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하지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사후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접한 후, 그 전반적인 걸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부터, 그러니까 지난 한 4, 5년 동안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그래서 늘 개운치가 않았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보면 결국 이 ‘오직 믿음’의 교리로 사는 삶에 대한 대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의 오랜, 지난날 개신교인으로서의 삶 동안 혈육과 친구, 지인들의 거의 백 프로가 모두 위 제목에 해당하는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모든 계시의 결론은,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 가는 게 아닌, 각 사람의 내면, 곧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은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삶과 생활 가운데 실천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합당한 속 사람의 상태가 되며, 그러므로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현 개신교, 그리고 기독교인 중에서 비록 ‘오직 믿음’의 교리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겉보기에 삶과 생활, 일상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같은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의 선한 삶으로만 보면 그가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새로운 계시의 사람인지, 아니면 ‘오직 믿음’의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후덕하고 선량하다가도, 이 오직 믿음 교리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태도가 돌변, 표정이 굳어지는 그런 분들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지난 수년간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및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는 10837)를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최근 이에 대한 무슨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어 이렇게 나름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실마리’라 함은 다름 아닌, ‘황폐함의 과정’ 또는 ‘황폐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영어로는 Vastations라는 과정을 말하며, 다음은 이와 관련된 요약들과 해당 글 번호들입니다. 해당 글은 위 ‘천계비의’, 즉 라틴어 Arcana Coelestia의 글 번호를 말합니다. 혹시 아래 해당 번호의 글들 또한 읽어 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글을 열어 거기서 해당 pdf들을 다운받으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pdf들은 영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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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에는 황폐함의 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고 내세에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것이다 (AC.698, 7122, 7474, 9763). Vastations are effected in the other life, that is, those that pass into the other life from the world are vastated (n. 698, 7122, 7474, 9763).

 

선한 사람들은 거짓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나고, 반면 악인들은 진리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난다 (AC.7474, 7541, 7542). The well-disposed are vastated in respect to falsities, while the evil are vastated in respect to truths (n. 7474, 7541, 7542).

 

선한 사람들이 겪는 황폐함의 과정은 지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과정인데, 이것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함께했던 것들이다 (AC.7186, 9763). The well-disposed undergo vastations that they also may be divested of what pertains to the earth and the world, which they had contracted while living in the world (n. 7186, 9763).

 

또한 악과 거짓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서 나오는 천국 선과 진리의 유입을 위한 여지, 그리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AC.7122, 9330). Also that evils and falsities may be removed, and thus there may be room for the influx of goods and truths out of heaven from the Lord, and ability to accept these (n. 7122, 9330).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까지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방해하고, 그들과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AC.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Elevation into heaven is impossible until such things have been removed, because they obstruct heavenly things and are not in harmony with them (n. 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미리 준비된다 (AC.4728, 7090). Those who are to be raised up into heaven are thus prepared for it (n. 4728, 7090).

 

준비도 되기 전, 천국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AC.537, 538). It is dangerous to come into heaven before being prepared (n. 537, 538).

 

황폐함의 과정을 마치고,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의 내적 밝아짐과 기쁨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리셉션에 관하여 (AC.2699, 2701, 2704) The state of enlightenment and the joy of those who come out of vastation and are raised up into heaven, and their reception there (n. 2699, 2701, 2704).

 

이들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지역을 가리켜 낮은 땅이라고 한다 (AC.4728, 7090). The region where those vastations are effected is called the lower earth (n. 4728, 7090).

 

그 지역은 지옥들로 빙 둘러싸인 발바닥 아래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AC.4940–4951, 7090)과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AC.699) That region is under the soles of the feet surrounded by the hells; its nature described (n. 4940–4951, 7090); from experience (n. 699).

 

그 무엇보다 훨씬 더 감염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지옥들이란 무엇인가 (AC.7317, 7502, 7545) What the hells are which more than others infest and vastate (n. 7317, 7502, 7545).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황폐하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피하며, 그들로부터 돌아선다 (AC.7768). Those that have infested and vastated the well-disposed are afterwards afraid of them, shun them, and turn away from them (n. 7768).

 

이들 감염과 황폐함의 과정은 악과 거짓의, 들러붙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며, 그들의 질과 양에 따라 계속된다 (AC.1106–1113). These infestations and vastations are effected in different ways in accordance with the adhesion of evils and falsities, and they continue in accordance with their quality and quantity (n. 1106–1113).

 

일부는 이 황폐함의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이 원한다 (AC.1107). Some are quite willing to be vastated (n. 1107).

 

일부는 두려워하면서 이 과정을 밟는다 (AC.4942). Some are vastated by fears (n. 4942).

 

일부는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세상에서 한 거짓된 생각들로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이 악과 거짓 때문에 근심하고 양심의 큰 고통을 겪는다 (AC.1106). Some by being infested with the evils they have done in the world, and with the falsities they have thought in the world, from which they have anxieties and pangs of conscience (n. 1106).

 

일부는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영적 감금 상태에 있는, 그런 식으로 이 과정을 지나는데, 이 상태는 진리에 관한 무지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다 (AC.1109, 2694). Some by spiritual captivity, which is ignorance of truth and interception of truth, combined with a longing to know truths (n. 1109, 2694).

 

일부는 잠드는 식으로, 일부는 깨어 있음과 잠이 든, 그 중간 상태에 있는 식으로 (AC.1108) Some by sleep; some by a middle state between wakefulness and sleep (n. 1108).

 

자기가 한 일을 공으로 여긴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AC.1110). Those that have placed merit in works seem to themselves to be cutting wood (n. 1110).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엄청한 다양함으로 (AC.699) Others in other ways, with great variety (n. 699).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면,

 

1. 이 황폐함의 과정은 천국 갈 사람한테도, 지옥 갈 사람한테도 공평하게 일어난다. 다만 전자한테는 악과 거짓 등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후자한테는 선과 진리 등 지옥에는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떼어내는 과정이다. 참고로, 말이 떼어낸다지 실제로는 생살을 찢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2. 이 과정은 그 확신한 정도에 따라 매우 혹독, 오래 걸리거나 그냥 슬쩍 금방 지나가기도 한다. 즉 가령,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어도 그것보다는 일상 가운데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힘쓴 사람은 이 과정이 가볍게 지나간다. 그에게는 떼어낼 게 별로 없어서다. 만일 그가 이런 교회가 아닌,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치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더라면, 이 떼어냄의 과정은 그야말로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전에 어쩔 수 없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게 되어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그런 교리보다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참된 신앙으로 이웃 사랑에 힘쓰며 산 사람은 의도치 않게 붙은 이런 교리적 오류들만 좀 떼어내는 약간의 과정을 밟은 후, 천국으로 올라간다.

