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39-45)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1절)

 

하였고, 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36절)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반대로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들이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7절)

 

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37절)

 

답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떠나가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엘리사벳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가서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으로 표상(表象)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어떤 사람들을 나타낼까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모두 천적인 선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영적이다, 그리고 자연적이다 라는 말, 표현, 용어들은 새 교회에서는 정말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인데요, 다른 곳에서는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굉장히 생소하기까지 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들은 사랑의 단계, 정도(degree)를 나타내는 표현들인데요, 그러니까 천적이라는 표현은 주님, 즉 선(善, good)을 사랑하는 단계이구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 이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한다’는 게 좀 낯설 수 있어 보충 설명드립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5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김은경 역) In heaven loving the Lord does not mean loving him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it means loving the good that is from him; and to love good is to will and do good from love; and to love the neighbor does not mean loving a companion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loving the truth that is from the Word; and to love truth is to will and do it.

 

또 자연적이라는 말은 세상 법도나 학문 같은 것, 그 밖의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천적 선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선을 행하되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이렇게 천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을 친척(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실제로도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그들을 특별히 친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선의 특성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마치 친척 간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구요, 마리아 역시 속뜻으로는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마리아로 표현되는 이방인은 단순히 교회 밖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구요, 기존 교회,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리아와 같은 이방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 그러니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거나, 말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세 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타협하지 않는, 그런 믿음, 그런 신앙과 교리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의 속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왜 이방인들을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왜 새 교회를 이방인들과 함께 세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이에 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천국과 지옥’을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새 교회 교리에 관한 일종의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천국에 관한 사실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 것은 잘못된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기존의 낡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말씀을 가지고는 왜 안 될까요? 기존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왜곡, 뭔가를 보태서 섞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교회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소위 장로의 전통이라는 계율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일단 이 모든 오류의 출발은 현 기독교회가 그 주된 교리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도들의 편지에서 뽑아냈기 때문입니다. 교리, 즉 신앙은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만 나와야 합니다. 현 66권 성경 중 주님의 말씀과 말씀 아닌 것에 관한 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https://bygrace.kr/1027)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선하게 살아라.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가르칩니다. 이것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에 아무리 투철해도 정작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즉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잠깐 허락을 받아 들어간들 금방 못 견디고 스스로 뛰쳐나오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신교의 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거짓이요, 오류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긴 일기를 보면, 스베덴보리가 영계에 들어가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마틴 루터도 있었답니다. 그가 루터와 이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하여 대화하던 중 그의 대답,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순전히 내가 고안한 것인데, 당시 카톨릭과 교리적 어떤 선명성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런 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고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엘리사벳과 사가랴 같은 사람, 즉 기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말씀이란 유대교회 말기에는 신약,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말씀이구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는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에게 주시는 아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인류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그 대신 세워질 새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누구일까요? 마리아의 아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이 없는 곳에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례(세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지상에 세우시는 새 교회 가운데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受胎告知, Annunciation)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는 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렸을까요?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새로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말씀, 새로운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죠. 어떤 분은 책을 통해서, 어떤 분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새 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인도를 통해 마리아는 이제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출발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은 선한 이방인이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먼저 산골로 갔습니다. 산골은 영어로는 hill country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작은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작은 산은 무슨 뜻일까요? 큰 산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면, 작은 산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산골로 가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기존 교회 안에 이웃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그들에게 갔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줘도 잘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다녔다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회의를 느껴 교회에서 멀어진 분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제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마리아가 마침내 유대의 어느 동네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유대는 천적인 것을 뜻하고,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동네란 천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천적 교리는 그 교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다시 그것을 통해 가장 깊고 순수한 교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유대의 동네에 당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면서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인사를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웃의 집을 방문할 때는 인사하라, 평화를 빌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인사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2-13)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인사는 마리아에게 있는 주님의 평화가 엘리사벳과 그 아기에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았을 때 복중(腹中)에서 아이가 뛰었습니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중의 아이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뛰었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인 마리아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정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주님께서 당신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을 주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내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에 오시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존의 교회에는 주님이 계실 곳이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 오실 때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주님은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42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엘리사벳이 축복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리아를 축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것과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 뛰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성이구요,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한 것은 주님의 열성이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엘리사벳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 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저주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여자란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진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교회는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임신하는 고통과 자식을 낳는 수고는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진정한 진리를 얻기까지 견디고 이겨야 할 내적 싸움과 온갖 걱정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아기를 낳는 수고와 임신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진정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가 진행될 동안 사실은 출애굽기 속뜻 강해 역시 병행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진리를 ‘만나’로 표현합니다. 만나는 책에서 배우거나 설교를 통해 듣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 바로 진정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리는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자아를 부단히 깎아 내고, 깎아 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그런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부단한 내적 싸움과 인고(忍苦)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징계처럼 내리신 이 말씀은 교회의 험난한 역사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 주님에 대한 호칭 변화에 주목해 보세요. 창세기 1장은 ‘하나님’만 나오지만, 창세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다 다시 ‘여호와’만 나오고, 또 ‘하나님’만 나옵니다. 다음은 주님의 여러 호칭에 관해 짧게 요약해 본 글입니다.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아래 제 블로그 글을 참고하세요.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https://bygrace.kr/2637)

 

그런데 오늘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교회가 겪었던 모든 싸움과 수고의 결실을 이제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교회의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을 예고하는 그런 말씀이라면, 이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교회의 그 모든 흥망성쇠의 결실을 너를 통해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교회이구요,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입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이는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43절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또 말했습니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역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은, 참된 말씀을 아는 엘리사벳 같은 사람들이 이제 낡고 병든 교회를 떠나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내적 진리가 있는 새 교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본 마리아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의미를 우리들의 얕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글자로 된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것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기, 즉 새로운 말씀이 마리아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물론 그들에게도 진리를 주십니다. 어떤 식으로 주실까요?. 다양한 종교의 교리나 세상의 상식들을 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들은 진정한 진리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도 선하게 살면 자기 자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교회로서의 사명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인류를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뜻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선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보면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엘리사벳에게로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엘리사벳과의 만남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참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여전히 기존의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기존 교회에 머무는 것은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진리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진리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진리와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진리를 함께 섞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들이 어떻게 될까요? 진리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이, 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에 아직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마리아를 만나는 것은, 낡은 교회를 떠나 순수한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권고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가 나에게 나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새 교회가 나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새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진리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들이 주변에는 많습니다.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새 진리를 위해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오로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새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 교회는 에덴동산 이래 인류가 감당했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로 인도된 모든 성도님들께 주님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아멘

 

원본

2016-05-2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3. 2023-02-27(D2)-매일예배(2420, 눅1,39-45),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pdf
0.45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천적(天的, celestial)인 사람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신앙(faith from love), 그리고 지혜와 지성(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8, 10-14)

 

 

오늘날 사랑에 기원한 믿음이 무엇이고 그 믿음에서 비롯한 지성과 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외적인 사람들은 기억의 지식 외의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또 그 지식을 지성, 지혜, 믿음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의지와 이해력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을 모른다. (천국의 비밀 111, 이순철 역) ...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 (AC.111)

 

 

