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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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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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5-13)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2159:2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en he had put off this human, he put on the Divine human, from which he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as we find many times in the Word of the New Testament; and also the ‘son of God’; and by the ‘son of man’ he meant the truth itself, and by the ‘son of God’ the good itself, which belonged to his human essence when this was made Divine. The former state was that of the Lord’s humiliation, but the latter that of his glorification (treated of before, n. 1999). (AC.2159:2, Clowes 역)

 

이는 창세기 18장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에 관한 주석 중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다음은 창14:1-11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14:1-11)

 

여기 보면,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 베라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이듬해 배반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다른 왕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만났는데, 결과는,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즉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 왕의 연합군을 이긴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전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있었던 왕들의 전쟁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속뜻으로는 어린 시절 주님의 내면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40일간 광야 시험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주님의 시험 안에는 당연히 이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주님에게 어떤 시험이었는가를 속뜻을 통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친구들은 어린 시절 주님 안에 있었던 선과 진리들인데,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고 외견상 선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왕들은 외견상 선과 진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외견상 선과 진리라는 건 이를테면, 젖먹이들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외견상의 선과 진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선하게 보이는 그것을 외견상의 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천진함 속에 이기적인 것이 숨어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을 섬겼던 기간은, 이기적인 성향들이 천진난만함 속에 가려져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다가 지각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기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란, 자기 것을 챙기려 하고, 다른 친구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 이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고, 소돔의 왕들이 그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멜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 안의 이기적인 성향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찍부터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당신의 인성(인간성) 안에 이기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이기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돌라오멜 왕의 승리는 그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외견상의 선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것들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돔 왕의 군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들이 그 근원인 자아 사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이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시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글 성경에는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마귀가 주님의 인성 안 자아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시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할 단서, 꺼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자아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그 권위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라는 말은, 시험은 아주 순간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마음이 울컥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 세상 돈이나 명예, 쾌락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마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잠깐씩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 마음을 덥석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되며, 그래서 그것은 지옥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 가령, 로또의 유혹 같은 것도 여기 해당되지 싶습니다. ‘만약 내게 수억의 현금이 생기면 나는 그 돈을 참 은혜롭게 주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할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마귀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지만, 지옥의 노예가 되는 삶에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마귀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자 마귀는 지체함 없이 바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 시험에 대해서 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첨탑 위에 주님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를 때는 그냥 새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이 교회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위의 탑’은 ‘자아에 대한 사랑’, 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 절에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과 여기서 성전 탑 꼭대기에 주님을 데리고 간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산이나 탑은 모두 우리의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아가 높은 산이나 첨탑과 같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성전 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안으로 마귀가 들어와 주님을 유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표현에는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48번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세에 들면 먼저 천사들이 맞아들여 모든 선한 도움을 주고, 주님과 천국, 천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며 진리와 선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하고 무시해왔으면, 몇 마디 나눠본 후에 그 천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천사들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는 자기와 같은 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자기가 세상에서 연결되어 살던 바로 그 지옥을 바라본다. 그 지옥 안에는 자기와 비슷한 악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천국에서 나오는 입류를 통해서 모든 영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악 안에 있는 영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찢어내듯 하며, 밧줄에 끌려가듯 자기 자신의 악에, 즉 지옥에 끌려간다. 그렇게 끌려가기 때문에, 즉 그들의 악에 대한 사랑이 거기 따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유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다. 사실, 저 세상에서 지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옥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상 모든 내용은 주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지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은 뒤 영이 된 후에나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HH.548, 김은경 역) //

 

따라서 성전에서 몸을 던지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의 교리에서 이탈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몸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종종 이와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시험하듯이 ‘네가 지키려고 힘쓰는 교회 교리는 너를 구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즐거움에 몸을 던져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몸을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한 것은 아래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91:11-12)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 탈 없이 지켜 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발이 돌에 부딪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낮은 의식, 또는 가장 바깥쪽의 의식인 자연적인 의식, 즉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발에 대해 말했을까요?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성전, 즉 교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더라도 겉 사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에 부딪힌다’ 그랬는데, 영어식 표현은 against stone입니다. stone은 돌이기 때문에 이 말은 돌, 즉 진리에 반(反)한다는 뜻이지요. 즉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무렇게나 행동을 해도 진리에 반(反)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에는 마음이 원한다고 그대로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진리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모세를 다그쳤을 때,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6:16)

 

신앙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주님을 다그칩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어기려고 합니다.

 

※ 저는 비교적 꽤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까지는 위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가 제게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는 일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충분히 기도하며 주님 뜻 알려고 하는 대신, ‘나는 주의 자녀이니 혹시 내가 하는 이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어도 주님이 수습해 주실 거야’ 하며 어떤 중요한 걸 결정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태도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끝까지 저를 돌보셨지만, 조금 착하고 겸손했더라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구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질러갈 길을 굳이 꾸역꾸역 빙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속뜻으로는 선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인자’는 진리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진리는 공격할 수 있지만, 선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자주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진리만 가지고는 거짓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이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부딪치면 언제나 이깁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인자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로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에게 절을 요구하고,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진리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님을 이미 선의 상태가 되었다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에게 절을 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고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자아 사랑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많이 거듭났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올 때, ‘잠깐 이것을 즐기자.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진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하며, 쉽게 생각하고 자신 있어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몸에 해로운 기호품을 끊었던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이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면서 다시 그걸 가까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요,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에게 ‘당신은 이미 선의 상태이니 아무 일이나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요, 그리고 시험에서 이기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 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모든 부정한 생각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1)

 

아멘

 

원본

2017-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1. 2023-03-21(D3)-매일예배(2438,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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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의미하고, ‘’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0. 2023-03-20(D2)-매일예배(2437, 눅4,1-4),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1)'.pdf
0.4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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