 

3. 당연한 결론이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를 크게 확신, 비록 목숨을 걸었어도 실제 그의 삶이 천국에 부합하지 않으면, 즉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면 그는 천국에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역시 당연한 결론인데,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는 건 그가 겉 보기에 무슨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든 그 숨은 동기, 심지어 본인조차 몰랐던 그 진짜 동기가 바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마틴 루터를 만나 그와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특히 이 주제, 오직 믿음’의 교리와 관련, 왜 이런 교리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자기가 이 아이디어를 교리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자 천사들이 그런 짓을 하지 말라 계속 권했지만, 그 당시 이런 교리 없이는 카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가 없어서 부득이 계속 강행하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루터 관련,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796. Ⅰ. 영계에서 만난 루터 · 멜랑크톤 · 칼빈 - 참된 기독교 - 새교회

나는 자주 기독교의 이 세 지도적 개혁자들과 대화를 했으며, 그들의 오늘날까지의 생활에서 모든 것들을 배웠다.   루 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교리의 극렬한

www.newchurch.or.kr

 

4. 참고로, 위 ‘낮은 땅’이라는, 이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곳은 지옥에 인접한 곳으로, 특히 발바닥 아래’ 같은 표현은 천국 전체가 사람 모습이라는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와 57장, ‘주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신다. 영이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이’(The Lord Casts No One into Hell; This Is Done by the Spirit)에 관한 아래 스캔들을 읽어 보라.

천국과지옥.1.8.59-67.'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scan.pdf
0.33MB
천국과지옥.3.57.545-550.'주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신다'.scan.pdf
0.31MB

 

등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태생적으로 온통 이런 환경이었으면, 무슨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너무 교리, 교리 하지 않으시는 것이 나중을 생각하면 보다 나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교리보다는 실천에 더 집중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입니다. 저는 사람의 사후, 그가 선한 삶을 살았으면, 즉 선과 사랑, 애정과 신앙의 삶을 살았으면, 비록 그에게 생전에 의도치 않게 덕지덕지 붙어 떼어내야 할 신앙적 오류들이 좀 있더라도 그런 걸 끝까지 떼어내시고, 순도 백 프로의 사람으로 만들어 천국에 올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는, 이제는 제 주변, 제 혈육이 비록 이 새로운 계시에 대해 시큰둥해하거나 적의를 드러내며 저를 멀리한다 하여도 전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사후엔 좀 더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 안타깝지만, 그러나 그가 선한 삶, 곧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으면 그는 결국 천국으로 올려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오직 믿음’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힘써 고백하더라도 실제 그 삶이, 그리고 그 하는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던 사람들은 그가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인이었어도 사후 그는 천국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0여 년, 저 역시 이 오직 믿음’의 신앙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므로 저희 부모님을 비롯, 장인, 장모 네 분 모두 천국 가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네 분 모두 배움은 조금 부족하셨어도 이 땅에서 정말 선한 삶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늘 이글이 유익, 도움 되셨기를 바라며, 그 결과 주변 나와 생각이 다른 신앙의 지인들이 혹 계시더라도 전과 달리 넉넉한 심령, 후덕하심과 여유로우심으로 대하실 수 있기를 권합니다. 타교단과 교파, 심지어는 타종교에 속한 분들한테까지도 말입니다. 사람의 사후, 주님은 오직 그의 안에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가만 보십니다. 타종교, 즉 교회 밖 사람들에 관하여는 아래 스캔을 읽어보세요. 말씀(The Word)이 없는 교회 밖 세상 나라와 종족들을 포함한, 주님의 공정하신 구원 시스템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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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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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의 증거

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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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8-18(D1)-주일예배(2557, 눅21,20-28), '말세의 증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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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눅21:20-28)

 

 

사람이 가장 신앙하는 진리는 (내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 다음에,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천국의 비밀 9164, 이순철 역) ...When a man is in truth from good, then that truth in which he has the greatest faith is in the middle; next follow the truths in which he has less faith; and finally those which are of doubtful faith. In the borders round about are falsities, which, however, are not in a series with the truths, and do not stand upright toward heaven as do the truths of good; but are bent downward, and look toward hell insofar as they come forth from evil... (AC.9164)

 

 