※ 지난주까지 만 2년에 걸친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끝내고, 오늘부터는 그때그때 이슈를 성경 여기저기 말씀으로 살피는 주제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역시 이순철 목사님이 남기신 원고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여럿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주님의 퍼셉션에 순종, 제 블로그에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본문 순서에 따라 한 편 한 편 재작업, 올리고 있으니 일상 중 늘 가까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이 설교는 그 원본의 그 시기와 배경을 보니 문재인 정부 시절인 지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인 것 같은데요, 그때 너무나 거짓된 사람이 버젓이 일국(一國)의 법무부 장관을 하겠다고 나오는 거며, 그리고 그런 사람이 법무부 장관에 합당하다 찬성하는 여론이나 결국 그런 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대통령이나 모두 미쳐 돌아가는 듯한 정국에 어이가 없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고민하신, 결국 이 땅에 참지식, 참된 지성과 지혜가 없어 이런 사달이 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지식과 지성, 지혜는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신, 오늘 설교는 그런 설교가 아닌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고위직 관료를 임명하는 데 있어 청문회라는 제도를 활용합니다.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이력과 신상 자료를 검토, 그가 직무 수행 능력은 있는지, 또 윤리적 흠결은 없는지를 철저히 검증합니다. 따라서 청문회 제도가 잘 시행되면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 요직에 기용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여러 번의 청문회를 지켜봤지만, 결과는 아주 참담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정직하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씁쓸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학력자들 대부분이 정직하지 못하고 부정한 짓을 많이 저지르는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그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사랑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들에게 참 진리는 없고, 그저 진리라 부르는 것에 관한 지식만 있기 때문입니다.

 

※ 진리를 얻어 그걸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는 것과, 그걸 그저 자기 머릿속에 지식과 정보로 저장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그 결과 자기 속 사람이 잘 준비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그가 아무리 머리가 터질 듯이 많은 걸 자기 머릿속에 쑤셔 넣었어도 정작 그 속 사람은 전혀 준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사후 천국에 올라갈 수 없게 되지요. 속 사람은 남이 발견한 지식들, 곧 남의 것으로 자기 사랑의 삶을 사는 걸로는 준비되지 않기 때문인데, 미안하지만, 천국은 오직 속 사람으로만, 즉 자기가 세상 살면서 얻은 지식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즉 참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탕에는 언제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리, 곧 그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에는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진리, 세상, 세속의 진리일 뿐 진정한 진리는 아닙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정의와 평등, 공정을 외치면서도,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서슴없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9)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 땅’은 사람의 지식을,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는 그들의 지식 속에 사랑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은 사람의 지성을 뜻하며, 따라서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지성을 얻었다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흘러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지식은 생명 없는 차가운 지식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 지성,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창세기 2장은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 곧 천적인 사람들의 지성을 만들어주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8절입니다.

 

※ 천적(天的, celestial)이라는 것은 사랑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의 신성 중 선에 더 끌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에 더 끌리는 사람들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합니다. 모든 천사는 이 둘 중 하나에 속하며, 그래서 천국은 두 나라, 곧 천적 나라와 영적 나라로 나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적 나라 천사들은 오직 100% 선만 있고, 진리는 없다는 게 아니라 둘 다 있지만, 특별히 선에 더 끌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영적 나라 천사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천적이라는 것이 이렇기 때문에, 천적인 사람들은 좀 더 사랑스럽고, 선하며, 따뜻하고, 온화합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첨부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곧 천사입니다. 주님은 천사 따로, 사람 따로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참 사람, 진정한 사람이시기 때문인데, 주님은 천국을 자기를 닮은 사람 모습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저런 오해를 하게 된 건, 말씀을 겉으로만, 즉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기서 ‘동산’(a garden)은 천적인 사람에게 주님이 주시는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 창세기 1장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크게 여섯 단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게 거듭남의 1차 목표이며, 이것이 ‘여섯째 날’, 곧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의 속뜻입니다. 거듭남의 2차 목표는 그를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창세기 2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에덴’(Eden)은 사랑을 뜻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천적인 사람의 지성을 만들어주시는데, 그 지성, 그 인텔리전스 안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따뜻한 지성, 사랑스러운 지성의 소유자들입니다.

 

다음 10절로 14절은 그런 사람들의 지성을 형성하는 마음의 구성 요소들과 그곳을 흐른다는 네 개의 강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10절입니다.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 river)은 주님으로부터 나와 천적인 사람들의 지성을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덴’은 사랑을 뜻합니다. 따라서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의 속뜻은 주님으로부터 나와 천적인 사람들의 지성을 만드는 모든 것 안에는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란 쉽게(?) 말씀드리면,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입니다. 지상에 사는 인간은 말씀을 겉뜻으로 읽는다면, 하늘에 사는 천사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우리는 외적, 곧 겉이요, 그들은 내적, 곧 속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만드는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이를테면,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지식과, 믿음, 사랑에 대한 지각입니다. 그러한 지식이나 관념, 또는 지각이 주님으로부터 나와 사람의 마음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 지성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입니다.

 

다음 11절과 12절은 에덴동산을 흐르는 첫 번째 강에 대한 내용입니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동산을 흐르는 첫 번째 강의 이름은 비손입니다. ‘비손’(Pishon)이라는 강 역시 주님에게서 나와 지성을 만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관념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바탕에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지성은 진정한 지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진실을 말하지만, 불리할 때는 언제든지 거짓을 말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지성을 어떻게 올바른 지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지성은 오직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강이 흐르는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에는 순금이 있고,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라 하는 보석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 ‘순금’은 가장 순수한 선을 뜻하고, 보석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순수한 선과 진리가 있는 곳, 곧 하윌라는 어딜까요? 바로 속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윌라 땅은 인간의 속 사람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의 강은 맨 먼저 속 사람을 통해 흐르기 시작합니다.

 

※ 즉, 주님의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출발, 우리의 속 사람, 겉 사람, 감각 순이며, 오늘 본문은 그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강은 어떤 강일까요? 두 번째 강에 대해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기혼’(Gihon)이라는 강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기혼은 구스 온 땅을 굽이쳐 흐릅니다. 첫 번째 강이 흐르는 ‘하윌라’ 땅이 속 사람을 뜻한다면, 두 번째 강이 흐르는 ‘구스’(the land of Cush)는 겉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겉 사람의 마음을 만드는 두 가지 능력인 이해력과 의지, 곧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과 윌(will, 의지)을 뜻합니다. 이해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이해한 진리를 바라고 행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주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라 말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14절은 세 번째 강과 네 번째 강에 대한 기록입니다.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세 번째 강인 ‘힛데겔’(Hiddekel)은 이성(理性, reason), 즉 이성에 속한 명민함(明敏, 밝고 총명함), 통찰력(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입니다. 앞에서 이해하는 능력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 능력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라면, 추론(推論), 즉 이성 능력은 진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진리를 바탕으로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힛데겔 강은 앗수르 동쪽으로 흐릅니다. ‘앗수르’(Asshur)는 합리(合理)적 마인드(the rational mind)입니다. 합리라는 능력의 역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겉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심오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합리라는 능력을 통해 당신의 진리를 겉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로 만들어주십니다. 진리를 겉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 그것이 추론 능력입니다. 그래서 합리 능력 안에는 추론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힛데겔 강이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이유입니다.

