지 않고, 또 늘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요, 나의 자아가 어디로 움직일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각 사람에게 오셔서 타고난 자아를 천국의 자아로 바꾸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의와 성결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가랴를 통한 성령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도 꼭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아멘

 

 

원본

2016-07-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2(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6. 2023-03-02(D5)-매일예배(2423, 눅1,67-75), '사가랴의 예언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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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1:57-66)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30:1)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너무 분해 야곱을 해치려고 했고,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삼촌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는 동생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사랑’(the affection of interior truth)(AC.3782, 창29:6)을 뜻한다고 새 교회 가르침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우리 안에는 라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헬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진리의 결실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내적 진리를 알기는 아는데,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제대로 살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상심이 큽니다. 그것은 새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이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안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엘리사벳 역시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사벳의 속뜻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진리를 모르니까요. 따라서 믿음, 곧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 역시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이제 잘못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이 낳는 아이는 바로 ‘새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타락한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 교회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에 따라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산할 기한이 차서’는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에게 새 교회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이해할 것이 있고, 그러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것이 바로 ‘해산할 기한’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은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여기서 ‘이웃과 친족’은,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 속뜻입니다. 선이 비슷하다는 것은 애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이 저마다 있듯, 교회를 섬긴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 좋아하는 비슷한 점이 바로 선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교회를 섬김에 있어 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일하는 방법이나 순서 같은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개중에 그 방법이나 질서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 잘 맞는 것이죠. 그런 것이 진리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는 무슨 뜻일까요?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걸 들었다는 것은 ‘그들, 즉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듣고’는 순종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도 새로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속뜻으로는 엘리사벳으로 표상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말씀이 비슷한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런 식으로 신념과 애정이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 또 다른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함께 즐거워하더라’의 의미입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팔 일’은 영적으로 하나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상태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은 하나의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팔 일째는 그 일주일이 끝난 다음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 일째가 되기 전 일주일이란 기간은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기간이고요, 그리고 팔 일째 되는 날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진리들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많았는데요, 그러니 그걸 버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저 역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장로교 통합 측에서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게 된 저는, 그러고는 결국 침례교 신학을 하고, 침례교회 목사가 된 저는 오십 대 후반까지 쌓아온 모든 신앙의 관계를 접어야 하는, 그리고 등돌림과 외면을 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형제들을 비롯한 혈육들로부터도 말이지요! 저 역시도 처음에 큰 걸림돌이었던 이슈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첫째, 성경 66권이 다 말씀’(The Word)이 아니고, 그 안에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안에 속뜻, 곧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가 들어있는 성경만 읽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성경은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구약에서는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권만, 신약에서는 , , , , 등 총 5권만 말씀이라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지요. 왜냐 하면, 현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은 열에 아홉, 모두 사도들,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서에서 추출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동안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가 없는, 인간의 창작물을 가지고 구원 교리의 터를 파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것인데... 이렇게 허망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둘째, 천국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실상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첫째 목표는 천국 가는 건데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막연하고 무지한 상태이지요. 이런 사실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를 불러 27년간 영계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기록, 곧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매우 낯선 내용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마치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쑤욱 쑥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는지, 제가 전하는 여러 사실에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겉 사람’, ‘속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면서 이 속 사람을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 충격적이지 않나요?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런 많은, 그리고 마치 새 술은 새 부대에가 떠오르는 듯한, 이 사고의 대전환 앞에 저는 정말 여러 해 많은 안팎의 고민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저를 제가 소화할 수 있는 페이스에 발맞춰 제 곁에서 저와 동행하시고, 끝까지, 그리고 지금도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이나 고통은 없고, 밝고 환한 빛 가운데 걸어감을 생생히 느낍니다. 여전히 궁금한 것들은 몇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

 

그 진리를 얻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노력들이 아깝기도 하고, 또 그중에는 최선의 진리는 아니라도 여전히 진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서로 섞이게 되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선의 것이 나타나면 차선의 것은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9:17)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 17장에서는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17:12)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상 가운데는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非) 진리, 또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온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씻어내라고 하세요. 그것이 모든 남자로 할례받게 하는 것이고,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 안에 인간적인 것, 진리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없습니다. 팔 일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대개는 주님,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아버지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예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 자아에 속한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아직 할례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사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누구나 그의 자아를 통해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진리를 찾고 배웁니다. 그때의 진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도 자기 사랑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할례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할례를 통해 자아에 속한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려고 하자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60절로 63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더니 거기에다 요한이라 썼습니다.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쓴 이유는,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와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내면에 교회를 이룬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교회를 이루는 진리를, 남편 사가랴는 교회를 이루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60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대답하여’라 했고, 63절, 사가랴에 대해서는 ‘서판을 달라 하여 쓰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에서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대답했다고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그런 관례에 포함된, 자기 안에도 있는 이기적인 사랑을 보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자기도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곧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인 것이지요. 주님의 뜻은 아이의 이름을 주님 사랑에서 나오는 이웃 사랑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즉 이기적인 사랑은 몰아내고,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생명 안에 그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서판’은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자주 생명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서판’, 또는 ‘생명책’은 개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 생명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461-469) 중 463번 글에 나오는, ‘생명책’ 관련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HH.463, 김은경 역)

 

따라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성격이 그대로 그의 생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말하면, 사가랴는 지금 새로운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책에 진리를 기록하는 일은 선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한 사람은 요한이라고 ‘대답’했고요,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서판’에다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그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혀가 풀리며’는 사람의 이성이 주님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빛이 흘러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혀는 우리의 이성, 또는 이해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 이성이 밝아질 때, 우리는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혀가 풀리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나요?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또는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사가랴가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을 자기의 신앙으로 온전히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혀가 풀리고 주님을 찬송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가 말을 하는 것은 신실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사가랴의 신앙 고백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는 본래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 용어로 유다는 천적(天的)인 교회를 나타내고요, 이스라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다는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잘못된 교회, 무너져가는 교회를 뜻하지요. 그리고 유대 산골이라고 할 때 산골은 그 잘못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사람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산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큰 산이 아니라 나지막한 산, 영어로는 ‘’(hill)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다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이 기존 교회 안의 선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듣는 사람들이 이 말을 모두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에 둔다는 것은 각자의 의지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아이는 바로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는 누구나 자아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원을 생각하고요, 또 자기의 지성으로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불완전하고 나약한 신앙에서 시작, 점차 견실하고 확고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너희 것으로 삼지 말고, 내게로 돌리라’ 하세요. 오늘 말씀에서 ‘팔 일째 아이가 받는 할례’의 의미 가운데는 주님의 그러한 뜻과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의 진리 안에 있는 애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의 사랑은 버리고, 대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나를 구원하는 진리일 뿐 아니라 이웃을 구원하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의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했고요, 팔 일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요한이라 짓는 것 역시 그런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께서 자신의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꼭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통해 팔 일째, 즉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아멘

 

원본

2016-06-26(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1(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5. 2023-03-01(D4)-매일예배(2422, 눅1,57-66),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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