지난 2주 동안 계속해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전해 드렸습니다. 첫 주에는 마지막 때 교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런 것처럼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불경하다는 것과, 그래서 말세에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계시록에서는 여자가 힘들게 아이를 낳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또 둘째 주에는 말세에는 기존 교회들에 의해 새 교회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과, 그때 새 교회 사람들은 인내함으로 오히려 영적 생명인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를 얻는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세에는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무리 잘못해도 결코 성내거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씀에서는 징벌의 날이라고 할까요? 교회가 그릇된 신앙으로 인해 영적으로 피폐해질 때, 지옥으로부터 공포와 불안감이 몰려오고, 더구나 자연적으로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데, 그때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 ‘그릇된 신앙’이란, 주님의 속성, 성품, 실제 모습에 위배 되는, 안 어울리는 신앙을 말합니다. 즉 주님은 실제로는 이런 분인데, 사람들은 저런 분, 곧 무엇을 더하거나 빼서 살짝(?) 위, 변조, 결국 자기들을 닮은 그런 이상한 신을 만들어 내고는 그 신이 곧 주님이시라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게 바로 ‘오직 믿음’의 신앙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같이 가는데, 역사적으로 인류는 여기서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 굳이 삶이 안 받쳐줘도 굳센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배우고 믿어왔는데, 각 교회 시대마다 그 시대 종말에 이르면 이런 신앙이 아주 극에 달하곤 했습니다. 위에서 ‘역사적’이라 한 것은, 이런 비극이 창세기 가인이라는 신앙과 아벨이라는 신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의 그런 상태를 본문 20절과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군대는 진리를 공격하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였다는 것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가득한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거짓 진리 때문에 교회 안에 진리가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칼은 거짓 진리를,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거짓 진리에 의해 참된 진리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악이 가득한 것, 즉 자아의 악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나라는 보통 선을 뜻하지만, 이방 나라, 또는 이방인이라 할 때는 반대로 자아의 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 ‘자아의 악’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악을 말합니다. ‘’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면 그가 의도하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악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본문 25절과 2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25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하늘의 징조와 땅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마지막 때 교회의 심판은 영계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지상의 교회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일월성신의 징조는 영계에서 심판이 있을 때, 그곳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상응(相應)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영계의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것은 지상 교회 안에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별이 떨어지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달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땅에서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심판을, 구체적으로는 교회 간 교리의 다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바다와 파도가 으르렁대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탕으로 추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맞다 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간 교리 다툼이 교회의 심판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다툼을 통해 교회의 잘못된 신앙과 타락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심판은 이렇게 영계와 자연계에서 차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새 교회가 나타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27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능력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까닭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 안에서 빛나는 영광이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처음 오실 때처럼 그렇게 다시 오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고, 말씀의 내적 의미로 오십니다.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이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가르칠 때도 교인들 가운데는 신앙에 따라 인애, 곧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2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21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본문에서 유대 및 성과 촌에 있는 자들, 그리고 아이 밴 자들, 젖을 먹이는 자들은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참된 신앙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이 밴 자, 또는 젖 먹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삶의 선을 뜻하고, 젖을 먹인다 할 때 이 젖은 삶의 선과 함께 있어야 할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누구보다 선량한 참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타락한 교회 안에서는 체어리티의 신앙, 또는 선이 있는 진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릇된 교리가 주님으로부터 교회로 유입되는 참된 선과 진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 ‘선이 있는 진리’란 그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진리를 말합니다. 얼핏, 혹은 누가 보아도 진리 같아도 실제로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진리가 있으며, 그런 진리로는 능력이 비롯되지 않습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으며, 능력은 오직 이런 선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조용기 목사 저, ‘4차원 영성’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사람, 혹은 그 장소에 주님이 임하실 수 있었던 그런 상태였음을, 천국의 능력, 입류가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상태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지 못하면, 기왕에 가지고 있던 체어리티의 선과 진리가 점점 메말라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 및 성과 촌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와 성과 촌은 교회들을, 산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선한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말세의 징조가 보일 때, 주님은 일어나 머리를 들라 하십니다. 머리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것인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고,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들라는 것은 말세에는 무엇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라는 것이고, 인간의 지혜,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9164번 글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 안에 있을 때, 그가 가장 신앙하는 그 진리가 (내면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그것보다 덜 신앙하는 진리는 그다음에, 그리고 끝에는 확신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며,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는 거짓이 위치한다. 거짓은 진리들과 함께 열을 지어 서 있지 않고, 선에서 비롯한 진리처럼 천국을 향해 바로 서 있지도 않으며, 아래를 향하거나 악에서 비롯한 만큼 지옥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진리가 참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라면, 그것이 마음의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 진리가 선이 없는 진리, 즉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마음 한복판에 자리 잡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이해하기만 할 뿐 그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라고 하는 애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욕망이나 자아에 속한 것들이 마음 한복판에 있다면, 그것을 밀어내고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가 있는 신앙을 그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 아주 사소한 습관부터 고쳐나가야 합니다. 사소한 습관들이 주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질 때, 그것과 연결된 많은 것들이 거룩하게 변하며, 그렇게 해서 거듭남의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상응을 통해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영광과 능력으로 오신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이 말씀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라고요. 그냥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좀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통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신앙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마치 유대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정결 의식의 의미가 내적인 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적인 것으로 바꿔 그것으로 교인들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잘못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능히 거듭남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아주 작은 악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큰 악도 끊게 하십니다. 아주 작은 선부터 행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눅21:28)

 

아멘

 

 

 

2022-09-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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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장성하면,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이시다 (2024/8/14)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 후에는 그는 전처럼 아버지(father)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 즉 왜 아버지는 자녀가 자랄 동안만 아버지인가 하는 이유는, 그때는 그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그때는 아직 자녀가 어려 아버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제법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주님이 그의 아버지(Father)이심이 틀림없는데요, 이 아버지 노릇을 그동안은 육신의 아버지가 해왔었죠... ...after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he ought not to acknowledge his father as father, as before; for the reason why the father is to be acknowledged during the bringing up of the son, is that the father is then in the Lord’s stead, nor does a son know at that time what he ought to do except by the direction of his father. But when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and competent to think for himself, and seems to himself to be able to direct himself from himself, then the Lord must be his Father, whose vice regent his natural father had been... (AC.6492)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중, 입류(Influx)와, 사람의 영과 육 사이 교류를 다룬, ‘ABOUT INFLUX AND THE INTERCOURSE OF THE SOUL AND THE BODY’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느 날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며,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시라는 이 글을 읽고 했던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에 의하면, 그 이유는 먼저, 육의 아버지는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까지나 주님의 대역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때 아버지 노릇을 하는 우리 육의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실제 아버지이신 하늘의 주님께 안테나를 세우고 그 주파수를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당연한 귀결, 곧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와 내게 흘러들어오는 입류를 통해, 내게 맡겨진 이 아이를 내 뜻, 내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는 안 되고, 늘 주님 뜻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장성한 자녀도 이제는 하늘의 주님께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혈연, 그리고 서류상,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 아버지는 주님이심을 시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운데 끝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아버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는 이 사실! 정말 감격적이지 않습니까? 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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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

2024-08-11(D1)-주일예배(2556, 눅21,10-19),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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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8-11(D1)-주일예배(2556, 눅21,10-19),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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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10-19)

 

 