 

※ 지혜, 지성, 지식 및 이성, 이해, 추론, 합리 등의 개념은 어렵습니다. 모두 내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외적 세계에서는 알쏭달쏭한 이 개념들이 천국에서는, 그러니까 저 내적 세계에 가면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추상이 아닌,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이 외적 눈으로 사물을 생생하게 보듯 내적 눈으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강은 유브라데(Euphrates)입니다. 유브라데라고 하는 강은 진리 가운데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기억 지식을 말합니다. 기억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의 창고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에서 받아들인 모든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만들어집니다. 유브라데 강이 에덴에서 나와 겉 사람의 가장 낮은 곳인 기억 속으로 흐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의 지식은 강물이 흐르듯 사람의 마음 전체로 흐릅니다. 처음에는 속 사람 안으로 흐르고, 속 사람을 거쳐 합리성 가운데로 흐르며,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의 이해력과 의지 안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에는 겉 사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기억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 속에 있는 지식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지식을 습득하고, 주님이 주신 추론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고 믿으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간을, 그러니까 천적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드린 창세기 2장 말씀은 주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회복, 수리, 복구되는 모습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청문회를 통해 어떤 인사를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사회가 소란합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지위를 이용해 불법을 저지른 의혹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참외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바로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심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사람들이 열 명 중 넷은 되고 심지어 대통령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장관이 되려고 하는 것이나, 그를 임명한 사람이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정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 시대에 참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얕은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진리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 곧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거짓을 선동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습니다. 그들이 바로 애굽의 왕들이며, 자기의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입니다. 악을 악이라 하지 않고, 거짓을 거짓이라 분명히 말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악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지지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고,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지식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늘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비추어 보면서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면서 진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0-11)

 

아멘

 

 

2019-09-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09(D1)-주일예배(2583, 창2,8, 10-14), '주님이 천적(天的, celestial)인 사람들에게 주시는 참된 지성'.pdf
0.44MB
천국과지옥.1.4.20-28.'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scan.pdf
0.27MB
축도.2025-02-09(D1)-주일예배(2583, 창2,8, 10-14), '주님이 천적(天的, celestial)인 사람들에게 주시는 참된 지성'.pdf
0.23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수태고지(受胎告知)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1:26-38)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침례(세례) 요한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속뜻으로 침례 요한은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글자로 표현된 말씀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직접 주신 신약 복음서의 말씀이나,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 같은 것이 바로 침례 요한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침례 요한의 의미를 설명했더니, 언젠가 어떤 성도님께서, 말씀의 속뜻이면 당연히 내적 진리인데, 왜 그것을 자연적 진리라고 하나요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 inner meaning), 즉 영적 의미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곧 내적 진리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그런 만큼 그것은 내적 진리를 받기 위한 자연적인 그릇일 뿐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아주 깊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비록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이 내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아시려면,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약어 AC,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8443번 글의 ‘진리의 여섯 단계’를 참고하세요.

 

※ 다음은 AC.8443 일부 인용입니다.

 

신적 진리(神的, Truth Divine)라고 하는 신성한 진리는 한 단계(one degree)만이 아닌, 여러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immediately) 나오는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조차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부터는 피조물인 천사가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진리는 가장 안쪽 천국, 곧 삼층천에 있는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러나 인간은 조금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중간 천국, 즉 이층천 진리와 같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지각할 수 없는(neither... intelligible) 진리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가장 바깥 천국, 곧 일층천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 내면이 열린 사람이면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대부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혹시 이게 아이디어가 되면, ‘아, 그래서 그 경우가 그런 거구나!’ 하는 지각과 함께 믿는 역량이 생깁니다. Truth Divine is not of one degree, but of many. Truth Divine in the first degree, and also in the second, is that which 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this is 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 But truth Divine in the third degree is such as is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this is such that it 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man. Truth Divine in the four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 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man. But truth Divine in the fif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 this 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but still it is such that a great part of it cannot be expressed by human words; and when it falls into the ideas, it produces the faculty of perceiving and also of believing that the case is so.

 

※ 그러니까 이 맨 마지막 문장은 그동안 인류를 이롭게 한 수많은 천재적 발견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의 한 줄기 번쩍이는 생각들은 바로 이 다섯 번째 단계의 신적 진리인 일층천 진리가 인간의 아이디어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계속) 그러나 신적 진리의 여섯 번째 단계는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의 지각을 수용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로, 곧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표현된 진리입니다. 이 뜻, 즉 이 진리는 구름으로, 그리고 그 내적 진리(the interior truths)는 구름 속 영광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곧 왜 여호와, 즉 주님이 그렇게 자주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름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가령 출24:15-16, 40:34-35, 왕상8:10-11, 마24:30 및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But truth Divine in the sixth degree is such as is 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thus it is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This sense, or this truth, is represented by the cloud, and the interior truths are represented by the glory in the cloud. This is the reason why Jehovah (that is, the Lord) so often appeared to Moses and to the sons of Israel in a cloud (see Exod. 24:15, 16; 40:34, 35; 1 Kings 8:10, 11; Matt. 24:30; and other places).

 

15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40:34-35)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왕상8:10-1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계속) 주님의 현현(顯現, The appearing of the Lord)은 신적 진리를 통해서이며, 더더욱 신적 진리이십니다. ‘구름’(a cloud)은 진리를 가리키며, 이 진리는 퍼셉션을 위해 제공되는 거라는 이 사실은 저세상에 있는 다음과 같은 표상들로 말미암는데요, 거기서는 더 높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아래 천국 천사들한테는 빛으로 나타나며, 밝기 또한 빛으로 말미암는 반면, 더 낮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위 천국 천사들이 볼 때는 밝은 구름으로, 그 진리의 퀄러티에 따라 다양하게, 그리고 짙거나 옅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다음 말씀, 곧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하는 말씀은, 지각에 맞춰 제공된 진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The appearing of the Lord is by means of Divine truth, and moreover is Divine truth. That a “cloud” denotes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is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other life, where angelic speech of the higher heavens appears to those who are beneath as light, and also as the brightness from light; whereas the speech of the angels of a lower heaven appears as a bright cloud, in form various, and in density or rarity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truths. From all this it can be seen that by “the glory of Jehovah seen in the cloud” is signified the presence of the Lord in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AC.8443, 변일국 역)

 

※ 그러니까 주님의 진리는 하나요 동일하지만, 그 진리를 받는 인간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조절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 초등 어린이에게 고등학교, 대학교 수학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계속) 위 인용 글은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라는, 출16:10 말씀을 속뜻으로 푼, 주석한 글입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실까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 현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열에 서넛(너무 적게 잡았나요? ㅎㅎ)은 되지 싶습니다.

 

그것은 사가랴에 대해 유대 나라 헤롯왕 때 제사장이라고 말한, 아래 본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1:5)

 

말씀에서 유대 나라는 주님 당시의 유대교회처럼 종말에 가까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헤롯왕은 거짓 진리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 또는 반대의 의미로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왜 진정한 진리는 없고, 거짓 진리만 있을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지금 거짓 진리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가랴는 또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가 비록 잘못된 교회 안에 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속뜻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가랴와 같은 사람, 즉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을 열어 주십니다. 그것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침례 요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많은 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저의 어떤 면을 보셨는지 이렇게 귀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제게 열어 주셨는데요,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에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26, 27절입니다.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가 찾아간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녀는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다윗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를 뜻하고, 남자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의 안에 이미 주님의 교회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간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왜 천사는 갈릴리로 갔을까요? 큰 성 예루살렘도 있고, 다른 많은 곳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간 이유는, 주님이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타락,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을 때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 교회 시대의 역사인데요,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라고 하는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이마저 사실은 그 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교회들은 순서대로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입니다. 각 교회 시대마다 종말이 있었고, 그로 인한 새 교회의 일어남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태고교회의 종말이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었고, 이후 노아교회라고도 하는 고대교회가 일어났고, 이 고대교회는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마감, 이후 율법을 가진 유대교회가 있어나고... 하는 식이지요. 교회의 종말은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곧 황폐한 상태가 되는 것이며, 이때 하나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 시대를 여시는 것인데요, 비유하자면, 촛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유대교회가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란 말은 상황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의미입니다. 그런 반면, 주님 당시의 이방인들은 좋은 의미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오히려 교회가 주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로 표상되는 이방인들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런 이방인들을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타게 갈망했는지는 그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다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음식은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리아는 그러한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보면 마리아는 분명 확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만 속뜻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를 통해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고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신 것입니다.

 

28, 29절입니다.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이 장면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임재하시는 순간인데요,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깜짝 놀라며,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합니다. 크게 놀란 것이지요. 마리아가 놀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실 때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전율 같은 것인데요,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만 느끼는 거룩한 공포입니다. 성경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저 역시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영적 체험을 몇 번 했는데요, 나중에 기회 되면 자세히 나누겠습니다. 이런 체험은 한 개인의 영적 성장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유익이 됩니다. 많은 유익 중 한두 가지는, 첫째, 영계가 분명히 있다는 걸 확실히 지각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게 무슨 개인의 욕심과 소원을 살짝 영성의 옷을 입혀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저 겉 사람의 일일 뿐이지요. 그러나 천국은 오직 속 사람으로만 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걸 무슨 누구의 설명 없이도 그냥 알게 되며, 그래서 그냥 무조건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자아 부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주님을 이렇게 만난 사람이라야 참된 회심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네, 뭐, 이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30절, 31절입니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에는 누구나 그렇게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에 보면, 다니엘이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주님을 뵈었을 때, ‘마치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서 그들의 몸을 만지시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지실 때, 그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히 자아를 내려놓을 때, 그러니까 죽은 자같이 될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그 죽은 영혼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무서워 말라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의 속뜻은, 주님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진리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미리 알려주시는데, 바로 ‘예수’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善, good)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평범한 진리가 아닌,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그런 진리입니다.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그리고 예수는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각각 나타냅니다. 그래서 천사는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의 전언은 계속됩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태어날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누구십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녀를 통해 당신의 아들을 낳으신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데요, 하나님의 아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인성(Divine Human)입니다. 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냐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보통 인간들처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거룩한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해서 입으신 이 몸이라는 옷이 곧 주님의 인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는 신성과 함께 거룩한 인성이 있습니다. 주님에게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나 사람 모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신적 진리(Divine Truth)입니다. 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냐면, 신적 진리는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진짜 인간의 아들처럼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이 아니구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기 때문에, 인간적 수사(修辭)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신적 진리는 상응적으로는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바로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신적 진리나 신적 인성이나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의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적 인성이나 신적 진리는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걸치고 계신 옷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인성은 곧 신적 진리인 것입니다.

 

34절입니다.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조금 전에 남자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께서 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은 그가 그만큼 주님 앞에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속뜻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방인입니다. 그 말은 그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를 모른다는 것일 뿐, 그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내면에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정혼한 사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성령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령, 성령, 성령이란 말을 많이들 하시는데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그 안에 계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살아있는 능력의 진리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시구요, 잘못된 생각이나 신념들을 교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 인격을 바꿔주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에게 오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36절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친족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에서 친족은 그냥 친척이라는 뜻이 아니구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이나 진리의 종류가 서로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즉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족이란 말은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종류의 선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룩한 아들들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는 선은 어떤 선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그냥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구요, 주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에서 나온 선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말은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엘리사벳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그가 알고 있는 진리가 거짓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거짓 진리가 사가랴-엘리사벳으로 표상되는 신앙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후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신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36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늙어서 아기를 배었고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고, 26절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은 여섯째 달에 마리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섯’이란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여섯’이란 수는 주님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는 침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말씀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내적 싸움을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거짓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내적 싸움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은 건 여섯째 달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신앙이 이렇게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주시고, 마리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내적 진리를 주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내적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37절, 38절입니다.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스스로 주님의 여종이라 말하고, 주님의 뜻이 그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로 오신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서로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주님은 각자의 신앙 상태에 따라 오신다는 것 또한 아셨을 것입니다.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로 표상되는 사람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진리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을 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앙의 열매를 맺기도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 진리가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는 뜻이구요, 그러므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또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는데요, 그 새로운 말씀이 바로 침례 요한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있는 거짓 진리를 몰아내고, 진정한 신앙을 가지길 참으로 원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통해 거짓 진리를 몰아내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속뜻으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거짓 진리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갈 때가 여섯째 달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미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적 싸움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죠. 주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 하십니다.

 

그러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시는 아들과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신 아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입니다. 그것은 신앙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거짓 진리에 빠진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주님 자신이세요. 신적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그 안에 살아계신,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세상에서 오는 어떤 유혹이나 난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신앙에 따라 다릅니다. 부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죽은 자처럼 자기를 낮추시기를,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리고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자기를 낮춘 것처럼 낮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1:68-69)

 

아멘

 

원본

2016-04-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5(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2. 2023-02-25(D7)-토요예배(2418, 눅1,26-38), '수태고지(受胎告知)'.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 엊그제인 2월 2일 주일 설교를 끝으로 지난 2년간 달려온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쳤습니다. 세어 보니 총 144편의 설교였습니다. 총 144편이면 한 3년치 설교인데 2년 걸린 건, 처음엔 매일예배 본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 인용을 허락하신 원 저자, 전 청주 새 교회, 그리고 이후 서울 새 교회 담임이셨던 이순철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이 전체 설교를 한 편의 pdf로 만들 필요가 생겨 고민 중, 이 전체를 다시 한번 깊이 살피라는 주님의 퍼셉션(perception) 또한 있어 순종하고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강해이면서도 맨 처음 본문인 눅1:1-17이 없는 이유는 설교 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 저자께도 문의드렸으나 분실하셨는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죽 가시다 보면, 한 구절이 빠졌거나 몇 구절이 통째로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원 저자의 단순 실수이신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혹시 중간중간 설명 부호인 ''가 나오는 부분은 특별히 무슨 배경이 되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어 제가 더한 것입니다. 전반적인 어투나 뉘앙스, 에피소드 등은 저희 교회에 맞게 다듬었다는 점, 참고하세요. 아, 그리고 원본의 '믿음'은 전부 '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특별한 데서는, 그러니까 'believe'의 뜻을 살려야 하는 데서는 원본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사가랴가 말을 못 하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기도 했고, 그 밖에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 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기술(記述)이 사실 굉장히 예민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진리이기에 용기를 내어 말씀하심인 줄 압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김은경 역)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공동체를 말한다. (HH.52, 김은경 역)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했습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 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의 비밀 1786번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그것에 대해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3-02-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0.73MB
001. 2023-02-24(D6)-매일예배(2417, 눅1,18-25), '사가랴가 말을 못하다'.pdf
0.47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24:44-53)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었을 때, 즉 신성하게 되었을 때, 주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당신의 몸 전체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여느 인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으로는 다시 살 수 없고 오로지 영으로만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35:9, 이순철 역) As the Lord’s human was glorified, that is, made Divine, he rose again after death on the third day with his whole body, which does not take place with any man; for a man rises again solely as to the spirit, and not as to the body. (L.35:9)

 

 