(運, fortune)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질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으로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섭리는 모든 개별적인 일 속에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6494, 이순철 역) and that what is called fortune is from the influx of providence in the ultimates of order, where it so comes forth; thus that providence is in the veriest singulars of all things,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that not even a hair falls from the head without the will of God. (AC.6494)

 

 

※ 다음은 지난주 설교 부분 인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연장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세에 일어날 징조에 대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는데요, 우리는 그 대답을 계시록 12장 1절로 6절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6)

 

이 말씀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용은 뭘까요? 새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려 하는 기존 교회들을 뜻합니다. 새 교회가 처음 나타날 때는 이처럼 기존 교회들의 저항이 아주 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교회는 주님의 보호 아래 천천히, 그러나 견실하게 성장합니다.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우리 한국 새 교회가 지난 60년 동안 더러는 시험도 있었지만, 아주 조금씩, 그러나 견실하게 성장해 온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 새 교회의 경우는, 제가 알기로 1800년대 초인 1817년에 세워졌고, 그 후 70년쯤 지난 후인 1890년에 컨벤션 처치와 교리적인 견해 차이로 갈라졌으니까, 그렇게 보면 대략 1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갈 때마다 느끼는 건, 그래서인지 미국 새 교회는 교리적으로 아주 안정되어 있고, 교리에 대한 이해가 바르고 깊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새 교회는 천천히 그러나 견실하게 발전합니다. 말씀에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여자가 주님에 의해 양육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말세라고 하면, 보통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세는 성경에서 비롯한 개념으로 교회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홍수로 인해 땅이 모두 물에 잠겼던 노아 홍수 시대나,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이교도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때가 모두 영적으로는 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 11절입니다.

 

10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영어로 nation을 번역한 것으로, 속뜻으로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민족은 people을 번역한 것이고, 진리를 뜻하며, 반대로는 거짓을 말합니다. 따라서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한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끼리, 또는 거짓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말세에는 교회가 타락해 세상에 선과 진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것은 몸의 심장과 폐가 장기와 손발에 깨끗한 혈액을 공급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세에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기근은 교회 안에서 사랑이나 선이 사라지는 것을 나타내고, 전염병이 발발하는 것은 교회 안에 거짓 진리가 만연하여 교회가 병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무너질 때, 주님께서는 기존 교회를 대신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데, 그 교회가 계시록 12장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로 표현된 새 교회입니다.

 

새 교회가 나타날 때, 기존의 교회들은 어떻게 할까요? 교리가 이단적이라거나 하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새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여기서 내 이름은 주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속뜻으로는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charity)를 뜻합니다. 말세에 교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새 교회에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그러므로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들이 새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주님은 한 번도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나,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의 이야기는 모두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 신앙은 구원의 신앙이 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고 회당과 옥에 갇히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새 교회인들이 핍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이 새 교회를 박해할 때 새 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사전에 이런저런 궁리를 합니다. 자칫 상대가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리 궁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리 궁리하는 것은 주님의 지혜에 기대지 않고, 인간의 지혜에 기대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 안수받고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댁에 식사 초대를 받아 대접을 잘 받았는데, 식사를 마치고 어떤 장로님이 저희 새내기 목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성경책과 성문서 중 어떤 것을 더 많이 읽으십니까?”

 

※ 성(聖)문서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서 남기신 모든 기록을 말합니다.

 

그때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몸에 해당한다면,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성문서 중 어느 하나를 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의 인성과 신성 중 어느 하나를 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경히 여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아마 이런 것이 주님이 주시는 구변과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 이런 것이 바로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국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인데요, 지상에서는 태고교회 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앙이 있다면 미리 염려하거나 궁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7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이름은 인애(仁愛), 곧 체어리티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그 속에 체어리티라는 본질이 들어있는 신앙,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주님을 부를 때는 체어리티의 신앙으로부터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체어리티 신앙으로 사는 걸까요? 일을 할 때, 자신의 이익보다는 주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 세상 것보다 영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 이런 것이 모두 체어리티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으로 살고자 할 때,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으며, 또한 각자의 내면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모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이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시험을 당하여 싸울 때는 자신에게는 엄격히 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억울하거나 항변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침묵하신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내하고, 또 인내할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살아난다는 건 우리에게 있는 진리 안에 이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생기는 걸 의미합니다. 신앙인의 영혼은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어느 때는 진리만 가지고 행동하고, 어느 때는 진리와 체어리티를 함께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언제나 체어리티가 있는 진리로부터 행동합니다. 그것이 인내로부터 얻는 결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에는 교회 안에 진리와 선이 점점 사라져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도 악을 선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시련과 고난이 많습니다. 새 교회 사람들도 처음에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을 뿐,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시험이 많은 건 그래서입니다. 각자 견뎌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공격할 때에도 인내하며, 주님께 엎드리면 주님께서 머리털 하나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항상 외면하는 것만 같던 행운이 마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새털구름과 같이 몰려옵니다.

 

이 운(運, fortune)이라는 것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6494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질서의 가장 마지막의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곳에서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운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개별적인 일들 속에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셨다.

 

머리털은 인체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하나님의 질서의 가장 끝단에 있는 자연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행운이나 불운 같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주님의 섭리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과,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운처럼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고, 자연적 삶의 끝에까지 흘러들어와 행운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17, 19)

 

아멘

 

2022-09-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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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에 관한 때와 징조

2024-08-04(D1)-주일예배(2555, 눅21,5-9),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에 관한 때와 징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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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8-04(D1)-주일예배(2555, 눅21,5-9),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날에 관한 때와 징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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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눅21:5-9)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인정하되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자신에게 나온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의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주님은 그에게 있는 진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 (천국의 비밀 8868, 이순철 역)

 

 

유럽 여행을 다녀온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가는 곳마다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 건축물이 많았는데 정작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는 않았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드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교인들의 수가 그렇게 작으면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아마 유럽 교회가 점점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이 온통 세상의 쾌락을 쫓아다니고,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교회는 비어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모두 교회의 마지막 때 징조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때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징조는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5절과 6절입니다.