※ 드디어 오늘, 누가복음 마지막 본문인 24장 44절로 53절을 끝으로, 지난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부터 시작한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 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만 2년 2개월이 넘었는데요, 지금도이지만, 그때는 더더욱 말씀의 속뜻에 대해 쌩(生)초보였던지라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제힘으로만 주일 설교를 준비하려면 한 주 내내 주일설교에만 전념해도 모자라기에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다른, 이 길을 먼저 걸으신 분들의 설교를 참고하라시는 주님의 퍼셉션을 얻어 시작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주일 설교 준비였습니다. 특별히 자존심 센 저로서는 더욱 말이지요. 그러나 개인의 자존심은 주님의 퍼셉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제 짐이 ‘쉽고 가벼워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원본 그대로 인용, 그저 대신 읽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아, 이대로는 좀... 나는 몰라도 이런 속뜻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무척 생소하며, 때로는 반발심이 들 수도 있겠다’ 싶어 중간중간 최대한 양쪽, 그러니까 개신교와 이 스베덴보리 양쪽을 경험하고 있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설명을 곁들이느라 솔직히 의식적으로는 갈수록 거의 일주일 내내 이 주일 설교에만 매달리기도 했지요... 뭐,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큰 개인적 성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설교를 얼마든지 인용, 원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께도 거듭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한 가지, 특이하게도 저는 매번 원고를 인쇄, 설교 때 나누어주어 그 원고를 함께 보며 설교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글 인용 시, 가급적 그 영어 원문을 병기(倂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 역시, 주님의 퍼셉션을 따른 것입니다. 이 관련 영어 원문 찾는 시간이 제법 걸리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라신 주님의 어떤 뜻이 있으시겠지’ 믿고, 우직하게 순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디 나누어드린 이 모든 원고를 다들 몇 번씩 다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주님의 빛 비추심을 간절히 구하시면서 말이지요. 말씀의 속뜻을 맛보실수록 참 자유를 경험하시기 때문인데요, 다음 주님 말씀처럼 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네, 아멘, 아멘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시편 88편 4절로 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시험에 들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시험 중에는 종종 손과 발이 묶인 사람처럼 아무 힘을 쓸 수 없거나 죽임을 당해 웅덩이에 버려진 것 같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겪으셨던 시험을 묘사한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시험에 대해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시험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지만, 주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시험이 깊었으면 죽임을 당해 무덤에 던져진 것 같다고 하고, 아버지마저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주님은 그 모진 시험을 이김으로써 지옥을 정복하시고, 천국과 지옥의 무너진 질서를 본래대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 ‘주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셨다’ 하는 이유는, 주님의 성육신이 인류 전체 및 피조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무슨 비유를 들자면, 자식, 즉 책임져야 하는 자녀가 없거나 한둘인 사람과 일곱이나 열둘인 사람이 부모로서 겪게 될 그 마음고생의 무게는 차원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피조세계 전체이기 때문에 지옥 또한 주님을 향해 총력전을 펼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예 없거나 내 몸, 내 새끼 정도의 사람이면, 지옥은 그런 사람은 쳐다도 안 봅니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지옥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이 하늘에 오르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주님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교회 안의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44절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구약의 역사서를 뜻하고,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구약에 기록된 비밀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한글 성경에는 마음이라 했지만, 영어 원문에는 understanding, 즉 이해력,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이해력을 열어 말씀에 감춰진 내적인 것을 깨닫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들은 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을 통해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에는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통해 말씀의 깊은 것들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새로운 이해력을 통해 깨달은 비밀, 즉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성경의 비밀들은 뭘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46절에서 4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 전체가 기록하고 있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비밀은, 첫째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김으로써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모두 주님을 표상한다는 사실과, 예언서의 모든 내용 또한 주님의 싸움과 심판을 나타내며, 시편 말씀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표상하며, 이방인들과의 싸움은 지옥을 상대로 한 주님의 싸움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와 부활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806번 글 3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또는 거룩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옥을 영원히 굴복시키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첫 번째 원리로부터 마지막의 것을 수단으로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활동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사람에게까지 미친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의 첫 번째 사람들에게만 미쳤을 것이고,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천국의 첫 번째 사람들이 무너진다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은 끝났을 것이고, 그리하여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을 통한 주님의 신적 활동을 가리켜 가장 낮은 사람에게까지 흘러 들어오는 주님의 직접적인 입류(influx)라고 부른다. (이순철 역) The other reason was that He might glorify His Human, that is, make it Divine, since by this and by no other means is He able to keep the hells subjugated to eternity, for He thus acts to eternity from first principles by means of things ultimate, and in fullness. In this way His Divine operation reaches down even to those who are lowest in the world, while otherwise it would reach only to those who are first in heaven, and mediately through these and those that follow to the lowest, who are men; consequently if these should give way, as happened just before the Lord’s coming, the Divine operation among men would cease, and consequently they would have no means of salvation. The Divine operation of the Lord through the Human assumed in the world is called His immediate influx even to those who are lowest. (AE.806:3)

 

주님이 첫 번째 원리로부터 마지막의 것을 가지고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활동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첫 번째 원리인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사랑과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마지막의 것인 자연계의 인간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인간 안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가장 바깥쪽의 감각에까지 흘러 들어오는 데, 그때 신성의 활동은 가장 힘이 있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성의 힘이 천국의 천사들에게만 미치고 자연계에는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면, 또는 인간의 속 사람 안에만 있고, 겉 사람의 감각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까지나 지옥일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것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시고, 그리고 승리하심으로써 당신의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는 힘이 있고 완전한 진리입니다. 주님의 영화와 부활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 그러니까 육체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 즉 자기들처럼 육체로 와서 자기들처럼 말하고, 먹고 마시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수준, 자기들의 눈높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말입니다.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그러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어? 육체로 있어도 천국에 합당한 거룩함, 신성함이 가능하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살면 얼마든지 천국을 갈 수 있는 거네?’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것으로 꼭 이루어져야 할 두 번째 비밀은, 주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신적 인성, 즉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는 새 교회로부터 실질적인 회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직접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대해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질적인 회개는 스스로를 검토하여 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 주님께 기도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이순철 역) Actual repentance is examining oneself, recognizing and acknowledging one’s sins, praying to the Lord, and beginning a new life. (TCR.528)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게 아니고 죄의 고백과 함께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와 죄의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옥을 이기고 신성한 몸으로 살아나신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이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하신 것입니다. 오로지 그들만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았으며,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50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말씀을 마치시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적 의미로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말씀을 갈망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의 진리를 사랑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이라도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완전한 능력이 그 신실한 사람들을 덮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진정한 회개가 주님의 교회로부터 시작해 교회 밖의 모든 순수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온 땅을 천국으로 바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은 성경 전체가 담고 있는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것과 그렇게 해서 육신으로 부활하신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 교회를 시작으로 진정한 회개의 불길이 교회 밖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정한 회개와 죄의 용서는 입술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해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완전하고 직접적인 진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축복을 받아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과 시몬과 같은 사람, 슬퍼하며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과 말씀을 갈망하는 베다니의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진리를 향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무기력하고 열심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소해 보이는 선한 일을 매일 하나씩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워만 있던 사람은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습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도 좋겠지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10분이라도 말씀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적과 같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와 축복이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아멘

 

 

※ 이상으로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매주 그 본문이 다를 수 있는, 속뜻 주제 설교로 준비하겠습니다.

 

2023-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02(D1)-주일예배(2582, 눅24,44-53),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pdf
0.46MB
성찬.pdf
0.14MB
축도.2025-02-02(D1)-주일예배(2582, 눅24,44-53),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pdf
0.24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24:36-43)

 

 

※ 이제 다음 주면 누가복음 마지막 본문인 24장 44절로 53절을 끝으로, 지난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부터 시작한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만 2년 2개월이 넘었는데요, 원래대로라면, 즉 매 주일에만 했더라면 만 5, 6년도 더 걸렸을 겁니다. 처음엔 매일 예배 본문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훨씬 짧아진 것이지요. 주님의 사 복음서 중 한 권을 그 속뜻으로, 비록 다른 분의 설교를 원본으로 해서이지만, 여러 해 살피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큰 성장, 곧 말씀의 속뜻에 관한 깊은 이해에 나름 도달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금 하고 있는 이 창세기 번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개인적으로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속뜻 강해 설교 또한 병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도 살짝 가져봅니다. 아울러 지금의 저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약하지만, 주님의 허락하심과 도우심으로 제 남은 노년을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강해하면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엠마오 본문 관련, 지난 두 주간 다룬 내용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러면서 거기 있었던 사람 중 둘이 슬퍼하며 엠마오라는 마을로 돌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어디선가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다가 해 저물어 유할 곳에 들러 식사 중 그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죽은 믿음을 살리는 사랑의 떡이었습니다. 그 떡을 먹고 그들의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신앙이 살아났다는 것은 사랑 없는 믿음이 사랑 있는 신앙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그 신앙으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떡을 떼시기 전까지는 이들은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여기까지가 지난 두 주에 걸쳐 전해 드렸던 내용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얕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진리를 따라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가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진리에 복종하려면 실패와 좌절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문득 진리이신 주님이 함께하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어도 못 알아본 채 동행하다가 주님이 떡을 떼시는 순간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처럼 말이죠.

 

※ 이는 마치 아래 기술과도 같은 상황이지 싶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번 글 일부 인용인데요,

 

...가장 바깥쪽 천국에, 천국이 천사의 내면 상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 높은 천국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 무리 가운데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수많은 무리가 거기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들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의 내면이 그곳에 있는 천사들의 단계만큼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각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그 후 어떻게 변했을까요? 말씀에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리를 이미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난 주님이 바로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정한 진리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엠마오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난 후, 내면에 있는 각자의 교회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붙잡고, 이방인처럼 교회 밖에서 서성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로는 예루살렘, 즉 내면의 교회 안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주시는 살아있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교회 안에서 진리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 3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내면의 교회 안에 거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십니다. 평강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인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갈 때 꼭 평강을 기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1-13)

 

주님은 왜 그렇게 평강을 주시려고 하실까요? 평강은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내적인 평화이며, 안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 안에 있을 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거나 험담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거나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진리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영적인 평화를 주십니다.

 

※ 저 역시도 최근 이것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반복되는 무례함 앞에 속으로 당혹해 하면서 순간순간 몹시 언짢았으나 그때마다 얼른 주님의 시선으로 그 상황들을 보고자 힘썼더니 그 즉시 어두움이 물러가고, 주님이시라면 이렇게 대답하셨겠구나 싶은 그런 말로 평안한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칫 지옥문이 열릴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철저히 봉쇄, 오히려 주님 주시는 평안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며, 그에 따른 깊은 지혜 역시 얻을 수 있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날 때, 사람들은 그분을 영으로 생각할 뿐 육신을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7절과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영으로서의 주님과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영으로서의 주님은 인간의 합리성을 통해, 그러니까 이성적 이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겉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그에 비해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와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진리의 깊은 부분을 깨달았음에도 행동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으로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깨달음과 함께 행동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간의 겉 사람과 그 바깥에 있는 감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는 육신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 개신교 표현 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해’ 하는 표현들이 있는데요, 아마 이런 표현들이 방금 말한 ‘육신을 입으신 주님’에 대한 개신교식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과 지옥’ 316번 글은,

 

주께서는 영뿐 아니라 몸도 부활하셨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롭게, 즉 신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당신의 영혼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신성 자체이셨고, 당신의 몸조차도 그 영혼, 즉 아버지의 영혼과 같이 되어 신성이 되셨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16, 김은경 역) The Lord rose again not as to his spirit alone but also as to his body, because when he was in the world he glorified his whole human, that is, made it Divine; for his soul which he had from the Father was of itself the very Divine, while his body became a likeness of the soul, that is, of the Father, thus also Divine. (HH.316)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의 몸을 아버지의 신성과 하나로 만드시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인간들과 직접 만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과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주님께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뼈, 손과 발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자연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신성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10044번 글 10번 항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의 마지막까지 영화롭게 만드셨다는 것은 무덤에 당신의 인간에 속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분명하다. (이순철 역) that the Lord glorified even the ultimates of his human is plain from his words above, and also from the fact that he left nothing of his human in the sepulchre.

 

주님의 손과 발을 보고 제자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절로 43절까지 말씀입니다.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진리를 믿는 사람들조차 진리의 능력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진리는 그냥 진리일 뿐, 삶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어’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를테면 그런 태도가 주님을 영으로만 알 뿐,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아시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생선은 말씀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웠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주님께 드리는 건 지식적으로만 알뿐,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나 잘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중독들이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것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이 뭘까요? 이를테면 식탐이나 알콜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넷플릭스나 유튜브, 또는 게임이나 웹툰, 도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동안은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신 주님께 문제가 되는 진리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말입니다. 그것이 불에 구운 생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걸 맛있게 드셨습니다. 말씀에서 먹는 것은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드시는 건 사실은 주님이 드시는 게 아니라, 제자들인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의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든다는 것은 진리와 선을 각자의 사랑과 의지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거짓과 악을 혐오하게 되고, 갖가지 중독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육신으로 부활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독교’ 109번 글은,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가 저녁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교회는 아침과 같다. (이순철 역) in the Word the state of the church before the Lord’s coming is called evening, and the state after his coming is called morning.

 

고 합니다. 또

 

세상에 오시기 전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회와 함께 계셨으나, 세상에 오신 후에는 직접 교회와 함께 계신다. (이순철 역)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he wa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but only mediately, through angels who represented him; but since his coming he i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immediately;

 

고 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의 신성한 몸에서 나오는 진리는 이전의 진리와는 비할 수 없이 밝고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30장 26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때를 뜻합니다. 그리고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진리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밝고 힘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216번 글과 9828번 글은,

 

내적인 것은 마지막의 것 안에서 흐름이 멈추고 마지막의 것들과 결합하여 그곳에 머문다.

 

고 하고, 9836번 글은,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은 질서의 마지막의 것 안에 있을 때 힘이 있고 거룩하다.