 

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이때의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헤롯(BC.37-AD.4)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은 46년 동안 증축한 당대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말씀에서 ‘성전’은 보통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유대교회와 같은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인 교회란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돌과 헌물’은 무슨 뜻일까요? 돌은 외적인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헌물은 그 교리를 바탕으로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인 사랑의 삶보다는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의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더 끌리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보시고,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은 참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진리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질서는 단호한 것이며,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말씀은 말세에는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돌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진리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주님 당시 유대교회나 오늘날의 교회나 교회들은 모두 나름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에는 모세의 십계명을 포함한 각종 규례와 장로의 전통이라는 교리가 있었고,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는 삼위일체의 신앙과 믿음만의 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 교리들이 모두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임의로 해석해 만든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서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8절) 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진리가 아닌 교회의 교리에 대해 ‘천국의 비밀’ 8868항은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인정하더라도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을 때 주님은 그의 진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또 8868:2항은 ‘진리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 없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만일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 없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유대교회는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말로는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을 구별, 한 분 주님의 존재를 사실상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 안에는 생명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묻습니다. 7절입니다.

 

7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교회의 마지막 때 나타날 징조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거나 천재지변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때 주님이 나타내 보여 주시는 계시를 뜻합니다. 주님의 사도 요한은 계시록 12장 1절 이하에 그 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6)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시의 내적 의미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 ‘하늘에 큰 이적’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계시를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존 교회를 대신할 새 교회에 대한 계시를 뜻합니다. ‘해를 옷 입고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는’ 여자는 그때 나타날 하늘의 새 천국과 그것과 통하는 땅의 새 교회를 뜻합니다. 여자가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여자는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며, 또한 교회는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는 새 교회의 교리가 비로소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여자가 낳는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는 새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용으로 표현된 기존 교회들의 극렬한 저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한 큰 붉은 용이 있어’에서 붉은 용은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믿음만의 신앙으로 변질시킨 교회들을 뜻합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는 새 교회가 처음 생길 때, 교회들이 새 교회의 교리를 말살하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이 말씀은 새 교회의 합리적인 교리가 체어리티가 없는, 죽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장은 새 교회의 합리적인 교리를 뜻하고, 만국은 체어리티가 없는, 그래서 죽은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새 교회의 교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는 처음 새 교회가 생길 때는 교인의 수가 별로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폐한 곳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새 교회의 처음 상태를 뜻합니다.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는 주님의 보호 아래 새 교회가 지속적으로 커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완전하게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정도로 성장하는 게 완전하게 성장하는 걸까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계획하셨던 일들이 완벽하게 실현될 때, 그때가 새 교회가 완전하게 성장한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밝히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8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종말론 같은 거짓 진리를 퍼뜨리거나, 마치 자신이 재림 예수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자들이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의 말에 속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난리와 소요는 새 교회와 기존 교회들 간의 교리적 다툼 같은 외부의 시험을 뜻하기도 하고, 또는 새 교회인들이 겪는 내면의 시험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험의 조짐이 있을 때, 새 교회인들은 어쩔 수 없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시험에서 넘어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혹 시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시험에서 이기든 지든 그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새 교회의 신앙은 그냥 자라는 게 아닙니다.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든 외부에서 오는 것이든 시험과 연단을 통해 자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난리와 소요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하시고, 그래야 끝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것에 끌립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건물이 크고 아름다워야 교인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교회당이 아무리 아름답고 예배 의식이 경건해 보이더라도 그 속에 내적인 것이 없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것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8868:3항은, ‘살아있는 진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바탕으로 한 신앙의 진리이다. 살아있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닌데, 그 이유는 그 진리 안에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외적인 것에 미혹되는 대신 사랑과 체어리티라는 내적인 것에 끌려 새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의 체어리티의 삶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새 교회는 우리만의 구원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통해 이웃과 사회와 지구 전체를 살리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이 우리의 입술에 머물지 않고 입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손과 발끝까지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의 진리를 배운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4-5)

 

아멘

 

2022-08-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8-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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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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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8(D1)-주일예배(2554, 눅21,1-4), '과부의 두 렙돈 헌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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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0iBCab2Z-U

 

과부의 두 렙돈 헌금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1-4)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참된기독교 459:9)

 

※ 오늘부터 누가복음 21장입니다. 총 다섯 편의 설교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존 설교 원고들도 계속 가까이하시며, 함께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성서 시대 이스라엘 화폐 단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하)’(2010)에 나오는 ‘화폐 단위’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화폐 단위가 복잡한 것은, 1세기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 가지 화폐 단위가 모두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공식 화폐인 로마 화폐가 사용되었다. 둘째, 로마 제국 이전부터 사용되던 헬라 화폐도 통용되었다. 셋째, 이방인들의 화폐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자체의 화폐도 통용되었다.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보다 작은 단위의 동전은 구리 동전이었다. 로마의 구리 동전은 앗사리온(assarion)과 콰드란스(quadrans)가 있었다. 4과드란스는 1앗사리온으로, 당시 하루치 품삯인 1데나리온(denarius)은 16앗사리온이었다. 이를 기초로 대략적인 가치를 환산해 보면,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2010년 기준, 대략 5만 원이라고 할 때, 1앗사리온은 3,125원, 1콰드란스는 781원에 해당한다. 헬라의 구리 동전은 렙돈(lepton)으로 2렙돈은 1콰드란스였다. 이것을 기초로 과부가 성전의 연보궤에 넣은 두 렙돈, 즉 1고드란트(콰드란스)는 1,000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로마의 은 동전인 데나리온과 헬라의 은 동전인 드라크마는 거의 같은 화폐 가치를 가졌다. 시장에서 값을 지불할 때는 두 개의 은 동전이 같았지만,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납부할 때는 1드라크마가 4분의 3데나리온에 해당했다. 납세를 위해서는 제국 내의 공식 화폐인 데나리온에 비해 헬라 화폐인 드라크마가 25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거래된 것이다.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로마와 헬라의 동전과는 별도로 이스라엘은 ‘셰켈’(Shekel, 성경에는 ‘세겔’로 나옴)로 불리는 자체적인 동전이 있었다. 세겔은 일반 세겔과 성전세 납부에 사용하는 특수 세겔이 있었다. 특수 세겔은 두로(Tyre, 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도시)에서 주조했기 때문에, ‘두로 세겔’로도 불렸다. 일반 세겔은 2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고, 두로 세겔은 4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 다음은 ‘연보궤’ 관련, 배경지식입니다. ‘열린다 성경, 성전’ 인용입니다.

 

성전 안 여인의 뜰 주변을 따라 3면의 벽에는 13개의 연보궤(헌금함)가 있었다. 각각의 연보궤는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 때 부는 양각(숫양의 뿔) 나팔처럼 돈을 넣는 입구는 좁고, 밑바닥은 넓었다. 이는 연보궤에 손을 넣어 헌금을 훔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예수님은 헌금과 구제를 하고 나서 ‘나팔을 불지 말라’는 독특한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여인의 뜰에 있는 연보궤의 모양에서 나온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2)

 

13개의 연보궤는 각각 용도가 달랐고, 그 용도는 연보궤에 새겨져 있었다. 이 중 1, 2번 연보궤에는 성전에 바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넣었다. 3, 4번의 연보궤에는 번제와 속죄제로 비둘기를 바치는 여인들이 그에 상당하는 돈을 넣었다. 첫 아들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도 성전을 찾아 초태생을 위한 속죄제로 비둘기값을 이곳에 넣었을 것이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2:22-24)

 

연보궤 5번에는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6번에는 분향단의 향, 7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는 금잔, 8번에는 남자의 속죄제, 9번에는 속건제, 10번에는 비둘기, 11번에는 나실인 서원, 12번에는 나병환자의 치유, 13번에는 기타 자원 헌금과 관련된 헌금을 넣었다.

 

13개의 연보궤 외에 ‘은밀한 방’(Silence Chamber)으로 불리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내는 곳이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비밀리에 헌금을 하곤 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아마 이곳에서 은밀하게 드려졌을 것이고, 부자들은 바깥에 있는 나팔 모양의 연보궤에 위풍당당하게 헌금을 넣으며, 힘차게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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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설명으로, 오늘 본문의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이라는 돈은 2010년 기준, 1,000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2024년도 시급 9,860원으로 계산하니 1,230원 정도 나오는군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가리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부자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당장 끼니를 걸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켜보신 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과부처럼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의미로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논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관계는 열차의 목적지와 궤도와 같아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과부의 정확한 의미는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아직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있기 전의 선은 선이라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과부가 진리에 대한 애정만 있고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말씀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부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이용해 재물과 명예를 얻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조작, 거짓 교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세뇌, 조금 남아있는 진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19장, 주님을 찾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며 영생에 대해 여쭙는 청년과 같은 부자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나 다른 사람처럼 문자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고, 내적 진리에 가까이 가길 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것은 그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주님께 되묻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여기서 ‘네 소유’는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청년은 자신이 노력해 얻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니 내적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는 소유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할 때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화란 어떤 것입니까?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깨달음을 뜻합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그동안 삶 가운데 허용했던 자아의 악을 멀리하고, 이제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오는 여러 종류의 악들이 있는데요, 그걸 계속 허용하면 언제까지나 자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 중에는 말씀의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아의 악들 가운데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죄가 아닌 것 같은데 내적으로는 죄악인 것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들을 멀리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주님의 말씀에 순진하게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 하셨듯 주님이 과부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와 관련해 열왕기상 17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17:5-16)

 

이 본문은 아합왕 때 여러 해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기근이 들었던, 그래서 참 절박하고 비참한 그런 상황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과부의 대답을 보면 말이지요. 이 말을 듣고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야의 말을 들은 과부는 어떻게 하나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엘리야를 떠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은 과부의 순종과 그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서 거기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이방인의 과부, 즉 진리를 갈구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는 진정한 진리를 원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부가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바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아의 생각보다 말씀의 진리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인애, 체어리티의 선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459번 글 9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애는 자체로 사람의 지위나 기부액에 따라 평가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애정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 동전 한 잎을 기부하는, 비천한 사람의 인애가 더 큰 것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과부를 왜 더 칭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아합왕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든 이후부터 교회에 더 이상 진리의 비가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 새 교회 분들은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를 언급할 때 좀 극단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질 때, 주님으로부터 참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는 교회의 높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운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부자들일까요? 진리이신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시지 않습니다.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가루와 기름으로 말씀을 따라 떡을 만들어 먼저 선지자에게 드리는 과부와 같은 사람,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오셔서 그들의 단단한 마음을 여시고, 그 속으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을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둠에서 일어나 빛을 볼 수 있고, 빛이 이끄는 대로 이전의 악을 끊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떨쳐버리려 해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자아의 악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지를 때, 사르밧 과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사랑을 동원해 그것을 제지하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항상 나는 침묵, 오직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 안에 신앙의 빛과 열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21:4)

 

아멘

 

 

2022-08-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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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민수기 6장, 그 유명한 제사장 기도입니다.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아래는 위 본문에 대한 속뜻 주석 원문입니다.

 

...Jehovah bless thee and keep thee;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gracious unto thee; and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4-26). Divine truth, from which i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makes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falsities is meant by "be gracious unto thee;" and the Divine good, from which is all love and charity, with which the Lord flows in, is meant by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protection thereby from evils, and thence heaven and eternal happiness, are meant by "give thee peace;" for when evils and falsities are removed and no longer infest, the Lord flows in with peace, in which and from which is heaven and the delight that fills with bliss the interiors of the mind, thus heavenly joy...(AC.10137:12)

 

본문만 번역하자면...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의미하는데, 모든 지성과 지혜가 이 신적 진리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진리를 동반하시는, 그런 진리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거짓들로부터 보호하심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신적 선(Divine good)을 의미하는데, 모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가 이 신적 선에서 나오며, 주님의 흘러들어오심 역시 이 신적 선을 동반하시는, 그런 선을,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악들로부터 보호하심을, 그리고 천국과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는 주님의 신성이신 신적 선과 신적 진리에 대한 말씀이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구하며, 이것으로 복을 빌라시는 말씀입니다.