 

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의 마지막의 것은 자연계와 그곳에 사는 인간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은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이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로 질서의 마지막까지 오신 것이며, 그곳에서 인간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영의 문제들을 모두, 그리고 온전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3-4)

 

아멘

 

2023-06-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0.45MB
축도.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0.24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25-35)

 

 

※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한 아침입니다. 간밤, 그러니까 새벽 4시쯤 서부지법 차은경 부장판사가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이에 따라 구치소에서 대기 중이던 대통령은 수형복, 그러니까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독방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재명 같은 저 파렴치범은 버젓이 저러고 다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권리인 계엄을, 그것도 두 시간짜리, 국민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은 계엄을 시행했다 하여 국회를 통해 대통령 탄핵 소추되어 현재 헌재에서 심리 중, 그것도 아주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고, 그와는 별도로 권한도 없는 공수처에 의해,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한 경찰에 의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 결국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집회 현장에 나가 저들과 함께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좋을까요? 멀쩡한 나라가 한순간에 송두리째 저 반국가 국가 전복 세력에 의해 두 눈 뜨고 넘어갈 것만 같습니다. 이토록 치밀하게 오랜 세월 저들은 한 나라 전 분야에 걸쳐 비밀하고 의뭉스럽게 몰래 준비해 왔군요! 내일은 미 트럼프가 두 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인데요, 주님이 트럼프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을 돕게 하실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대에 또다시 이런 과거 3.1 운동 같은 날이 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정말 이 나라가 그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저는 미련 없이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던질 생각입니다. 살아서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죽어서 새로운 조국인 천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리고 또 하나, 어제는 지난날 우리 교회를 크게 도우시던 귀한 권사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촌교회 고 안정희 권사님이신데, 그 인연은 과거 서울침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우리가 개척 후 7년 차 되던, 재정적으로 크게 어렵던 지난 2020년부터 여러 차례 그때마다 크게 우리를 재정적으로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주님께 쓰임 받으신 분입니다. 권사님은 우리 외에도 여러 개척 교회를 물질로 돕던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의 모친 나이 사십에 태어났으나 재가하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배다른 형제들과 보내셨고, 남편과 결혼, 자녀 넷을 두었으나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 두 여자 데리고 살다 죽을병 걸려 연락오더니, 중환자실 4개월 만에 별세, 남편을 용서하고 한 달을 우셨다는 권사님, 향년 82세를 일기로 그토록 소망하시던 천국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가셨습니다. 권사님,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권사님이 보이신 그 사랑과 돌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도우신 그 마음과 취지를 기억,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맡기신 소명 감당 후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시며, 영원한 행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지난주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님은 벌써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이르기를, ‘우리가 선지자로 믿고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째입니다.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며 슬퍼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엠마오는 영적으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주님 또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나,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들의 모습이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그들을 다스리길 원하지만,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서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상태가 나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 뜨기 직전 깊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고, 진리가 살아난 자리에 남은 빈 무덤 같은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여기서 잠깐,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말씀드리면, 이 표현과 동일한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진리인데 선 없는 진리, 선을 동반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잠깐 설명드리자면, 하늘의 해, 태양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햇볕은 선, 햇빛은 진리로 말이지요. 햇볕, 즉 열은 없고, 햇빛, 즉 빛만 있으면, 아무리 그 빛이 강렬해도 마치 겨울철 햇빛과 같아 만물이 절대 생장하지 못합니다. 만물의 생장엔 햇볕, 곧 열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볕 없는 빛, 곧 선 없는 진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선 있는 진리’라야만 한다는 것이고, 여기서 ‘’은 곧 주님이십니다. ‘선 없는 진리’, 즉 볕 없는 빛으로는 거듭남이 불가능한데,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아도 주님하고는, 즉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 대제사장들과 당시 종교 리더십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깊은 설명은 제 블로그 오늘 주일설교 게시글 하단에 pdf로 첨부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조언하는 장면인데, 이에 대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풀어 주신 내용을 지난날 청주 새 교회 시절, 이순철 목사님이 설교하신 설교 원고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3863번 글 14번 항은,

 

진리를 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인데, 이때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순철 역) seeing,”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faith from the Lord, for there is no other faith which is faith than that which comes from the Lord. This also enables man to “see,” that is, to believe; but faith from self, or from what is man’s own, is not faith, for it causes him to see falsities as truths, and truths as falsities; and if he sees truths as truths, still he does not see, because he does not believe, for he sees himself in them, and not the Lord.

 

라고 합니다. 밑에 영어 원문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라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과 주님이 주시는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 즉 인간의 자아 및 고유 본성 안에는 이기심과 세상, 세속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신앙,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안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주님을 믿되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것이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왜 진리이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의 믿음 가운데 아직 인간적인 것이 있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설교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은 ‘faith’와 ‘to believe’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둘 다 ‘믿음’으로 푸시는데요, 저는 ‘오직 믿음’의 뉘앙스가 느껴져 가급적 스베덴보리 원문을 따라 귀찮지만 좀 엄격하게 구분, ‘faith’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앙’, ‘to believe’에 해당하는 부분은 ‘믿음’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저한테는 뭐랄까... 전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더 분명히 하는 것 같고, 후자는 인간의 어떤 자의적 접근 같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나무라십니다. 선지자는 보통 말씀을 뜻하거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머리로만 믿고,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에서 오는 욕망과 그로 인한 거짓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는 별로 없고, 그냥 배우는 걸로 만족합니다.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기도 하지요. 이때가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배움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조금씩 선한 마음이 흘러들어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시험이 찾아오는데요, 시험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주도하던 옛 주인인 자아와 새로운 주인인 진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진리에 붙어 있던 거짓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그 빈 자리로 선이 있는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가진 진리는 점점 순수하고 힘 있는 진리로 변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즉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진리도 고난을 통해 더 굳건하고 거룩한 진리로 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우리에게 있는 죽은 진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시험을 딛고 살아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일행이 엠마오에 가까이 갔을 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날이 저물어 주님이 그들과 함께 유(留, 머무르다)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날이 밝을 때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입니다. 반대로 날이 저물 때는 인간의 자아가 삶을 주도할 때이며, 그러므로 시험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는 감히 지옥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은 수시로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한동안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아가 고개를 쳐듭니다. 그때 시험에 들고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떡을 주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말씀에서 떡은 사랑과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성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빵(우리말 번역으로는 떡)은 선과, 포도주는 진리와 상응하며, 그래서 함께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을 상응, 표상, 상징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우리 안에 이 신성이 있어야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 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때 그들에게 있는 자아에 속한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신앙으로 바뀌고, 그 신앙으로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그들과 함께 시험을 이기신 후,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자 32절에서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서로 이야기합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이신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매 순간 그걸 느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말처럼 말씀을 읽을 때 특별한 깨달음으로 오시거나,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오십니다. 또 시험을 이겼을 때는 큰 위로와 평화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습니다.

 

끝으로 33절로 35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때,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세상에 대한 잡다한 관심과 욕망 속에 거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예루살렘, 즉 주님의 교회 안에 거하게 됩니다. 말씀에는 그곳에 주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행동하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은 선에 대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 둘, 즉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살아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 즉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내면의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 말에 화답하듯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으로 그들의 믿음이 순종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만난 살아계신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삶의 전반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서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밝아진 눈, 곧 그렇게 눈이 밝아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이웃과 사귀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세상에서 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에 모든 걸 맡길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 5)

 

아멘

 

 

2023-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45MB
2016-10-30(D1)-주일예배(이순철 목사, 출18,19-22), '이드로가 모세에게 방침을 주다'.pdf
0.39MB
축도.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13-24)

 

 

기억의 지식이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사람 안에 있는 인애를 통해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다. (천국의 비밀 1162, 이순철 역) It may be seen from this that memory-knowledge is not faith. But faith is the acknowledgment of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 (AC.1162)

 

 

새 교회 가르침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에서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인 선(good)과 진리(truth)로 이루어지며, 종류별로는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靈的, spiritual), 자연적(自然的, natural)인 세 천국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천국 모든 사회는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 간 차이는, 천적 천사는 진리보다는 선을 더 사랑하는 천사이고, 영적 천사는 선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리를 더 사랑하는 천사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천적 천사, 진리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영적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두 가지 성향의 천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천국과 통하는 지상의 교회도 두 가지 성향의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 차이, 이 비밀을 잘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인간과 목회,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도 말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움 반, 기쁨 반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본문입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눅24:1-10)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여자는 보통 진리보다는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람 안의 선과 진리 중, 진리가 아니라 선이나 인애(仁愛, charity) 안으로 오시는 것과 관련, ‘천국의 비밀’ 1162번 글은, ‘주님은 각 사람 안에 있는 인애 가운데로 오셔서 그의 신앙을 내적으로 만드신다’(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고 합니다. 또 1226번 글은, ‘참된 지성과 지식은 사람의 인애를 통해 주님이 생산하는 자식이다’(Hence comes true intelligence, and hence comes true memory-knowledge, and hence comes true knowledge, which are all sons of charity, that is, sons of the Lord through charity.)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주님이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지요. 여자들은 진리를 생각하기보다 바로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들, 즉 체어리티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보다 그들에게 먼저 오셔서 그들 안의 죽은 지식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 안에서 살아난 진리의 지식이 바로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이십니다.