 

즉, ‘’이란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지면, 자연히 천국하고도 통하게 되어 천국의 모든 복이 우리 삶 가운데 흘러들어온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모든 걸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환경부터 먼저 갖추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듯, ‘’ 역시 내적(內的, internal)인 복이 있고, 외적(외적, external)인 복이 있는데요, 모든 것이 그렇듯 영적인 것은 반드시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것은 반드시 자연계의 것으로 도착,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즉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그 역순은 없으며, 속, 즉 내면의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도, 겉, 즉 자연적, 물질적 복을 받는다면... 그건 정상, 그러니까 주님의 질서가 아니며, 그렇다면 뭔가 위험한 것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즉 그런 건 구하거나 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로또를 하십니까? 로또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 여부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바울의 권면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 곧 천사들이 로또를 할까?라는 질문 말이지요. 천사들은 모든 것, 곧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과 무엇보다도 천국 지성과 지혜, 지식을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습니다. 거저 받되 천사 저마다의 역량이 감당할 수 있는 최상, 최고 수준의 것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의 쓰임새, 그러니까 주님이 나에게 이것을 왜 허락하셨을까?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에만 집중합니다. 그들이 먼저 주님의 일을 구했더니 나머지를 모두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이지요. 다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혹시 로또를 했다고 해서, 또는 지금도 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또 너무 뻔뻔하셔도 안 되겠지요 ㅎㅎㅎ 정말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자기가 로또를 했다는, 혹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에 가책이 있으실 겁니다. 뭔가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게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쉽지 않겠지만 로또에서 그만 손을 떼세요. 주님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주의 자녀들, 오죽했으면 로또에 손을 댔을까요? 이런 분들에게 로또의 쓰임새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런 한 발 물러남이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위 약속,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를 지키십니다. 즉, 지켜지는 것입니다.

 

위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는 주님의 신성을 구하는 기도, 주님의 신적 성품을 구하는 자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신 주님 말씀으로 분명하며, 그러니까 나의 내면 상태가 천국이어야 실제로 천국이 내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즉 하늘의 복이 내게, 내 삶 가운데 임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상태 유지가 중요합니다. 내 영의 상태, 내 속 사람의 상태, 나의 내면 상태를 늘 천국에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천국 금고를 여는 오직 유일한 열쇠이며, 내 삶이 주님의 쓰임새가 되어 주님 뜻 온전히 수행하는, 참 형통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여기 금고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리고 천국의 모든 부요를 얘기했다고 해서 그걸 누리는 게 주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이 궁극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건 다 이 목적을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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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눅20:41-47)

 

주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일반적으로는 천국과 교회를 만들고, 개별적으로는 각각의 천사와 사람을 만드는 신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천사 하나하나 안에는 천국이 있고, 사람 하나하나 안에는 교회가 있다. (계시록의 속뜻 256: 2, 이순철 역) Since the Lord is the Word, and the Word is the Divine truth, which in general makes heaven and the church, and in particular each angel, that heaven may be in him, and man that the church may be in him; (AR.256:2)

 

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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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7-21(D1)-주일예배(2553, 눅20,41-47),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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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고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사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세 개의 파가 있었고,

 

※ 이 외에도 ‘열심당’이라 하는 무장 독립단체도 포함, 보통은 네 개로 나눕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는 것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루쉼’(פָּרָש, 분리하다)에서 비롯한 말로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BC.215-164)의 헬레니즘 동화 운동에 가장 먼저 저항한 유대교 순수주의 세력인 ‘하시딤’(חסידים, 경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이 기간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고, 그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삶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고자 노력, 그들이 분리된 자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대중들은 그들을 경건주의자라 부르며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그토록 철저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과 사사건건 부딪쳤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만 율법을 잘 지킬 뿐, 속으로는 사실은 율법에 반대하는 자들, 율법을 우습게 여기고, 단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만 여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과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어느 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만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 속에 담긴 내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사실 말씀에 ‘속뜻’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은 이들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서 거의 그 누구도, 심지어 소위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들 역시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겉과 속이 같아지고자 애쓴 사람들은 그 삶과 인격 가운데 ‘실천’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대해 물으셨을까요?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려 하셨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나 일반 백성처럼 조금 밖에 모르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진리를 가르쳐주려고 애쓰십니다. 그리고 그때 겸손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우침을 얻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2절에서 44절까지 말씀입니다.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는 신성 자체이신 주님을 뜻하고, ‘내 주’는 신성으로부터 잉태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한 시험과 승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발판’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연적인 것들을 뜻하고, ‘원수’는 그 자연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을 공격하는 지옥의 영들을 뜻하며,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는 것’은 시험에서의 승리와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불완전 몸이 신성한 몸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기기 전의 발판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불완전한 몸이라면, 시험에서 승리하신 후의 발판은 거룩한 몸, 즉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시편 말씀을 인용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입증하신 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부터 이끌어 내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바리새인들도 할 말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에서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23:5, 6)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라고 해서 그 문자적인 의미가 모두 진리는 아니고, 오직 내적 의미와 일치할 때만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다윗은 인간 다윗이 아니라 신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치려 하셨던 진실은, 첫째는 그리스도는 신적 선이신 여호와로부터 태어난 신적 진리시라는 사실, 둘째는 말씀의 진리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내적 의미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왜 주님은 그러면 처음부터 말씀을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말씀을 그 기록된 신성, 곧 속뜻으로 읽는 천사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기에 말씀도 내적 의미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있어 말씀을 내적 의미로만 기록하면, 아무도 읽을 수도, 그리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을 입고 사는 우리가 영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의 상태로 있는 사람한테는 육의 상태인 겉 글자로 기록된 말씀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말씀 앞에 겸손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 곧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소위 난해한 말씀을 만나면, 무슨 잔머리를 굴리며 억지로 푸는 대신, 정직하고 겸손하게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으신가 보다’며, 주께서 때가 되면 내게 빛을 비춰 주실 줄 믿고, 한발 물러나 기다리는 태도가 가장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45절에는 모든 백성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복종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 겸손한 사람들은 즉시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합니다. 반면에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지성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자들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긴 옷’은 본래 하나님의 신성한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진리, 즉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시장’은 말씀의 진리와 선이 유통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잔치’는 예배를 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왜곡해 거짓 진리를 만들거나, 교회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긴 옷’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린 ‘’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3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15:37-40)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불리는 ‘’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 ‘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마23:5)