 

※ 그러니까 신앙 지식을 갖고만 있던 우리가 드디어 실천에 옮기고, 이후 실천하는 신앙인, 선을 행하는 신앙인으로 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은, 제자들은 그들 내면의, 생명 없는 진리들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엠마오는 샘(spring)이라는 뜻이고, 샘의 영적 의미는 참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없는 진리란 어떤 걸까요?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그걸 실천하지는 않는,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진리로 자신을 포장하기를 즐기는 사람, 즉 박학다식하고 달변 및 글재주도 있어 청중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는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속 사람이, 정작 본인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행하려 해도 뜻대로 잘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13절과 14절입니다.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를 걸어갔다고 번역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three score, 즉 이십 리를 세 번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스코어(score)는 스물, 이십이라는 뜻도 있는데요, 여기 이 숫자 2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십 리를 세 번 걸어 엠마오로 가는 건 신앙인들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우고 한편으로는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점차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엠마오는 참된 진리를 뜻하고, 숫자 3은 완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5절과 16절에는,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앞 절의 말씀에서 짐작하셨을 터이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문자적으로는 두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신앙인에게 있는 두 가지 생명, 즉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과 의지(will)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둘은 신앙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지요. 거듭나는 동안 이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는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도 여인들과 같이 진리를 배우기보다 행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살아있는 진리의 인도를 받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의 사람이 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답답하고 슬프겠습니까?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 왜 나는 변하지 않는가? 진정한 지혜는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지혜 없음을 인정하고 진정한 지혜를 갈구할 때 어느 날 불쑥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에는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눈을 가리어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뭘까요?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이나 교만, 분노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생활고나 질병의 고통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 때,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 서두에 세 천국이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천국은 그 지혜와 영광 등 모든 것에 있어 서로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혜입니다. 즉 천적 천국은 영적 천국에 비해 그 지혜가 수천수만 배 뛰어나고, 영적 천국은 자연적 천국에 비해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령 예를 들면, 자연적 천국에 있는 천사가 마음에 원해서 영적 천국을 가보고 싶어 하면 주님의 허락으로 잠시 가볼 수 있게 되는데, 정작 가보면 이상한 게, 분명 거기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들과 사람들, 곧 천사들이 가득함에도 정작 본인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내면이 영적 천국을 볼 수 있게 열리지를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비슷한 게 아닐까, 정작 이 엠마오 두 제자의 내면이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말씀에서 ‘걷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이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자기에게 진정한 지혜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때 우리는 깊은 공허함과 슬픔에 빠집니다. 그것은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생각이나 자존심, 오랜 습관 같은 것, 마치 분신과 같은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것을 떠나보낸 자리에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는 게 바로 지혜를 향한 출발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18절로 24절입니다.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두 사람 중 글로바라 하는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운을 뗀 후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글로바는, 요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 곧 나사렛 예수,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자기들은 이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으로 알았는데, 이분을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 그리고 자기들과 함께한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보았더니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더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기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더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으나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예수는 못 보았다는,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글로바가 하는 말은 엠마오로 가는 모든 신앙인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한 말을 그 속뜻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믿었던 예수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 진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한 진리가 죽고 완전한 진리로 다시 살아나는 것과 그때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그 진리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 살아날 때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내 안에서 진리이신 그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즉, 본문에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우리 안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악과 거짓을 뜻하고, 주님이 죽은 지 사흘이 되었다는 것은 구원자이며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진실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제쯤이면 지혜로워질 수 있을지 그날만을 고대합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일에는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어쩌면 지금 우리 가까이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눈이 가리어져 주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 이 엠마오 두 제자 에피소드는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명멸했듯이 우리 안에서도 그동안 많은 교회가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처음 알았을 때는 태고교회처럼 순진한 교회가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고대교회와 같이 진리에 밝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점점 싸움이 치열해졌습니다. 싸움에서 넘어져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님을 죽인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 우리 안에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교회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 교회이며, 슬픔에 눈물짓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제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역사에 호산나를 부르며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가 주님의 새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렘30:10)

 

아멘

 

2023-05-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0.44MB
축도.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

 

불 말과 불 병거(왕하6:8-23)로 대통령 관저를 둘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지금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진입,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하고자 저 불의한 수많은 무리가 모여 모의하고 있고, 그에 비하면 소수인, 그리고 이럴 때 당연히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찰도, 군도, 법원도, 심지어 대통령실과 정부 행정 관료들조차 대통령을 향해 등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리는 등 대통령 경호처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 가운데 있는 이때...

 

8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왕하6:8-23)

 

저 엘리사의 때에 일어난 일이 지금 대통령 관저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분연히 일어나 주께 속한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 천사들에게 입혀 주시는 얇은 보호막을 입혀 주셔서, 이 강추위와 더불어 모든 지옥의 기운들로부터 영육간 어디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엡4:26) (2025/1/8)

 

간밤 한남동 관저 앞 도로변 상황을 박완석 라이브로 계속 보다가 저분들은 이 강추위 한복판에 아랑곳없이 저렇게 애들을 쓰시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이 무슨... 하는 맘에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드러눕지도 못하고 앉아 기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 토막잠 자던 중 새벽 5시, 얼른 유튜브를 켜니 아이고...

 

어떤 분은 그 추운 아스팔트 바닥에 호일을 돌돌, 마치 김밥처럼 말아 주무시고 계신 분, 그 시간에 청년들이 애들을 쓰며, 누구는 연사로, 누구는 자원봉사로... 그리고 저만치 열 대가 넘어 보이는 대형 버스의 엔진 소리, 보니 애국 후원자들께서 보내주신 ‘난방 버스’, 아... 세상에! 어르신들, 이곳에서 몸 녹이시라고... 아이고, 주님, 순간 울컥...

 

요 며칠 계속 이 급변 정국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의 애를 써서인가 오늘은 제법 몸에 무리가 오고, 두통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에 원망과 분노, 저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깜빡, 제 안에 벌어진 틈을 따라 지옥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 서둘러 수습,

 

오, 주님, 주님도 때로는 노를 발하셨지만, 그러나 주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여서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시대 저 이재명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온 나라 전반에 퍼져 있는 이 독버섯 같은, 암세포 같은 불의한 자들로 정말 화가 많이 나지만, 그러나 참으로 주님 안에서 분노하고 싶습니다. 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셔서 제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분을 내다가 지옥문이 열리는 우를 범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기를,

 

오, 주님,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그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어도 전혀 몸이 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주님의 선, 곧 주님의 올바름을 사랑하는 저분들을 지켜주시고, 역시 일체 몸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 안에서 안전하게 나라를 사랑하여 지옥의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