 

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손을 댔다는 예수님의 겉옷은 바로 이 겉옷, 즉 예수님이 쓰신 숄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참고로, 계속 나오는 이 ‘겉옷’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자기 머리를 덮는 마름모 형태의 큰 ‘’(히, 탈릿)을 말한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상)’ 여기저기서 인용)

 

 

※ 다음은 위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에 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약 왕정 때부터 존재했고 특별히 바벨론 포로를 거치면서 율법 필사와 율법 연구 및 전승을 담당했으며, 또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문서 등을 작성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더욱이 율법을 전수하는 일에 남다른 역할을 했기에 율법사 또는 랍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나 헤롯 정부 내 각종 기관에 속해 일종의 행정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특정한 종교 분파에 속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약시대 유대교의 분파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이르시길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과부’는 선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 배우기를 원하지만,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과부인 것입니다. 또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경건한 척 자신을 꾸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된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주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즉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을 극복하고 여호와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인간이 되셨는지, 또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 다가가 거듭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며,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매달려 내적인 것을 볼 수 없었고, 그리하여 주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마땅히 주님과 이웃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의 내적 의미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마음속에서 바리새인을 몰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2022-07-3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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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D1)-주일예배(2552, 눅20,27-40), '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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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20:27-40)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혼의 사랑 41:3, 이순철 역) That to be married is to be conjoined with the Lord, and that to enter into marriage is to be received in heaven by the Lord is cl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unto a man, a king, who made a marriage for his son, and sent forth servants and invited to the wedding (Matt. 22:1–14).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성직자들이 많았고, 주로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리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경향이 강했고,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또 그들의 구전 율법인 장로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입니다.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대를 잇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명기 25장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25:5, 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해주신 결혼의 원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신명기의 규례는 일부일처의 원칙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엄격히 말하면 레위기 18장에 형제의 아내와 관계하지 말라는 율법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러한 법을 만들어 지키게 하셨을까요? 영적으로 남편의 형제는 이른바 친족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나 취미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진리와 선도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리와 선은 끊임없이 자기와 맞는 선 또는 진리를 찾아 그것과 결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친족의 선(kindred good)이란, 어떤 진리가 좋아하여 자신을 그것과 결합시키려 하는 비슷한 성격의 선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남편의 형제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은 어떤 진리가 죽은 남편으로 상징되는 선과 친족의 관계에 있는 선과 결합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진리가 그렇게 결합해 열매를 맺을 때 각자의 내면에 교회가 굳건하게 서고, 점점 부흥하게 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교회가 침체하겠지요. 그렇다면 여인과 첫 번째 남편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까닭은 뭘까요? 예를 들면 하나의 진리가 하나의 선을 좋아하여 만났는데 만나보니 생각이 다르고 열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둘 사이에는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번에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 참석해서 보니 목사님들의 성향이 모두 달랐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살림을 맡아 건전하게 꾸리는 데 관심이 있고, 어떤 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선교를 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과 교리를 연구하여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동료 목사님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예를 들면 진리가 미숙하거나 아니면 애정이 부족하거나 하면 둘 사이에 충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에 따라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지만 생각이나 애정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분들은 서로 잘 맞아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어떤 분들은 마음이 잘 맞지 않아 함께 일해도 시너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영적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계속해서 주님께 묻습니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에서 간교함이 느껴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말씀을 이용해 부활의 신앙을 공격하고,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이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의 결혼도 세상의 결혼처럼 육신의 결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34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에 살 때 많이 거듭나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세상 사람들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의 천사들의 결혼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결혼의 사랑’ 41:3항은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금의 아들은 주님을 뜻하고, 혼인 잔치에 초대될 사람은 주님과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 즉 세상에서 충분히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 366항 이하에서는

 

천국에도 남녀의 결혼이 있으나 세상의 결혼과는 다르다. 즉 천국에서 남녀의 결혼은 이성과 의지의 결합이고,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천국의 결혼은 육신의 결합이 아니라 영의 결합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의 결합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천국의 남녀는 더 이상 육신으로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천국에서 결혼의 기쁨은 육신의 결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결혼에서 오는 기쁨, 즉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주님이 주시는 지극한 평화와 순진함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37절의 말씀입니다.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부활을 꿈꾸는 이들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셔서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후의 부활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던 사람은 사후에 지옥에 있고, 거지였던 나사로는 천국에 있다는 누가복음 16장 22절의 비유의 말씀이 그렇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던 겸손한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누가복음 23장 43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적인 눈, 시야가 닫힌 상태에서 외적인 눈, 시야로만 보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외적인 눈만 발달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며, 할 수만 있으면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을 바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 지킬 때, 부활에 합당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자의 의미로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일치하는 것만 지키고, 그 밖의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오시기 전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내려주셨던 법도들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오셨을 때, 그 표상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해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요한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보혜사, 즉 말씀의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게 보면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문자적 가르침을 모두 버리면 안 되는 이유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더욱 분명하고 힘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문자적 의미 안으로 내적 의미라는 말씀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로서 구약의 말씀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비춰봐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내적인 것과 일치하는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대부분의 내용과 순결한 부부 사랑에 관한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들은 얼굴이나 손이 그렇듯 벌거벗은 진리로 명확히 드러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내적 진리를 통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로 알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외적이면서 동시에 내적인 말씀의 의미를 통해 부활에 합당한 결혼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19:7, 9)

 

아멘

 

2022-07-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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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저희 성찬식 때 사용하는 성찬식 원고입니다.

 

주님이 생전에 남기신 두 가지 예전은 침례(세례)와 성찬입니다. 주님의 모든 활동은 세 가지, 곧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이 두 예전은 바로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침례가 그 첫 번째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성찬은 그 두 번째, 천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기(大氣)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생전에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어야 사후 우리는 천국의 대기를 호흡할 수 있어 천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 형성하는 걸 ‘주님을 닮는다’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주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체어리티(charity, 仁愛, 선행,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떡으로는 주님의 선을, 잔으로는 주님의 진리를 각각 상징하였고, 또한 각각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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